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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년 대기근에서 읽는 코로나의 선거 지침(오항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4-09 17:06
조회
584

오항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1. 도시
 신석기 시대를 지나며 시작된 농경의 결과 인류는 더 많은 생존노동을 해야 했고, 체력이 약화되었다는 연구는 이제 학계에서 대체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이 무렵 노동, 건강과 함께 주목을 받은 것이 전염병이었다. 농업은 어떤 한 곳의 땅에 씨를 뿌리고 거둘 때 노동력 투여가 집중되므로 인류는 자연스럽게 마을을 이루고 정착해서 살았다. 사람들이 몰려 있다는 것, 그것은 병원균에게 강력한 힘을 부여했다. 몰려 사는 만큼, 전염병은 드문드문 유목하거나 사냥, 채집하는 사람들의 세계보다 농경사회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18~19세기 자본주의의 만연에 따라 사람들은 농지에서 뿌리가 뽑혀 도시로 나와 노동력을 팔았다. 자본-노동의 생산관계가 일반화 된 것이다. 이렇게 늘어난 도시는 세균에게 속수무책이었다. 현미경을 통해 병원균의 정체가 밝혀지고 그에 대한 위생 관념과 조치가 생길 때까지 그러하였다. 침 뱉는 행위가 무례한 행동에서 더러운 행동으로 변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1918년경 스페인 독감이 유행할 때 뉴욕시에서는 유럽에서 오는 배를 검역하였고,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승객의 전차 탑승을 거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뉴욕은 그 50년 전만해도 브룩클린을 비롯하여 전염병에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도살장이 많았던 시카고는 내장 등 도살 뒤에 버려진 동물들의 부속물이 떠다니며 썩어서 거품이 이는 강물 곁에 노동자의 거주지가 밀집해있었다. 그나마 식수가 없어 그 물이라도 마셔야 했다. 여전히 현대의 재해 피해는 계급, 계층과 상관이 높다.


 과학의 발달은 전염병을 비롯한 홍수, 가뭄 등 자연재해를 어느 정도 통제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코로나는 그 ‘어느 정도’라는 게 참 허망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통제할 수 없는 재난을 만났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1. 기근
 코로나가 세계를 집어삼킬 기세를 보였을 때, 자연스럽게 조선시대 경신대기근이 떠올랐다. 경술년(1670, 현종11), 신해년(1671) 두 해에 걸친 혹심한 기근이라 이렇게 부른다. 지금은 기근이 농산물 다국적기업의 이윤 논리에 따라 저질러진 인재(人災)이지만, 당시 기근은 역시 자연재해였다. 기근은 영양 상태를 악화시켰고 역병(疫病)을 불러들였다.


 조선시대에 기근은 흔하지는 않았더라도 잊을 만하면 찾아왔다. 조선 사람들은 16세기말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문명의 재해를 겪었다. 그 사이 광해군대 혼정(昏政)이 채 수습되지 못한 1626년(인조4)~1627년에 병정(丙丁) 대기근을 겪었다. 후금과 ‘형제의 맹’을 맺은 정묘호란이 바로 이 기근 와중에 닥쳤던 침략이었다. 효종 때도 1653년(효종4)~1654년 계갑(癸甲) 대기근이 있었는데, 봄에 동해가 얼고 여름에는 제주에서 기르던 말 900여 필이 얼어 죽는 참사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병정, 계갑, 경신 식으로 두 해에 걸쳐 기근이 진행되는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한 해 농사를 망치면 이듬해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1670년(현종11)에는 새해 첫날부터 기상 이변이 있었고, 1월 내내 전국 각지에서 이변 보고가 이어졌다. 전라도, 경상도 거창과 동래, 경기도 통진 등 전국 각지에서 지진도 있었다. 역병도 발생했다. 2월 충청도에서 염병이 창궐해 80여 명이 죽었고, 윤2월 평안도에서는 1,300명이 감염되었으며, 3월 7일 경상도에 1,000명 이상이 감염되었다. 이 틈에 메뚜기 떼가 경기도, 함경도에 기승을 부렸고 딱정벌레들이 물밑으로 들어가 해를 끼쳤으며, 수많은 참새 떼 때문에 곡식은 물론 도토리와 밤도 열리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냉해에 대한 보고도 빠지지 않았다. 윤2월 26일, 서울에 때늦은 눈과 우박이 내렸다. 음력 윤2월이면 일러도 3월말, 대개 4월이다. 3월에는 경상도에도 새알만한 우박이 내렸고, 평안도에 서리가 내렸는데, 4월까지 서리 우박이 내려 곡식의 싹이 죽고 목화와 삼베가 모두 피해를 입었다. 이런 상황은 전라도, 경상도, 함경도, 강원도를 가리지 않았다.


 와중에서 가뭄이 계속되었다. 비가 너무 오지 않아 도저히 파종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고, 이후 한 달 동안 비가 오지 않아 밀과 보리가 모두 말라 죽은 상태였다. 5월 말에 내린 비로 가뭄이 끝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홍수가 찾아왔다.



