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우리시대

‘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학벌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정다운)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0:27
조회
338

정다운/ 청년 칼럼니스트


 

자기소개 = 안녕하세요+(이름+나이+대학∙전공)+기타 등등

면접 같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20대의 자기소개는 대개 위와 같이 이루어진다. 학벌은 이름이나 나이와 같은 ‘신원’정보로 인식되고 있다. 오히려 나이와 이름만으로 부족한 정보가 출신대학으로 더 이상 부족하지 않게 된다. 물론 ‘소속’은 인간의 사회적 특성상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문제는 나를 설명해줄 수 있는 수많은 소속집단들 중에서 출신 대학이나 사는 동네, 집 평수나 연봉수준 등 수치화하여 줄 세울 수 있는 것만이 나에 대한 쓸만한 정보가 된다는 사실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조기축구회 소속이거나, 라틴댄스 학원을 다닌다는 정보는 “서울대 나왔대” 라는 말에 비하면 아주 영양가가 없다. 그것이 그저 산재해 있는 다른 정보들을 고려하기 귀찮은 데 비해 학벌이 효율적인 기준이기 때문이라면, 그리고 실제 대우에 있어서도 수직선상 위치에 따른 차이 없이 평등할 수 있다면, 학벌이 ‘나’를 설명하게 내버려 두어도 괜찮은 걸까?


136462031320_20130331.JPG
서울 송파구 방이동의 한 입시전문학원에서 열린 ‘국제중·특목고 입시설명회’에서
학부모들이 전문가의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그냥 궁금하기만 한 건데 뭐가 문제야?

몇 달 전 토익학원에서 스터디에 가입했던 적이 있다. 네댓 명과 함께 스터디를 하게 됐는데, 처음 자기소개에선 다들 출신 대학을 말하지 않았다. 한 달간 매일같이 만나면서 내가 그들에게 가장 궁금했던 것은 어떤 취미를 갖고 있는지, 감명 깊었던 영화가 무엇인지 따위가 아니었다. 그 네댓 명이 다들 어느 학교 학생들인지가 궁금했다. 후에 누가 어느 대학을 다니는지 알게 되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내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속물’이 아니라고 자부했다. “대학 어디 나왔을까?” 궁금한 것은 비교하기 좋아하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이미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에 물들어 있었다. ‘학벌’이라는 소속을 조기축구나 라틴댄스 동호회 같은 소속보다 우위에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취업에서 면접관이 학벌로 나의 상당 부분을 읽어낼 것이란 생각을 하면, 아주 불안하다. 학교는 나의 잠재력과 그 직업에 대한 열정을 전혀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스터디 팀원의 학교를 다른 요소보다 궁금하게 여기는 것과, 면접관이 내 학벌을 눈여겨보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은 셈이다. 대학 간판이 한 인간을 설명하게 만드는 시스템을 모두가 자처해서 떠받들고 있는 것이다.

유명인들의 학력위조 문제가 또 불거지고 있다. 이 경우 학력을 위조한 그 유명인의 도덕성과 자질이 논란의 대상이 된다. 학벌에 의혹이 생기면, 어제까지 내가 감동했던 그 청년 멘토의 충고는 공중화장실 벽에 붙은 손바닥만한 광고만큼이나 하찮고 우스워진다. 그를 신뢰한 것에 억울한 마음까지 든다. 하지만 사실 그 사람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포털 사이트에 등록된 프로필의 학력란에서 ‘00대학교 석사∙박사’라는 몇 글자만이 위태로워졌을 뿐이다. 학력 위조자의 도덕성, 자질 혹은 부실한 논문 검증 절차가 비판의 1순위가 되는 것은 다시 한번 학벌 앞에 무릎 꿇는 일과 다를 바 없다. 학벌을 위조하게 만드는 사회상과 그런 분위기를 조장하는 정책을 없애는 일이 우선되어야 이런 일의 반복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학벌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포털사이트에 ‘학벌’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학벌의 중요성, 무시무시함, 학벌을 극복한 사람, 실력으로 승부하는 법 등 비장한 결의와 한숨 섞인 토로가 동시에 넘쳐난다. 대형 서점의 중앙 가판대와 TV토크쇼에서는 각종 멘토들이 총출동 해 위로와 충고를 건낸다.

“주어진 환경에 굴복하지 마라, 학벌은 실력으로 극복해라.”

애써 취득한 학위가 왜 극복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걸까? 애초에 진정한 ‘나’의 가치가 학벌로 대체되지 않는 사회라면 생각해보지 않아도 될 질문이다. 학벌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한숨이나 비아냥거림, 혹은 극복이 아니라 내가 얻어낸 학벌에 대처하게 만드는 사회와 그런 사회에 무방비상태로 잠식당한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이어야 한다. 학벌이 아니라 학벌사회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