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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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정동칼럼] 남도 북도 아닌 ‘제주도우다’(2023.09.14)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9-20 11:16
조회
104

소설가 현기영은 1978년에 발표한 중편 소설 <순이 삼촌>으로 단박에 파란을 일으켰다. 국내 최초로 제주 4·3을 다룬 본격적인 작품이었다. 서슬 퍼런 박정희 정권이 그를 그냥 놔둘 리 없었다. 국군보안사 서빙고분실에 끌려가 밤낮없이 고문당했다. 고문은 고문당한 사람의 인생을 규정한다. 현기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글쓰기가 두려웠다. 더 이상의 집필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제주 4·3의 원혼들이 현기영을 가만두지 않았다. 반복적으로 악몽을 꿨다. 꿈속에서 제주 4·3 원혼들이 절규했다. 우리는 이렇게 허망하게 죽임을 당했는데, 고문을 핑계로 아무것도 안 하면 어떻게 하냐. 그래도 당신은 살아 있지 않냐는 꾸짖음이었다. 현기영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제주 4·3 원혼들이 자신을 선택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4·3의 숱한 원혼들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최근 현기영은 장편 <제주도우다>를 펴내면서 제주 4·3과 관련한 필생의 작업을 일단락했다. 흔히 ‘해방공간’이라 부르는 1945년 8·15 해방부터 3년여는 ‘왜놈’들의 압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화국을 건설할 희망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분단과 분열의 시간이기도 했다. 1947년 3·1절 기념식부터 제주는 유독 가혹한 시련을 겪었다. 미 군정의 집회 관리는 가혹했다. 희생자가 속출했다.



게다가 촉망받은 젊은이들이 잇따라 고문치사로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1987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죽어간 서울대생 박종철을 보고 느꼈을 충격과 공포, 분노가 제주도민들을 사로잡았다. 가만히 있어도 죽고, 저항해도 죽을 것 같았다. 그래도 살아 있다고 절규라도 하고 싶었다.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제주 자체를 불온시했고, 처단의 대상으로 여겼다. 단기간에 적어도 3만명이 넘는 양민이 학살당했다.



3만명이란 숫자는 때론 공허하고, 또 무미건조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현기영은 <제주도우다>를 통해 3만명을 공허한 숫자에만 머물지 않도록 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정성스럽게 그 이름과 사연을 불러냈다. 제주에서의 학살을 통렬하게 그렸다. 한 대목만 읽어보자. 학살자들은 죽이고 싶은 사람이 없을 땐, 그 아내를 대신 죽였다(代殺).



“남편 이름을 호명하면서 그 아내를 나오라고 하여 일어나려 하자, 시어머니가 그녀를 주저앉혔다. ‘아이고, 며늘아, 네가 무사 죽으니. 나가 죽으켜. 내 아들이니 나가 대신 죽으켜. 아기를 잘 키워라.’”



제주 4·3은 ‘제노사이드’라 부르는 집단 학살이었다. 보통의 제노사이드는 국적·피부색·민족·종교 등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집단 학살 범죄인데, 제주는 육지와 다른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이념을 앞세웠다고도 하지만 제주 사람들만 별난 이념을 갖고 있을 리도 없었다. 4·3은 악랄한 국가범죄였지만, 그 때문에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작은 불이익조차 없었다.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오히려 승승장구했다.



정부 수립 초기의 혼란을 감안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제주 4·3은 하나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이승만 정권이 공산당에서 전향한 사람들의 조직이라고 만든 ‘국민보도연맹’. 행정을 동원해 청소년까지 끌어들여 30만명이 넘는 사람을 가입시켰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보도연맹 사람들부터 선제적으로 학살해버렸다. 최소 3500명에서 수만명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이 희생됐다. 보도연맹 학살은 전국에서 동시에 진행됐다.



한국전쟁 때 17세 이상을 끌어모아 50만명 규모의 국민방위군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이들에게 돌아갈 식량 등의 보급품을 빼돌렸다. 이런 범죄 때문에 10만명 이상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 전쟁에서 싸워 이기기 위해 도망치지 않았고 작은 힘이라도 보태려 했던 국민을 굶겨 죽이고 얼려 죽이는 일은 왕조시대에도 없었다.



대한민국의 시작은 이렇게 참혹했다. 그 정점에 이승만이 있다. 누군가는 이승만의 공과를 함께 봐야 한다지만,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살육을 일으킨 사람을 두고 ‘공과’ 어쩌고저쩌고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다. 이승만 기념관을 짓겠다고 모금까지 하는 사람들이 생각을 바꿀 가능성은 크지 않을 테니, 기념관 건립은 기정사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승만 기념관에 국가 예산을 투입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무엇보다 이승만이 자행한 대규모 학살로 희생된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안 된다. 제주 4·3부터 4·19 혁명까지 희생된 수십만명의 원혼을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