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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기꺼이 치를 매몰비용(이창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9-27 11:04
조회
239

이창우/ 회원 칼럼니스트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갈등을 만드는 것이 '상대적 박탈감'이라면, 끝없이 회한에 젖도록 하는 것이 '상대적 공감'인 것 같다. 물론 개인적인 차이가 있으니 내 생각을 중심으로 말하려 한다.

 상대적 박탈감은 개인에서 시작해 사회와 세계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근원을 찾다 보니 적어도 나에게만은 '가족'이었다.

 내 의지로 태어나지 않았기에 분명 부모 덕분에 나는 이 세상을 만났다. 그렇다면 내 부모는 어떤 환경에서 나를 태어나게 했고 성장하도록 만들었는지가 중요해진다. 대다수 사람은 성장하면서 부모의 삶에서 보고 들으며 우선순위를 배우게 된다.

 부모의 가치관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나의 부모가 보여주고 훈육의 형태로 학습하도록 했던 것들, 생활인으로 눈에 드러난 다양한 측면에서 부모를 관찰할 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의 뇌는 그것마저도 선별적으로 윤색하면서 자극적으로 다가왔던 것을 중심으로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어린 시절 내가 느낀 상대적 박탈감으로 뚜렷하게 남은 것이 '도시락'이었다. 지금은 초등학교라 불리지만 국민학교를 나온 나의 경우에는 '급식'이란 말도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맞벌이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아버지의 직업이 박봉이었기 때문이라 했다. 지금은 직업 선호도가 높은 공무원이었는데 말이다. 그 시절 공무원은 가욋돈이 월급보다 많아서 살기가 좋았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 상황이 내 아버지에게 해당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존경심을 갖고 어머니의 고군분투기가 시작되었다고는 해도 그것은 어머니의 선택을 정당화시킨 일면도 있다. 어쨌거나 어머니의 경제활동으로 나의 유년기는 애정결핍을 대가로 그럭저럭 경제적 궁핍을 피해 평범하게 살아왔다.

 어머니의 분투에 힘입어 나의 도시락을 책임지는 사람은 집안일의 거의 모든 것을 담당하는 식모 언니라 부르던 가사도우미였다. 문제는 그 언니의 선택에 어머니조차 거부할 수 없는 무엇이 있는데, 어머니에게만 주어진 '돌봄'이라는 성역할이었다.

 당시 맞벌이 부부에게 돌봄 노동의 부담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었다. 국가의 역할은 생각해보지도 않고 요구할 줄 모르고 당연하게 받아들인 부모의 선택은 그저 현실이다. 부모는 혼자 크는 아이가 어른이 되기까지 결핍을 알아차리지도 공감하지도 못한다.

 내게는 부재중인 어머니를 대신할 대모의 결정이 절대적인 환경에서, 내 도시락과 주변 친구들이 가져오는 도시락의 격차가 너무 컸기에 생긴 심한 상대적 박탈감이 어린 시절 보이는 것의 전부였다.

 그것만이 그토록 중요했던 초등학교 시절의 내게 그 이후 성장기 기억에 상대적 박탈감은 남아 있지 않았다. 스스로를 돌보는 일에 익숙했던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살아남을 이유를 찾아냈기에 가능한 일이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선택한 그 길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야 만나는 감정, 뭔가 이게 아닌데 하는 마음이다. 당연하게 생각하며 한참을 걸어왔던 길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경우도 익숙하다.

 잘못된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이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내가 과거로 다시 돌아가 그 선택을 다시 할 수는 없지만, 상상으로는 가능하다.

 그 가능성에 매달리게 되면 딱지가 하나 붙여지면서 졸지에 '사회 부적응' 낙인마저 감당해야 되는 게 아닐까도 싶다. 하지만 별로 권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까지 지나온 그 세월의 수고와 고통, 스스로 위로하기 위해 저질렀던 자율을 내세우던 강제, 자발적 자유의 속박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나의 잘못된 선택을 외면하도록 한다. 매몰비용은 나답게 살아내기 위해 필요했다.

 

출처- pixabay


 

 국가의 성장이 숫자로 확연해도 개인의 성장을 고통스럽게 한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국가의 성장에서 만나는 상대적 박탈감과 능력주의의 불공정을 주변에서 너무도 잔혹하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성장우선주의 정책은 부의 양극화도 가져왔다. 어떤 의미에서 국가는 '미필적 고의'를 당연시하며 위세를 부려온 것이기도 하다. 그런 행위를 멈추게 할 수 있는 역할을 가진 '법과 정의'는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후부터만 따져 보아도 수평을 이루지 못하는 저울로 있다.

 일상에서 정의가 상대적으로 비틀거리고, 개인이 추구하는 선함이 공공선으로 나아가는 가치는 힘을 잃었다. 그래도 이 사회가 표방하는 능력주의에 빨려 들어가는 그놈의 '매몰비용'을 앞으로 남은 시간을 위해 아낌없이 버리는 게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는 언제나 있었다. 처음부터 결과에만 조급하게 매달리지 않고 과정을 통해 내일의 가능성을 도모할 수 있다. 나에게서 성취하는 삶이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상대적 공감'이 만들어지면 행복한 개인이 함께할 건강하고 희망찬 사회가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