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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민들레의 마음으로 (이상욱)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0:17
조회
325
이상욱/ 청년 칼럼니스트

대선의 영향인지 작품의 명성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영화 「레 미제라블」이 장기 흥행을 기대하고 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이 원작인 이 작품은, 프랑스 혁명 이후의 반동기를 그리고 있다. 작품 속에서 혁명의 열정이 청년활동가들을 감싸면서 권력의 동요는 극에 달한다. 그러나 시민의 피로감과 낙차는 정치적 동요의 파고(波高)만큼 깊다. 이 격동기를 겪는 불우한 이들의 생동하는 비극을 그렸기 때문에, 아마도 원작의 제목도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 비참한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 사회의 시민들도 당대의 프랑스에 뒤지지 않는 질곡을 경험해 왔다. 지난 5년도 그렇지만, 시민들의 땀과 눈물로 써내려온 한국현대사였다. 이번 대선에서도 당선인을 지지한 절반의 국민이 아닌 수많은 시민은, 빛과 어둠이 교착하며 이루어져온 한국현대사의 익숙한 ‘레 미제라블’을 경험하게 될지도 도른다. 3%의 득표 차이를 보이긴 했지만, 국민의 절반은 당선인을 지지했고 나머지 절반은 낙선인을 지지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수의 시민들이 대선 결과에 낙담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지난 5년 동안 국정에 대한 피로감이 두껍게 쌓여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절반의 시민들은 2013년 이후를 낙관하기 어려울 것이 분명하다.
새해 벽두의 답답한 풍경들

희망으로 생동해야 할 새해 벽두에도 많은 시민들은 자신과 사회의 운명을 마냥 기쁘게 전망하기 힘들어 보인다. 무엇보다 민생을 우선시하겠다던 두 거대정당이 새해 벽두부터 초중고 비정규직노동자들을 지원하는 예산을 전액 삭감하고, 대신 국민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제주도 해군기지 예산을 슬그머니 통과시켜 버렸다. 인터넷과 SNS를 달구는 유명 연예인 열애설의 틈바구니에서, 민생예산 삭감의 진실은 오히려 불우하다. 게다가 지난 5년 동안 정권의 눈치를 보던 공영방송에서는 이제 대놓고 ‘5.16 군사반란’의 명칭에서 ‘군사반란’이나 ‘쿠데타’를 빼버리고, ‘5.16’을 어떻게 호명할지 고민하는 눈치다.

당장 대학을 다니는 내 또래들도 걱정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작년만 해도 여야를 가리지 않고 ‘반값등록금’을 약속했었다. 그러했던 정치권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등록금 인하가 아닌 ‘장학금 확충’으로 말을 바꾸더니, 아예 이번 대선에서 모 정당은 ‘등록금 부담을 반으로’라는 구호를 내걸면서 ‘반값등록금’ 공약으로부터 발을 빼기도 했다. 이는 5년 전 이명박 대통령이 선거 과정에서 ‘반값등록금’을 약속했다가, 나중에는 ‘심리적 부담을 반으로 하겠다’고 입장을 바꾼 일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대학생들은 내년에도 등록금액이 반으로 줄어든 등록금 고지서를 받아보진 못할 성싶다. 이것저것 조건이 붙은 장학금만 확충이 되고, 대학교육의 공공성이 강화되고 모두가 마음 편히 공부할 수 있는 대학생활을 만들어가는 일은 꽤나 멀어 보인다. 더욱이 장학금 지급은 생색만 내고 제 배 불리기에는 열심인 사립학교에서 장학금을 어떻게 운용할지를 생각하면, ‘반값등록금’을 희망했던 우리의 기대가 얼마나 순진했던 것인지 때 아닌 자성(自省)까지 하게 된다.
‘패인의 분석’이 아니라, ‘패인 분석의 잘못된 태도’

우리를 더 힘 빠지게 하는 것은 선거에서 그토록 지지를 호소했던 분들이다. 선거 결과가 나오자마자, 그 분들은 자신들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들 앞에서 ‘패배의 책임 소재’를 가리는 난타전을 시작했다. 후보가 문제다, 어느 계파가 문제다, 우리가 아니라 진보정당이 문제다 라는 등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사람이 먼저다’라는 야당의 슬로건을 바꾼 ‘사람이 문제다’라는 풍자가 퍽이나 통찰력이 있었던 듯도 싶다.

