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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려는 자와 가지려는 자(이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11-13 14:22
조회
923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정치경제학에서 ‘교환가치’(exchange value)니 ‘사용가치’(use value)니 하는 말을 한다. 교환가치는 일정한 비율로 교환되는 상품들 간의 속성이다. 배추 한 포기와 과자 한 봉지를 바꾼다면, 배추 한 포기의 교환가치는 과자 한 봉지 정도에 해당한다. 한 시간 노동한 대가로 만 원을 받는다면 노동의 ‘사용가치’가 만 원이라는 뜻이다. ‘교환가치’는 대등하게 계량화한 주고받기로 나타나고, ‘사용가치’는 내심 더 많은 것을 받으려는 전략적 시도로 이어진다. 가치를 더 많이 확보할수록 부를 더 축적하게 된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상상을 하게 해주었다. 그는 원시 부족사회의 포틀래치(증여행위)를 연구한 『증여론』이라는 명작을 남겼다. 이 책에 의하면, 교환은 증여(gift)로부터 이루어진다. 누군가 증여하면, 받은 만큼, 아니 받은 것 이상으로 내어줌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규정된다. 모든 교환행위는 증여로부터 시작되고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 때 주고받기는 단순히 물질적 관계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 명예와 지위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아가 영적(spiritual) 차원까지 교감하는 행위이다.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받았다면 받은 것 이상으로 상대방에게 갚는 행위가 상호 순환하면서 사회가 운영된다. 받기와 갚기가 순환할 때 차별과 불평등은 줄어들거나 사라진다. 증여가 한 사회를 운영하는 근본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모스의 증여론을 ‘호수성’(互酬性, 서로 갚음)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는 최근작 『유동론』에서 호수성이 특정인의 과도한 축적과 그로 인한 차별을 극복하는 동력이라고 말한다. 프로이트의 생각을 빌려오면서, 호수성은 재물과 힘의 불균형을 정당화하는 ‘국가라는 원부(元父)’를 살해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증여와 수증이라는 교환양식은 물건을 축적하며 사는 인간의 정주 생활에서 생겨났지만, 정주 생활이 낳은 계급과 차별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호수성은 그저 계량화된 계약 관계에 따라서만 살지 않는 인간의 원초적 지향성을 보여준다. 가라타니는 이것을 ‘유목적 유동성’이라고 말한다.


 다소 종교적 언어로 하면, 증여는 ‘초월’의 세계, 특정 권력을 넘어서는 ‘보편종교’를 열어주는 동력이다. 가라타니에 의하면 주고, 받고, 갚는 관계의 지속은 근대 국민국가 체계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낳은 자본 중심의 ‘세계제국’을 넘어 자유와 평등이라는 원천 관계를 고차원적으로 회복시킨다. 증여론에 담긴 호수성은 과거의 원시 부족에게만 나타나는 특정 사례가 아니라 앞으로 도래할, 아니 도래시켜야 할 ‘오래된 미래’이다.


 그런데 이런 사유가 딱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선입견 없이 보면, 수천 년 이상 된 불교나 기독교 같은 종교의 메시지도 이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세상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주어져 있다. 누구든 거저 받은 데서 삶이 시작된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신의 은총 혹은 선물이라 말한다. 그렇기에 인간도 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종교 윤리이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기, 이것이 자연 혹은 신적 원리에 어울리는 삶이라는 것이다. 졸저 『인간은 신의 암호』에서 이러한 은총의 원리와 윤리를 신학적으로 정리한 바 있다.



사진 출처 - 구글


 인류의 문제는 주어져 있는 것을 저마다 소유하려고만 하는 데서 발생한다. 사용가치를 높이기 위한 부의 축적 경쟁에서 승패가 나뉘고 차별과 아픔으로 이어진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먼저 ‘주기’이다. 그리고 그만큼, 아니 그 이상 갚기이다. 주기와 그 이상의 갚기가 순환하는 곳에서는 재물이 특정인이나 세력에 쏠리지 않는다. 모스의 ‘증여론’이 이것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북한에게 먼저 주면 안 될까? 난민을 더 수용하면 안 될까? 검찰은 수사권을 내려놓으면 안 될까? 서울‘광역시’ 정도로 바꾸면 안 될까? 증여론, 호수성과 같은 언어를 접하다 보면 갖은 생각이 다 떠오른다. 현실이라는 이유로 체념하고, 종교의 이름으로 배제하고, 외연을 확장한다며 내면을 파괴하고, 나를 위해 남을 몰아내고, 온갖 차별, 소외, 억압, 갈등이 지속되고... 이런 폭력을 언제까지 지속시켜야 할까. 주고, 받고, 갚고, 주고, 받고, 갚는... ‘서로 갚기’의 순환 고리를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누구든지 원래 받은 데서 시작하는 데 말이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