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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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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꺼내든 맹자(孟子)(오항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10-28 17:25
조회
1021

- 국가의 공유재 강탈 현장에 서서 -


오항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며칠 전 학회에서 ‘맹자의 여민동지(與民同之)의 역사적 성격’이라는 글을 발표 했다. 마침 인권연대에서 한재훈 선생님의 《맹자》 강의가 열린다고 한다. 내친 김에 나는 그날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맹자》의 다음 구절을 암송했다.


 천하의 넓은 거처에서 살고,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큰 길을 간다. 뜻을 펼칠 수 있을 때는 인민들과 함께 실천하고, 뜻을 펼치지 못할 때는 자신의 길을 홀로 간다. 부귀가 마음을 흔들지 못하고, 빈천이 지조를 바꾸지 못하며, 위력이 굴복시키지 못하나니, 이런 사람을 일컬어 대장부라 하느니라[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得志, 與民由之; 不得志, 獨行其道. 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


 맹자는 왕도정치, 위민, 역성혁명의 사상가로서 대장부, 호연지기, 연목구어, 오십보백보, 측은지심처럼 귀에 익은 표현의 저작권자이기도 하다. 맹자의 행적과 사상을 담은 《맹자》는 일찍이 경전으로 자리 잡은 《논어》와 사뭇 다른 대우를 받았다. 송나라 때에 이르러 정이(程頤)가 사서(四書)에 포함시킨 뒤 주자(朱子)가 주석을 단 이후에야 경(經)의 반열에 올랐다.


 조선과 명나라가 《맹자》를 받아들인 태도도 각기 달랐다. 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이 80여 군데를 도려내 간행한 《맹자》를 과거의 교재로 삼았던 명나라와 달리, 조선에서는 삭제 없이 읽고 널리 인용하였다. 이것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겠으나, 조선의 지식인들은 사림으로서 정치와 사회를 주도하였고, 중국 지식인들은 환관들에게 짓눌려 생존에 급급했다.


여민락
 조선 세종대 〈여민락(與民樂)〉이라는 곡명은 맹자의 ‘인민들과 함께 하는 삶[與民同之]’ 사상에서 유래하였다. 맹자에게 제나라 선왕(宣王)은 ‘무용(武勇)을 좋아한다’, ‘재물을 좋아한다[好貨]’, ‘여자를 좋아한다[好色]’ 하며, 자신의 인격적 약점을 상담하였다. 제 선왕은 그래도 반성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던 듯하다. 맹자는 ‘인민들과 함께 한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고 대답했다.



 제 선왕은 ‘내게는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라고 하여 취향의 편향성을 부덕함의 원인인 듯 말하였다. 허나 맹자의 눈은 달랐다. 제 선왕이 무용을 선호한 것은 전쟁을 수행하여 나타난 결과일 뿐이고, 재물을 좋아하는 것도 전쟁 비용을 조달해야 하는 상황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이때는 전쟁으로 남자들이 죽어나가 ‘짝을 잃고 원망하는 여자’들이 많아진 시대, 이른바 ‘맨날 싸우는 나라들[戰國]의 시대’였다. 더 중요한 쟁점이 있었다.


 문왕의 동산은 사방 70리였지만, 풀 베고 나무 하는 사람들이나 꿩이나 토끼를 잡는 사람들이 갈 수 있어서, 백성들과 공동으로 이용하였으니, 백성들이 작다고 여긴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신이 처음 제나라 국경에 도착하여 제나라에서 가장 금지하는 것을 물어본 뒤에 조심스럽게 들어왔습니다. 신이 듣건대 국경 관문 안에 동산이 사방 40리인데, 그곳에 있는 사슴들을 죽이는 자는 사람을 죽인 죄와 같이 다스린다고 했습니다. 이는 사방 40리 되는 함정을 나라 한가운데에 만들어놓은 것이니, 백성들이 너무 크다고 여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



사진 출처 - 경향신문


공유(共有)
 대다수 백성이 농민이었던 시대의 대부분의 생업수단은 토지였다. 앞서 언급한 여민동지 가운데 경제 부문의 정원, 동산, 산림이 토지에 해당한다. 숲, 연못, 늪지, 강, 산림은 원래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개방되어 있었다. 누구나 그 땅을 사용하고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이제는 국가의 군주들이 이 공유지를 독점하려는 것이다. 인민들에게는 소나무, 참나무 같은 목재, 꿩, 토끼, 멧돼지 같은 동물, 머루, 딸기, 버섯 같은 식물……오랫동안 단백질, 땔감 같은 생계자원의 공급처이자 나들이와 놀이의 공간이었다. 로빈훗의 셔우드 숲을 상기하면 이해하기 쉽다.


