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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의 데쟈뷰 악몽 - 이현정/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차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1 15:37
조회
340


청소년들의 인권, 우리 사회가 지켜줘야 한다!


이현정/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차장



“경수야~ 어서 빨리 일어나야지! 학교 늦겠다.”
경수는 아무 대답 없이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이기만 한다.
“경수야~ 빨리 일어나!”
“아.. 엄마~ 딱 5분만, 5분만 더 잘게요.”
경수 엄마는 매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아들의 모습에 마음이 아프지만, 큰 목소리로 다시 경수를 깨워본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빨리 안 일어나!”

거실 시계는 어느덧 6시를 가리키고 있다.
경수는 거실 시계의 시간을 잊은 채 매일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몸의 시계에 맞춰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미래의 주인공’이라는 딱지가 붙은 대한민국 ‘보통 청소년’으로 살아가기 위해 하루 타임스케쥴에 자신을 끼워 넣는다.
밥은 입으로 먹었는지, 뭐로 먹었는지도 모르게 허겁지겁 뚝딱 해치운다.
더욱 피곤한 날에는 속이 쓰려 아침밥을 굶기도 태반이다.

7시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학교로 향하는 아들의 축 처진 뒷모습에 경수 엄마, 아빠는 마음 속 눈물을 흘리며 고등학교 때만 잘 버텨달라는 자조 섞인 주문을 해본다.
경수는 집을 나선 후, 학교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손잡이를 잡고 서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정신이 몽롱하다.
옆에 서 있는 친구와 얘기하고 싶지만, 자신도 그리고 친구도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제 정신(?)들이 아니다.

교실에 들어섰다.
자율학습 시간이다.
잠은 오지만, 학교 선생님에게 들키면 혼날까봐 엎드려 자지는 못하고,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졸고 있다.
1교시 영어 수업이다.
잠을 깨기 위해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왔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눈꺼풀이라지만 이를 악물고 쏟아지는 잠을 참아본다.
하지만 잉글리시는 계속해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처럼 흐느적거리며 들릴 뿐이다.
2교시 국사 수업이다.
입시과목이 아닌 터라 어제 학원선생님이 내준 수학숙제를 한다.

저녁 7시, 경수는 보충수업, 야자(야간 자율학습)를 마치고, 곧바로 학원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학원 버스가 학교 정문 앞에서 경수를 픽업해준다.
진짜(?) 공부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경수의 엄마가 몇몇 학부모들과 함께 학원계를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실력 있는(?) 학원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학원수업이 끝나고 다시 학원버스에 몸을 맡기고, 집에 돌아온다.
이미 11시가 훌쩍 넘었다.
경수는 지방에 살고 있는 사촌 경숙이가 야자부터 학원까지 1시가 넘어서야 집에 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나마 애써 달래보며 아파트 현관문을 연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응. 그래. 오늘 많이 힘들었지? 간식 준비했으니까 그거 먹구...” 엄마가 얘기하신다.
결국 경수는 허기진 배를 간식으로 채우고 다시 새벽 1시가 넘도록 학원숙제를 한다.
그리고 책상에서 엎드려 자다가, 엄마가 깨워줘서야 침대에 몸을 던져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6시.
“경수야~ 경수야~ 어서 빨리 일어나야지. 학교 늦겠다.”
경수는 아무 대답 없이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이기만 한다.
“경수야~ 빨리 일어나!”
“아.. 엄마~ 딱 5분만, 5분만 더 잘게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빨리 안 일어나!”

눈을 비비며 힘든 몸을 겨우 추슬러 일어나는 경수는 순간 ‘데자뷰 악몽’을 떠올린다.
‘어휴~~ 오늘은 새로운 날인데, 어제, 그제 본 일이 또 반복되겠구나.’
그리고 쓰린 배를 부여잡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무의식적으로 침대에서 일어난다.

경수는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의 자화상이다.
선발 경쟁 체제라는 입시교육 아래에서, 우리 아이들이 인질로 잡혀있고, 유린당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사회이다.
한국사회가 결국 사회적 음모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월 12일, 서울시 의회 교육문화위원회에서 학원교습시간의 무제한을 골자로 하는 조례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경쟁력 강화와 현 학원들의 연장운영 행태 속 탈세 및 위법행위에 따른 규제 철폐를 내세웠다.
아울러 정연희 교육문화위원장은 모방송 인터뷰에서 “성인들이 일을 하다 과로해서 죽었다는 얘기는 있어도 학생들이 공부하다 피곤해서 죽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기도 하였다.

지난 2007년에도 서울시 의회는 학원교습 연장 조례안을 통과시켰었다.
이에 여러 학부모단체, 청소년단체, 시민단체 등이 연대하여 조례안 본회의 통과를 반대하였고, 결국 조례개정안을 심사 보류하는 결과를 가져왔었다.
하지만 2008년에 들어서자 서울시는 이제 아예 학원교습시간을 무제한으로 하자고 하였다. 여론은 매우 부정적이었고, 참교육학부모회, 전교조, 흥사단, 참여연대 등 여러 단체들이 학원시간연장저지시민운동본부를 발족하여 서울시 의회를 규탄하는 직접행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다행히도 18일 서울시 의회 본회의에서 이 조례안이 폐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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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시간 연장 저지 시민운동본부’ 회원들이 18일 오후 서울 태평로 서울시의회 앞에서 학원
교습시간 24시간 허용 조례 추진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사이, 서울시의회에 방청하러 온
초등학생들이 기자회견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그러나 여전히 한국사회, 특히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은 더더욱 선발경쟁체제로 변질되어갈 것으로 보인다.
정연희 위원장은 학생들이 공부하다가 죽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통계청의 최근 조사결과에 따르면 2006년 한해 청소년 사망 원인의 2위가 자살이며, 가출경험율 또한 2005년 9.9%에서 2006년 10.9%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이에 2008년 1월 (사)한국사회조사연구소의 ‘심야학습과 청소년의 가출 및 자살충동’ 조사결과 보도자료(2007년 10월 조사, 전국 2,838명의 고등학생 대상, 다단계무선층화집락표집 방식)의 내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학업성적 때문에 부모, 교사로부터 동시에 심리적 압박을 받는 청소년들과 새벽별 보면서 집을 나서고 달밤에 귀가하는 등하교 시간이 극단적으로 늦거나 이른 청소년, 4시간미만의 잠을 자서 수면이 극도로 부족한 청소년들 가운데 가출충동을 느끼고, 실제로 가출을 하고, 자살 충동을 느끼는 청소년이 월등하게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결국 학업성적으로 부모와 교사로부터 동시에 심하게 압력을 받는 청소년 가운데 63.7%가 자살충동을 느꼈다고 응답하였다.

다시 경수를 떠올려 본다.
내일엔 또 다시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는 희망의 말도 있지만, 매일 아침 6시에 힘들게 일어나는 경수에게는 다가올 내일이 단지 ‘데쟈뷰 악몽’으로 여겨질 뿐이다.
반복되는 데쟈뷰 악몽을 더 이상 맞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악몽을 끊어버리기 위해 자살충동을 느낄지도 모른다.

오늘도 죽음과 길거리에서 휘청거리는 경수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
엄마, 아빠, 학교와 학원선생님, 교과서만이 주는 희망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따뜻하게 보살펴주고 감싸줄 수 있는 그런 희망.
그러려면 지금과 같은 선발경쟁 입시체제로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이제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의 인권을 짓밟지 말고, 죽음과 길거리로 내모는 사회적 음모와 범죄 공모를 중단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얘기해주고 싶다.
‘경수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