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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현진, 박선영, 임영훈, 정석완, 조소연, 주만, 주윤아, 최우식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김도원(YTN),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이오성(시사인), 임아영 (경향신문), 장형우(서울신문), 전진식(한겨레), 조일준(한겨레)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100년 전과 오늘날의 ‘태극기’> (주만)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03-28 09:51
조회
224

주만/ 회원 칼럼니스트


 100년 전 어느 날. 일본 유학 중이던 조선인 학생이 고국 땅을 밟았다. 칠흑같은 바다를 헤치고 조선에 도착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모자를 벗는 것이었다. 모자 속에는 일제의 심장에서 유학생들이 준비하고 있던 독립선언서 초안이 숨겨져 있었다. 독립을 향한 의지가 또렷이 박힌 선언서. 청년들의 결의에 조선의 어른들은 부끄러워했고, 그것이 결국 우리의 위대한 역사 ‘3.1 운동’으로 피어났다. 공의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찬 학생. 그런 청년을 보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주지 못했다며 부끄러움을 느낀 어른. 그들이 하나가 되어 힘차게 태극기를 흔들었던 그 날. 우리는 이토록 아름다웠다.


 독립운동부터 그 숭고함을 이은 민주화운동까지, 대한민국의 주요 사회운동은 젊은이들을 주축으로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이야기의 주인공, 송계백 선생님의 당시 나이 24세였다. 미국과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전달하고, 3.1 운동에도 큰 역할을 한 독립운동 단체 신한청년당의 창당 발기인 6명의 나이는 평균 29세였다. 민주화운동에서 목숨을 잃어가며 활동했던 열사들도 모두 창창한 젊은이들이었다.


 이러한 역사를 겪으며, 누군가 ‘청년 정신’의 힘을 무서워하게 된 것 같다. 그는 청년이 청년답게 행동할 수 없는 사회를 만들려 했고, 결과는 성공적인 듯 보인다. 100년 전 그들과 오늘날 우리 모습의 차이를 보면 말이다.


 20대로서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생각해보자면, 내가 자라온 환경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학문적인 가르침에 있어서라면, 어쩌면 그 시절 젊은이들보다 더 양질의 교육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회 환경은 아니다. 언제부터인지 학생이 공부하는 이유는 ‘성공자’라는 간판 혹은 ‘먹고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함이 되어버렸다. 그러기 위해서 입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기에, 주입되는 지식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고, 옆에 앉아 있는 학우를 있는 힘껏 딛고 올라서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 경쟁은 끝이 없다. 성인이 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착각에서 빠른 시일 내에 빠져 나오지 못하면 잉여인간,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 나의 이야기이자, 현 시대 젊은이들의 이야기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민족정신과 같은 공의가 우습게 되어버린 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민족이니 공의니 거창한 말을 썼지만, 핵심은 우리가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마땅하다 여기는 ‘인간성’이다. 무한경쟁의 사회 속에서 시민의식 같은 인간성이 자리 잡을 리 없다.


 하지만 현실을 대하는 청년들의 태도 또한 참담하다. “취업하기 힘들다”, “살기 힘들다” 어쩐다 하다가도 ‘먹고 살 수 있는 기회’를 잡으면 입을 싹 씻는 게, 나를 포함한 우리의 현주소 아닌가. 젊은이들은 생각해야 한다. 현실이 이러하다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외쳐야 한다. 독립운동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민주화 운동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청년이라면 청년답게. 정의를 위해 죽어간 이들의 무덤을 발판삼아 딛고 있는 우리는 당장의 안락함에 기대어, 현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과 거기로부터 오는 고난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사회의 어른들에게도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다. 사실 앞서 말한 환경은 어른들이 만들었고,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경쟁을 당연하게 여기는 건 물론, 지금도 계속 부추기고 있다. 내가 어른들을 겪으며 느낀 문제는,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을 은근히 무시한다는 점이다.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에 젊은이들의 도전정신은 어리석은 생각으로, 정당한 권리 요구는 철없는 행동으로 치부된다.


 이와 반면, 한때 한가닥 하셨거나 현재도 한가닥 하시는 어른들은 뭘 하던 쉬이 높게 치켜세워진다. 때문에, 높으신 분들이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는 모습은 여느 회사나 단체의 행사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나름의 업적이 있으시지만, 대부분 지나치게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 가치관만을 이야기한다. 심지어,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겠다는 단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이런 행동들은 멈추시고, 3.1 운동과 민주화운동 속 젊은이의 열의를 인정해주었던, 그 시대 깨어있는 어른들의 모습을 떠올려 주셨으면 좋겠다. 그래야 젊은이가 어른을 이해해줘야 하는 세상이 아닌, 존중할 줄 아는 세상이 온다. 사회에 나와 있는 우리가, 성공을 위해서든 생계를 위해서든 부당한 것에 타협하며 살아간다면, 그 대가는 다음 세대가 치르게 된다. 어른이 희생하지 않으면, 아이가 희생당한다. 만약 지금껏 공의와 정의를 위해 살아오신 분이시라면,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젊은이건 어른이건 상관없이, 당신의 노력과 희생이 세상을 밝게 만들고 있음을 감히 말씀드리고 싶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3.1 운동 100주년을 기리며, 광화문 광장에 당시 쓰였던 태극기들이 걸렸다. 건, 곤, 감, 리는 물론 태극 모양까지도 가지각색인 태극기들을 보며 “태극기가 왜 저렇지?”하고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현대인들. 하지만, 그때 그분들이 제각각 그린 태극기들은 하나 되어 세상을 바꿨다.


 그렇게 바뀐 세상에 우리가 서 있다. 3.1 운동 100주년을 맞은 지금. 자신만을 위한, 자신에 의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공의를 위한 태극기를 가슴 속에 그려보는 것은 어떨까. 작고 서툴러도 상관없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배들이, 태극기는 이렇게 그려야 한다는 규칙이나 지식을 따지는 것보다, 민족을 위한 정신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처럼.


주만: 서로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고 싶은 작가 지망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