사진 출처 - EBS


1. 대응
 재상급 인물들도 십여 명씩 죽어나갔다. 국방부장관 격인 병조판서 김좌명이 대표적인데, 이 사람은 대동법 확립에 큰 공을 세운 김육(金堉)의 장남이며, 동생이 숙종의 외할아버지 김우명이다. 김좌명의 후임으로 병조판서가 된 서필원도 몇 달 후에 목숨을 잃었다. 대사헌 장선징(張善徵)은 이렇게 상소를 올렸다.


 서울 안팎에 굶어 죽은 시체가 도로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부모처자가 서로 베고 깔고 함께 죽은 경우도 있고, 혹은 어미는 이미 죽고 아이가 그 곁에서 엎드려 그 젖을 만지며 빨다가 금방 따라 죽기도 합니다. 이렇게 울고불고 신음하는 소리에 지나가는 자도 흐느낍니다. 더욱이 전염병은 날로 치솟아 열풍이 불꽃을 일으키는 듯 한 기세입니다.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드문데, 걸렸다 하면 죽어서 곧 성 밖으로 버려집니다. (《현종개수실록》 12년 6월 4일)


 서울 안팎으로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다는 말이다. 가족이 몰살되기도 하고, 어미가 죽은 줄 모르는 아이는 죽은 어미젖을 빨고 있는 상황이었다. 장선징은 흉년이 시작된 1671년 이전의 각종 부역 및 관청 대출미 미납 등의 항목을 일체 탕감하라고 건의하였다. 백성들이 어려울 때 나라에서 제일 먼저 해줄 일은 세금을 줄이거나 면제해주고, 군대를 포함한 신역 동원을 면제해주어 편안히 모여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조선 정부는 그렇게 했는데, 이를 두고 어떤 학자는 재난의 규모에 비하여 조선 정부의 대응 시스템이 효과적으로 작동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대기근 두 번째 해인 신해년(1671)에 대제학을 맡았던 김수항(金壽恒)은 굶주린 백성들에게 식량을 나누어주는 진휼을 맡았다. 봄에 기근이 크게 들자 사방의 굶주린 백성 수십 만 명이 한양으로 모여들었다. 김수항은 김좌명(金佐明 이때 역병으로 사망), 민정중(閔鼎重 현종의 사돈), 조복양(趙復陽)과 함께 진휼하는 일을 나누어 맡고 밤낮으로 쉴 틈 없이 직무를 보았다.


 이 해 여름에 또 보리가 흉작이었고 여역(癘疫)이 크게 돌아 사망하는 백성이 더욱 많았는데도 끝내 도적이 되거나 유랑하여 흩어지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현종이 애를 쓴 덕도 있지만, 능력 있는 여러 신하가 좌우에서 부지런히 애쓴 공이기도 하다고 평가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안민(安民) 정책을 펴서 소농인 일반 백성들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킨 효과도 컸다.


 이 점은 중요하다. 도적이 되고 싶은 백성, 유랑하고 싶은 백성은 아무도 없다. 편안히 가족과 모여서 살고 싶다. 이런 재해를 넘기면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백성은 도적이 되지도 유랑을 하지도 않는다. 넘기는 방법은 나라 재정을 모두 털어서라도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다. 위정자들이 스스로의 목숨을 돌보지 않는 책임감으로 구휼, 격리, 소개(疏開)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전망이 없으면 백성은 달라진다. 죽던가 떠나고, 도둑이 되어 약탈한다. 살 수 있다는 전망을 주는 것, 그것이 관료, 정치가의 책임임을 적어도 현종 당시 김수항과 그의 동료들은 알고 있었다.


1. 선거
 며칠 전 도쿄와 뉴욕에서 사재기로 상품진열대가 텅 빈 사진을 보았다. 저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약탈이 시작될 지도 모른다. 한국 시민들은 아직 사재기 조짐을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차분하기까지 하다. 수구 언론이나 정치배들의 끈질겼던 험담에도 불구하고 질병관리본부를 비롯한 정부의 대응은 믿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몸이 유달리 약한 대구 시장 같은 사람이나, 종교적 신념과 의학적 처치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꽃놀이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조급한 사람들이 있어서 걱정이긴 하지만 말이다.


 조선의 재난 대응과 지금의 방식이 같을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진화론의 수준에서 변치 않은 것은 전염병 같은 자연재해에 맞서 대응하는 방안에는 왕도가 없다는 점이다. 책임감 있는 위정자들이 있어야 하고, 그래야 시민, 인민들은 불안을 극복하고 일상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말이다.


 불안은 재난의 크기와 별 상관이 없으며, 또 다 같이 당하면 덜 생긴다. 불안은 나만 버려질 수 있다는 데서 시작된다. 현대사회의 유난히 만성화된 불안, 공포는 19세기 산업화 이후 공동체의 도움과 보호가 사라지고 남은 것은 팔아야할 노동력 밖에 없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다시 도움과 보호가 자본주의 사회의 불안과 공포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대두했고, 그 유력한 방안이 노동조합이고 복지정책이었다.


 이런 점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이 땅의 시민들에게 하나의 지침을 주고 있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 않을 위정자를 뽑으라고, 노동과 복지가 공약에서 핵심인 위정자를 뽑으라고. 그리고 이 지침은 자본주의가 역사적 수명을 다할 때까지 유효할 것이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에 재직 중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