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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등대 한국?(정범구)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10-24 10:20
조회
446

정범구/인권연대 운영위원


최근 있었던 강서 구청장 보궐선거 결과를 지켜보면서 문뜩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독일 국회의장을 지내고 현재도 독일 국회 최장수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쇼이블레이다. 그가 윤석열 정부 1년 반 만에 치러진 이 선거 결과를 봤다면 무엇이라고 했을까?


쇼이블레 박사(Dr. Wolfgang Schaeuble) 출처: 위키백과


3년간의 독일 대사 시절을 되돌아 볼 때 여러 뜻 깊은 만남들이 있었지만 그중 유독 잊혀지지 않는 만남이 있다. 당시 독일 국회(Der Bundestag) 의장이었던 쇼이블레 박사(Dr. Wolfgang Schaeuble)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1942년생인 그는 2017-2021년간 의장직을 수행하고 현재도 평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독일 의회 최장수 의원(1972~)이다. 1990년 통일 당시에는 내무부 장관으로 역사적인 통일협약에 서명한, 한마디로 독일정치의 산 증인이다. 그와 정치를 함께 하였던 빌리 브란트나 헬무트 슈미트, 헬무트 콜 총리, 겐셔 외무장관 등이 모두 세상을 떠난 것을 생각하면 그의 존재는 단연 독보적이다.


게다가 그는 장애인이다. 1990년 10월 12일, 독일 통일이 공식적으로 단행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는 선거유세장에서 한 정신이상자로부터 총격을 당한다. 두 발의 총탄이 그의 척추를 관통하고, 이후 그는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총격사건 이후 그의 가족들은 그에게 정치 은퇴를 권했지만 그는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 독일 국가 의전서열 2위에 오르고, 독일 연방의회사상 최장수 의원(51년째!)의 지위를 누리게 된 것이다.


2018년 3월 27일, 내가 부임인사차 그의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그는 자신의 휠체어를 밀면서 직접 문 앞에까지 나와 나를 맞았다. 1980년대 유학시절, TV나 신문에서만 보았던 오래된 정치인을 직접 눈 앞에서 마주치는 경험은 무척 특별하였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애초에 약속했던 20분의 면담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결국 우리는 40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먼저 과거 독일이 우리 민주화운동 시기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도와준 것, 그리고 IMF 때의 협조에 대해 고마운 인사를 드렸고,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전두환 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독일의회가 초당적인 규탄 결의문을 내 주었던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드렸다. 그는 한국의 촛불혁명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며 어떻게 그렇게 수 많은 군중이 참여한 장기적 시위가 폭력 사태 없이 평화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인가를 물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그는 한국을 “동아시아의 등대” 같은 존재라고 말하였다. 등대란 말은 독일어로 Leuchtturm인데, 내가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그는 재차 한국을 등대(Leuchtturm) 같은 존재라고 하였다. 한 나라의 국회 수장으로부터 듣는 예사롭지 않은 표현이라 오래 기억에 남는다.


출처: 연합뉴스


그가 그런 표현을 사용한 데에는 이런 인식이 깔려 있는 듯 했다. “G2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은 경제적으로는 강대국이지만 정치적으로는 비민주적, 권위주의적 국가이고 G3인 일본은 아시아의 오래된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그 민주주의란 것이 자민당 일당 장기집권을 허용하는, 생기가 없는 민주주의이다. 여기에 반해 급속한 산업화를 달성한 한편으로, 민주화 역시 무수한 드라마를 엮어내며 역동적으로 이룩한 한국의 경우는 매우 인상적이다. 게다가 직전 몇 개월 간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변화야 말로 드라마틱했다. 지난 해 여름(2017년 8-9월)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싸고 트럼프가 ‘화염과 분노(Fire & Fury)’를 언급하며 핵 선제공격까지 암시하던 일촉즉발 상황에서, 2018년 2월 평창 동계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한이 협력과 교류 모드로 전환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국가의전서열 2위의 고위 정치인이니 외교적으로 매우 정선된 언어들을 사용했겠지만 그가 동아시아 정세를 보는 눈이 대략 그러했다. 세계 2위, 3위의 강대국 사이에 끼인 한국, 경제적으로 이제 G10 언저리를 오르락내리락 하지만 그 역동성에서는 주변 어느 강대국들 보다 더 힘차게 움직이고 있는 나라에 대한 최고의 헌사가 그의 “등대”라는 단어에 함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 때 이런 찬사를 들었던 나라가 지난 1년 반 동안 굴러온 모습을 보면 참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이 된다. 세계의 찬사를 받던 나라가 졸지에 조롱의 대상이 된 것 같은 자괴감도 든다. 이제 곧 1주기가 다가오는 이태원 참사에서부터,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대응, 홍범도 장군 동상 이전 논란,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고 있는 남북관계 등등... 어쩌다 나라가 이토록 짧은 시간에 이렇게까지 추락할 수 있나 하는 자괴감이 심하다.


출처: 연합뉴스


그러다가 강서 구청장 선거를 만났다. 야당이 이길 것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내심 표차가 궁금하였다. 결과는 “그러면 그렇지”였다. 아무리 여당이 “일개 단체장 보궐선거”였느니, “전통적인 야당 강세지역”이니, 심지어는 “생활보호대상자가 유독 많은 지역”이니 까지 하면서 선거결과를 폄하하려고 하지만 그건 “민심”이라는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리려는 처사이다.


“동아시아의 등대” 한국, 그 등대에 어느날 다시 한 번 불이 켜지는 날...


너희들 다 주거쓰~


정범구 위원은 전 독일대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