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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은 어떻게 국정원을 구원하게 되었는가 (한은석)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1:14
조회
267

한은석/ 청년 칼럼니스트


건강한 시민사회를 생각할 때, 폭력의 피해자에게 폭력의 책임을 묻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정치집단이 대중들에게 가져야 하는 책임과 의무라는 관점에서라면 다르다. 정치집단은 신성한 진리의 권위가 아니라 대중들의 지지와 신뢰를 바탕으로 정치를 한다. 대중들에게 신뢰받지 못하는 정치집단만큼 취약하고 무능한 집단이 있을 수 있을까?

공안당국과 정부에 의해서 주도된 이번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사건은 통합진보당의 이런 과오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다. 국정원의 공작 뒤에는 정부여당과 공안당국에 비판적인 진보 언론도 통합진보당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배경이 있었다. 그리고 국정원은 이런 점을 영리하게 파고들었다.

새누리당 내에서도 국정원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고, 야권이 국정원 개혁에 칼을 갈고 있었다. 하지만 이석기 의원의 체포동의안은 쉽게 통과되었고, 여론에서는 국정원이 할 일을 했다는 반응이 나왔다. 심지어 통합진보당이 국정원 개혁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반응까지 야권 지지자들 사이에서 나왔다. 통합진보당이 국정원을 구원한 셈이다.

작년 총선에서는 제3당으로 출발했지만 현재는 여권에게는 만만한 호구가, 야권에는 짐짝이 된 처지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통합진보당의 주장에 따르면 이는 매카시즘과 기득권 세력과 미 CIA의 공작 때문이지만, 이는 무책임한 변명에 가깝다. 문제는 어떠한 오류도 없으며, 반성도 필요 없다는 태도에 있다.

통합진보당의 정치 지도자들은 어떤 가치와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권력을 통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 대중들에게 보여주고 평가받는 대신 당면한 거대한 악과의 싸움에서 단결을 우선시하는 방법을 택했다. 가치와 목표에 대한 비판적 토론과 합의는 적전분열을 일으키는 이적행위로 비난받았다. 대신 도덕적 우월함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투쟁과 단결만이 허락되었다. 물론 투쟁과 단결은 지도자들의 지휘통제를 따르는 것이었다.

그 결과 진보정당에 으레 기대하는 비판적 사고와 풍부한 인권적 감수성은 사라졌다. 보수정당 못지않은 일사불란한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당명이 민주노동당이었지만 당직자노조를 탄압한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흘러나왔고, 성소수자는 자본주의가 만든 해악이라는 황당한 말이 당직자의 입에서 튀어나오기도 했다. 또한 진보신당 분당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당 중앙위원회의 의사소통 과정은 보수 기득권 정당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민주노동당 시기의 일들은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당원들 사이에서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총선 이후 부정경선 논란이 일면서 벌어진 일산 킨텍스몰 폭력사태는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들었다. 오마이뉴스로 생중계된 폭력사태는 총선 당시 정당 비례로 지지를 보냈던 220여만 명의 지지자들을 경악으로 몰고 가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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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 장면을 정당비례표를 찍어준 220만 명이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물론 이게 끝이 아니었다. 통합진보당의 정치 지도자들은 어떠한 과오도 없으며, 따라서 책임질 것은 하나도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일련의 사건은 미 CIA와 기득권 세력, 권력에 눈이 먼 심상정, 유시민 공동대표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인정해야 할 과오는 없었다. 오직 단결과 투쟁만이, 이석기, 김재연이 의원직을 유지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당은 언제나 옳았고 적은 언제나 틀렸다.

총선 이후에 벌어진 일련의 파국 때문에 가려지긴 했지만, 총선까지의 과정에서도 문제가 많았다. 당론으로 FTA 추진을 반대하며, 당원이 FTA 반대를 외치며 분신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총선과 당직 선거에 유리한 구도를 차지하기 위해서 착한 FTA를 말하는 국민 참여당과 합당이 추진되었다. 역시 당내 반대가 있었지만 당면한 거악과의 싸움이 먼저라는 이유로 결국 묵살되었다.

총선 당시 제시된 복지 공약들은 민주당은 물론 새누리당과도 큰 차이가 없다는 평을 들었다. 가장 압권은 17대 대선 당시 기록적인 참패를 당했던 캐치프레이즈와 정책인 코리아 연방 공화국을 18대 대선에서도 그대로 들고 나온 것이었다. 보수정당들도 당명을 바꾸고, 새로운 정책을 쏟아내면서 지지를 얻으려 노력한 것과 비교해서 통합진보당의 이런 모습은 안일하다 못해 오만하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통합진보당의 정치 지도자들이 대중들에게 보여준 것은 정치집단이 대중들에게 신뢰와 지지를 받기 위해서 보여줘야 하는 가치와 기준, 정책과 계획이 아니라 정치적 경쟁자들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악한지, 그리고 자신들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우월한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대중들에게 더 나은 대안의 선택이 아니라, 더 선한 우리 편이 되기를 요구했다.

그 결과는 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지막지함과 어떠한 비판도 거부하는 폐쇄성, 그리고 마치 종교전쟁에 참전하는 것 같은 광신에 가까운 열정이었다. 그러나 더 많은 당직과 선출직, 더 많은 국고보조금을 향한 섬세함을 포기하지는 않은 열정이었다. 이름만 진보정당일 뿐, 그 행동에 있어서는 보수정당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이 모든 것들이 잠재적인 지지자가 될 수 있는 대중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공안당국과 정부는 믿을 수 없지만, 통합진보당은 더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국정원의 논평이 나올 때마다 오락가락하던 통합진보당의 허술한 해명은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종북 척결’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마녀사냥은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통합진보당은 시민단체가 아니라 선출직 의원을 보유한 엄연한 정치집단이다. 정치집단으로서 무능을 극복하지 못하고 시민사회의 보호 안에 안주한다면, 아무리 시민사회가 건강해지고 매카시즘을 극복한다고 해도 통합진보당이 재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한은석씨는 사회 내 불평등에 관심이 있는 경제학과 학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