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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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광조/ CBS PD 지난 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고 있던 탈레반이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해 세계 최대의 바미얀 석불을 파괴했다. 150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견뎌온 인류의 문화유산이 한 순간에 무너져버린 것이다.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이런 야만적 행동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그들의 머릿속에 들어가 보지 않은 이상 그 복잡한 심사를 속속들이 알 길은 없지만 상식적으로 추론해 보건데 파괴를 불러온 원동력은 그들의 신념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면을 향한 신념이 아니라 권력과 결합돼 외부를 향한 독단적인 신념 말이다. 하지만 어디 탈레반뿐이랴. 따지고 보면 인류 역사에 가장 끔찍한 장면들은 이런 독단적인 신념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중세의 마녀사냥, 십자군전쟁이 그랬고 20세기를 피로 물들인 파시즘과 제국주의, 공산주의가 그랬다. 그리고 잠시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유행처럼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세계는 독단적인 신념들의 각축장이 돼 버린 것 같다. 그 중에 단연 돋보이는 것은 종교적 근본주의다. 근본주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슬람 근본주의’를 떠올릴 것이다. 탈레반은 말할 것도 없고 여객기를 이용해 세계무역센터를 파괴한 알카에다의 초현실적인 테러를 목격한 마당에 ‘근본주의=이슬람근본주의’라는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세는 차치하고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보면 ‘개명된’ 기독교에도 이런 어두운 역사가 있다. 실은 우리가 ‘근본주의’라고 옮기는 ‘펀더멘털리즘’이라는 용어 자체가 19세기 미국 개신교에서 발생한 보수주의 운동, 곧 천년왕국 운동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뿐만 아니라 성서를 자구 그대로 해석하고 그 교리의 실천을 주창한 천년왕국 운동은 오늘날까지 미국사회에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과 아프간 전쟁을 십자군 전쟁에 비유하는 일부 미국 개신교계의 모습이 그 단적인 사례다. 종교 전문가도 아니고 미국 전문가도 아닌 내가 빤 한 밑천을 드러내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것으로 보이는 세 가지 근본주의 흐름 가운데 두 가지가 미국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사회에도 불행을 몰고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두 가지 흐름이란 다름 아닌 기독교 근본주의와 시장주의다(나머지 하나는 물론 이슬람 근본주의다). 근본주의는 자신의 신념체계 외에 다른 것, 즉 타자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자신의 신념만이 절대적인 진리이자 선이며 다른 것들은 존재할 가치가 없는 미신이거나 악마, 무지 또는 탐욕으로 치부된다. 이런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신념과 권력이 결합된다고 생각해 보라. 권력은 타인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려고 한다. 그러므로 근본주의와 결합된 권력은 타인의 육체와 노동뿐만이 아니라 신념체계까지도 조종하고 자신과 일체화시키려고 한다. 타자가 그것을 거부할 땐 응징과 폭력 또는 조롱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유럽을 피로 물들였던 종교 전쟁의 역사를 보라. 하지만 권력이 인간으로부터 목숨을 빼앗거나 노예로 부릴 수는 있어도 인간의 내면까지 지배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인류의 오랜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더구나 하나의 신념체계로 통일된 세계 같은 건 애당초 실현 불가능한 공상에 불과하다. 뿐이랴. 근본주의는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현실,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인간의 삶과 끊임없이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완벽하게 동질적인 공동체를 꿈꾸는 근본주의는 결과적으로 공동체의 분열을 가져오고 폭력을 확대시킨다. 종교 얘기는 접어두고 요즘 유행하는, 아니 권력이 강제하려고 하는 민영화(사유화) 문제를 보자. 민영화(사유화) 문제를 얘기하면서 장황하게 근본주의를 얘기한 것은 요즘 우리사회의 권력층이 민영화(사유화)의 근거로 내세우는 시장주의가 근본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이다. 긴 말 할 것 없이 요즘 우리사회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민영화(사유화) 대상들을 보자. 정부의 말이 오락가락하긴 하지만 상수도, 전기, 병원, 공항, 국책은행, 방송사 등등이 민영화(사유화) 대상에 포함된다. 공기업 또는 공공기관의 형태로 운영해왔던 이들 서비스를 선진화하기 위해 민영화(사유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논리다. 선진화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핵심은 결국 주인 없는 회사에 주인을 찾아줘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정부의 이런 주장에 뒤따르는 의문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주인을 찾아주다니? 애초에 주인이 존재했다는 말인가. 물론 몇몇 방송사를 포함해 한 때 주인이 있었던 기관들도 있다. 