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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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사람들이 흩어진 이후 (전교조 기관지 <교육희망> 08.06.07)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4 10:02
조회
188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여학생들이 청계광장에 모여 촛불을 밝힐 때도, 매일 밤 철야시위를 벌이는 지금도 다음 국면이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힘들었다. 각성된 개인들은 광장을 메웠다. 판은 ‘대책회의’가 펼쳤지만, 지도부는 없었다. 


광장은 권위를 거부하였다. 대통령은 애초부터 권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린 학생들마저 “너나 먹어라!”고 조롱한다. 중무장한 경찰도 마찬가지다. 마이크를 잡고 불법집회 운운하면 노래부를 것이 아니라면 퇴근이나 하라고 무시해버린다. 체포를 당하면 이틀짜리 닭장차 투어를 한다며 좋아한다. 기존의 운동세력도 권위를 거부당하긴 마찬가지다. 깃발 근처에는 가지 말라며 문자질을 한다. 대열을 지도하던 ‘확성녀’는 왕따가 되었다. 


구김도 위축도 없이 당당하게 주권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광장의 사람들에 대한 찬사가 끊이지 않는다. 조중동에 실리는 광고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들의 힘과 지혜는 정당정치나 여러 가지 사회운동 담론으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기만 하다. 


촛불로 상징되는 거리 시위는 40년 전 프랑스 68혁명을 닮았다. 68혁명이 구좌파진영에서 제기되던 운동의 과제들을 밀어내고 삶의 운동을 의제로 설정하고, 새로운 권력의 수립이 아니라 권력과 권위에 대한 불복종을 전개했던 것과 서울의 광장은 너무 닮아 있다. 문제는 지도부도 프로그램도 없이 시작된 이 운동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누구도 모른다는 것이다. 68혁명처럼 대학평준화는 물론 사회 전반에 관용의 문화를 정착시키는 계기가 될지, 아니면 들불처럼 타올랐다가 정원식 국무총리가 밀가루를 뒤집어쓰면서 단박에 사그라졌던 1991년처럼 한여름밤의 꿈이 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이명박 정부가 광우병 재협상을 받아들이고, 그동안의 실정에 대해 최소한 말로는 겸허하게 반성하겠다면 광장의 사람들은 어떤 판단을 할까. 주장을 보다 급진화하여 정권과의 싸움을 계속할까, 아니면 이겼다는 자신감을 선물로 받고 광장을 떠날까? 


지혜로운 사람들은 광장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 갑자기 촛불이 꺼지면, 어떤 역풍이 불어올지 모른다.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일수록 전열을 가다듬고 다음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번에 배운 것과 얻은 것을 차분히 챙겨야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않아도 행사가 가능하다는, 아니 집회와 투쟁도 가능하다는 ‘상식’을 자기 것으로 체화해야 한다. 소통을 통한 개인의 협력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가를 보았으면, 자기가 속한 조직도 같은 잣대로 점검하고 혁신해야 한다. 소수의 지도부가 지침을 정하고 대중은 따라오면 된다는 식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면, 우리도 그렇게 변해야 한다. 더디 가더라도 현장에서 충분한 토론이 진행되야 한다. 기실 친소관계에 지나지 않는 정파구조를 통한 작은 정치도 이젠 접어야 한다. 활동가가 대중을 지도한다는 낡은 도식과 오만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스스로 변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