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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지성(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6-03 12:51
조회
858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놀랄 수밖에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해치고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윤석열 신출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나온 말이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내 후보 경선에서부터 후보 확정 이후 유세 기간에 이르기까지 그의 입에서 ‘지성주의’는 물론이고 ‘지성’이란 말조차 들어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점술이니 법사니 사이비 스님 등에 현혹되어 지성과 정확하게 대립하는 미신에 의존한다는 소문과 의혹이 무성했기 때문이다.


 당내 경선이 있을 당시 상대 예비 후보인 유승민 씨와 ‘천공 스님’ 운운하면서 크게 대립각을 세운 것이 언론을 통해 공공연히 알려지기도 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대통령 집무실을 광화문으로 옮겨 제왕적 대통령의 통치를 벗어나 국민과의 소통을 한껏 높이는 ‘탈-청와대’ 시대를 열겠다고 하면서 “청와대에는 한 발짝도 들이지 않겠다.”라고 말을 했을 때, 그 결과 전혀 이야기된 바 없는 용산 국방부 청사에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겠다는 뜬금없는 결심을 내보였을 때, 청와대 ‘입성’을 그렇게까지 두려워하듯 기피 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중론이 일었고, 마침내 법사 운운하는 모 배후의 인사가 청와대에 들어가면 급살당할 수 있다는 점술에 따른 조언을 했고 대통령 당선인이 이를 맹목적으로 믿은 탓이라는 식의 뒷이야기가 무성했다.


 그런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사에서 ‘반지성주의’를 질타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지성주의를 합리주의와 연결하면서 그것이 미신을 타파하면서 발전해 온 과학과 그에 따른 진실을 전제로 한 것임을 강조했으니 어찌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선에서 상대 후보인 이재명 씨는 국민의 집단지성을 믿는다는 말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이에 대한 찬동도 반대도 전혀 없었던 그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마치 지성의 화신이기라도 한 양 기염을 토하니 더더욱 놀랄 수밖에. 그런데 그 놀라움은 놀라움으로 그치지 않았다. 사십여 년 명색 이성을 바탕으로 한 철학을 업으로 삼아온 사람으로서 그동안의 정황을 떠올리며 심지어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하는 심경에 더해 국민을 우롱한다는 분노의 감정으로 이어졌다.


2. 다수결의 원칙과 반지성주의


 하지만 놀람에서 벗어나고 분노를 자제하며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그 결과,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는 말을 취임사에 담게 된 것은 그의 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고 취임사를 작성하는 데 도움을 준 누군가가 정략적으로 삽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것을 신출 대통령인 자신이 받아들인 결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정황을 감득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정략의 대상은 무엇이며 그 저의는 무엇인가?


 정치적 판단력이 미숙한 탓일지는 모르지만, 나로서는 이 취임사의 대목이 국회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한 민주당이 검찰 정상화를 위해 검찰의 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하는 법을 통과시킨 것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취임사 작성을 돕는 누군가가 그럴듯한 말로 포장할 수 있는 언어적 장치를 권유하여 관철했으리라 짐작하게 되었다. 이러한 해석이 충분히 일방적이고 편협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관련한 취임사의 대목을 인용해서 그 앞뒤 문맥을 살펴보기로 한다.


 다양한 위기가 복합적으로 인류 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국내적으로 초저성장과 대규모 실업, 양극화의 심화와 다양한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공동체의 결속력이 흔들리고 와해되고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정치는 이른바 민주주의의 위기로 인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반지성주의입니다.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입장을 조정하고 타협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진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합리주의와 지성주의입니다. 국가 간, 국가 내부의 지나친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습니다.


 풀이해 요약하자면 이렇다: (1) 다양한 위기가 인류 사회를 암울하게 하고 있다. (2) 공동체의 결속을 통해서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3) 민주주의를 통해서만 공동체의 결속을 이룰 수 있다. (4) 민주주의 기능이 상실되고 있다. 그 원인은 반지성주의다. (5) 견해를 달리하는 집단들이 과학과 진실을 전제로 조정과 타협을 이루는 것이 지성주의고, 지성주의를 통해 민주주의가 실현된다. (5)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는 반지성주의의 대표적인 현상은 (5-1) 집단 이기주의에 따른 외눈으로써 사실을 선택적으로 왜곡하는 것이고, (5-2) 다수의 힘으로써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1)∼(4)는 일반적인 내용으로서 대다수가 인정하는 것들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5)에 담겨있다. 이중 (5-1) 역시 대체로 인정할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5-2)는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논란의 여지가 많고,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다.


