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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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4만3199명’ 벌금 못 내 갇히는데 누구는 하루 일당이 5억원?(시사저널, 2014.03.26)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4 12:05
조회
700

벌금형은 징역형 등 자유형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도입됐다. 경미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교도소에 가둔다면 범죄자 자신은 물론, 그 가족이나 사회에도 좋을 게 없다. 교도소에 가면 생계를 잃고 가족관계는 단절된다. 범죄자 낙인도 찍힌다. 교도소에서 교정·교화가 되기보다 거꾸로 범죄를 배우고 익히는 ‘범죄 오염’이 생기기도 한다. 재소자를 수용하는 경제적 비용도 만만치 않다. 대략 1인당 연간 1000만원쯤 된다. 


반면 벌금형은 벌금 납부로 인해 국가가 수익을 챙길 수 있어 잘만 운영하면 유익한 제도다. 범죄자도 생계나 가족관계에 영향을 받지 않고, 정상 생활을 할 수 있다. 형벌은 어차피 죗값만큼 고통을 주는 것이니, 돈을 빼앗는 것으로도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문제는 벌금을 내지 않거나 못 내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미납 벌금액만큼 교도소에 가둔다. 이를 ‘환형유치(換刑留置)’라고 부른다. 재산형인 벌금형을 자유형으로 바꿔서 가두는 것이다. 벌금 납부로 죗값을 치를 기회를 주었는데도, 그마저 이행하지 않으니 좀 더 단호한 처벌을 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별문제 없다.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문제가 많다.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 일당 5억원


벌금 액수를 정하는 법정형의 기준부터가 오락가락이다. 어떤 경우는 징역 1년 이하 또는 벌금 300만원 이하에 처하기도 하고, 다른 경우에는 같은 징역 1년인데도 벌금 1000만원 이하에 처하기도 한다. 제각각이다. 국회와 법제처가 게으른 탓이다. 벌금 미납에 대비해 정하는 노역 일당의 경우도 천차만별이다. 보통 시민들은 하루 5만원씩 쳐준다. 물가 인상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째 5만원 그대로다. 


하지만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의 경우처럼 일당을 5억원씩 쳐주는 경우도 있다. 보통의 경우보다 1만 배나 많은 액수다. 근거는 형사소송법상 ‘환형유치는 3년 이하로 한다’는 규정뿐이다. 허 전 회장이 선고받은 벌금 249억원을 기준으로 노역장 유치를 정해 일당을 1억원으로 치면 249일을 구금할 수 있고, 2500만원이면 996일을 구금할 수 있다. 3년만 넘기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도 49일 만에 끝나도록 5억원으로 쳐준 것은 지나친 특혜다. 같은 재벌·대기업 회장이라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봐주진 않았다. 하루 1억1000만원(벌금 1100억원)의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 1억원(벌금 400억원)의 SK 손길승 명예회장의 경우와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허재호·이건희·손길승씨가 모두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에 갇힌다면 이건희씨는 1000일, 손길승씨는 400일을 각각 교도소에 갇혀 있어야 한다. 이건희씨는 허재호씨보다 20배나 긴 구금생활을 해야 한다. 도대체 기준이 없다. 엿장수 맘대로다. 더구나 허재호씨는 재판 과정에서 500억원의 벌금을 반으로 깎아준 경우였다. 


    
지난 2007년 11월20일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이 영장실질심사를 위해 광주지법 법정으로 가고 있다. ⓒ 연합뉴스 
벌금도 형벌이고 고통을 주기 위한 수단이다. 그래서 재산이나 소득이 많은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똑같은 액수의 벌금을 내는 한국식 벌금제는 불공평하다. 사회 정의에도 어긋난다. 재벌·대기업 일가의 벌금 몇 백만 원에는 어떤 고통도 따르지 않지만, 서민의 몇 백만 원은 자신은 물론 가족의 생계까지 위협한다. 


