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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멀다고 하면 안 되갔구나!” (최낙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5-09 18:07
조회
426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저는 사무실에 출근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TV 앞에만 앉아 있었습니다.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거짓말 같았습니다. 현실이 아닌 영화 같았습니다.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도 지척이요, 마음이 천리면 지척도 천리’라는 옛사람의 말이 그저 그대로 온몸에 착 달라붙는 것 같았습니다.


 이후, 저는 아침 첫 뉴스부터 마감뉴스까지 하루 종일 뉴스만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같은 내용의 뉴스도 이 방송, 저 방송을 돌아가며 몇 번을 보고 또 보고 하는 것 같습니다. 하다못해 티비X선까지 찾아볼 정도이니, 이렇게까지 TV를 챙겨보았던 적이 또 있었을까 싶습니다.


 “둘 다 표정이 좋은 걸 보니 왠지 빨리는 안 되더라도, 제가 죽기 전까지 통일이 될 거 같아요.”


 초등학교 6학년 남자아이의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냉철한 평가(?)만 봐도 판문점 회담은 성공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기 살아생전 통일이 될 거라는 기대까지 하고 있으니 대단한 일입니다.


 어느 시인의 ‘애국, 애국, 애국 소리 딸꾹질 같아...’ 하는 표현에 깊이 공감했던 제가 애국자일 리는 없습니다. 거기에 ‘통일염원 몇 년’ 하는 식의 연호(?)를 쓰는 것에 심한 거부감이 있었던 지난 기억으로 볼 때, 소위 민족주의자는 더더욱 못 되는 제가 이렇게 들떠 있는지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가슴이 기대감을 주체 못해 벌렁벌렁하는 걸까요.


사진 출처 - 뉴시스


 어버이날, 어머니를 뵈러 갔습니다. 먼저 와 있던, 저보다 여섯 살이 많은 누이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물었습니다.


 “엄마, 우리 개성하고 장단에 땅 있다고 하지 않았어?”


 개성에 살던 저희 할아버지는 장단으로 이주해서 농사를 지으며 사셨다고 했습니다. 누이는 개성에 산이 있고 장단에 전답이 있는데 큰댁에 그 땅문서가 있다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던 모양입니다. 그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역시 정상회담 때문이었겠지요.


 집에만 오면 뭐라도 하나 챙겨가려는 누이가 못마땅했는지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야, 통일이 되도 그 땅을 OO이가 너한테 쪼개 주겠냐? 미친 소리...”


 ‘OO이’는 큰댁 장형(長兄)입니다. 어머니는 아예 꿈도 꾸지 말라는 듯이 한마디를 더 얹었습니다.


 “그리고 이북 놈덜을 뭘로 믿냐? 통일이 무슨 애들 장난인 줄 알어...”


 “아유, 내가 무슨 땅을 어떻게 하겠다고 했어?”


 누이는 그냥 궁금해서 해본 소리라고 멋쩍게 웃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북한 사람들을 ‘빨갱이 새끼덜’이라고 하지 않고 ‘이북 놈덜’이라고 말한 것에 놀랐습니다. 혹시 이번 정상회담 분위기가 열렬한 박정희 신도인 어머니에게도-비록 503 때문에 많은 실망을 했어도-어떤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30년 전쯤, 존경하는 소설가 한 분이 문학 수업 중에 하셨던 말이 떠오릅니다.


 “보따리 하나 둘러메고 판문점에 가서, 그냥 ‘나 고향 갈랍니다’ 하고 넘어가면 왜 안 되나?”


 함경도 회령이 고향이었던 선생의 얼굴은 굳어 있었습니다. 우스갯소리처럼 시작했지만 말하고 나니 새삼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듯 한 그런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선생은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 당연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셨던 것 같습니다.


 두 정상이 마치 놀이하듯이 남북을 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연하다는 것은 어떤 걸까, 이런저런 이유를 달수록 오히려 구차해지는, 덧붙일 것도 뺄 것도 없이 그냥 당연한 것, 그것만으로 마땅한 것은 어디쯤 있을까요.


 비록 멀리 돌아왔지만, 이렇게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당연한 것이 당연히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당연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