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권용선(수유너머104 연구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석미화(평화활동가), 신하영옥(여성활동가),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문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홍미정(단국대 중동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리좀적 사유와 실천이 요구된다(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8-03 16:23
조회
59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철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들뢰즈(Gille Deleuze, 1925∼1995)를 알 것이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대통령 윤석열 씨가 혹시 들뢰즈라는 현대 철학자가 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다고 한다거나, 심지어 한 걸음 더 나아가 ‘리좀’이란 말을 한 철학자 아니요? 하는 말을 한다거나 하면, 나로서는 깜짝 놀란 나머지 그의 취임 80일에 28%라는 국민의 지지율이 혹시 조작된 것 아닐까, 하고서 의심하는 잘못을 범할지도 모른다. 설사 언감생심일지언정, 마음 한쪽에서는 우리의 대통령인 그가 이처럼 나를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인문 · 철학을 가까이하는 정치가였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다.

 들뢰즈가 그의 학문적 절친인 가타리(Pierre-Félix Guattari, 1930〜1992)와 함께 쓴 <천 개의 고원>이란 책이 있다. 철학 영역에서는 워낙 유명한 책이다. 이 책 맨 앞에 약 30쪽 분량의 '서설: 리좀'이란 글이 실려 있다. 두 달 전쯤에 나는 <철학아카데미>에서 이 글에 관해 2시간씩 네 번에 걸쳐 강해를 했다.

출처 - 오마이뉴스 윤재은


 ‘리좀’(rhizome)은 감자와 같은 ‘땅속줄기’인데 본래 생물학에서 식물을 분류하는 개념이다. 나무는 ‘주축 뿌리’ 식물이라고 하는데, 이와 달리 지구를 뒤덮고 있는 풀은 대체로 리좀의 구조를 갖고 생장하고 확산한다. 예를 들어, 잔디는 땅 밑에 뿌리들이 중심이 없이 엄청 복잡하게 얽혀 사방으로 넓게 퍼져 있어서 한 부분을 떼 내려면 가위를 써서 잘라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뿌리가 동등하게 수평으로 한껏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식물이 리좀 식물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들의 탁월한 창의적인 사유 능력을 발휘해 이 ‘리좀’이란 생물학적인 개념을 철학적인 개념으로 둔갑시켜 활용한다. 그럼으로써, 개인의 사유와 표현과 실천의 방식, 일상에 밴 욕망과 습관의 방식, 나와 나 아닌 것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 맺기의 방식, 권력에 관련한 사회나 국가의 구성 형태, 사회 혁명을 위한 저항의 형태 등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이들은 사유방식과 이에 따른 실천의 방식을 크게 나무의 구조를 반영한 수목형(樹木型)과 풀의 리좀 구조를 반영한 리좀형으로 나눈다.

 

2.

 나무는 땅 위의 중심 둥치와 흙 밑의 주된 중심 뿌리가 있다. 그리고 나무의 가지는 대체로 중심 둥치가 위로 두 개로 나뉘고 그 두 개의 가지가 또 각각 두 개로 나뉘면서 위로 자란다. 이러한 나무의 구조를 반영한 사유방식을 ‘이항 논리’ 또는 ‘이분법’에 따른 것이라 말한다. 세상과 온 우주에는 인간들과 동식물을 비롯한 온갖 것들이 무한할 정도로 많다. 수목형 사유는 이 모든 존재자가 하나의 근원에서 생겨나 갈래져 변화 · 운동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지닌다. 그리고 그 근원인 하나에서 둘이 갈래져 나오고, 그 둘 각각에서 또 둘이 갈래져 나온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그런데 이 이원법적인 수목형의 사유는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들어 이해하기 쉽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정신과 물질, 리(理)와 기(氣), 무한과 유한, 존재와 무, 참과 거짓, 추상과 구체, 본질과 현상, 주체와 대상, 이성과 본능, 사유와 행동, 이론과 실천, 실재와 가상, 선과 악, 천사와 악마, 주인과 노예 등, 서로 대립하면서 쌍을 이루는 두 항이 있고, 이 두 항이 서로에 의존해서 작용하면서 만물의 변화를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거꾸로 만물의 변화와 운동을 이러한 각종 두 항의 모순과 대립을 원리로 삼고 이 원리에 환원함으로써 설명하고자 한다. 이분법의 원리는 아주 편리한, 인류가 고안해 낸 너무나 오래된 사유의 장치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유는 우리가 자연을 필연적인 환경으로 삼아 그 속에서 사는 데서 출발한다. 환경을 잘 알아 잘 이용 또는 역이용해야만 생명을 잘 가꾸고 유지할 수 있고 더 많이 퍼뜨릴 수 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하늘과 땅이 있고, 해와 달이 있고, 낮과 밤이 있고, 밀물과 썰물이 있고, 암컷과 수컷이 있다. 그리고 가만히 보니,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 있고 수시로 변하는 것이 있다. 늘 죽은 것이 있고, 산 것이 있다. 움직이는 생물이 있고, 움직이지 않는 생물이 있다. 강한 것이 있고, 약한 것이 있다. 뜨거운 것이 있고, 찬 것이 있다. 주변 환경을 둘러보니, 이같이 두 가지로 뚜렷이 나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니 만약 그 두 가지 각각의 항이 지닌 고유한 성질과 성격 등을 제대로 알아 구분할 줄 모른다면 목숨을 유지할 수도 없고 자손을 퍼뜨릴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분법적인 원리를 고안해서 생각하게 되고, 그에 따라 자연환경에 대해 예측하고 방비책을 미리 마련해서 우환과 불행을 막아내고자 했던 셈이다.

