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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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권용선(수유너머104 연구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석미화(평화활동가), 신하영옥(여성활동가),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문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홍미정(단국대 중동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단순하게, 소박하게(박상경)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6-22 11:51
조회
115

박상경/ 인권연대 회원


 

1.


 “비 올 것 같은데, 우산 가지고 가요!”


 “지금 오는 비는 맞아도 돼. 예전 같으면 이런 날 우산 쓰면 어른들한테 야단 들었어. 가뭄이 너무 길다.”


 친구 만나러 마을 가는 엄마가 꾸물거리는 날씨에도 그냥 나가기에 우산 타령을 했더니 돌아온 엄마의 대답이다.


 겨울 가뭄이 봄 가뭄으로 이어져 초여름에 들어선 지금도 여전하다. 겨우내 묵은 계단의 먼지를 한바탕 쏟아지는 비에 털어내려고 했으나, 올 듯 올 듯 비를 머금은 먹장구름은 이내 불어오는 바람의 기세에 뚝 뚝 비 몇 방울 뿌리고 만다. 가뭄이 너무 긴데, 기우제라도 지내야 할런가….


2. 


 네팔 겨울 산에 오른 적이 있다. 고도가 4천 미터 되는 마을에서 한 소녀를 만났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는 한낮, 소녀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듯한 물이 가득 담긴 대야가 놓여 있었다. 세수라도 할 모양이지 싶어 가만히 바라보는데, 소녀가 한 가닥으로 질끈 묶은 머리를 풀어 빗으로 곱게 빗어 내린다. 그러더니 대야에 머리를 담그고는 또 정성껏 물을 축이는 것이다. 머리를 감으려는 것인가, 주변을 둘러봐도 물은 대야에 있는 물이 다인데, 어떡하려는 거지 싶어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머리에 물을 다 축이는가 싶더니 이내 머리에 비누칠을 하고 헹구어낸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비눗물을 조심스럽게 대야 한쪽으로 밀어내고 다시 머리를 헹군다. 머리를 감은 그 물은 버리지 않고 옆에 있던 동생의 얼굴을 한 번 쑥 닦아준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 시간을 나는 숨죽여 바라보았다. 소녀의 머리 감기는 대야에 있는 물, 그 하나로 다 되었다. 참으로 신기했다. 먹을 물조차 귀한 이곳에서 살아가는 생존 본능이라고 해야 하나. 겨울 한낮에 내리는 햇살이 마치 조명처럼 소녀만을 비추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 하산 길에 나선 나는 2천 미터 고지의 한 로지에서 열흘 만에 씻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떡이 된 긴 머리와 먼지로 뒤엉킨 내게, 주어진 물은 무릎까지 오는 한 양동이뿐. 이 물로 몸도 씻고 머리도 감아야 한다. 그런데 그게 되었다. 조심스럽게 머리부터 감고 조금씩 조금씩 물로 몸을 축이며 닦아낸 뒤에 마지막 한 바가지로는 머리에서부터 부어버렸다. 그때 머리를 감고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내다 눈이 마주친 나를 보며 수줍게 웃던 소녀가 내 앞에서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출처 - NEWSIS


3.


 거리두기가 풀리면서 수영장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샤워장도 덩달아 붐빈다. 2년여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 대화로 시끌벅적거린다. 그러자니 쓰지도 않는 샤워기 꼭지는 열린 채로 물을 쏟아낸다. 샤워기는 틀어놓은 채 잠깐 자리를 비우기도 한다. “쓰지 않을 때는 잠깐 잠그면 어때요?” 했더니 혼잣말로 별걸 다 참견한다며 투덜댄다. 슬며시 샤워기를 잠그며 제자리로 돌아와 눈을 흘긴다. 내 물건 왜 맘대로 손대냐 하는 시위 같다. 샤워장의 이 풍경은 사실 거리두기 이전에도 비슷했다. 아이들은 아이들이어서 그렇다고 해도 가뭄 걱정을 경험했을 어른들이 그럴 때는 마음이 편치가 않다.


 일본의 온천장 샤워기는 참 불편하다. 예전 우리 목욕탕에도 그런 샤워기가 있었다. 중간 손잡이를 눌러야 물이 나오는. 수영장의 샤워장 입구에는 이런 안내문이 붙어 있다. 샤워기를 쓰지 않을 때는 잠그시기 바랍니다.”


 비금도는 물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가뭄이 길어지면 씻는 일을 삼간다. 많은 섬들이 그럴 것이다. 어느 해 겨울, 일로 비금도에 갔을 때 숙소를 안내해 주시던 분이 샤워는 짧게 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늘 그런 것은 아닌데 올해는 겨울 가뭄이 길어 물탱크의 물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뒤꼍에 있는 물탱크를 가리켰다. 비가 오면 빗물을 담아둔다는 물탱크를 보면서 어릴 적 비가 오면 처마 아래로 떨어지는 물을 받아 담아 두던 항아리가 기억났다. 항아리에 받아놓은 물은 다음 날 머리 감는 데 썼다.


 한여름 뙤약볕을 받으며 설악산의 용아장성을 갔다. 왼쪽으로는 공룡능선을 마주보면서 오른쪽으로는 구곡담계곡을 끼고 하루 종일 그 능선을 가면서 물이 흘러넘치던 수렴동 계곡의 물소리가 환청으로 들리곤 했다. 고작 1리터의 물은 이미 떨어지고 입은 버캐가 낄 정도로 타들어갔다. 그때 바닥 구덩이에 고인 물이 보였다. 사람이 급하면 얼마나 지혜로워지는지. 잘못 건드리면 곧 흙탕물이 될 그 물을 먹으려고 풀잎에 물을 적셔 입술부터 축였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갈증이 가셨다기보다는 입술이 축축하니 길을 다시 나설 만하였다. 하루를 타는 목마름을 달래며 닿은 봉정암에서 마신 물은 신선의 세계에서 맛보는 그런 꿀맛이었다.


 엄마는 계단 청소는 미루자고 했다. 먼지 풀풀 날리는 계단을 비질만 했다. 밖에서 집에 올 때 비가 오면 혹여라도 전화하지 말고 맞고 들어오라고도 한다. 엄마의 기원이 하늘에 닿아 오늘이라도 비가 오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며칠 흐리던 날씨는 다시 화창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