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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포용할 수 있을까: 지구화시대의 선제적 보훈(이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10-07 13:56
조회
275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그동안 종교학과 평화학을 공부하다가 올 초부터 보훈교육연구원에서 일하고 있다. 보훈교육연구원 밖에서 보았던 한국 보훈제도의 의미와 과제가 안에 들어오니 더 선명하게 보인다. 그것은 결국 보훈이란 무엇이고 보훈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사전적으로 보훈(報勳)은 “국가 유공자의 애국정신을 기리어 나라에서 유공자나 그 유족에게 훈공에 대한 보답을 하는 일”이다. ‘국가보훈기본법’ 제1조(목적)의 핵심을 추리면, ‘국가를 위하여 희생하거나 공헌한 사람의 숭고한 정신을 선양하고 그와 그 유족 또는 가족의 영예로운 삶과 복지향상을 도모하며 나아가 국민의 나라사랑정신 함양에 이바지하는 행위’다. 얼핏 지당하고 분명한 규정 같다.


 하지만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 ‘공을 세운다는 것’[有功]이 무엇인지 하나씩 따지다 보면, 실제로 그 경계가 모호할 때가 많다. 전쟁 참전 용사가 국가유공자일 수 있고,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희생을 무릅쓰고 노력하는 이들도 국가유공자일 수 있으며, 나아가 양심적으로 선량하게 사는 소시민도 국가유공자일 수 있다. 이들 없이 국가가 유지되고 발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어디까지가 국가에 공을 세우는 행위인지 규정하고자 할 때 늘 긴장과 갈등이 뒤따른다. 어떤 태도로 얼마나 헌신하고 희생적이어야 유공자라고 할 수 있는지는 결국 사회적 의미와 영향력에 따른 법률적인 판단에 달려 있다. 공식적으로 국가유공자라는 말은 헌신과 희생의 객관적 증거에 입각해 법과 규정대로 판단한 이후에나 쓸 수 있다. 그리고 이 때의 법과 규정은 좁은 의미에서 엄정하게 적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국가 전체를 염두에 두면, 나아가 국경이 사라져가다시피 하는 급격한 지구화 현상까지 염두에 두면, 국가유공의 본질을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어디까지가 국가유공의 행위인지 그 경계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현행 법률과 제도상 보상과 선양의 대상이 되지 못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류애를 실천하다 희생당한 이들이 보훈의 가치와 본질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훈은 국가공동체로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정책이면서도, 역설적이게도 누군가의 희생을 낳은 폭력적 현실을 전제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 폭력적 전제 자체를 없애가는 행위가 정말 근본적인 보훈의 행위라는 뜻이다. 역설적이게도 국가유공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아도 되는, 바꾸어 말하면 국가보훈기본법의 국가유공자의 개념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될 평화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장기적 과제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세계가 급격히 유기적으로 연결되어가고 있는 때일수록, 어느 국가에 공을 세우는 행위가 다른 국가에 피해가 아니라 도리어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보훈이 국가를 위하여 희생한 사람의 숭고한 정신을 선양하는 행위라 해도, 그 희생이 특정 국가만이 아닌 다른 국가에게도 유익이 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독립 운동을 하고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지배와 정복의 세상이 아니라, 식민, 전쟁 등과 같은 폭력이 사라져, 국가를 위한 희생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아도 되는 지구촌 사회를 만드는 일, 그 궁극적 비전을 한시라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눈앞의 희생자를 우선 돌보고, 국가를 위한 희생의 정신을 선양하되, 궁극적으로는 더 이상 희생이 나오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다각도로 만들어가는 일, 이러한 행위를 ‘선제적 보훈’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희생에 보답하는 ‘사후적 보훈’이 당면한 단기적 과제라면, ‘선제적 보훈’은 사후적 보훈을 포함하며 이루어야 할 장기적 과제이다. 기존 보훈이 국경 중심의 근대 민족국가 범주에 제한되는 경향이 있다면, ‘선제적 보훈’은 국경 중심의 민족국가의 범위를 넘어, 탈경계적 세계시민사회에 걸맞게 재규정하는 행위와 연결된다. 한반도의 경우는 통일과 평화 지향의 실천과도 연결된다.



사진 출처 - 구글


 가령 6.25 전쟁에 참여했다가 희생당한 이들과 유족을 돌보는 일은 보훈의 핵심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여기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는 뜻이다. 북한 보훈정책의 북한 사회적 의미를 연구하고, 그 의미를 적절히 반영하며 결국은 북한을 품는 더 큰 보훈의 개념과 정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남한의 보훈이 북한에게도 유의미한 것이 될 수 있도록 보훈의 시각을 확대해야 한다. 이것이 선제적 보훈의 한 가지 길이기도 하다. 최종적으로는 적까지 품을 수 있는 보훈이어야 한다. 그런 가능성을 간과하면 보훈 정책이 그 희생을 낳은 적에 대한 증오로 이어지고, 그로 인한 다른 갈등을 야기하는 진원지가 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보훈의 의미와 범주를 선제적으로 확대해가야 한다.


 이러한 선제적 보훈은 사후적 보훈을 포함하며 거기에 심층적 의미와 방향성을 알려준다. “사후적 보훈≤선제적 보훈”으로 그 범위를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사후적 보훈과 같으면서도 언제나 더 큰 선제적 보훈’의 핵심은 한 마디로 ‘평화와 인권’이라고 할 수 있다. 보훈은 결국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일이고, 희생을 낳은 폭력이 없어질 때까지,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보훈교육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