 그런데 인류의 사유 능력이 점점 발달한다. 생각해서 보고 듣고 만지고 하니까 생각하지 않고 그럴 때보다 더 정확하게 보고 듣고 만지게 되고 그 경험적인 지각의 효력을 더 많이 더 잘 활용할 수 있음을 발견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 그리하여 이른바 ‘호모 사피엔스’가 생겨났다. 사유 능력이 발달할수록 아는 것이 더 많아지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모르는 것도 더 많아졌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모르는 것을 모른 채 그냥 놔둘 수 없는 호기심과 이를 어떻게든 설명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상상력이 발달했다. 그리하여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 신화다. 그리고 신화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환경의 변화와 인간의 모듬살이에서 생겨날 수 있는 나쁜 일을 몰아내고 좋은 일을 끌어들이려는 행위가 주술이다. 신화는 모든 일이 신들 말하자면 귀신들의 힘과 의지에 따라 생겨난다고 믿는다. 그래서 주술의 기본은 신들을 기분 좋게 해서 그들의 분노를 잠재워 일어난 불행은 되돌리고 일어날 불행은 막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주술을 집행하는 자는 신들과 교섭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하고, 신들의 말을 인간들에게 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샤먼이 생겨나고, 사제 계급이 생겨나고, 주술이 체계화된다. 이에 따라 주민들이 절대로 벌받을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에서 행동 규범이 만들어진다. 제례와 행동에 관한 교리를 갖춤으로써 체계적인 종교가 생겨나 자리를 잡게 된다.

 각 부족은 각기 그들 나름의 신들을 창안해서 믿고 후대에 전한다. 역사가 흐르면서 그 신들을 무조건 믿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대적인 종교적인 관념과 그에 따른 관습과 도덕이 생겨나 굳건해진다. 신들과 종교의 힘을 장악한 특정한 인간 또는 사제들이 부족의 일거수일투족을 지도하고 감시하고 통제하면서 부족을 이끄는 통치자로 군림하게 된다. 그런데 다른 부족들을 만나보니 자기 부족과는 다른 신들을 믿고 있다. 부족들 간의 투쟁과 전투는 곧 서로 다른 신들 간의 전투로 여겨진다. 이리하여 패배한 부족의 신은 가짜 신이 되고, 승리한 부족의 신은 진짜 신이 된다. 이 과정이 오래 진행되면서 생산력이 발전하여 부족국가 내지는 도시국가를 형성하게 되니 그에 따른 수호신이 등장하게 된다. 사회가 점점 더 발전하면서 더 많은 전쟁과 전투를 통해 더 큰 나라, 이른바 제국을 형성하게 된다. 제국의 수호신은 단 하나의 신이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다른 하위의 신들은 모두 가짜 신 즉 우상 신으로 인식되어 제거된다. 그리하여 유일신 사상이 만들어진다. 이제 만물은 유일신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 유일신이 힘을 발휘하여 자연의 일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사의 모든 일을 일으켜 생겨나게 하고 억눌러 사라지게 한다고 믿게 된다. 그리하여 유일신에 의한 창조 사상과 섭리의 사상이 생겨난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수십억의 사람들이 유일신을 믿고 있다.