 많은 사람이 모여 공동생활을 할 때 갈등과 대립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이를 효율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다. 또 여러 이유로 국민이 모두 정치 행위에 일일이 직접 참여할 수 없기에 편의상 채택한 것이 의회민주주의고, 갈등과 대립에 관련하여 민주주의가 채택한 원칙이 다수결의 원칙이다.


 그런데 (5-2)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의회민주주의와 다수결의 원칙에 위배 된다. 취임사를 하는 대통령 자신도 1639만 표를 얻어 겨우 전체로 보아 +0.73%의 더 많은 득표율에 그쳤다. –0.73%의 차이의 1614만 명이 그가 대통령직을 맡기에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도, 민주주의의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대통령으로 인정되어 그 직을 맡게 되었다. (5-2)에 따르면, 그는 다수의 힘으로써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여 대통령이 된 셈이다. 하지만, 그 자신은 상대의 의견을 억압했다고 하지 않을 것이고, 또 그렇게 생각하는 국민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왜 그는 취임사에서 굳이 (5-2)를 주장한 것일까? 그 주장이 겨냥하는 구체적인 대상은 과연 무엇일까? 국제사회에서 다수의 힘으로써 소수의 의견을 억압하는 예를 찾을 수는 없고, 설사 찾는다고 하더라도 그 주장의 실효성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국내에서 그 예를 찾을 수밖에 없다. 국내에서라 할지라도 그 구체적인 예를 적시하기는 전혀 쉽지 않다. 가장 적실한 예는 그가 취임하기 직전,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점유한 민주당이 검찰 정상화를 위해 검찰의 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하는 법을 통과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를 굳이 반지성주의적인 정치적인 행위로 지목한 것인가? 취임 전에서부터 기획하여 실행한 정부 고위급 인사들의 임명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대통령부터 법무부 장관과 차관, 법제처장, 공직기강비서관, 법률비서관, 인사비서관, 총무비서관까지 검찰 출신으로 채워졌다. 더욱이 그의 가장 가까운 ‘수족’으로 알려진 한동훈 씨를 ‘많은 상대편의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법무부 장관으로 밀어붙여 임명했고, 국가 전체의 경영에서 법무부 장관보다 훨씬 높고 중요한 직책의 인물들마저 검증하는 ‘공직자 인사검증관리단’을 신설하여 법무부 산하에 두는 것을 밀어붙이고 있다. 국가 공직을 맡을 수 있는가에 관한 판단을 위한 모든 정보를 검찰이라는 강압적인 공권력으로써 수시로 비밀스럽게 수집 · 축적 · 관리할 수 있는 길을 열겠다는 것이다. 공권력에 의한 민간 사찰과 그에 따른 국민 인권 침해를 우려할 수밖에 없는 국가 조직의 정책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만약 검찰 출신 대통령이 검찰 권력의 핵심으로 평가되어 온 수사권을 ‘박탈’하는 법을 민주주의의 근간인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다수 의석의 민주당이 통과시킨 것을 향후 자신의 통치 행위를 요약해 제시하는 취임사를 통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반지성주의로 몰아붙인 것이라면, 이야말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할 것이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3. 권력과 반지성주의


 사실상, 윤석열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말한 “상대편 소수의 의견을 억압하는 다수의 힘”이 그야말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일은 역사적으로 비일비재했었다. 그것은 파시즘적인 독재에 따른 다수의 힘이 국가의 현실을 지배한 것이다.


 파시즘은 언론을 비롯해 각종 억압적인 장치를 통해 대다수 국민의 욕망과 그에 따른 감정 그리고 사유를 왜곡하여 집단적인 광기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 집단적인 광기를 바탕으로 법을 제정하고 그 법을 여지없이 가혹하게 집행하는 데서 파시즘이 작동한다. 다수가 집단적인 광기로 무장하고 통치 권력이 이를 법으로 제정하고 그 법을 명분으로 내세워, 이성적인 판단으로 이에 저항하는 소수의 의견을 국가 또는 민족의 적으로 규정하고 억압하는 것이 파시즘적인 독재다. 히틀러나 무솔리니나 일본 군사 제국주의의 천황은 물론이고,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차우셰스쿠, 폴 포트 등의 공산주의 일인 독재 역시 파시즘으로 보아야 한다. 일인 지상의 우상화된 통치로 대다수 국민의 의식과 무의식을 장악하여 조종 관리하는 파시즘이야말로 반지성주의다.


