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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라는 한국의 보나파르트(이재성 위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4 10:37
조회
333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디에선가 헤겔은 모든 거대한 세계사적 사건과 인물들은 말하자면 두 번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들에게는 클리셰나 다름없는 마르크스의 아포리즘이 요즘 부쩍 자주 눈에 띈다. 슬라보예 지젝이나 가리타니 고진 같은 이름난 사상가들의 글을 통해서. 이런 현상은 세계 금융위기 이후 <자본론>이 다시 유행한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20세기를 들끓게 했던 현실 사회주의가 정치적 사망 선고를 받은 뒤 세계를 제패한 듯 기고만장하던 신자유주의가 허망한 실체를 드러내자, 세상의 구조를 설명하는 원전으로서 마르크스가 다시 호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헤겔을 인용한 이유는 나폴레옹 1세와 3세가 노정한 역사적 아이러니의 반복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민중들의 위대한 승리로 기억되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1848년 혁명이 나폴레옹 가문의 전제정치로 귀결되고만 아이러니 말이다.

마르크스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당통 대신에 코시디에르가, 로베스피에르 대신에 루이 블랑이, 1793~1795년까지의 산악당(몽타뉴파) 대신에 1848~1851년까지의 산악당이, 삼촌 대신에 조카가.”

여기서 삼촌은 나폴레옹 1세, 조카는 나폴레옹 3세를 말한다. 나폴레옹 3세, 그러니까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1832년 사촌인 라이히슈타트 공작(나폴레옹 1세의 외아들)이 죽자 보나파르트 가문에서 프랑스 왕위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자기뿐이라고 생각하고 왕이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그리고 1848년 혁명 뒤 수립된 공화정에서 제헌의회 의원으로 정치에 데뷔한다. 이어 대통령 선거에 나서 옛 황제의 조카라는 혈통과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으로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프랑스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각계각층의 국민들에게 그들의 이익을 모두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한다.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에는 높은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헌법을 바꿔 스스로 황제가 된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뒤 황제로 등극한 나폴레옹 1세의 반복이었다.

가리타니 고진은 <역사의 반복>에서 황제로서 보나파르트의 정책은 그 자체가 모순으로 가득찬 것이었다고 단정한다. 보나파르트는 본질적으로는 보호주의자이지만 실천적으로는 생시몽주의자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모든 계급의 이익을 모두 만족시킬 것처럼 선전했다. 중간계급과 농민들에게는 질서와 번영을, 빈곤층에게는 복지를 약속했다. 빵값을 낮게 유지했고 위생적인 노동자주택을 건설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 쓴 소책자 가운데 <빈곤의 퇴치>(1844년)는 좌파의 지지를 얻기도 했다.

“1930년대에 독일이나 일본에서 파시즘이 생겨났는데 그것은 보나파르트주의의 한 양상으로 보는 게 좋다. 우에서 좌까지 모든 당파, 계급, 민족의 지지를 모은 루즈벨트 대통령은 보나파르트주의자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2대 정당이라는 구조를 파괴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국민경제를 희생시키는 시장자유화인가 그것에 대한 보호인가 하는 대립은 눈앞에 놓인 최대의 정치적 쟁점 중 하나였다. 그들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키는 것처럼 행동하는 정치가는 ‘보나파르트주의자’라고 해도 좋다. 물론 그것이 항상 파시스트인 것은 아니다.”(가리타니 고진 <역사의 반복>)

파시즘을 보나파르티즘의 한 갈래로 보는 시각이다. 실제로 나폴레옹 3세의 집권 과정과 통치 스타일은 히틀러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 먼저 선거를 통해 집권한 뒤 국민투표를 거쳐 합법적인 독재자가 된 점이 그러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왕을 추방하고, 좌익혁명이 유산된 후에 생긴 바이마르공화국의 대표제 속에서 히틀러가 수상이 되고, 국민투표를 통해 총통이 되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루이 보나파르트가 황제가 되었던 과정과 상동 적이라는 것이다.”(같은 책)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며,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때로 그것을 조작하기도 하는 것이 파시즘과 보나파르티즘의 또 다른 공통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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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파르트가 삼촌의 후광을 업고 정치를 시작했던 것처럼 박근혜는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정치를 시작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가리타니 고진은 파시즘이라는 개념의 재정립 필요성을 제기한다. “일반적으로 전제적인 정치형태를 파시즘이라” 부르고 있는데 “그와 같은 용법은 잘못된 것이고 오히려 유해하다”는 것이다. 파시즘을 이렇게 왜소화시키면 “파시즘이 가지고 있는 어떤 매력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중략) 한마디로 말하자면, 파시즘은 러시아혁명(사회주의)의 침투에 대한 대항혁명(counter-revolution)이다. 그것은 반혁명(anti-revolution)과는 다르다. 파시즘은 그 자체가 혁명적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흡인력이 있는 것이다.”(같은 책)

설명이 장황했지만, 누가 떠오르지 않으시는지. 보나파르트가 삼촌의 후광을 업고 정치를 시작했던 것처럼 박근혜는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정치를 시작했다. 보나파르트가 나폴레옹 1세 시절의 영광과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아이콘이었듯이, 박근혜는 박정희 시대의 고성장과 번영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향수의 아이콘이다. 보나파르트가 자신을 모든 계급의 대변자, 갈등의 중재자인 것처럼 포장했듯이, 박근혜는 신뢰와 복지를 내세우며 만인의 연인 같은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박근혜는 노련하다. DJ와 YS이후 사라진 ‘정치9단’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유일한 현역 정치인이다. 최대한 말을 자제하는 극단적인 미니멀리즘의 정치를 통해 어눌한 캐릭터의 단점을 극복할 만큼 영리하며, 진보진영의 독점 테마였던 복지 이슈를 선점할 만큼 과감하다. 복지 이슈에서 여전히 방어적인 조중동과 경제 관료들, 전경련 등이 무안해 할 정도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결정적 순간에 일침을 놓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극대화한다.

누군가는 박근혜 주변 인사들이야말로 정통 TK(대구경북)들이어서 이명박 정부보다 훨씬 더 말 안 되는 사람이 많다고 전한다. 박근혜가 집권하면 이명박 정부보다 문제가 많은 인사들이 요직을 차지하게 될 거라는 걱정이다. 돌이켜보면, 박정희의 공화당에서 전두환의 민정당으로 계승된 대한민국 수구정당의 역사가 YS의 민주계를 수혈한 신한국당부터는 족보가 꼬이기 시작한 게 사실이다. 이재오나 김문수, 박형준 같은 변절한 운동권들이 주류를 차지한 이명박 정권은 더욱 이질적인 집단이 되었다. 이른바 친박이 친이와 쉽게 동화되지 않는 이유는 박근혜라는 아이콘과 더불어 자신들이 정통 티케이라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정통 티케이가 보기에 영포라인은 변방의 북소리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이른바 정통 티케이가 정권을 놓친 지가 어언 20년이 다 되어간다는 점이다. 그만큼 이들은 오래 굶었다.

지금 우리는 박근혜라는 한국의 보나파르트를 통해 역사의 반복을 목도하고 있다. 박정희라는 비극에 이어 박근혜라는 희극을.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