 유일신은 단 하나의 영원한 절대자로서 우뚝 올라서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유일신이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존재로서 그 본질과 활동을 제한하는 일체의 경계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유일신은 무한자로 등극한다. 이를 바탕으로 유일신은 영원한 자, 무한자, 절대자, 전지전능한 자로 정확하게 자리매김한다.

 이러한 종교에서의 유일신이 철학으로 넘어와 ‘일자’(一者, the One)로 개념화된다. 그리고 일자가 만물 · 만사의 궁극적인 근원으로 여겨지고, 이 일자가 다시 종교와 결합하여 일자인 신은 만물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자, 그 명령을 어기는 사람 또는 집단에게는 벌을 가하고 지켜 실현하는 사람 또는 집단에게는 복을 내리는 자로 정확하게 자리를 잡는다. 일자인 신의 힘은 천사와 악마라는 두 대립적인 존재의 힘으로 분화된다. 천사는 천사대로, 악마는 악마대로 계속 분화되어 전체적으로 보이지 않는 신을 정점으로 한 거대한 피라미드 형태의 위계 조직을 형성한다.

 사람들은 장구한 역사의 과정을 거쳐 이러한 일자를 정점으로 한 위계 조직에 따라 자신들의 욕망과 사유, 습관과 신념을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형성하여 대를 이어 계승한다. 이에 지상에서 이렇게 위계적으로 습관화된 욕망을 지닌 사람들을 지배하고 통치하려 하는 자는 당연히 일자를 정점으로 한 위계 조직을 구성하여 강화하고, 이를 철저하게 활용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이 위계 조직 전체가 유기적으로 한 치 빈틈도 있어서는 안 되는 하나의 통일된 몸으로 이데올로기화된다. 개개인의 위계 조직에 따른 욕망을 역용하여 지배하는 데는 위계 조직으로 된 통치가 가장 효과적이고 유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위계적인 집단 조직의 형태는 사회 곳곳에 아형(亞型)들을 만들어낸다. 이 아형들은 왕과 황제 그리고 교황 등은 물론이고, 가부장적인 가족에서의 아버지, 회사에서의 사장 또는 회장, 민주적인 정부 조직에서의 대통령, 심지어 혁명에서의 최고 지도자 등의 우두머리를 정점에 내세운다. 그 우두머리들의 권력은 우두머리 쪽으로 올라가 가까울수록 소수의 사람에게 강하게, 아래로 내려가 멀수록 다수의 사람에게 약하게 분화되면서 퍼진다. 그리하여 권력의 강약에 따른 상명하복의 질서가 형성된다. 상명하복의 질서에 따른 집단 조직은 그렇지 못한 집단 조직보다 더욱 결집한 위력으로써 높은 사회적 생산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검증 과정을 거쳐 가장 효율적이라 여겨진 탓에 전체적으로 거대한 위계 조직의 체계 즉 거대한 관료제가 형성된다. 상명하복이 행동 지침으로 통용되고, 삼각형 사다리 형태로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가 중간을 거쳐 아래에까지 관철된다.

 이를 극단적으로 구현한 것이 파시즘적인 독재 통치의 구조다. 인민들에 대해 이른바 ‘내 안의 파시즘’을 운운하는 것은 인민들이 일자 정점의 이 위계 조직을 대대로 받아들여 무의식적인 욕망의 구조로 삼음으로써 그러한 지배 · 피지배의 사다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사회정치 철학자인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사회정치적인 권력 관계가 사람들의 몸 깊숙이 파고들어 내면화하는 것을 보고서 ‘미시권력의 그물망’이라는 개념과 ‘생체 권력’이란 개념을 만들고 이를 통해 일자 정점의 위계적인 권력의 구조를 지탱하는 이러한 내 안의 파시즘적인 욕망을 고발했다.