하지만 정부가 얘기하는 민영화(사유화) 대상의 대부분은 사회 전체의 필요 때문에 국민 대다수가 조금씩 주머니를 털어 만들고 정부가 국민의 위임을 받아 운영해 온 기관들이다(비록 내기 싫은 세금으로 만들어지고 오만한 권력이 국민의 의사는 무시한 채 제멋대로 운영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기관에 주인을 찾아주다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식민지 지배라는 아픈 역사 때문에 근대적인 제도와 기관들의 뿌리가 일본이고 보면 주인을 찾아주자면 일본인들에게 그 권리를 줘야할지도 모를 일이다. 정부는 선진화를 말하고 해당 산업의 국제경쟁력을 말한다. 하지만 사회 전체에 필수적인 공적 서비스의 일차적인 목표는 국민의 기초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가격에 말이다. 백보 양보해서 인류 역사에서 공기업의 민영화(사유화)라는 것이 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미지의 길이라면, 그래서 민영화(사유화)와 경쟁이 보다 저렴한 가격에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까짓것 한번 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정부 당국자들의 안이한 계산과는 달리 우리보다 훨씬 앞선 선진국에서도 민영화(사유화)가 실패한 사례는 너무 많다. 의식주와 교육, 보건 등 국민의 기본적인 욕구가 공공성에 입각해 제대로 제공되지 않을 때 사회 양극화의 가능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우리사회가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니 상상도 하기 싫지만 시장주의 개혁의 첨단을 달린 중남미 국가들의 사례를 보라. 납치와 범죄가 산업이 되고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사설경비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성장하는 것이 선진화는 아닐 것이다. 이런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정부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시장주의는 박제화 된 근본주의와 얼마나 다른가. 방만한 공기업들을 통폐합하고 필요하고 가능한 기관들을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민영화(사유화)하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하지만 공적 영역=비능률, 그리고 민영화(사유화)의 대상이라는 단순 논리 앞에는 허탈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얘기가 길어졌다. 근본주의, 죽음을 불사하는 숭고한 신념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개인의 신념을 뛰어넘어 집단화되고 권력화하면 그 속에는 끝을 알 수 없는 탐욕과 폭력이 자라나기 십상이다. 미국의 역대 정부 가운데 시장주의의 기치를 가장 선명하게 내세운 부시 행정부에서 전쟁과 정경유착이 많이 발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뿐인가. 시장주의의 전도사로 정부개입을 악으로 규정하고 비난하던 월가의 금융기관들이 파산 위기에 직면해서는 경제위기 운운하며 정부의 지원을 얻어내는 이중적인 태도는 시장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독단적인 잣대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사회는 미국과 얼마나 다른가. 탈레반은 멀리 있지 않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77 | 추천: 0
이유정/ 변호사, 인하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법은 최소한의 정의라는 말이 있다. 법이 정의 그 자체는 아니지만 최소한의 정의를 보장해 주는 도구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법에 의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최소한의 정의를 보장해 주기는커녕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훼손하고, 권력에 굴복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는 법률도 많다. 나치시대의 법률이 그러했고, 유신시대의 법률이 그러했다. 그 이외에도 우리는 법률이 저지른 수많은 악행을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은 ‘정의롭고 옳은 것’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 전제는 객관성과 형평성이다. 적어도 법은 법전에 적혀있고(객관성),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잣대(형평성)이기 때문에, 법치주의라는 말은 신뢰를 준다. 지난 8월 25일 한국 법률가대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법치를 국정운영의 3대 중심축의 하나로 삼아 흔들림 없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법치를 확립코자 한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좋은 말이다. 제대로 법치주의를 하겠다는데 누가 반대하겠는가? 문제는 현 정부의 법치주의가 형평성과 객관성이라는 두 가지 전제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 정부는 출범 초기에 부동산 투기 등 각종 탈법을 저지른 인사들을 보란 듯이 청와대와 내각에 임명하더니, 공공기관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위해 기관장들의 임기를 보장한 법률을 무시하고 노골적으로 일괄사표를 강요했다. 공영방송인 KBS의 사장을 쫒아내기 위해 국가기관을 총동원하더니 뚜렷한 비리가 드러나지 않자, 국가에 세금을 많이 납부함으로써 KBS에 손해를 입혔다는 이유를 들어 해임을 강행했다. 그리고는 공영방송의 중립성 보장을 위해 법률에서 정하고 있는 사장 임명절차를 무시한 채 청와대 관계자, 방송통신위원장, KBS이사장이 모여서 후임사장 문제를 논의했다. 그 뿐인가. 경제를 살린다는 막연한 이유를 들어 판결문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경제비리사범들을 대규모 사면했다. 