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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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얼마든지 관리 가능하다 (경향신문, 2020.05.22)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5-22 09:53
조회
678


그의 이름은 차마 적지 못하겠다. 이런 글을 쓴다고 동의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고, 또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내내 아들 아무개의 어머니로 불렸다. 딸과 아들을 두었지만, 유독 아들의 어머니로 기억되는 건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이다. 군에 간 아들이 갑자기 죽었다. 1998년 7월이었다. 군 당국은 사고라 했다. 황망 중에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직접 본 현장은 군 당국의 설명과 달랐다. 아들과 함께 있었다던 선임 병사의 말도 달랐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군 당국은 아들이 실수로 배전반에 감전되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현장을 목격했다던 선임 병사는 평소 아들이 자기를 괴롭히는 이상한 사람으로 꼽던 자였다. 그는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배전반에서 떼어놓는 등 노력을 했단다. 단박에 거짓말인지 알았다.


인체도 전기가 통하는 도체이기에 살리려고 팔을 잡았다면 그 선임병도 감전되었을 터였다. 어머니의 추궁에 진실이 밝혀졌다. 사고사는 과실치사로 또 폭행치사로 바뀌었다. 아들은 국가유공자로 현충원에 안장되었고, 가해자는 형사처벌을 받았다. 그는 혼자서 아들 죽음의 진실을 밝혀냈다. 놀라운 일이다.


그의 아들의 억울함은 풀었지만, 비슷한 죽음은 멈추지 않았다. 1998년 한 해에만 248명의 군인이 죽었다. 매일처럼 그의 아들과 비슷한 죽음이 반복되었다. 의문의 죽음들이다. 김훈 중위처럼 아버지가 육군 중장이고 자신은 육사 출신 장교라 해도 다르지 않았다. 내가 일하던 인권단체에는 군의문사 가족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작은 인권단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수백명의 죽음을 일일이 확인할 수도 없었다. 몇 군데를 빼고는 현장을 가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때 그가 나타났다. 그는 금세 군 사망 가족들의 구심이 되었다. 군 폭력 희생자 유가족 단체도 만들었다. 자식 잃은 부모들은 열심히 싸웠다. 국가 차원에서 군 의문사 사건위원회를 만들고 조사활동을 벌였던 것도 이런 싸움 덕분에 가능했다. 자식을 군에서 잃은 부모들은 기본적인 정보조차 알 수 없었다. 책임자를 만날 수도 없었다. 장군은커녕 연대장이나 대대장조차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단체를 만든 유족들은 달랐다. 이들은 국방부 장관도 만났다. 비록 국방부 앞에서 9일이나 단식투쟁을 벌인 다음이었지만, 아무튼 군대도 세상도 그렇게 변해갔다.


군 사망사건 유족들의 가장 큰 공로는 군 사망사건 자체를 현저하게 줄인 것이다. 지난해 군 사망자는 모두 86명이다. 이것도 적지 않은 숫자지만, 지난 20년 동안 3분의 1 가까이로 줄어든 거다. 박정희 정권 시절, 매년 1300~1500명씩 죽어나가던 것과 비교하면, 정말이지 극적 변화다.


스무 살 남짓의 동년배에 비해 군에 간 젊은이들의 자살률은 낮다. 군에 가면 자살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게 아니라, 거꾸로 낮아진다. 군대가 사회보다 목숨 보전이란 측면에서는 더 안전한 곳이 되었다. 사회는 나빠졌고, 군대는 더 좋아진 거다. 그와 군 사망 유가족들의 여러 모임이 함께 일궈낸 성과였다.


대신, 그의 집안은 엉망이 되었다. 아들의 죽음은 시작일 뿐이었다. 아들은 손주를 안겨주었지만, 손주는 장애 때문에 초등학교 입학조차 못했다. 가족들에게는 손주가 아들의 무덤 앞에서 “아빠!”라고 말한 적이 있다는 불안정한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딸도 내내 편치 못했다. 그는 위태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 참극이 벌어졌다. 지난해 말, 아니면 연초였을까. 왜 일가족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아들의 죽음부터 비극이 시작되었다는 거다. 참극은 더 큰 참극으로 이어졌다.


그의 죽음은 누구의 책임일까. 죽음을 선택한 자신의 책임만은 아닐 거다. 국가와 군대는 그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무릇 모든 죽음이 그렇다. 자연사가 아닌 죽음에는 누군가의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저 무턱대고 책임만 지라는 게 아니다. 자연사가 아니라면, 공동체와 지도자들의 노력에 따라 관리도 통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장 군의 노력, 시민사회, 특히 유족들의 노력으로 군 사망사건 자체가 줄어든 것이 유력한 근거가 된다.


반면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으로 에둘러 말하는 자살은 1990년 3251명에서 2018년 1만3670명으로 네 배 이상 늘었다. 인구 10만명당 자살자 수는 26.6명이 되었다. 나라가 망했던, 그래서 국치로 기억하는 경술년, 인구 10만명당 자살자 수는 2.8명이었다. 우리는 나라 망하던 때보다 열 배쯤 더 험한 세상에 살고 있는 거다. 특히 10대, 20대, 30대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통계는 너무 끔찍하다.


자살도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 군대에서도 가능했던 일을 국가 차원에서 못할 일은 없다. 아무개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 꾸준히 노력한다면, 자살률 감소를 국정과제의 앞머리에 놓는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개인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살이라는 극단적 탈출구에 의지하게 하면 안 된다. 자살의 책임을 자살자에게만 물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하지만 어떻게 노력하는가에 따라 어떻게 죽는지는 달라질 수 있다. 애써 노력한 끝에 군 사망사건을 줄이고, 교통사고 사망자를 줄인 것처럼, 자살자도 줄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