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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고병헌 위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4 10:24
조회
409

고병헌/ 인권연대 운영위원



2011년 2월 3일, 새해 첫 날이다. 차례지내고 세배하면서 덕담을 나눈다. 요식행위로 전락한지 이미 오래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자녀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덕담을 생각해내느라 잠깐이나마 고민하게 되는 아침이다. 그렇지 않아도 성장통(成長痛)을 유별나게 겪는 우리 두 아이들에게 올해는 좀 힘도 주고 폼도 나는 말을 해주고 싶은데…… 어떤 덕담이 우리 아이들에게 새해에 받는 최고의 선물이 될까?

예전에 읽은 책이 있는데, 일곱 살 때 처음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열일곱 살 때까지 각종 문예창작 상(賞)들을 휩쓸어서 그 자신이 소위 ‘엄마 친구 딸’이었고, 현재는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와 <뉴욕타임스매거진(The New York Times Magazine)> 등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앨리사 쿼트(Alissa Quart)는 영재교육에 관한 자신의 책 『영재 부모의 오답 백과(Hothouse Kids)』에서 오늘날 부모들은 자녀가 자신들보다 더 ‘특별한’ 존재가 되기를 매우 강렬하게 열망한다고 하면서, 이를 프로이드(Sigmund Freud)의 나르시시즘 개념으로 설명한다. 프로이드는 『나르시시즘에 관하여(On Narcissism)』에서 부모가 자녀를 통해서 실현하려는 나르시시즘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르시시즘에서 가장 골치 아픈 점은 에고(Ego)의 불멸성(不滅性)이다. 현실이 아무리 강하게 압박해도 에고, 즉 자아는 자녀 속에 숨어서 죽지 않는다. 아무리 감동적인 부모의 사랑도 본질적으로 유치하다. 그것은 바로 ‘아이 속에서 다시 태어난 부모의 자기 사랑’이기 때문이다. (앨리사 쿼트, 2009: 240)

프로이드의 나르시시즘 개념이 주는 시사점은 부모가 자기 자녀들이 자신들보다 더 ‘특별’하게 되기를 열망할 때는, 즉 자기 자녀를 ‘이상화(理想化)’할 때에는 부모의 사심(私心)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는 사실이다. 앨리사 쿼트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없는 어떤 자질을 소유하고 있고, 또 그러한 자질을 숭배할 때 그 사람을 이상화하면서, 그렇게 이상화된 사람은 나와는 다른 차원에 사는 사람으로 느낀다고 한다. 문제는 어른 사이에서는 이러한 이상화 기간이 길지 않지만, 부모가 자녀를 이상화하는 경우에는 평생 그럴 위험성이 높다는 사실이다(앨리사 쿼트, 2009: 239). 실제로 우리 사회 부모들은 자녀교육에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열심(熱心)’을 보이고 있으며, 이 같은 ‘미친’ 열풍이 사그라지지 않고 오히려 갈수록 더 세력이 강해지는 것에는 분명 자기 자녀에 대한 ‘이상화된 기대’가 핵심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 우리 부모들은 우리 아이들이 나와 다르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점에서 다르기를 기대하고 있는가가 문제이다. 제 정신을 가진 부모라면 우리 아이들이 지금 내 나이가 되었을 때 지금 나보다 더 ‘행복’하기를 바랄 것이며, 이런 목적에서라면 어릴 때부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길러줘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적지 않은 부모들이 자녀들의 행복보다는 자녀들이 갖게 될 경제적 수준에 초미의 관심을 보이는 것이 문제다. 즉 ‘나는 이런저런 대학을 나오지 못해서 이렇게 생활하고 있지만 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초일류 대학을 나와서 어마어마한 연봉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참으로 비정상적이고 건강치 못한 ‘자녀의 이상화’가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자. 지금 당신은 당신 자녀에게 요구하는 ‘1퍼센트 안에 드는 성적’을 얻을 자신이 있는가? 또 진정 당신은 1퍼센트 안에 들어야 행복하고 99퍼센트에 속한 사람들은 진정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1퍼센트 안에 드는 사람들의 삶의 질과 품격을 당신은 진정으로 존경하고 있는가? 분명한 사실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 중 99퍼센트의 자녀들은 ‘99퍼센트’에 속할 가능성이 ‘100퍼센트’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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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대학합격자 이름을 붙여놓은 대치동 한 학원의 입구.
사진 출처 - 한겨레21


상황이 이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도대체 어떤 근거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이처럼 가혹한 폭력적 교육현실을 강요하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단 하나라도 상식적이고 교육적인 이유를 댈 수 없다면, 그것은 결국 부모의 ‘사심(私心)’이 ‘괴물 같은 교육’이 자라나는 온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비정상적으로 이상화된 자녀를 ‘위해서’ 참으로 많은 부모들이 어떤 희생이라도 기꺼이 감수하고 있는데, 이러한 방식의 자녀사랑에 대해 건강한 교육적 이유를 대지 못한다면, 부모가 늙어갈수록 자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교육현실은 노년을 위해 일종의 ‘보험’을 들어두는 식의 ‘사심(私心)’으로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는 말이다. 부모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말이다.

