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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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피한 경찰, 창피한 정부(경향신문 100617)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4 10:55
조회
286

[시론]창피한 경찰, 창피한 정부



월드컵 그리스 전이 열리던 날. 대학생들이 지하철 구내에서 유인물을 나눠줬다. 정부의 천안함 사건 발표가 의혹투성이니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하자는 내용이다. 갑자기 경찰관들이 학생들을 붙잡았다. 경찰관은 ‘불온 유인물’ 배포가 불법이고 ‘정부의 조사결과를 불신하면 불온 유인물’이라고 했다. 2명의 학생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여기까지는 학생들의 주장이다.


관할 경찰서의 과장급 책임자와 통화했다. 112신고를 받고 지구대 경찰관들이 출동했다. 학생들에게 신원확인을 요구했는데, 응하지 않았다. 복잡한 공공장소여서 경찰서로 이동해 신원확인을 하자고, 임의동행을 요구했다. 경찰서에서 신원확인을 한 다음, 곧바로 풀어줬다. 정부를 못 믿으면 불온 유인물이라는 건 말이 와전된 것 같다. 경찰관의 설명이다.


진실게임을 할 생각은 없다. 경찰이 정부를 불신하면 불온하다는 일제강점기 수준에서 맴돌고 있는지 확인할 재주가 내겐 없다. 하지만 몇 가지는 짚어볼 수 있겠다. 경찰관이 신원확인이나 임의동행을 요구해도, 시민은 응해도 그만, 그러지 않아도 그만이다. 시민의 자유다. 현행범이 아니면 체포되지 않으니, 경찰관과 말을 섞기 싫으면 가던 길을 가거나 하던 일을 하면 그만이다. 이게 ‘경찰관직무집행법’ 제3조에 규정된 ‘불심검문’의 핵심이다. 경찰관의 자의적 판단만으로 신체의 자유를 함부로 침해하면 안된다는 게 바로 법질서다. 하지만 무턱대고 임의동행을 요구한다든지, 떳떳하면 함께 가자는 경찰관의 요구를 뿌리치기는 쉽지 않다. “저희와 함께 가시면 좋겠는데, 바쁘시거나 싫으시면 괜찮습니다. 저희의 요구를 거절하셔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습니다.”라고 친절하게 말해주지 않는 한, 경찰관의 요구 앞엔 늘 주눅 든 시민이 있을 뿐이다. 유인물을 뿌리러 나온 패기 있는 대학생들이 왜 경찰관의 임의동행 요구에 순순히 응했는지 모르겠다. 임의동행이라는 게 거짓말이거나 아니면 학생들이 어수룩했던 것 같다.


어수룩하지 않은 일부 시민들 때문에 ‘경찰관직무집행법’ 개정안이 여야 합의로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를 통과했다. 그대로 통과되면 1980년대의 거리가 재현될 거다. 경찰이 시민의 가방 등 소지품 검사를 하고, 최루탄도 쏘고, 술에 취했다고 지목하면 24시간 동안 가둘 수도 있다. 이젠 신원확인 요구도 거부하기 어렵게 되었다. 경찰이 연고자 확인이나 지문날인 등의 새로운 무기를 챙겼으니 말이다.


불온하다는 것은 진술이 엇갈리니 따지지 말자.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천안함 사건에 대한 유언비어를 단속하고, 반정부를 곧 반국가로 여기고, 정부를 믿지 않는 것도 죄로 여기는 분위기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관들의 눈에 천안함 의혹 제기가 불온하게 비춰졌을 가능성은 높다. 불온하든 어떻든 유인물 배포는 처벌할 법률적 근거가 전혀 없는 시민의 자유로운 활동이다. ‘형법’은 물론, 국가형벌권이 시민의 시시콜콜한 일상 전반에 개입하는 ‘경범죄처벌법’, 심지어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에도 유인물 배포를 형사처벌할 근거는 없다. 따라서 경찰이 개입할 여지도 없다. 서울대 앞에서처럼 달리는 버스를 세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경찰은 대학생들의 유인물 배포에 개입했다. 왜일까? 역시 불온해서일까? 정부와 다른 주장을 한다고 국가형벌권을 휘두르며 시민을 잡아들이는 일은 진짜 창피한 일이다. 법질서를 붕괴시키는, 헌정질서 파괴행위다. 봉건시대도 일제강점기도 아닌데, 경찰관들이 이런 창피한 일까지 떠맡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촛불집회 때 많이 부려먹었으면 된 거 아닌가.


<오창익 |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


입력 : 2010-06-16 18:02:06ㅣ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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