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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과외 교사의 고백 (신혜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1:40
조회
328

신혜연/ 청년 칼럼니스트



올해로 대학 3년차인 나는 10명의 학생을 거친 베테랑 과외교사다.

요즘 수업하고 있는 학생은 선미다. 인문계 고등학교 2학년생인 선미는 학급반장을 맡을 정도로 성실하고, 정이 많은 아이다. 영어단어도 곧잘 외워오고, 숙제도 빠짐없이 해온다. 칭찬해 줄 때마다 수줍게 웃는 모습이 참 귀여운 선미는 ‘사회 선생님’이 되고 싶단다. 하지만 선미의 꿈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학원에 거의 다니지 않았다는 선미는 학교 수학 진도를 따라잡기 힘들어한다. 영어해석도 아직은 더듬더듬 걸음마 수준이다. 선미와 같은 또래 아이들이 지금쯤 2학년 수학 진도를 이미 떼고, 수능영어기출을 풀고 있을 거란 생각에 내 마음이 다급해진다. 따라오는 선미도 꽤나 초조해 보인다.

평범한 일상의 균열은 세월호 사건에서 시작했다. 사건 당일 날 선미네 집에 도착해 보니 TV가 틀어져 있었다. 단어 안 외우고 TV 보고 있었냐고, 조금은 장난스럽게 물으니 친구가 배에 탔는데 생존자 명단에 없어 걱정된다고 말했다. 밤새 한숨 못 자고 지켜봤단다.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어 “살아있을 거야”라고 짧게 위로한 뒤 수업을 시작했다. “밤새 봤으면 충분하니, 이제 TV는 그만 보자”는 현실적인 충고도 잊지 않았다. 어느 날은 시내에서 열린 세월호 집회에 참가했다고 했다. 이상한 아저씨들이 “집에나 가라”며 소리를 질렀다고 수줍게 말하는데, 역시나 할 말이 없었다. 조용히 책을 펴고 진도를 나갔다.

한때 대학생이 돼도 절대 과외만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 교육 체제를 옹호하고 권력의 재생산 구조에 동참하라고, 그로써 체제를 지탱하는 충실한 부품이 되라고 아이들을 채찍질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최저 시급으로는 용돈조차 녹록치 않은 현실에서, 대학생에게 들어오는 과외를 거부하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나는 그렇게 베테랑 과외교사가 됐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좋은 대학에 가면 행복할 수 있다”, “대학에 가지 못하면 낙오자가 된다”는 사기와 협박으로 무장한 자신을 발견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한국 교육의 유일한 철학이 수많은 어린 생명을 수장시킨 후에도 전과 다름없이 수업을 계속하는 교사들, 그리고 이 낡은 매뉴얼로 여전히 대한민국호를 운전하는 기득권층의 모습은 나와 다를 바 없었다.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은 계속됐다. 이 거짓말은 처음엔 그저 ‘보호’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의 입과 귀를 막지만, 머지않아 숨통까지 막아버리리라.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입을 다물어 온 우리는 이 참극의 공모자였다.

국민들이 ‘진보 교육감’을 선택한 심리 또한 같을 것이다. 부채감과 변화에 대한 욕구. 이것이 지난 6‧4지방선거에서 유례없이 많은 진보진영 교육감을 탄생시킨 원동력이었다. 당선된 진보 교육감들은 “과열된 입시경쟁을 완화하고, 아이들의 잠재력을 살피겠다”며 ‘혁신학교’ 설립에 뜻을 모았다. 사회 교사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사회에 대한 관심을 접어야만 하는 한국 교육의 메커니즘. 이를 바꾸려는 시도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분명한 건 이를 위해 진보 교육감 뿐 아니라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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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이후 두 달. 우리는 남은 아이들을 지켜낼 수 있을까.
안산 단원고 정문에 가득 묶인 노란 리본들 뒤로 한 학생이 걸어가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베테랑 과외선생 입장에서 학교 교육을 정상화시키고 불필요한 입시경쟁을 완화하는 것은 전혀 이득이 아니다. 그러나 너도나도 동조하던 구조가 결국 파멸의 먹이사슬이란 걸 알아차렸다면, 더 이상 그 작은 이익에 눈이 멀어있어서는 안 되겠지 않나. 소수의 이윤을 위한 잔인한 굴레는 모두의 침묵으로 유지돼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남은 아이들이라도 살릴 수만 있다면, 베테랑 과외선생 노릇은 기꺼이 포기하련다. 오늘은 선미와 떡볶이라도 나눠 먹으며 수업시간에 못다 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선미는 가명입니다.

신혜연씨는 노동과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갖고 대학교 학보사에서 사회부 기자로 활동 중인 학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