 자본주의 사회 경제 체제는 일자 정점의 위계에 따른 내 안의 무의식적인 파시즘적 욕망의 구조적인 형태가 사회 전체적으로 확산하는 데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이제 일자 정점의 자리에는 자본이 차지한다. 자본은 외부가 없는 무한한 신과 동형이다. 자본은 노동자건 자본가건, 물질이건 정신이건, 자연이건 문화건, 시장이건 국가건, 법이건 도덕이건, 집단이건 개인이건 상관없이 그 모든 다양하고 특정한 이질성을 저 자신의 맹목적인 양적 동질성으로 바꾸어내는 위력을 발휘한다. 이 세상에 돈 좋아하지 않는 놈이 누가 있어! 돈도 안 되는 쓸데없는 생각을 왜 해!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잖아! 그리하여 돈은 신적인 자본이 인간에게 내리는 절대적인 명령인 계시처럼 작동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시하는 리좀형 사유 및 실천 그리고 그에 따른 욕망은 이제까지 설명한 수목형 사유 및 실천 그리고 그에 따른 무의식적 욕망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그 전략의 핵심은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정점의 ‘일자’인 그 ‘머리’를 단칼에 베어 버리는 것이다. 그 정점의 일자가 무엇이건 상관없이 그 아래의 위계적인 몸으로부터 절단함으로써 몸의 위계적인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누구나 잘 아는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의 능력을 배, 가슴, 머리라는 인체의 구조에 빗댄다. 배는 무질서한 욕망에 해당하고, 가슴은 행동을 이끄는 의지에 해당하고, 머리는 삶을 최고의 선으로 이끄는 이성적인 지혜에 해당한다. 당연히 머리가 온몸에 명령을 내린다고 생각하고 머리를 배와 가슴에서 솟구쳐 오르는 욕망과 의지를 제압하여 지혜에 따라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내세우는 철인(哲人) 정치는 지혜롭기 이를 데 없는 철학자를 우두머리로 삼아 귀족들과 인민들을 다스리도록 하는 체제다. 이는 가톨릭교회에서 교황과 사제들 그리고 일반 신도들이 교회라고 하는 큰 몸을 이루는 구조와 닮았고, 또 북한에서 내세웠던 주체사상에서 수령을 정점으로 한 당과 인민들의 조화를 내세운 것과 닮았다. 그리고 우리 가까이에서는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한 검사 동일체 원칙과 닮았다.

 정점의 우두머리는 결코 둘일 수 없다. ‘하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하나’에 대해 엄청난 실천철학적인 적개심을 지닌다. 이에 대해 그들은 이론의 구성을 위해 다소 어려운 수학적인 용어를 활용해 ‘n-1’의 사유와 실천 및 욕망의 발휘 방식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n은 존재하는 일체의 것들을 추상화해서 일반적으로 지칭한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1은 n에 해당하는 일체의 것들을 한 손에 거머쥔 정점의 일자로 보면 된다.

 그런데 이 일체의 것들은 무질서하게 아무렇게나 카오스 상태를 이루지 않는다. 그 나름으로 일정하게 배치 상태를 이룬다. 그 구성적인 형태와 상관없이, 가족이건 사회건 국가건 근본적으로는 원리상 이러한 성격을 지닌 하나의 배치 장치다.

 그런데 이러한 배치 관계에서 만약 정점의 일자(우두머리) 즉 1을 인정해 꼭대기에 놓게 되면, 그 바깥으로 아무것도 빠져나갈 수 없는 일사불란한 상명하복의 닫힌 위계의 배치가 이루어진다.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는 인민 또는 국민의 경우, 각자는 정해진 자리를 지켜야 하고, 그 자리에서 알게 모르게 위에서부터 자신에게 주어지는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이에 각자는 자신의 삶을 다르게 살 수 있는 권리,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다양하게 영위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기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지배적이면서 피-지배적인 상대적인 위치에 갇혀 명시적이거나 암시적으로 아래를 향해서는 일방적으로 억압하면서 위를 향해서는 일방적으로 굴종하는 일에 길든다.

 인민 모두가 타고난 권리에 따라 각자 나름으로 다양한 형태의 삶을 자유롭게 살 수 있으려면, 이같이 정점의 일자를 중심으로 한 수목형의 수직적 위계 조직을 해체 · 파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생각이다. 이를 위해, n-1 즉 n에서 1을 빼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n-1의 원리를 투쟁의 전략이자 대안으로 삼는 것이 리좀형 사유와 실천의 방식이고, 그에 따른 사회 구성의 방식이다.

