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발자국통신

‘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아저씨(김창남 위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4 10:11
조회
225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올 한 해 가장 많은 관객을 모은 영화가 <아저씨>였다고 한다. 원빈이라는 매우 잘생긴 배우가 주연으로 나오는 이 영화는 사실 우리가 갖고 있는 ‘아저씨’의 이미지와는 그리 큰 상관이 없다. <아저씨>는 그가 원빈이기 때문에 인기를 얻은 것일 테고 실제 우리 사회에서 ‘아저씨’들은 별로 인기가 없다. 언제부터인가 TV에서건 어디서건 아저씨란 호칭을 듣기 어렵게 되었다. 아줌마란 호칭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웬만큼 나이 들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저씨, 아줌마 대신 아버지, 어머니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아버지, 어머니라 부르는 걸 더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아저씨, 아줌마란 호칭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게다.

영국 런던 근교에 뉴몰든이라는 곳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이 동네에 오래 전부터 회자되는 이야기가 있다. 한 한국 아저씨가 공원을 산책하는데 17, 8세 쯤 되어 보이는 백인 소년이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빌려 달라고 했단다. 그러자 이 아저씨 대뜸 그 친구의 멱살을 쥐고는 이렇게 소리쳤다는 거다. “How old are you? What is your father's name?" 너 몇 살 먹었어? 너희 아버지 누구야?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그 많이 듣던 소리가 영어로 직역될 때 생기는 생경함이 이 이야기가 주는 재미의 포인트다. 설마 그런 일이 진짜 있었을까도 싶지만 아무려나 이 에피소드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저씨’들에 대한 이미지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그저 나이를 따져 상대방을 누르려 하고, 다짜고짜 소리부터 지르며 권위를 내세우지만 실상 아무런 권위도, 내세울 것도 없이 초라하게 찌그러지고 있는 존재, 그게 아저씨다. 아저씨들의 동반자가 아줌마들인데 ‘아줌마’라는 기호 역시 부정적인 이미지로 채색되긴 마찬가지다. 뻔뻔스럽고 낯 두껍고 억척스럽고 목소리 크고 막무가내인, 그러면서 더 이상 여성으로서 성적 매력을 가지지 못한 존재, 그게 아줌마다.

M0010002_emotion_poster_web.jpg


잘생긴 배우가 주연으로 나오는 이 영화는 사실 우리가
갖고 있는 ‘아저씨’의 이미지와는 그리 큰 상관이 없다.
사진 출처 - 씨네21


 

나이를 먹고 중년이 되면 아저씨, 아줌마 호칭이 붙게 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사람들이 대체로 그 호칭을 반가워하지 않는 데는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 자체가 즐겁지 않은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는 아저씨, 아줌마라는 기호가 품고 있는 그런 이미지들 때문이다. 모두가 거쳐 갈 수밖에 없는 인생의 한 단계에 대해 그런 부정적 이미지가 덧씌워 있는 건 불행한 일이지만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아저씨와 아줌마를 바라보는 시각이란 대개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에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아저씨와 아줌마는 사실 나의 부모와 같은 세대이고 그들을 보는 나의 시선은 기실 부모에 대한 나의 시선에서 나온 것이다. 그저 권위를 내세우며 큰 소리만 치는 아버지, 억척스럽게 살며 잔소리를 해대는 어머니는 우리에게 언제나 어쩔 수 없는 삶의 조건이다. 난 이 다음에 저런 아버지(혹은 어머니)는 되지 말아야지 다짐했던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닐 테다. 그러나 부모는 그런 측면 외에도 다른 관계(이를테면 가족애, 경제적 후원, 인자하고 따뜻한 또 다른 모습 등등) 역시 존재하고 무엇보다도 나를 낳아준 부모라는 점에서 쉽게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부모의 부정적인 측면은 나 아닌 남의 부모들, 즉 아저씨와 아줌마들에게 전가되어 버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저씨 아줌마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사실 우리 부모의 부정적 측면이 대입되어 형성된 일종의 속죄양인 셈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토록 부모 세대를 닮고 싶어 하지 않은 자신들이 어느 틈엔가 나이를 먹어 가면서 조금씩 나도 모르게 그들을 닮아가고 있음을 깨달으면서 갖게 되는 자기 부정의 감정이다. 어, 어느 새 나도 우리 부모처럼 잔소리가 늘고 뻔뻔해 지고 꼰대처럼 되어가고 있네, 그럴 때 순간적으로 휩싸여 오는 자기 부정의 감정은 불쾌하기도 하고 한편 쓸쓸하기도 하다. 이럴 때 사람들은 애써 아저씨, 아줌마가 되어가는 자신을 그로부터 멀리 떼어놓고 싶어 한다. 우리가 아저씨, 아줌마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자신은 ‘아직’ 저기까지 가지 않았다는 심리적 안전판을 가지고 싶은 욕망의 표현일 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남보다 일찍 아저씨 소리를 들은 편에 속한다. 대학 시절부터 흰 머리가 많아 실제보다 겉늙어 보였던 탓인데 당시에는 조금이라도 더 나이 들어 보이고 싶었던 시절이라 아저씨 소리에 그리 개의치 않았다. 사실 내게 조금 충격적이었던 건 ‘할아버지’ 소리였다. 둘째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아빠와 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이 있어 아이 손을 잡고 유치원에 간 적이 있다. 그 때 어느 꼬마가 우리 부자를 보더니 이러는 거였다. “어머, 내훈이는 아빠랑 안 오고 할아버지랑 왔네.” 유치원 아이의 판단 기준으로는 머리가 하얀 사람은 곧 할아버지였던 거다. 자칫하면 아저씨 단계를 건너뛰고 바로 할아버지 단계로 진입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해야 할 판이었다. 다행히 그런 경우가 많지는 않았고 나는 지금 대체로 순탄하게 아저씨 단계로 연착륙한 셈이다. 물론 나는 지금의 나의 모습에 그런대로 만족한다. 적어도 누군가가 내게 20여 년 전의 청년 시대로 돌아가겠냐고 묻는다면 그리 큰 고민 없이 ‘싫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은 그러하다. 생각해 보면 나의 청년 시대는 대체로 불안했고 불만스러웠고 가난했다. 그게 청년 시대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70, 80년대의 청년에게 그 시절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연옥이었다. 그 시대를 거쳐 지금 현재의 아저씨가 되어 버린 나 자신이 고맙고 대견스러울 정도다. 나는 불안보다는 안정을, 도전보다는 안주를 좋아하는 태생적 보수주의자가 틀림없다. 그러고 보면 아저씨, 아줌마에 대한 혐오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에서 오는 것 아닌가 싶다. 지금의 나 자신을 정말 사랑한다면 아저씨, 아줌마가 되어 가는 것이 두려울 이유가 없지 않을까 싶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