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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국민의 고통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다 (남소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4:09
조회
292

남소연/ 청년 칼럼니스트


참 이상한 사과다. 미안하다는 너는 후련해 보인다. 내 입으로는 절대 사과하지 않겠다는 태도도 뻔뻔스럽지만, ‘잘했다’며 환영인사 받는 모습도 마뜩찮다. 더 이상 미안하다는 말조차 꺼내지 않겠다며 윽박지르는 뻔뻔함마저 갖췄다. 이상하다 못해 참 나쁜 사과이면서, 또다시 상처를 안겨주는 사과다. 사과를 받은 쪽은 되레 변명하기 바쁘다. 제 몫이 아닌 사과를 받은 까닭이다. 정작 피해 당사자는 받을 수 없다는, 그 사과를 받아오기 위해 선물까지 얹어 줬다.


세밑 소식치고는 고약했던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양국의 해결방안 얘기다. 두 나라 각각 공통된 합의문을 발표하지 못하고, 외교적 해법이라는 이유로 애매한 단어 뒤에 숨어 버렸다. 말의 밑동을 잘라 서로 유리하게 해석할 여지를 남겨둔 비겁함이 엿보인다. 가령, ‘법적’ 책임이 아니라, ‘책임’이다. ‘일본 정부’의 계획적인 관여가 아닌 ‘군’의 관여다. 아베 정부가 최초로 사죄와 반성의 뜻을 밝혔다며 의의를 찾아 나서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다. 이미 1995년 일본 정부는 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했고, 사죄와 반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잃은 것은 10억 엔뿐”이라는 아베의 말이 귓등을 때린다. 그의 말처럼 새로울 것은 전혀 없었다. 다만, 한국이 그 제안을 수용했다는 점 빼고는. 한국은 한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비겁한 외교적 거래를 했을 뿐이다.


20160203web01.jpg사진 출처 - 한겨레


이 모든 이상함과 비겁함이 모여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니 기가 찰 수밖에 없다. 참다못해 대학생들은 위안부 피해자를 대신해 소녀상을 지키겠노라 거리로 나섰다. 기록적인 한파는 중요치 않았다. 침낭조차 허용 안됐던 거리 위에서 덮은 비닐 위의 살얼음, 그마저도 중요치 않았다. 피해자들의 요구사항은 단 한 가지도 고려되지 않았던 합의, 그리하여 피해자들도 국민도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그 합의의 책임을 누군가에게는 되물어야 했기 때문이다. 합의는 끝났다는데, 수요시위는 그렇게 계속되고 있다.


1992년부터 시작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 시위’는 세계 최장 기간의 시위 기록을 매주 경신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매주 자신의 요구사항을 분명히 외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범죄 인정. 위안부 진상 규명. 일본 국회의 사죄. 법적 배상.
역사 교과서 기록. 위령탑 및 사료관 건립. 책임자 처벌.


‘최종적, 불가역적(finally and irreversibly)’란 말은 두 정부의 그릇된 협상에 쓰여서는 안 될 말이다.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다. 협상으로 해결되어서는 안 될 일을 협상해버린, 무책임한 정부를 보고 있는 국민의 고통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다.


남소연씨는 소수자와 약자를 대하는 언론의 문제점을 느끼고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신문 모니터링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16년 2월 3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