패장들이 사분오열하는 와중에, 오히려 상처가 깊어지는 이들은 뚜렷한 야당 지지를 보여주었던 지역과 세대의 구성원들이다. 선거 전략의 당사자들이 자신의 주체적 반성을 회피하고자 ‘지역주의의 벽’과 ‘2030 대(對) 5060 대결의 패배’를 운운하는 가운데, 정작 야당을 지지했던 호남 지역과 젊은 세대의 마음은 착잡할 따름이다. 대한민국에서 고립된 지역과 세대로서의 소외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호남 유권자들과 청년들의 폭넓은 지지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성취하지 못한 스스로의 책임을 도외시한 채, 마치 방관자인 양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논평하는 태도는 그래서 배신감마저 들게 한다. 지금 그들이 고민해야 할 일은 자신들의 호소에 응답했던 이들의 소망을 어떻게 부활시킬 것인가의 문제이지, 패배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평론가처럼 지지자들을 평가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우리가 지켜보고 있는 풍경은 과학적인 패인의 분석이 아니라, 패인 분석에 임하는 태도의 오류라고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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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 미제라블'
사진 출처 - 씨네21



아름다운 패배와 승리의 확신

영화 「레 미제라블」의 배경이 되는 1800년대 초중반은 프랑스 혁명 이후의 반혁명과 그에 저항하는 청년운동이 격돌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레 미제라블」은 젊은 혁명가들의 항쟁이 좌초하는 모습을 그리면서, 주인공 장발장이 위협적인 시대 속에서 어떤 삶을 만들어 가는지를 묘사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또 한번의 장엄한 패배 뒤에 빛나는 승리를 기약하는 웅장한 합창으로 그려진다. ‘민중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가’라는 노랫말을 반복하면서, 프랑스인들은 뼈아픈 좌절에도 불구하고, 선대의 희생이 언젠가는 거대한 항쟁의 역사를 창조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좌절감에 빠진 많은 시민들에게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것도 아름다운 패배일 것이다. 민들레 홀씨가 멀리 날아가서 비로소 한 송이의 꽃을 힘겹게 피워내듯이, 지금은 추락한 희망일지라도 그것이 다음의 발자국을 내딛게 하는 원동력으로 남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한 정치권력의 창출은 곧 민들레 홀씨처럼 사회 곳곳에서 다시 일어설 때 어느 먼 훗날 또는 가까운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의 ‘결과’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절실하다.

그렇다 할지라도 패배란 뼈아픈 것임에 틀림없다. 어떠한 아름다운 패배도 승리의 기억에는 비할 바 못 된다. 한 번의 승리는 백번의 패배보다 더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자신감을 선사한다. 그러나 ‘광주 이후’를 살아내었던 이들의 그 숱한 패배의 기억들이 마침내 6월의 환희를 만들어낸 거름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승리를 믿는 사람만이 당장의 승패에 초연하게 패배에 익숙해질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의 패배를 내일의 승리를 위한 ‘아름다운 패배’로 갈무리하고, 다시 자신이 발 디딘 땅에서 한 톨의 씨앗을 뿌리는 작은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의 패배와 별개로, 우리 사회의 사각지대는 생생히 살아 있다. 그리고 승리의 내일을 소망하는 확신의 크기는 그 사각지대의 어둠을 넘어서야 한다.

‘진정 곧은 풀은 바람이 세차게 불 때에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상투적인 가르침도 지금은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