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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뚱한 상상(이재성 위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3 17:19
조회
207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몸에서 나간 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언제 나갔는데 벌써 내 주소 잊었는가 잃었는가
그 길 따라 함께 떠난 더운 사랑들
그러니까 내 몸은 그대 안에 들지 못했더랬구나
내 마음 그러니까 그대 몸 껴안지 못했더랬었구나
그대에게 가는 길에 철철 석유 뿌려놓고
내가 붙여냈던 불길들 그 불의 길들

- 이문재 <내 마음의 지도>

 

#섬진강

지난해 가을 섬진강변을 따라 사흘을 걸었다. 광양제철소 근처, 섬진강이 바다로 몸을 푸는 지점에서 출발한 나는 시속 4㎞의 속도로 서서히 북상했다. 망둥이가 뛰어오르는 섬진강 하류는 아름다웠지만, 이내 한 무더기의 공사현장과 맞닥뜨렸다.

남해고속도로와 19번 국도를 잇는 지름길을 새로 놓으려는 공사 같았다. 모든 공사현장이 그러하듯, 벌겋게 파헤쳐진 국토는 슬퍼 보였다. 강 하구 쪽에 보가 설치되는 바람에 재첩이 잘 잡히지 않는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무렵이었다. 국산 재첩이라고 써놓은 것들은 죄다 거짓말이며, 이제 재첩도 거의 중국산이라는 육성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걸으면서 나는 강가에는 길이 없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강을 따라가려는 여행자는 국도 위의 아스팔트를 걸어야 했다. 어느 운 좋은 마을이나, 이따금 만나는 공원에서는 강을 발치에 둘 수 있었지만 그건 잠시뿐이었다. 물결은 멀고 차량은 가까웠다. 발은 쉬이 피로해졌다. 그러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강변을 걸어봤던 것일까?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강변에 접근하기 쉽도록 자전거 도로를 만들겠다는 것일까? 강바닥의 모래를 퍼내어 수심을 깊게 하고 유람선을 띄우겠다는 것일까? 국도가 아닌 강변을 걷고 싶다는 나의 욕망이 4대강 사업을 자초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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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구례 쪽 정상에서 바라본 섬진강의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



#청계천

복개한 도로 밑의 청계천에 가스가 차서 언젠가 청계천 일대가 폭발할 것이라는 괴소문마저 돌았던 청계천 복개도로와 그 위에 위태롭게 걸쳐져있던 고가도로를 뜯어내고 청계천을 복원하자는 제안을 처음 한 것은 지금은 고인이 된 박경리 선생이었다. 한겨레신문은 2002년 1월 1일 신년기획 특집으로 박경리 선생 인터뷰를 싣고, 청계천 복원 시리즈를 통해 이 동화 같은 상상에 시민권을 부여했다. 당시 대부분의 언론은 교통 혼잡과 천문학적인 비용 등을 들어 반대했다.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후보는 청계천 복원론을 선거 공약으로 받았고, 김민석 민주당 후보는 미적거리다 반대했다.

결국 이명박이 당선됐고, 청계천은 불구의 몸으로 복원됐다. 산에서 내려온 물이 흐르는 살아있는 하천이 아니라 수돗물을 역류시켜 거꾸로 흐르게 하는 죽은 하천이었다. 하천 바닥을 시멘트로 쳐바른 청계천 복원 사업은 토건족 이명박의 절묘한 변용이었다. 개발 시대를 반성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은 개발의 진화였다.
#한강

여의도 63빌딩 아래 샛강과 만나는 수문 근처에는 자그마한 모래톱이 있었다. 둔치 공사 이후, 한강 하류에는 모래가 쌓일 공간이 없었지만, 이곳에만 유일하게 남아있던 모래톱이었다. 김소월의 <강변살자>는 노래가 절로 나오는 정다운 곳이었는데, 오세훈 서울시장의 ‘한강 르네상스’ 공사로 싹없어지고 말았다. 모래를 치우고 시멘트를 발라버렸다. 오 시장은 참 대단한 따라쟁이다. 환경연합 회원이었다는 분이 어찌 그렇게 환경감수성이 무딘지 새삼 놀랄 따름이다. 친구와 그곳을 거닐며, 세월이 조금만 더 흐르면 둔치의 시멘트를 모두 걷어내고 자연하천을 살리자는 운동이 시작될 거라는 얘기를 하며 꿈에 부풀었던 내가 한심스러웠다. 한강의 다른 구역은 어떤가. 공터라고는 거의 남기지 않고 꼼꼼히 시멘트를 발라놓은 성실성이 놀라울 정도다. 지금의 한강 둔치는 숨 막히는 잿빛 그 자체다.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염형철 서울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이
한강르네상스 사업으로 조성된 돌 축대를 가리키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경부고속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한강의 그 잿빛 구조물 위에서 즐겁게 논다. 사진도 찍고 자전거도 탄다. 인공어항이라고 비판받는 청계천을 수많은 사람들이 찾고 즐기는 것처럼. 여름이면 발까지 담그며 즐거워한다. 없는 것보다 낫지 않냐고.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4대강 사업이 완공되면 시민들은 자전거를 타고 지금은 갈 수 없는 한강의 북쪽과 낙동강, 금강, 영산강을 달릴 것이다. 유람선을 타고 경치를 즐길 것이다. 없는 것보다 낫지 않냐고. 이명박 대통령은 완공 이후의 편익이 과정의 모든 논란을 덮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경부고속도로가 그랬듯이.
#기우뚱한 균형

분명히 말하건대, 섬진강의 모래밭은 멀리서 더 아름다웠다. 누군가는 흉물스럽게 바닥을 드러냈다고, 모래를 퍼내어 물이 가득 흘러야 비로소 강다울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런 쪽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강을 해치지 않으면서 강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고 싶었다. 모래톱을 해치지 않으면서 가벼운 산책길을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개발과 환경이라는 두 가지 가치 사이에서 철학자 김진석처럼 ‘기우뚱한 균형’을 잡아보고 싶었다.
#광기

그러나 이 정권의 4대강 사업은 그 자체가 너무 폭력적이어서 기우뚱한 균형을 말할 공간이 없다. 일체의 여론 수렴과정과 형식 절차를 생략한 채 밀어붙이는 이 독재적 만행 앞에 모든 이견과 상상은 설 자리를 잃는다. 가장 두려운 건 지금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광기다. 대통령 한 사람이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국민의 절반 이상이 반대해도 강행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불구가 되었다.
#두려움

버스전용차선을 포함한 교통체계 개편 작업을 진행하면서 이명박 서울시장은 자신의 취임식 날인 7월 1일에 맞춰 모든 작업이 끝나도록 독려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버스카드 단말기는 고장 나기 일쑤였고, 버스전용차선에 깔아놓은 빨간 아스팔트는 빗줄기에 파헤쳐졌다. 시민들은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충분히 준비하고 좀 천천히 하면 안 되나.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안에 4대강 사업을 완료하기 위한 속도전이 다시 한 번 진행되고 있다. 서울의 교통체계야 약간의 시행착오 뒤 금세 진정되었지만, 4대강 사업이 가져올 후폭풍은 재앙에 가까우리라. 나는 다가올 여름이 두렵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