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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북한 (안수찬)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01 10:04
조회
399
얼마 전 북한을 다녀왔다. 학술교류 행사를 취재하는 일이었다. 그래봤자 개성공업지구 근처에서 한나절 머문 게 전부였다. 비슷한 일로 금강산에 다녀온 걸 포함해 두 번째 ‘방북’이었다. 이젠 평양 다녀온 것도 특별한 ‘자랑’이 되지 못하는 시절이다. 금강산은 초등학생 수학여행 코스다. 개성은 남한 기업인과 노동자들의 삶터가 되고 있다. 여기서 중뿔나게 무슨 방북기를 쓸 염치는 없다.

다만 내 직업적 특성 때문에 겪은 일들이 있다. 어디서 누구를 만나건 남북 사람들의 첫 인사는 서먹하기 마련이다. 마음의 장벽을 허는 데 시간이 적잖이 걸린다. <한겨레> 기자는 예외다. 소속을 밝히는 순간, 그들의 입가에 미소가 나타난다. 그들이 <한겨레>를 구독하고 있을 리 없다. <로동신문> 등에서 인용한 <한겨레>의 ‘이미지’를 각인하고 있을 터이다. “우리 민족이 하는 일을 열성으로 후원하는 신문사로 알고 있습네다.” 그리곤 다른 기자들에게 말한다. “**일보는 왜 온겁네까?”

그런데 그게 반갑지만은 않다. ‘호의’는 거의 언제나 ‘동류의식’에 기반 한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는 믿음은 스스럼없이 하고 싶은 말을 내뱉게 만든다. 내 소속을 확인한 뒤, 그들은 거의 곧장 ‘정치토론’을 벌이려 한다. 만남의 주인공인 학자들이나 당국자들끼리도 어지간해선 나누지 않는 주제를 도마에 올린다. 대부분은 직설적이다.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이번 개성 방문 때는 도청 수사가 첫 주제였다. 점심 식사 자리에서 서로 인사를 나눈 직후 밥술도 뜨기 전에 나는 예의 그 정치토론의 상대자로 ‘간택’됐다. 날씨가 좋다는 둥, 많이 드시라는 둥, 다른 테이블에서 오가는 의례적인 대화조차 생략됐다. 그들은 <한겨레> 기자를 너무 ‘특별하게’ 대한다.

“6.15 세력에 대한 수구반동들의 대대적 공세 아닙네까. 그동안 쌓아올린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면, 이 땅에서 참화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신건, 임동원 등을 구속한 일이 6.15 선언을 정면으로 막아서는 ‘도발’이라고 보고 있었다.

인권이라는 가치가 남쪽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민주화 세력이라 할지라도 이를 침범하는 일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참화’라는 말도 신경이 거슬렸지만, 마구 대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자들의 ‘돌출행동’ 탓에 남북교류 행사가 파행을 빚은 일이 적지 않다. “참화가 일어나서는 안 되죠. 그런 일이 없도록 다같이 노력해야죠.” 문제의 핵심은 피하고, 속절없이 화합을 권유하며 술잔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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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한겨레
 유엔 총회는 11월 17일(현지시각) 유럽연합(EU)과 미국이 공동 제출한 ‘북한 인권상황에 대한 결의안’을
찬성 84, 반대 22, 기권 62표로 가결했다.



그런데 ‘인권’을 먼저 꺼내든 건 북쪽 인사였다. “우리끼리 잘 살겠다는데, 부시가 자꾸 못살게 굴면, 방법이 없잖습네까.” 얼마 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북한인권 결의안에 대한 이야기였다. “핵 문제가 더 이상 안 통하니까 인권을 걸고넘어지는 것 같은데, 우린 충분히 인권적으로 살고 있습네다. 자기들 인권이나 생각하라고 하시라요.” 곧이어 일본 이야기도 했다. “인권을 말하자면, 그 사람들이 (일제시대에) 저지른 참상부터 따져야지요.”

나는 다시 피해갔다. “서울에 오신 적은 있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 용케도 다시 주제를 이었다. “그 경찰인가 뭔가 하는 사람들이 온통 우리를 둘러싸가지고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지요.” 은근히 남한 인권을 말하려는 눈치다. 그 대화가 오간 식당 밖으로 50m도 나가지 못해 북쪽 군인들에게 제지당한 내 처지가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지만, 역시 토를 달지 못했다. 뭐, 이런 식이다. 그러니 북쪽 음식을 맛보는 자리가 나로선 언제나 불편하다. 언젠가 한번 ‘제대로’ 토론해야겠다는 결심만 거듭할 뿐이다.

그런데,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점심때의 대화가 자꾸 ‘변조 증폭’됐다. 도청, 북한 인권, 미국, 대북제재, 진보-보수 세력, 북한 정부…. 이런 것들이 하나의 연관과 맥락 속에 자리하고 있는 듯 했다. 그 매개는 ‘인권’이었다.

어떤 면에서 그 북쪽 인사는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꿰고 있었다. 인권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때, 그것은 거의 언제나 ‘권력’의 문제다. 인권을 보장하거나 억압하는 일 모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조건을 변형시키는 ‘힘’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더구나 특정 집단이 인권을 문제 삼는 상황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이다. 인권은 단순히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조건과 환경의 문제이며 이를 변화시킬 물리적 힘에 대한 사안이다. 하물며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에서 인권이 화두가 될 때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문제는 인권을 매개로 권력이 작동할 때, 사람들이 이를 서로 다른 관점으로 대한다는 점이다. 위에서 거론된 사안만 따져 봐도, 노무현 정부, 김대중 전 대통령, 한나라당, 부시 행정부, 북한 정부 등의 시선이 복잡하게 엇갈리고 있다.