 이제 공유지의 사용, 수익, 처분을 놓고 긴 투쟁이 벌어질 터였다. 국가가 산림 곳곳을 파악하는 강제의 능력이 낮으면 공유지는 안전하게 ‘방치’, 즉 원주(原住) 농민의 입장에서는 현상유지라는 평화로운 길을 갈 것이다. 국가의 강제력이 발달하면 농민은 세금과 부역, 나아가 형벌이라는 함정에 대항하여 저항과 탈주로 투쟁을 전개할 것이다.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포악한 국가는 망했다는 사실 뿐이고, 맹자는 그 포악한 국가의 주권자에 대해 다소 시크하게 ‘왕이 아니라 한 사내[一夫]일 뿐’이라고 치부하였다.


인천공항의 사유화
 바다나 갯벌, 숲과 하천에 철도나 공항을 놓고 이를 정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은 얼핏 ‘효율화’, ‘경영합리화’라는 미명 아래 가려진다. 인천공항, 한국철도, 한국전력의 민영화(=사유화) 논의가 바로 이런 사례들이다.


 충남 서산엔 광대한 간척지가 있다. 1978년 이른바 ‘유조선 공법’이라고 알려진 폐유조선을 이용한 물막이 공사를 통해 여의도의 33배에 달하는 농지가 만들어졌다. 이보다 앞서 서산의 공유지였던 갯벌을 농지로 바꾼 주인공들은 1961년 11월,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사회 명랑화 사업'을 내걸고 강제로 수용했던 '대한청소년개척단'이었다. 1966년 서산개척단이 해체된 뒤 운영권은 서산 군수에게 넘어갔고, 1975년에 정부는 가분배했던 땅을 모두 국유지로 몰수했다. 공유지가 국유지로 변하고 다시 현대그룹의 서산농장이 되었다.


 갯벌, 산림, 강, 바다 같은 공유지를 법인이나 개인에게 줄 수 있는 권리를 정부가 갖는 조건이란 대체 무엇인가? 불행하게도 이 질문에 대해 아직까지 법률적인 차원은 물론 철학적 경제적 성찰은 아직 제기되지 않는 듯하다.


 《공유수면 관리 및 매립에 관한 법률》(제16568호)에 따르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한국토지주택공사가 매립을 할 경우 해당 관청의 승인만 얻으면 매립이 가능하다. 매립 뒤 준공검사 확인증을 받으면 국가, 지방자치단체 또는 매립면허취득자가 매립지의 소유권을 가진다. 매각이나 양여 등 처분이 불가능했던 공유지가 처분 가능한 소유권의 대상이 된다. 국가(중앙정부 또는 지방정부)가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처분 가능한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더욱 문제가 심각하다. 갯벌 등 간석지는 물론 전기, 철도(도로), 공항, 의료, 수도 같은 경우도 정부의 결정에 따라 얼마든지 쉽게 민영화(=사유화)할 수 있는 길이 법적으로 열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경제적 이해를 가진 정권이 현행법 안에서 공공재를 침탈할 의도를 가질 경우 시민적 저항 방법이 부재하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희망도 있다. 이런 심각성을 자각한다면, 지금이라도 장차 전기, 철도, 공항, 수도, 의료 등 처분 가능한 사유화 추진을 저지할 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 먼저 국가의 자의적 공유지 침탈에 대한 헌법적, 법률적, 철학적, 경제학 논의가 필요하다. 이제, 정부(국가)가 어떤 권한과 근거로 감히 공유지를 ‘소유’, 처분할 수 있는지, 처음으로 돌아가 물어야 한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에 재직 중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