 리좀은 중심이 없다. 리좀은 통일성 대신에 다양성을 띤다. 리좀은 시작점과 끝점이 없다. 시작점에서 끝점은 한없이 멀 뿐만 아니라, 그래서 철저히 배타적인 이원성을 띠게 된다. 리좀은 항상 중간과 사이에서 힘을 발휘하여 확산한다. 중간과 사이는 시작점과 끝점이라는 대립적인 두 끝을 섞은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그 두 끝을 인정하지 않는 데에서 성립한다. 중간은 정점의 일자에서 비롯되는 보편성이 아니라,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것들을 두루 인정한다는 데서 성립하는 보편성을 지닌다. 리좀은 정확한 질서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전혀 질서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리좀은 ‘카오스모스’(chaosmos), 즉 코스모스 쪽에서 보면 카오스이면서 카오스 쪽에서 보면 코스모스인 상태를 이룬다.

 리좀을 이루는 구성 요소는 무한정한 방식으로 다른 구성 요소들과 연결되지만, 그 연결은 고정되지 않은 접속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기존의 접속을 버리고 새로운 접속을 이룰 수 있다. 연결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리좀은 창조적인 생산의 장(場)이 된다. 리좀은 수직선을 형성하지 않고 수평면을 형성한다. 사회 구조에서 보면, 리좀은 파시즘적인 기미를 보이는 그 어떤 형태의 관료적인 위계 조직이라 할지라도 아예 허용치 않는다. 리좀은 워낙 탈중심적이다. 그리하여 인민들 각자가 서로를 매개로 해서 자발성을 발휘하고, 또 자발성을 발휘함으로써 서로에게 매개로 작동한다. 각자는 나 홀로 우뚝 솟아 만물을 지배하는 중심을 지향하는 주체성이 아니라, 다른 주체들을 더 많이 매개로 삼으면 삼을수록 소멸할 정도로 더욱 확산해 나가는, 말하자면 인민적인 주체성을 확보한다. 그리하여 인민들은 더 많은 매개를 통함으로써 성립하는 생명의 강렬함과 높은 밀도를 누리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4.

 세상이 순식간에 잔인해졌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여 지속하는 것을 신호탄으로 해서 세계의 주요 지점에서 헤게모니 즉 누가 어느 나라가 정점으로서의 일자의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를 놓고 갈수록 적대적인 기세 싸움의 기미가 강화된다. 헤게모니 장악을 둘러싼 이항 대립의 중심 국가는 물론 미국과 중국이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한미일 대 북중러의 이항 대립의 전선이 강화되는 중이다.

 지난 30여 년 인터넷의 급속한 발달은 인류의 욕망과 사유와 행위를 위계적인 수목형에서 수평적인 리좀형으로 규정했다. 그리하여 사회문화적인 영역을 비롯한 경제적인 영역이 다양성과 열림에 따른 자유롭고 창조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였다. 그런 가운데, 군사 외교의 영역에서는 치열한 적대적인 대립이 지속했지만 으르렁대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입을 크게 벌려 날카로운 이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발톱을 일으켜 물어뜯기도 하고 덤벼들기도 한다. 노골적으로 핵전쟁 운운하기까지 하는 위기가 노현되고 있다. 정점의 일자를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적 파시즘이 부활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구촌의 시계가 20세기 초의 상황을 향해 거꾸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이 와중에 우리네의 정치가 하필이면 그야말로 일자 정점의 위계 조직적 동일체를 강조하는 검찰총장 출신의 대통령이 들어서서 남북 간의 극적인 대립을 당연하게 여기고 부활하고 있는 제국주의적인 세계 냉전의 구도를 아무런 성찰 없이 수용하면서 뒤따르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우리 국민의 집단 지성이 리좀적 사유와 실천을 무기로 삼아 일방적인 폭력을 정당화하는 일자 정점의 수목형 수직적 위계의 도래를 미연에 방지하는 쪽으로 결집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아울러 무엇보다 미국과 중국의 우두머리들이 그러잖아도 기후 위기로 절체절명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는 지구촌을 향해 리좀적 사유와 실천의 긴급한 필요성을 절감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