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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80만원의 얼굴(김희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8-22 10:32
조회
437

김희교 / 인권연대 운영위원


80만원. A씨가 장발장은행에서 빌려 간 돈이다. 장발장은행은 벌금을 내지 못해 실형을 살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곳이다. 대개 어디에서도 돈을 빌릴 수 없는 처지의 분들이 손을 내민다. A씨는 1984년생이다. 아직 젊은 나이다. 최근 그가 명을 달리했다. 왜 그리 짧은 생을 마감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의 죽음이 장발장은행에서 돈을 빌려야 하는 그의 처지와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내가 A씨에 대해 알게 된 건 A씨의 여동생 때문이었다. A씨가 명을 달리하자 그의 여동생이 장발장은행에 연락을 했다. 오빠의 부채를 갚아야 한다며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인권연대 운영위원의 카톡에 올라 온 이 짧은 사연을 본 날 하루는 나에게 참 길었다. 종일 심사가 복잡했다. 슬프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다. 부끄럽기도 했고, 뿌듯하기도 했다.


출처 - KBS뉴스


부끄럽게도 인권연대 운영위원을 맡고도 나는 장발장은행에 돈을 빌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한 번도 떠 올려본 적이 없다. 시민으로서 장발장은행에 대한 막연한 애정이야 홍세화선생이 은행을 언급하기 시작할 때부터 상당했다. 교수로서도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얼굴 없는 돈의 ‘악마의 맷돌’ 같은 속성 비판하며 장발장은행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럴 자격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권연대 운영위원을 맡아달라는 오창익 사무국장의 전화에 망설임 없이 덜컥 수락한 이유 중에도 인권연대가 장발장은행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운영위원을 맡은 지 한 달이 훌쩍 넘었다. 운영위원회가 한 번 있었다. 운영위원으로서 장발장은행의 심사 결과를 보고 받았다. 그때도 나는 그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지 않았다. 그저 그들을 숫자로만 취급했다. 운영위원으로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대출 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 심사를 통과해 대출을 받은 사람의 얼굴도, 그 돈조차 대출받지 못한, 그 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사람의 얼굴도 떠 올려본 적이 없다.


A씨 여동생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가장 먼저 든 느낌은 검은 비닐봉지 안에 있는 산 낙지를 잡은 듯한 충격이었다. 내가 숫자로 다루고 있었던 그들도 나와 조금도 다름없이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살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산 낙지를 만질 때처럼 그저 숫자로 나열되어 있던 대출자들의 얼굴과 그들 삶의 고뇌가 갑자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모두 A씨 여동생의 오빠이자 누군가의 형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충격 다음에 온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내가 죽으면 내 가족은 저럴 수 있을까. 아니 내 가족이 죽으면 나는 저럴 수 있을까. 솔직히 나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나는 틀림없이 심중팔구 현행법을 들먹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갚지 않아도 되는 돈이라고 스스럼없이 숫자로 정리했거나, 내가 더 좋은 데 쓰자고 자위했을 것이다. 심지어 국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거품만 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A씨 여동생처럼 아름답지 못하다.


참 아름다웠다. A씨가 장발장은행에 빌려야 될 처지였다면 모르긴 해도 동생에게 이렇게 저렇게 많은 폐를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동생은 오빠의 죽음조차 욕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자신이 갚지 않아도 될 돈까지 챙기고 있었다. 아니 이런 생각조차 아름답지 못한 내가 가진 편견일 수 있다. 동생이 이렇게 선하고 오빠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걸 보면 오빠도 동생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을지 모른다. 오빠가 장발장은행에 돈을 빌릴 정도라는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한국사회의 구조를 볼 때 동생도 그리 넉넉한 살림살이를 꾸리고 있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여전히 한국사회는 가난을 죄로 취급하지만 가난해도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장발장은행에까지 손을 빌릴 정도에 이른 것은 결국 그들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이다. 80만원은 그녀에게도 꽤 큰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돈 뒤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얼굴을 보고 그 얼굴을 외면할 수 없어 전화를 한 것이다. 그녀는 나는 보지 못한 80만원이라는 돈 뒤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본 것이다.


