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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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도소에 가지 않았다 (창비주간논평 2014.04.02)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4 12:07
조회
161
 

오창익 / 인권연대 사무국장



벌금형에 대한 노역 일당 5억 판결로 최근 큰 논란을 부른 허재호씨 사건은 검사의 구형과 판사의 선고가 '엿장수 맘대로'였다는 것과 함께 벌금제 자체의 구조적 결함도 알려주고 있다.

세금은 물론 국민연금이나 건강보험도 모두 재산이나 소득에 따라 달리 낸다. 당연하다. 재벌 회장이나 서민이 똑같은 액수의 세금을 내거나 기업의 최고경영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나 같은 금액의 국민연금이나 건강보험을 낸다면, 그건 당연히 불공평한 일이다.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그런 당연한 상식이 유독 법집행에서는 외면당하고 있다.

벌금형제도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벌금은 재산이나 소득에 상관없이 똑같이 매겨진다. 벌금 300만원이라면 재벌·대기업 일가에게는 형벌이라기에는 아무런 고통도 따르지 않는 특혜일 수 있겠지만, 보통의 사람들에겐 부담스러운 돈, 가난한 사람들에겐 도저히 마련할 수 없는 돈이 된다. 같은 액수라도 고통을 느끼는 정도는 다르다. 부자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큰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건 너무 불공평하다. '가난이 죄'인데 형사사법마저 그 가난을 다시 벌하고 있다. 이중처벌이고 가중처벌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통해 드러난 벌금제의 형평성 문제보다 더 중요한 쟁점은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 노역장에 끌려가는 사람들의 문제다. 허재호씨처럼 재산을 숨겨놓고도 부러 내지 않는 얼토당토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진짜 돈이 없어 교도소에 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매년 4만명이 넘는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죄질이 나빠서나 위험해서가 아니다. 오로지 돈이 없어서 교도소에 갇혀야 하는 거다.

이건 아파트 평수나 자동차 배기량의 차이가 아니라 법 앞의 평등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 사람은 얼마든지 돈으로 자유를 살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돈 때문에 교도소에 갇혀야 한다. 비극이고 또 야만이다. 그저 남의 고통이기 때문일까. 오래되어 익숙한 탓일까.

한 진보정당의 판사 출신 국회의원의 인식은 기괴하기까지 하다. "본래 노역장 유치제도는 가난하여 벌금을 납입하기 어려운 사회적 약자나 비교적 가벼운 범죄에 대한 벌금을 탕감해주는 차원에서 마련된 것"이란다. 지나가다 한 말이 아니라 지난달 30일 낸 보도자료에 나오는 말이다. 몇번씩 문안을 다듬었을 거라 생각하니 더 분통이 터진다. 돈을 내지 못한다고 교도소에 가두는 게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인식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어디서 그런 이상한 논리를 배우고 익혔을까.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민으로

벌금을 탕감해주기 위해 교도소에 가둔다? 돈이 없는 사람을 교도소에 보내는 걸 어떻게 선처라고 여길 수 있을까.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대한 분노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아픈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은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 교도소에 갇히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정말 모르는 걸까. 가난해서 교도소에 가야 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이 고통스러운 악순환을 아무렇지도 않게 선처라고 여기는 그의 인식은 정말이지 절망스럽다.

그 의원뿐만이 아니다. 사실 시민사회운동이나 진보운동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벌금형은 시민사회와도 가깝다. 집회·시위, 농성 등의 실천행동에는 꼭 벌금이 따른다. 그러면 '우리들'은 벌금형을 선고받은 동료를 위해 하루주점을 열어 벌금을 대신 내주는 동지애를 발휘해왔다. 그렇지만 주변에 벌금을 대신 내줄 사람조차 없는 진짜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법에 그렇게 정해져 있기 때문인가. 왜 벌금을 내지 못했다고 교도소에 가두는지, 왜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법이 이토록 가혹한 건지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의심조차 품지 않았다. '우리들'은 벌금을 대신 내주면서 안전할 수 있었고 교도소에도 가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들'은 교도소에 갇혀 가난의 의미를 곱씹고 있다. 2009년에만 43,199명이었다.

2014.4.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