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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 흔들기(최낙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02-03 16:52
조회
136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노안
 수년 전 노안이 온 후부터 무엇을 끝까지 읽는다는 것이 괴로운 일이 되었습니다. 책을 펼쳐놓고는 혼자 짜증 내는 꼴을 곁에서 보던 아내는 저보다 더 답답해했습니다. 돋보기를 맞춰 쓰면 간단히 해결될 것을, 미련한 짓을 하고 있다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지금껏 돋보기를 쓰지 않고 지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답답하고 짜증이 났던 노안도 습관이 되니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굳이 돋보기까지 써가며 자세히 봐야 할 일이 그렇게 많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충 보고 대충 알아먹고 대충 이해하는 일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에 따라 마음은 대충 편해지고 그랬습니다. 이 뻔한 세상,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봐야 알까?’ 하는,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뉴스를 볼 때, 눈에 보이는 큰 글자만 봐도 대충 그 내용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이번 보궐 선거 때문에 호들갑스러운 기사의 제목만 읽고는 ‘그래, 그놈들이 역시 그렇지 뭐...’ 하거나 자기 자식을 학대하다 숨지게 한 어느 엄마의 기사의 제목만을 보고 ‘이런 망할 놈의 세상’ 하고 마는 것이 제 생각의 끝이 되어버렸습니다.


#지옥도
 저는 휴대전화기가 두 개입니다. 유심칩이 없는 스마트폰은 당시 중학생이었던 조카가 강제로 저에게 팔아넘긴(?) 것인데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서 기사검색과 카카오톡 전용으로 쓰고 있습니다. 모든 통화는 지금도 폴더폰을 쓰고 있습니다. 폴더폰은 한 손에 들기 편하고 무엇보다 한 번 충전하면 3일 동안 배터리를 갈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긴 알림 문자가 올 경우입니다. 제 폴더폰은 화면 확대가 되지 않으니 글씨가 작아서 읽을 수가 없는 긴 문자를 대충 보았다가 낭패를 보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돋보기를 맞추면 간단한 일을...” 아내의 꾸지람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마침내 돋보기를 하나 사고야 말았습니다. 안경이 아니라 손금 볼 때나 쓰는 크고 둥그런 외눈 돋보기였습니다. 폴더폰 문자를 외눈 돋보기로 보고 있는 꼴을 본 아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외눈 돋보기가 생기니 아이들처럼 햇볕에 종이도 태워보기도 하고 와이파이 전용폰을 돋보기로 확대해서 보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일보의 기획 연재기사 <중간착취의 지옥도>를 작은 글씨까지 읽었습니다. 홧김에 종이신문을 끊고 나서 그렇게까지 여러 번 기사를 본 것이 언제였나 싶었습니다. 아무래도 돋보기안경을 맞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진 출처 - freepik


#공부
 소설가가 되어보려고 소설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습작을 써 가면 동기들이 돌려 읽고 지도해주시는 선생님께서 마지막 평을 하셨습니다. 재주도 없고 열심도 없는 제가 소설 쓰기를 그만둔 것은 오래전 일이 되었지만 잊혀지지 않는 선생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발상도 그렇고 문장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왜 작품 안에 맺힌 것이 없을까...?”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게 정확히 무슨 말씀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 말씀이 문득 떠오를 때, 어떤 때는 그 말씀을 이해할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역시 처음처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은 갑자기 그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드는 날입니다.


 연말연초가 되면 습관처럼 한 해를 돌아봅니다. 어느 사이 노안이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니 해마다 연말이면 써왔던 반성문도 여러 해 동안 쓰지 않고도 대충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대충 마음 편하게 지내왔던 시간이 정말 노안 때문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해, 스마트폰을 새로 장만하고 눈에 잘 맞는 돋보기안경을 맞추면 제가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을까요?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