인권의 가치를 중심으로 정치이력을 개척해온 김대중 전 대통령은 막상 재임시절의 ‘도청’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얼버무렸다. 전 세계 민중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있는 미국은 분명 북한의 인권 문제를 ‘정치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반면 서울 경찰의 ‘경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북한 사람들은 군대의 물리력이 결정적 구실을 하고 있는 북쪽 사회의 현실에는 둔감하다.

흔히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논리가 ‘이중 잣대’다. 뭐 묻은 놈이 겨 묻은 놈 나무라느냐는 반박은 적어도 인권을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반박의 논리다. 그리고 거의 예외 없이 그 반박이 ‘옳다.’ 모든 권력은 기본적으로 특정한 누군가에 대해서는 인권침해적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인권에 대해선 모든 권력이 자신의 몸에 뭔가 구린 것을 묻히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이중 잣대의 논리가 횡행하는 와중에 정작 인권의 실체는 실종돼 버린다. 특정한 인권침해 상황을 문제 삼는 손가락질의 ‘음험한 정치적 의도’를 손가락질하고 나면, 남는 것은 정치토론 밖에 없다. 부시 행정부가 망하기 전까지, 세상의 누구도 북한의 인권에 대해 말해선 안 된다는 환원론적인 논리만 남는다. 남쪽에 극렬반북인사들이 모두 사라지기 전까진, 북쪽 사람들의 경호는 언제까지나 철통같아야 한다는 단순함만 남는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런 앙상한 정치 논리 사이로 다시 인권의 문제가 작동한다. ‘인권적 상황’은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으니, 정치적 쟁투가 끝난 뒤에도 이 문제는 여전히 잔존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국정원은 도청을 한다는 건지 안한다는 건지, 어떤 경우에 해도 좋다고 허락해야 되는 건지, 이에 대한 국민적 감시는 어떻게 가능한 건지에 대해선, ‘오리무중’이다. 잡아간 사람의 정치적 의도와 잡혀간 사람의 정치적 반박만 남아있을 뿐이다.

특별히 이 글에서 다루고 싶은 것은 북한 인권이다. 특징적이었던 것은 이번 방북 때, 핵을 둘러싼 문제에 대해선 북쪽 사람들이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6자 회담을 통해 북핵 문제가 대화 체계 안으로 녹아들었음을 방증하는 일이었다고 믿는다. 그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이는 중요한 변화다. 핵을 거론하는 미국의 ‘의도’를 문제 삼고 핵외교를 펼칠 수밖에 없는 북한의 ‘처지’를 이해하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구체적 해결을 모색하는 자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원천인 핵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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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연합뉴스
5차 6자회담 개막 모습



북한 인권도 비슷하지 않을까. 이를 문제 삼는 미국의 의도는 분명하다. 북쪽 인민들의 탈북을 ‘기획-조직-선전’하는 일부 보수 세력의 속내도 뻔하다. 북 인권을 빌미로 진보개혁진영을 비난하는 그 목소리도 가소롭다. 그들 모두는 지금 인권이 아니라, 인권의 탈을 쓴 정치권력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정치의 인권’이 아니라 진정한 ‘인권의 정치’를 작동시킬 책임이 남쪽 인권단체에게도 있는 것은 아닐까. 북쪽의 인권 문제를 그저 정치적으로 비토하기만하고 팔짱을 낄 게 아니라, 이를 제대로 된 테이블에 올려놓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실질의 문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6자 회담 등이 탄생했듯이, 적어도 북한 인권의 문제를 어떤 식으로건 다룰 수 있는 건강한 마당을 형성하는 게 옳지 않을까. 길게 보자면, 북핵 문제가 일정한 매듭을 짓게 되더라도, 북한 인권을 둘러싼 논란은 다시 등장할 것이다. 남북 교류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가동했던 ‘화해의 정치’가 끝내 수구보수 세력의 중상비방을 잠재우고 있듯이, ‘인권의 정치’는 북 인권에 대한 터무니없는 정치도구화의 시도를 넘어설 유일한 방법이다.

엄밀히 보자면 인권에 국경은 없다. 그래서 세계의 모든 인민은 미국 관타나모 기지에 수감된 ‘테러용의자로 추정되는 이슬람인’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인권침해를 문제 삼을 수 있다. 여기서 세계 인민은 미국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게 아니다. 해당 정부의 물리력이 허용하는 공간에 인권의 자리를 보장하라고 촉구할 뿐이다.

국가가 주체가 되는 외교의 무대에 인권을 올리는 것은 인권의 문제를 오히려 은폐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지만, 시민사회가 인권을 문제 삼는 것은 국가의 오류를 스스로 바로 잡게 하는 토양이 된다. 미국과 유엔이 북한 인권을 함부로 말하게 내버려두지 말고, 한국 시민사회가 이를 담담하고도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을까. 미국 중앙정보국의 ‘믿지 못할’ 정보에 기반한 편견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고리를 끊어낼 힘이 사실은 바로 한국 시민사회단체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을 말하자면 이렇다. 도대체 북한 인권 문제라는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그 일은 인권의 보편원리에 비춰 어느 정도의 사안인가. 북 인권에 신경 쓸 필요 없이 남쪽 인권 문제나 집중해도 되는 건가 아닌가. 만일 북쪽 사람들과 이 문제를 함께 논의해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대화의 성과는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해 말해줄 사람이 진보개혁진영에겐 필요하다. 아직도 우리는 북한을 너무 모르거나 인권을 너무 모른다.

 

안수찬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