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인권연대

home > 활동소식 > 월간 인권연대

[102호] 분열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9-01 09:57
조회
178

 “모든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 위의 길에서 정확히 비긴다.” 김훈 <자전거 여행>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정치를 혐오했던 시절이 있었다. ‘정치적인’, 혹은 정치지향적인 사람도 혐오하곤 했다. 이런 정치포비아는, 나와 같은 세대라면 지금도 고개를 끄덕일 법한 일종의 암묵적 합의 같은 거였다. 직접적으로는 운동을 출세(정치와 동의어로 인식되는)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부류에 대한 경계가 작동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4‧19 세대의 정치적 행보를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삼으려했던 386 세대의 순교자적 의식의 발로였을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기자 생활의 핸디캡이 될 것을 알면서도 정치부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386 세대 역시 나이가 들어 학생운동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또한 학생운동 역시 정치의 일환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노무현을 얼굴로 내세운 386 세대(일부)의 정치 참여는 4‧19 세대의 그것보다 훨씬 더 처참하게 끝을 맺고 있다. 정치에 대한 인식의 폭을 확장시켰던, 덕분에 정치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를 불식하는데 도움을 줬던 민주노동당은 지금 심각한 내홍에 휩싸여 있다.


 누가 뭐래도 지난 20년 동안 한국 사회의 헤게모니는 ‘진보’가 잡고 있었다. 민주화는 시대의 명령이었고, 민주화 인사라는 칭호는 훈장이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그 헤게모니는 안티테제로서의 헤게모니였다. 모든 안티는 대상이 사라질 때 힘을 잃는다.


 헤게모니의 꼭지점은 지난 2000년 총선시민연대였다. 부패척결을 내세운 시민단체들의 이 운동은, 역설적이게도 이 운동이 시들해진 2004년 총선에서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역사는 강물과 같아서 한번 트인 물꼬를 바꾸기는 쉽지 않다. 범사회적인 개혁 드라이브는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고, 2004년 총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상 최초의 진보정당 원내 진출은 이런 개혁 드라이브의 맥락에서 가능했다. 이렇게 말하면 민주노동당 관계자들이 화를 낼 수도 있지만, 슬프게도, 민주노동당의 강령이 국민들을 설득한 결과가 아니었고, 노동자들이 노동자 후보를 찍는 계급 투표의 결과는 더 더욱 아니었다. 부패와 무능으로 표상되는 기존 정치권의 대안으로 국민들은 새 얼굴, 새 정당을 선택한 것이다. 여야를 불문하고 국회 역사상 최대의 물갈이가 이뤄진 것이 바로 이때였다. 다시 말해 진보정당의 최초 원내 진출은 민주노동당의 자력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도입을 비롯한 일련의 정치관계법 개정도 시민단체를 비롯한 범진보세력(물론 민주노동당도 포함되지만)의 노력의 결과였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굳이 민주노동당의 자력 운운하는 이유는 작금의 민주노동당 상황을 말하기 위해서다. 지금 민주노동당은 ‘분열’돼 있다.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착잡하다. 그러나 ‘분열’ 자체를 백안시해서는 안된다. 분열이란 내부 토론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싸움을 지켜보는 대다수 구경꾼들은 싸움 자체를 즐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싸움 자체보다는 싸우는 이유가 더 중요하며, 궁극적으로는 싸움 이후가 더 중요하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더욱 강도 높은 내부 토론을 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토론을 외화하려는 노력도 필요했다. 조승수 전 의원의 발언 같은 민주노동당원들의 공개적인 발언이 진작부터 더 많이 나왔어야 한다. 이른바 진보정당이 무슨 고민을 하고 있으며,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국민들에게 알렸어야 한다. 그동안 국민들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민주노동당이 어떤 세상을 만들어가고 싶어하는지.


080212web01.jpg


 심상정 민주노동당 비상대책위 대표와 다른 비상대책위원들이 지난 2월 4일 오후
국회에서 총사퇴를 발표한 뒤 “국민과 당원들께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진보가 새로운 사회의 이미지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분석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수구 혹은 보수는 정확히 그 빈틈을 파고 들었다. 먹고살기 힘들다고 난리를 쳤다. 나라가 곧 망할 것처럼 흔들어댔다. 노무현 정부가 과거사 정리 등에만 매달리는 이념정부라서 그렇다는 각주도 달았다. 결국 21세기판 ‘못살겠다 갈아보자’ 캠페인은 성공했다. 수구세력의 악다구니가 통할만큼 우리 사회의 정치적 지형, 이념적 체력이 허약하다는 점은 통탄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더욱 통탄할 일은, 진보에게는 이렇게 취약한 논리의 자기 프로그램조차 없었다는 사실이다.


 90년대 초반으로 기억한다. 사노맹 사건으로 재판을 받던 윤아무개씨가 “나는 사회주의자요”라고 법정에서 당당하게 외쳐 화제가 됐다. 지금 진보진영은 그때보다 얼마나 발전한 걸까? 사회주의라고 선언적으로 말하는 게 용기 있게 보였던 시절보다 얼마나 더 깊이가 생겼을까? 웬 이념 타령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민주노동당 내부에서는 내가 원하는 사회가 사회주의인지, 사민주의인지, 아니면 제3의 길인지 좀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어느 한 가지로 정리된다면 사회 각 분야별로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를 토론해야 한다. 강령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것이다. 강령에 동의하지 못하면 따로 당을 만드는 게 낫다. 그 과정을 당원 및 국민들과 적절히 공유할 수 있다면, 작금의 위기는 오히려 약이 될 것이다.


 정치를 혐오했지만 나는 늘 정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오늘도 그렇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전체 2,173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490
[102호] 인권그림판
hrights | 2017.09.01 | | 조회 182
hrights 2017.09.01 182
489
[102호] 함께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2008년 1월)
hrights | 2017.09.01 | | 조회 370
hrights 2017.09.01 370
488
[102호] <평화인문학> 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hrights | 2017.09.01 | | 조회 192
hrights 2017.09.01 192
487
[102호] 분열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hrights | 2017.09.01 | | 조회 178
hrights 2017.09.01 178
486
[102호] 제57차 수요대화모임 지상중계 - 사회권 보장으로서의 기초생활보장
hrights | 2017.08.31 | | 조회 206
hrights 2017.08.31 206
485
[102호] 인권연대 2008년 1월에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hrights | 2017.08.31 | | 조회 178
hrights 2017.08.31 178
484
[102호] 산낙지를 위하여
hrights | 2017.08.31 | | 조회 338
hrights 2017.08.31 338
483
[102호] 고교 평준화 세대의 변명
hrights | 2017.08.31 | | 조회 252
hrights 2017.08.31 252
482
[102호] 거짓말탐지기는 믿을 만한가
hrights | 2017.08.31 | | 조회 448
hrights 2017.08.31 448
481
[101호] 인권그림판
hrights | 2017.08.31 | | 조회 192
hrights 2017.08.31 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