돈에도 얼굴이 있다는 사실은 오래 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다. 금강산관광이 가능했던 시절이다. 금강산관광이 개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이 일하던 계간지 편집위원들이 의기투합하여 금강산 관광을 나선 적이 있다. 도착하고 하루가 지난 저녁이었다. 내 침대보가 헝클어져 바로잡으려는데 침대사이에서 노란 봉투 하나가 떨어져 나왔다. 열어보니 100불짜리 달러 몇 장과 20불짜리 몇 장, 그리고 10불짜리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이산가족 상봉 후 헤어지는 모습>


“헐 정신 빠진 사람들 봤나”라고 생각하고 프론트에 연락해 전날 묵었던 투숙객을 수소문했다. 프론트의 회답은 너무 뜻밖이었다. 그 곳에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마친 한 북한쪽 가족이 그 방에 묵고 우리가 오는 날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북한 가족들이 일 년은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놓고 간 것이다. 편집위원 전원이 여행을 팽개치고 그 돈을 돌려줄 방법을 찾았지만 불가능했다. 그 돈을 서울로 가져와 통일부를 통해 그 가족에게 전하는 데는 몇 년이 걸렸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수없이 10불짜리까지 챙겨주고 싶은 가난한 남쪽 가족들의 마음과 그 돈을 챙길 경황조차 없이 북한으로 돌아가 황망하고 죄스러워 할 북쪽 가족을 생각하며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돈에는 얼굴이 있었다.


장발장은행 심사 모습


인권연대 운영위원을 맡고 제일 먼저 한 일은 내가 내던 기부금을 조금 늘인 것이었다. 내가 가까이 서 본 오창익 사무국장과 인권연대 사무국 사람들의 얼굴 때문이었다. 존재 그 자체가 싫은 사람이 있다면 존재 그 자체가 좋은 사람도 있다. 그들이 그랬다. 연구를 한답시고 힘든 사회현장에서 거리를 두고 있던 나에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회문제의 현장을 챙기고 계시는 그 분들은 늘 그저 존경과 감사의 대상이다. 돈 안 되는 일을 저렇게 열심히 하는 분들을 나는 본 적이 별로 없다. 이제 A씨 여동생의 아름다운 얼굴을 만났으니 또 어디에선가 돈을 좀 더 짜내야 할 듯하다. 그런 얼굴을 더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기뻤다. 운영위원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부끄럽게도 아직 장발장은행에는 한 푼도 안내고 있다.


내가 딸아이에게 난생 처음 돈 부탁을 한 것도 그 인권연대 일꾼들 얼굴 때문이었다. “봄아 여기 기부 좀 할래?”라는 단 한마디 속에는 “네가 인권연대에 기부금을 내면 너는 아마 네 돈보다 몇 배는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을 만나게 될거야”라는 메세지가 담겨있었다. 벌써 수년간 같이 점심을 먹어 온 교수님들에게도 “좋은 일 좀 하시죠” 라고 말씀 드렸더니 몇 분이 흔쾌히 들어주셨다. 그 분들도 A씨 여동생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 아파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시리라.


유일하게 내가 기부를 권유했는데 망설인 사람이 나의 제자인 B였다. B는 다양한 얼굴을 가진 친구이다. 대구 출신의 보수 집안 출신임에도 나 같은 반골선생의 제자가 되겠다고 자청하며 나의 모든 수업을 듣기도 한다. 해외여행 다니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은 집안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회활동에도 돈을 쓰지 않는 이상한 나의 제자이기도 했다.


B가 인권연대 회원이 된 것은 진보당 당원인 또 다른 나의 학생 C 때문이었다. 둘은 나랑 같이 하는 다른 활동 때문에 여러 번 같이 만났다. 만날 때마다 C는 B에게 진보당 가입원서를 내밀었다. 계속 거절당하자 C는 B에게 “니가 입진보에서 벗어나려면 인권연대 회원이라도 되라”고 다그쳤다. 브라보 C여! 옆에서 나는 그저 한마디 했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네가 쓰는 돈을 보면 안다”. 결국 B는 지금 인권연대회원이다.


학생들에게 인권연대를 권유하지는 않는다. 강압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B도 마찬가지이다. 하기사 그는 강압한다고 들을 학생도 아니다. 그가 얼마나 나에게 덤비는지는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인권연대 회원인 그도 그가 내는 얼마간의 회비를 통해 수많은 아름다운 얼굴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선생인 나도 오늘도 인권연대를 통해 수많은 새로운 얼굴들을 만나 인간에 대한 예의를 배워가고 있다. 이 이야기는 B에게 가장 먼저 들려주고 싶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선생인 내가 학생인 그에게 가장 주고 싶은 선물이기 때문이다.


김희교 위원은 현재 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