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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착한 척’ 좀 하지 마! (김종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0:26
조회
353

김종현/ 청년 칼럼니스트


 

우리의 고백

80.14%. 지난 대선 때, 내가 사는 대구에서 박근혜 당선인이 얻은 득표율이다. 제1야당을 지지한 ‘깨어있는 시민’들은 기득권의 손을 들어준 대구시민을 노예근성에 젖은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어쩔 수 없는 보수의 도시라는 조롱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내가 만나본 경험으로는 보수 진영의 후보를 지지한 대구 청년들과 진보를 말하는 이들의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양쪽 모두 정의와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말했고, 공정한 사회로의 변화를 원했다. 말하자면, 그들 모두 ‘착한’ 사회를 진정으로 갈망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듯 보이지만 이들이 공통으로 희망하는 것은 도덕적인 사회였다. 박근혜 당선인의 유일한 대항마로 부상했던 안철수의 대중적 인기는 이 점을 정확히 보여준다. ‘착한 후보’ 안철수를 지지했던 유권자들은 선량하고 도덕적인 지도자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낼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각자 지지한 정당과 후보는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유권자들은 가진 자에게만 유리한 ‘나쁜’ 시스템을 ‘착하게’ 만들어 줄 도덕적인 지도자를 바랐던 셈이다.

나는 이들의 진정성을 의심하진 않지만, 이들이 바라는 도덕적 ‘힐링’은 믿지 않는다. 아니 내가 의심하는 것은 1대 99로 양극화된 잔인한 시스템은 외면하면서 착한 세상을 바라는 도덕적 감수성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의 유력 후보 3명 중 그 누구도 탐욕과 생존경쟁을 조장하는 체제의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이들은 정치에서 정의를, 경제에서 공정을 말했지만, 근본적인 변화에는 침묵했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도덕성을 믿어달라며 착한 마음을 호소하기 바빴다. 마치 그들이 대통령이 되면 그토록 바라던 민중의 새날이 올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도덕성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만든 시대를 기억한다. 착한 지도자도 세상을 바꾸지 못하자 사람들은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뀐 뒤 지금은 다시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다.”라는 말로 되풀이되고 있다.

도덕성으로 보자면 극과 극에 서 있을 법한 두 대통령이지만, 보통사람들에겐 이들이 만들어 낸 세상은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등록금에 저당 잡힌 대학생들은 여전히 알바인생이고, 소수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지 못한 청년들은 비정규직의 불안한 삶으로 내몰리고 있다. 노동자는 여전히 살기 위해 ‘높은 곳’에 있다. 망루와 크레인, 송전탑에 오르고 올라야만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여전히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가 진정으로 되물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변하지 않는 현실이 돼버린 ‘시장의 법칙’ 그 자체이다. 막연히 ‘착한 정치’만을 바라면서 사회 구조의 문제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아무리 준엄한 비판도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이를 외면 한다면 아마 5년 뒤 우리는 또 “이게 다 박근혜 때문이다.”를 외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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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열린 제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육·해·공 3군 의장대와 군악대의 사열을 받으며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나의 고백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 ‘사람이 먼저인 나라’에 살고 싶어 한다. 진보·보수 가릴 것 없이 누구나 상식이 통하며, 소통하고, 공감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원한다. 착한 세상을 바라는 꿈은 나도 예외일 수 없다.

이런 다짐을 했었다. 먹고 사는 것조차 녹록지 않은 이 땅에서 청년들이 어떤 모습으로 발 딛고 서 있는지 진솔하게 이야기하자고. 인권연대의 <청춘시대> 청년 칼럼니스트에 응모한 것도 이런 이유였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문제들 앞에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좌절했을 때, 고민은 멈췄다.

그때부터 나는 어떤 도덕적 의무감으로 원고를 보냈다. 그리고 착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걸린 청년이 돼버렸다. 착한 개인만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나 자신도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던 거다.

그동안 잊고 있었다. 먹고사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이 땅이 얼마나 청년들에게 가혹한지를 말하고 싶었던 나의 다짐 말이다. 비정규직의 아픔이 왜 생겨나는지, 지방대의 서러움은 무엇 때문인지, 꿈보다 연봉이 왜 더 중요한지, 과연 무엇 때문에 청년이 이토록 불안한 것인지를 풀어내고 싶었다.

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전히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과 마주하고 있다. 그 앞에서 나는 더는 ‘착한 척’ 않기로 고백해본다.

곧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다. 매스컴을 통해 새 정부의 인사청문회가 ‘도덕적 무덤’이 된 것을 보면서, 다음 5년 동안에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은 결코 줄지 않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때 다시 진정성 있는 새로운 ‘착한 지도자’를 찾아 헤매거나, 착하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에 당위적인 비판을 반복한다면 우리 사회는 이미 겪은 실패를 반복하게 될 거다. 그러니 착한 세상을 바라는 당신, 제발 ‘착한 척’ 좀 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