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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국밥을 먹으며 (이재승)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4 19:11
조회
457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밥그릇에서 돌을 발견하고서는 전국의 바위란 바위는 죄다 읊어대는 호들갑스러운 <바우타령>이 있다. 필자도 그런 타령을 한번 해야겠다. 지난 연말에 영화 <변호인>을 보고 차일피일하다가 오늘에야 가까운 벗들과 돼지국밥을 먹으며 영화를 놓고 해장을 하였다. 최근 5년 사이에 가곡 수선화처럼 죽었다가 살아났다 또 다시 죽는 것을 거듭하는 그 양반이 영화 속에서 팔팔한 청춘으로 나타났다. 영화는 약간은 으스대고 헐렁하고 껄렁한 사내에서 조류와 맞서며 대의를 추구하는 인간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잘 그려놓았다. 떠난 사람이야 또 보내야 하겠지만 사회적 대의를 향한 집념은 온전히 우리와 함께 머물기 바라며 법비(法匪) 타령으로 들어가겠다. 일본제국의 위성국가인 만주국에서 민중을 억압하는 일본 관리를 민중들이 가장 무서운 도적 떼라 하여 법비라고 불렀다 한다(참조. 한홍구, 법 주무르며 누린 ‘기춘대원군’의 40년 권력,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17380.html).

영화 <변호인>은 사건을 만화처럼 간결하게 처리하면서도 국가폭력의 양상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세상사를 일련의 권력범죄라고 이해하는 필자는 이 영화의 주인공은 변호인이 아니라 살아남아 영달하는 수사관, 검사, 판사라고 생각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지금도 육법당--유신시대부터 할거하였던 육군사관학교와 서울법대 출신의 검사들의 권력 지향적 집단--으로 공직을 시작하여 시대의 흐름을 타다가 역풍을 피하다가 권력의 정상에 이른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니 이제 귀밝은 감독은 <변호인>의 2탄으로 <검찰>이나 <법비전>을 만들어야 한다. 물론 <변호인> 속의 검사님은 안녕하시는지 파악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국회의원도 역임한 그 분은 부림사건의 피해자들에게 사죄할 뜻이 없다는 점을 어느 일간지가 전한다. ‘사죄할 뜻이 없다’는 말이 당황해서 튀어나온 말인지 오래전에 준비한 말인지 궁금하다. 그들은 과연 법의 수호자라고 믿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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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사진 출처 - 씨네21


야스퍼스는 <독일인의 책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만행에 대하여 독일은 어떤 책임을 지는지에 대하여 자세하게 논의하였다. 그는 법적 책임이나 정치적 책임 못지않게 내면에서의 깨달음이나 전향을 강조하였다. 그는 또한 악이 근본적이거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평범한 것이며 우리의 노력으로 악인을 개선하고 정화할 수 있으며 그래서 타인을 용서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악은 정말로 이 정도로 평범할까? 근본악이 없다거나 근본적인 악인이 없다는 견해는 일종의 종교적 가정이 아닐까?

실제로 사람들은 ‘악의 평범성’의 예로서 특별한 출세동기 없이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행하는 말단 공무원이나 관료제하의 인간을 지목한다. 아렌트가 유대인의 집단살해 프로그램을 완성한 아이히만에게 이 개념을 적용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아이히만에 대한 아렌트의 진단과 이론화는 여러 가지로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집단살해를 기획하고 자행한 자가 아무런 가책 없이 그러한 만행을 실행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악 자체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또는 악 자체를 정당화하려는 기제가 마음 속에 완성되어 있지 않다면 말 그대로 ‘아무런 생각없이’ 타자를 죽이거나 고문하는 행동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루살렘의 법정에 선 아이히만은 조직이나 관료제, 법에서 구실을 찾고 자신을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위장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책임이 없는 자인 것처럼, 근본적으로 악인이 아닌 것처럼. 한 마디로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농간에 낚인 것이다. 그래서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다른 유형의 악인에게는 설명력을 가질지 모르지만 적어도 아이히만에게는 맞지 않다.

다시 <법비전>으로 돌아가자. 한국에서 정치적 조작사건들에서 많은 고문이 자행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고문사건의 배후에 있던 검사들이나 불법감금과 고문을 뻔히 알면서도 유죄판결을 내린 판사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별 탈이 없다. 다만 이근안씨가 경관으로서 유달리 출중한 고문 성과를 올렸기 때문에, 경관이었기 때문에 유죄판결을 받았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경찰이 아니라 법복을 입고 법을 유린한 법조인을 상대로 법의 투쟁을 전개할 필요를 느낀다. 제2차세계대전이 종결된 후에 미군은 뉘른베르크에서 나치독일의 고위법조인을 상대로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범죄의 책임을 물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법조인소송이고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은 이 소송을 <뉘른베르크의 재판 Judgement at Neremberg>으로 영화화하였다. 전범 처벌이라는 폭풍 속에서 연합국이 이러한 재판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평시에 자국의 법원이 자국의 검사와 판사를 처벌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법조동일체와 법조특권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문을 묵인하고 사주하고 그 결과를 인수한 법조인들을 고발해야 한다. 특히 지난 노무현 정부 이래로 활동하였던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결정에 따라 재심을 거쳐 무죄판결을 받았던 간첩사건이나 정치적 조작사건중에서 불법성이 분명한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고인을 기소한 검사나 유죄판결을 내린 판사를 상대로 고발운동을 전개하고 손해배상청구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변명은 그들의 몫이고, 우리는 변명을 위한 굿판을 만들어야 한다. 악법을 즐비하게 양산하고 인권을 억압하는 체제에서 법대로 한다는 법비들은 항상 법을 명백하게 위반하면서 만행을 저지르기 때문에 고발하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 이래로 무엇이든 시키면 행하는 용역이나 법비로 전락하는 공직자들이 점증하고 있다. 지금 또 한건의 사건에서 법비가 탄생하는 것 같다. 이른바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에서 검찰이 조작된 증거로 유죄판결을 구했다는 민변의 고발이 오늘 터져 나왔다.

(http://media.daum.net/society/newsview?newsid=20140107120707199)

그들은 법비인가 법의 수호자인가?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