한국 법률 체계의 모범인 독일은 재산과 소득에 따라 벌금을 달리 낸다. 같은 행위의 범죄를 저지르면, 누구에게나 같은 액수의 벌금을 선고하는 게 아니라 같은 일수(日數)를 선고한다. 한국이 벌금 300만원을 선고한다면, 독일은 벌금 20일을 선고하는 식이다. 같은 범죄에 대해서는 같은 처벌을 한다는 원칙에 따르는 것이다. 대신 그 일수에 맞는 벌금액은 1유로부터 5000유로 사이에서 그 사람의 재산과 소득에 맞게 정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법무부, 검찰은 물론 변협까지 독일식 일수 벌금제를 반대하고 있다. 정확한 소득 파악이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어차피 정확한 소득을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도 국민연금·건강보험 등은 국가가 파악한 재산과 소득을 근거로 달리 내고 있다. 


그렇다면 벌금도 재산이나 소득에 따라 적당한 구간을 나눠서 낼 수 있을 것이다. 재산이나 소득에 대한 기본적인 파악은 돼 있으니, 그 자료를 빌려다 쓰면 추가로 인력·비용을 더 쓰지 않아도 얼마든지 독일식 일수 벌금제를 시행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가난한 사람, 서민들에 대해 관심이 없는 탓일까, 아니면 부자들만 보호하고 싶기 때문일까. 법무부·검찰·변협은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벌금제의 문제점은 모호한 기준에만 그치지 않는다. 벌금은 선고일부터 한 달 이내에 모두 내야 한다. 현금만 받는다. 신용카드로 낼 수도 없다. 나눠서 내거나 형편이 어려워 나중에 내려면 검사로부터 특별한 허가를 받아야 한다. 권리가 아니라 선처다. 모든 거래에서 할부가 인정되지만, 국가에 내는 벌금만은 엄격하기만 하다. 갑자기 목돈을 마련하기 어려운 사람은 급전을 구하거나, 그럴 능력도 없으면 몸으로 때워야 한다. 


돈 없는 서민은 몸으로 때워야 


4만3199명. 2009년 한 해 동안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에 갇힌 사람들의 숫자다. 격리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죄질이 나빠서가 아니다. 위험해서도 아니다. 단지 돈이 없어서 교도소에 가서 자신이 내지 못한 벌금 액수만큼 몸으로 때워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이 매년 4만명이 넘는다. 비극이다. 자유형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도입한 벌금형 때문에 매년 4만명이 다시 자유형 처벌을 받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가 누구든 교도소에 갇히는 건 잔혹한 처벌이다. 교도소에서도 입고 먹고 잘 수 있지만 자유를 박탈당한 일상은 불행하기만 하다. 내지 못한 벌금만큼 강제노역을 해야 하지만, 일감도 없어 하루 종일 감방에 갇혀 있어야 한다. 더구나 돈이 없어서 교도소에 갇혀야 한다는 자괴감과 패배감은 씻을 길이 없다. 


벌금을 내는 대신 사회봉사를 하는 방법도 있지만, 역시 검사의 특별 허가를 받아야 한다. 노력봉사로 교도소 구금을 대신하는 사람은 매년 몇 천 명밖에 안 된다. 벌금형보다 훨씬 무거운 징역형에는 집행유예가 있지만 벌금형엔 없다. 그래서 때론 징역 3년형보다 벌금 100만원이 더 무거운 형벌이 되기도 한다. 


겨우 100만원 벌금 때문에 교도소에 갇힌 스무 살 청년을 봤다. 가벼운 접촉 사고를 냈는데, 미보험으로 입건돼 벌금을 받았다. 혼자서 살기에 갑자기 100만원을 마련할 길이 없어서, 20일 동안 교도소에 갇혔다.  


냉혹한 자본주의는 재산이나 소득이 적은 사람도 죄인으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사는 게 죄가 되기도 한다. 게다가 벌금형은 유독 가난한 사람들만을 죄인으로 만들고 있다. 빵 한 조각 훔쳤다고 19년을 갇힌 장발장은 200년 전 프랑스, 그것도 소설 속 인물이지만 한국에서는 매년 4만명 이상의 장발장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잘못된 제도, 당장 고쳐야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