자녀에 대한 이상적(異常的) 이상화(理想化)가 갖는 또 다른 문제는 자녀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앨리사 쿼트에 따르면, 자율성, 혹은 자립성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認定)받을 때 가능한 것이며, 일반적으로 아이들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부모로부터의 인정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에서, 자녀의 입장에서는 자아의 자립 욕구가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모순적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부모가 먼저 자녀의 행복을 위해서 자녀의 자율성, 자립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부여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앨리사 쿼트, 2009: 240). 그런데 ‘이상화된’ 자녀를 위해서 ‘올인’하는 부모들, 혹은 ‘헬리콥터’ 부모들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훨씬 더 ‘의존적’이 되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인간들을 만들게 된다. 그래서 자녀가 어떤 분야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것을 발견했을 때 부모가 앞서 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앨리사 쿼트는 조언한다. 그녀는 “아이들이 가진 재능의 범위를 넓게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부로 아이들을 영재로 만들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자녀가 스스로 자기의 능력을 발견하고 자신의 꿈을 키워가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이러한 ‘자기 주도적인 꿈의 추구’와 ‘그냥 놀게 하는 것’”이라고 앨리사 쿼트는 단언한다(앨리사 쿼트, 2009: 338-339). 그녀는 부모가 자녀에게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투사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책 『영재 교육의 오답 백과』를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짓고 있다.
조기교육을 한마디로 얘기한다면 그것은 ‘미래의 성취에 집중하여 아이의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다. 심하게 말해서, 아이의 미래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한 나머지 아이의 현재를 노예처럼 부려먹는 것이 오늘날 일부 아이들이 받고 있는 영재교육의 실체다. 지금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여러 가지 학습을 확 줄인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영재’라는 굴레를 씌우지 않는다면, 내 아이는 이런 불행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아이로 키워야 한다. 우리 어른들이 누린 행복하고 충만한 어린 시절을 왜 내 아이에게서 빼앗으려 하는가. 행복한 아이는 더 많은 꿈을 꾼다. 어른들이 무리한 욕심으로 아이를 지치게 하지 않는다면 아이들 안에서는 꿈이 자랄 것이고 그 꿈을 이루겠다는 마음도 생겨날 것이다.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아이가 행복할 거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앨리사 쿼트, 2009: 341-342)

앨리사 쿼트가 말하는 ‘조기교육’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진도 앞지르기’ 방식의 교육을 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조기교육’의 본래적 의미는 ‘빠를수록 적기(適期)가 되는 교육’을 말하며, 이런 맥락에서 새해 첫 날 한국의 부모들에게 가급적 ‘조기교육’을 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지금 조건에서 다르게 살아갈 수 있는 의지와 힘을 길러주는 교육은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일수록 적합한 시기일 뿐만 아니라 성장기의 자녀에게는 부모의 삶이 가장 중요한 교재(敎材)이기 때문이다. 삶을 위한 교육인 한, 부모의 삶 자체가 주(主) 교재이고, 자녀들이 읽는 책이나 습득하는 지식, 혹은 체험이나 경험 등은 역시 중요한 요소들이긴 하나 보조적인 것이다. 그러니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을, 지금 우리 사회의 조건에서 행복한 삶을 살겠다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야말로 새해 우리 자녀들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부모가 바뀌면 오늘 이 순간에 우리 자녀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것이니까! 그래, 오늘 세배 덕담은 우리 아이들에게가 아니라 우리 부부에게 다짐하는 말로 해보자. 건강하라든지, 복 많이 지어라든지 등과 같은 권고의 말들 대신 “오늘부터 우리 부부가 이전과는 달리 너희들의 미래에 대해서 불안해하지 않고, 우리부터 먼저 좀 더 의미 있고 행복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할테니 지켜보고 격려해달라!”라는 부모 스스로의 다짐, 약속으로 덕담하리라. 오늘 이 덕담이 우리 아이들에게 새해 최고의 선물이었으면 참 좋겠다.

고병헌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