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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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를 위한 진보세력의 역할 (한겨레 07.01.17)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3 16:41
조회
223

사무실 앞의 햄버거 가게가 얼마 전부터 24시간 영업을 한다. 어차피 점포와 시설을 다 갖춰놨으니, 영업시간을 늘리는 만큼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다는 것일 게다. 시급 3100원짜리 ‘알바’를 쓰니 인건비 부담도 별로 없다. 한국에서만 누릴 수 있는 호사에 언제든지 햄버거를 사먹을 수 있는 기쁨도 더해졌다. 그렇지만 그 호사는 3100원을 벌기 위해 졸린 눈을 비벼가며 밤을 새는 가난한 집 아이들의 희생에 기댄 것이다.


우연히 들른 60년 전통의 곰탕집.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줄을 설 만큼 장사가 잘된다. 그런데도 오후 4시면 문을 닫는다. 다음날 준비도 하고 종업원들도 쉬어야 하니까 그렇게 한단다. 술도 파는 저녁장사로 더 큰 돈을 벌 수 있는데도 그렇다. 게다가 규모에 비해 종업원 수도 많았다. 인력을 줄여 조금 더 바쁘게 뛰게 하거나 알바를 써도 되는데도 그렇다. 인건비는 더 쓰고 영업시간은 제한하는 곰탕집의 풍경은 요즘 흐름과는 영 딴판이다.


곰탕집 사장처럼, 돈도 좋지만 제대로 된 품질과 일하는 사람들의 적당한 휴식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이웃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다. 그렇지만 문제는 이런 인간적인 대접이 오로지 사장님의 선의와 결단에만 기대야 한다는 것이다. 가수 이지상이 노래한 것처럼 돈과 사람의 목숨을 바꾸는 미련한 세상에서 개인의 선의와 결단에만 기대는 것은 너무 부족하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 통제다. 마치 재산권이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도 많지만, 우리 헌법 23조는 재산권 행사가 공공복리에 적합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알바생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면서까지 이윤추구를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이 조항은 시장에 대한 통제와 경제민주화를 규정한 헌법 119조와 함께 사문화된 가장 대표적인 헌법조항이다.


돈이 없기에 인권을 침해당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호할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정치선전의 구호가 되지만 사람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절박한 요구는 일상적으로 외면당한다. 물, 전기, 의료, 주택, 교육, 법률은 공공재여야 한다는 상식의 요구가 별난 좌파의 요구쯤으로 여겨지고 있는 실정이다.


돈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맵찬 반동의 바람이 거셀수록 진보세력의 역할은 더 귀해진다. 공공성과 연대의 깃발을 들고 탐욕스런 시장에 맞서 싸울 책무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보세력이 진짜로 위기에 처한 것은 아닌가 싶은 정황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공공성과 연대에 아무 관심도 없는 사이비 진보도 있고, 논점도 명확하지 않고 그저 친소관계에 기댄 것처럼 보이는 이런저런 정파 간의 대립도 반복되고 있다.


공공성을 확대하자는 것은 함께 나누자는 것이고, 당장의 편리함을 줄이더라도 함께 가자는 것이다. 이는 인간적·도덕적 요구의 실현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많은 자원을 가진 집단과의 싸움이기에 꼭 좋은 모양새만으로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요구하는 쪽의 도덕성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맞는 말인데도 말하는 사람이 싫어서 그 말이 묻히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진보세력이 보수세력보다 더 도덕적이라는 평가와 기대를 받긴 하지만, 엄격한 잣대에도 견딜 만큼 도덕적인지는 의문이다. 구조를 바꿔야 문제를 풀 수 있지만,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도 개개인이 노력해야 할 몫은 분명히 있다. “진보세력은 뭐가 달라도 달라. 저런 사람들의 목소리라면 뭔가 귀 기울여 볼 만하지 않을까.” 새해에는 이런 말이 더 많이 들렸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