 여러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겠으나,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 일어난 ‘자발적인’ 대다수 민중의 광기야말로 반지성주의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리고 1950년대 미국에서 대중적인 광풍을 일으킨 매카시즘 역시 반지성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의 경우, 박정희 군사독재 아래에서 국민 다수에 의해 유신헌법을 통과시키고 그에 따른 긴급조치니 해서 얼마나 반지성주의에 시달렸는가. 삼청교육대로 상징되는 전두환 체제는 또 얼마나 반지성주의였는가.


 반지성주의의 핵심 기반은 바로 권력이다. 민주공화국의 이념적인 기반은 국민이 비지배의 자유를 향유 하는 데 있다. 그런데도 민주공화국이라 할지라도 권력을 장악한 자는 그 권력으로써 국민을 지배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정치 욕망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자신이 국민의 안녕과 복지를 위한 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정확하게 오인할 때, 그 권력에 의한 개인의 지배 욕망은 저 자신마저 속인다. 그리하여 국민 다수의 이름으로 자신의 권력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온갖 술책을 고안하여 실행하고자 한다.


 “내가 정권을 잡으면 거기는 무사하지 못할 거야. 권력이라는 게, 우리가 안 시켜도 알아서 경찰들이 알아서 입건해요. 그게 무서운 거지.” 현재 대통령의 부인으로서 여사라 불리는 인물이 자신의 남편이 대통령이 되기 한참 전에 비밀스레 내뱉은 말이다. 당시 이 말이 폭로되었을 때 긴가민가하면서도 정말 무섭다고들 했다. 결국, ‘내가 정권을 잡고’ 말았다. 경찰이 이렇다면 검찰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속된 말로 ‘알아서 긴다’라는 것인데, 이야말로 권력이 어떻게 쉽게 반지성주의와 결합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다. 국민이 부여한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 이를 위해 국가 공권력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도록 언론을 비롯한 여러 장치를 암암리에 조종하고, 그럼으로써 국민 다수가 국가 공권력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러한 자의적인 국가 공권력의 발동에 반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동의하게 되는 전반적인 구도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리라 믿는 자야말로 파시즘적인 반지성주의를 체화한 자라 해야 한다.


 미신이 지성과 전격적으로 대립한다고 하지만, 정작 지성과 전격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집단적인 광기다. 집단적인 광기의 배후에는 일방적인 통치 권력이 작동한다. 이를 근본적으로 막아내기 위해 인류가 고안한 정치 체제가 민주주의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고안된 이후의 역사를 보아 알 수 있듯이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달리 말하면, 국민 모두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지성주의적 태도를 익히고 견지하기가 매우 어렵다. 국민 모두의 보통 교육은 지성에 바탕을 둔 정치적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 실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면서 발달한 자본주의는 교육을 오로지 반지성적인 기능적인 인간을 키우는 쪽으로 왜곡하기 일쑤다.


 자본주의를 지성주의와 맞추기는 힘들다. 만약 자본주의와 일치하는 지성주의라면, 그 지성주의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계산적인 합리성을 따른 것일 뿐이다. 그러한 계산 일변도의 지성주의가 권력과 결합한다면, 기실 그 지성주의의 본질은 반지성주의일 것이다.


 참다운 지성주의는 보편적인 가치를 도모하고자 하고, 이를 발견하거나 조성하고자 하는 이성적인 성찰을 지속할 수 있고, 이성적인 성찰에 따른 개방적인 의사소통을 존중하여 실행하고, 이를 저해하거나 방해하는 일체의 관행이나 관습 심지어 법에 대해서 강력하게 저항할 수 있을 때 성립한다. 이로써 참된 공화주의 정신에 입각한 참된 공동체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윤석열 신출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사회적 갈등을 넘어선 공동체의 결속을 민주주의 정치의 목표로 내세웠다. 놀랍긴 하나, 그 목표 달성을 위해 반지성주의를 몰아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대략 예상한 대로 검찰 공권력을 전면에 내세우는 정치 권력의 구도를 짰다. 과연 이 두 가지가 일치할 수 있을까? 전자를 위해서는 분명 제대로 된 지성주의가 관철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후자의 정부 조직이 과연 제대로 된 지성주의에 의거한 것일까? 아무래도 동의하기가 어렵다. 권력은 본성상 반지성주의로 치닫는 경향을 지녔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윤석열 새 정부가 제대로 된 지성주의에 따른 민주주의 정치를 겸허하게 실행해 줄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