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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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료기관부터 바꿔보자 (경향신문, 2020.01.02)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1-03 16:45
조회
14


 [오창익의 인권수첩]공공의료기관부터 바꿔보자






 새해를 맞아 금연을 한다, 술을 끊거나 줄이겠다, 운동을 하겠다는 등의 결심을 한다. 올해는 꼭 지키겠다며 떠오르는 해를 보며 다짐하기도 한다. 새해를 맞아 하는 다짐들은 대개 건강하게 살자는 거다. 물론 건강이 최고다. 한국인들의 건강에 대한 관심은 세계 최고다. ‘건강염려증’을 앓고 있나 싶을 정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지난해 통계에 따르면, 본인 건강이 양호하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한국인은 29.5%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88.5%가 스스로 건강하다고 응답한 캐나다는 물론, OECD 가입국 평균인 65.7%에도 크게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한국 사람들은 병원에 세계에서 가장 자주 간다. 국민 1인당 연간 16.6회로 OECD 평균 7.1회의 두 배가 넘는다. 병원에 입원하는 기간도 세계 최장이다. 한국인의 평균 입원일수는 연간 18.5일로, OECD 평균인 8.2일에 비하면 두 배 이상 길다. 평균보다 두 배 이상 병원에 자주 가고, 입원도 오래 한다면, 그건 한국인이 다른 나라 국민보다 두 배 이상 더 많이 아프다는 확실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건강이 다른 나라에 비해 유달리 심각하다는 근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술·담배를 하는 비율, 비만 정도, 영아사망률과 평균수명 등이 모두 OECD 평균보다 훨씬 좋은 상태다.


특별히 많이 아픈 것도 아닌데 환자들이 왜 넘쳐나는 걸까. 호들갑에 가까운 건강염려증은 어디서 온 것일까. 연대와 나눔을 찾아보기 어려운 각자도생의 사회이니, 제 몸부터 챙겨야겠다는 생존본능이 강하게 작동한 탓일까, 아니면 의료계에 대한 불신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의사들이 돈벌이를 위해 건강염려증을 조장하기 때문일까. 유감스럽게도 정부 차원의 정확한 진단은 없다.


그래도 다들 아는 게 있다. 환자는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만 취급되고, 과잉진료가 남발되고 있다. 세계에서 MRI와 CT가 가장 많이 보급된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환자들은 돈만 밝히는 병원과 의사를 믿지 못하니, 진단과 진료를 위해 병원을 옮겨 다닌다. 결국 브랜드 파워에 따라 대형병원으로 사람이 몰리고 있다. 믿을 만한 의사, 나아가 존경할 만한 의사는 모두 위인전에 갇혀 버렸다. 의대생들 중에 슈바이처나 장기려를 꿈꾸는 사람이 있을까. 녹색병원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성수의원 양길승이나 사당의원 김록호 같은 의사를 현실에서 만나는 것도 힘들어졌다. 아픈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그가 누구든, 어디든 달려가야 한다는 원칙, 세상이 아프면 의사도 아프다는 상식에 동의하는 의사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병원이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상황을 바꿔야 한다. 한국의 보건의료체계에 공공성을 확보하는 게 과잉진료를 막고, 더 이상 한국사람들이 건강염려증에 시달리지 않게 할 유일한 대안이다. 하지만 이를 위한 정부의 노력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며 기득권 세력의 눈치나 보는 형국이다.


돈벌이 의료행위를 피할 수 있는 곳은 그나마 공공의료기관이다. 그러나 전체의 5% 남짓이다. 전체 병상 비율은 10% 정도라 좀 더 낫지만, 둘 다 OECD 최하위 수준이다. 문제는 병상 기준으로 전체의 10% 남짓한 공공병원마저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국가나 지방정부가 직접 운영하는 공공의료기관은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많다. 서울대학교병원 등 상급종합병원은 12개, 종합병원은 49개다. 국립중앙의료원, 국립암센터처럼 보건복지부가 관할하는 병원도 있고, 국방부의 국군수도병원, 국가보훈처의 보훈병원,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한국원자력병원, 고용노동부 근로복지공단이 운영하는 병원, 지방정부가 관할하는 병원에다 경찰청의 경찰병원까지 있다. 여기에다 병원이 46개, 요양병원 84개, 치과병원 5개, 한방병원과 의원이 각각 1개씩이다. 합하면 모두 198개다. 이 통계에는 2018년 8월 문을 연 인천보훈병원은 빠져 있으니, 실제로는 200개가 넘을 게다.


아무튼 200개쯤 되는 공공의료기관들이 한국 보건의료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 공공성을 확보할 수 있는 안전장치이며, 오로지 돈벌이에만 혈안이 된 영리의료기관을 제대로 견인할 수 있는 선도기관이지만, 실상은 답답하기 짝이 없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공공의료기관들 사이에 어떤 협력체계도 없다는 거다. 기관별로, 또는 관할하는 부처에 따라 각자도생의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아무 상관없이 각자의 길만 가고 있다. 함께 모여 의논하는 일조차 없다. 그러니 효율성도 떨어지고 보건의료의 공공성을 담보할 실력도 뒤처지게 된다. 보훈병원은 군병원이나 경찰병원과 아무 연관도 없다. 국가가 예산을 투입해 운영하는 병원인 데다 주요 고객이 겹치는데도 그렇다. 만약 6개의 보훈병원과 19개의 군병원, 그리고 1개의 경찰병원을 통합하면 어떨까. 엄청난 규모의 공공의료체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군인들이 군병원을 이용하듯 경찰병원이나 보훈병원도 자유롭게 이용하면 더 좋지 않을까. 이를 국가돌봄병원이라 이름 붙여도 좋을 거다.


부처 간 칸막이만 뛰어넘는다면, 한국의 보건의료체계를 재편할 수 있는 대안도 만들 수 있다. 공공성을 강화하면 환자들의 신뢰도 확보할 수 있다. 과잉진료는 설 곳이 없어진다. 믿을 수 있고, 가격도 합리적인 데다 실력까지 갖춘 최고의 병원을 만들 수 있다. 대개의 국공립 유치원이 사립유치원보다 훨씬 좋은 것과 마찬가지다. 개별 병원 차원에서 해결하기 힘든 교육기관과의 연계나 유능한 의료진의 확보도 수월해진다.


게다가 국가유공자, 상이군경, 군인, 경찰관과 소방관 등 국가가 챙겨야 할 분들은 더 확실하게 챙길 수 있다. 지금만큼의 예산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새로 국무총리가 되는 분이 이런 일을 맡아주면 좋겠다. 당장 복지부, 교육부, 국방부, 노동부, 보훈처 장관들을 불러 논의라도 시작해보자. 새해이니 새로운 꿈으로 적당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