현 정부가 얼마나 법을 무시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5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한국법률가대회 개막식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반면 정부정책에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세력에 대하여는 가차 없이 법의 잣대를 들이댄다. 국민의 건강과 생명에 직결되는 쇠고기 졸속협상에 대한 반대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촛불집회의 참가자들을, PD수첩의 오역을, 쇠고기 문제를 왜곡 보도한 언론에 대한 광고 중단 운동을 폭력, 명예훼손, 업무방해로 수사하고 구속한다. 촛불집회 현장에서 색소 섞은 물대포를 발사하여 옷에 색소가 묻은 사람들을 무차별 연행하고 경찰에 연행된 여성들의 브래지어를 벗기는 것처럼 군사독재 시절에나 볼 수 있었던 일들도 버젓이 일어난다. 정부가 아무렇지도 않게 법을 어기고 무시하면서, 국민에게는 법을 지키라고 강요하고 윽박지르는 것은 법치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법의 이름을 빌린 폭력이고 만행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법치를 무력화하려는 행동은 더 이상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대통령의 말 속에는 앞으로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을 법의 이름으로 더욱 가혹하게 탄압하겠다는 저의가 묻어나와 섬뜩하기도 하다. 정부의 정책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의사표시를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떼를 쓰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탄압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 의견을 대화와 토론으로 조정하고 해결해 가는 자유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인가. 대통령의 말처럼 “법치가 없으면 인권도 없고, 자유민주주의도 없다.” 맞는 말이다. 자기편과 상대편에게 서로 다르게 적용되는 이중의 잣대가 아니라, 형평성과 객관성을 잃지 않는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법치주의 확립이 필요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법률가대회에서 한 약속을 과연 얼마나 잘 지키는지 두고 볼 일이다. 마침 ‘약속은 지켜야 한다(pacta sunt servanta)’는 라틴 격언까지 인용했다고 하니 기대가 크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40 | 추천: 0
안수찬/ 한겨레 기자 하늘이 깊어 밤이 고즈넉합니다. 가을입니다. “효진이 가슴에 멍울이 생기기 시작했어.” 발그레한 반달이 창문으로 들이치는데, 아내가 말합니다. 벌컥 놀랐습니다. “어, 어떻게 하지?” 열 살인데 당연히 그럴 나이랍니다. 어딘가에 부딪히지 않게 조심만 하면 된답니다. 정작 딸아이는 어른이 되고 있다며 무척 좋아한답니다. 아내가 마냥 웃습니다. 잠든 딸의 엉덩이에 뽀뽀해주는 일을 이젠 정말 그만둬야 하는 걸까. 늦된 아빠는 괜히 서운합니다. 소녀가 숙녀가 되는 가을, 아내는 소녀의 동생을 낳을 것입니다.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태 안에서 노는 품새가 꽤 괄괄합니다. 세상 구경에 안달이 났습니다. 할머니는 꿈에서 아주 크고 훌륭한 잉어를 보셨답니다. 열 살 터울의 아이를 가졌으니 늦둥이라 해야 하겠지만, 남세스럽기는커녕 가슴이 뜁니다. 10년 전에는 아이도 어리고 아빠도 어려서 좋은 시간을 제대로 보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꼭 육아휴직을 낼 겁니다. 시골 부모님은 손자를 바라는 눈치이지만, 장손인 그 아들은 그런 일에는 아무 관계없습니다. 저를 닮아 나중에 가출 같은 것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푸흡 웃을 뿐입니다. 지난달에는 멍멍이 요리를 지난주에는 미역을 바리바리 싸서 며느리에게 갖다 주셨습니다. 돼지고기도 먹지 못하던 서울깍쟁이는 시집온 뒤부터 그 고기를 아주 좋아하게 됐습니다. 시부모님은 텃밭에서 가꾼 주먹만 한 감자에 고추, 토마토 같은 남새도 한 상자씩 안겨 주셨습니다. 이름 짜르르한 마트에서 많은 돈 주고 사는 유기농 야채보다 훨씬 대단하다고 며느리가 추임새를 넣으면, 시골 어른들은 무척 좋아라 하십니다. 주말마다 텃밭에 나가시는 아버지는 올 가을, 환갑이십니다. 그리 높지 않은 자리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일평생을 바쳐 공무원 생활을 하셨습니다. 퇴직 때는 울기도 하셨습니다. 더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공부했다면 더 높은 자리에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아버지는 큰돈을 들여 맏아들에게 외국 어학연수를 시켜줬습니다. 아들은 고작 중국으로 환갑 여행을 보내 드리려 합니다. 유럽 여행이 어떨까 생각했지만, 지금 다니는 신문사 월급으로는 턱도 없습니다. 입사 이후 겪은 대여섯 명의 신문사 사장들 얼굴이 지나갑니다. 밉습니다. 그러나 사원들이 직접 뽑아 올린 사장이니 딱히 탓할 노릇도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결정적일 때 불편합니다. 그걸 감수해야 진짜 민주 시민이라고, 기자인 아들은 매양 글을 써왔습니다. 사돈이 환갑 여행을 하는 동안, 장인 장모는 서울에서 큰일을 치릅니다. 작은 딸이 결혼 합니다. 저한테는 처제입니다. 처제의 부모님은 아주 예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성당에 나가시는 장인과 장모는 조카딸을 작은 딸로 맞으셨습니다. 아무 구분 없이 키웠습니다. 영리하고 총명한 작은 딸은 넉넉하고 성실한 웃음의 남자를 만났습니다. 장인은 요즘 기분이 좋으십니다. 장모는 아주 가끔 눈물을 비치십니다. 저는 아직 ‘동서’라는 말이 입에 붙지 않았습니다. 술잔을 나눠 기울이면 조금 쉬워질 텐데, 큰 사위와 달리 작은 사위는 소주 한잔만 마셔도 얼굴이 벌개집니다. 장인과 꼭 닮았습니다. 이래저래 처가에 술친구가 없어서 큰 사위는 조금 서운합니다. 그런 일의 가운데, 부부는 결혼 10주년을 맞습니다. 딸아이의 가슴이 봉긋해지고, 그 동생이 태어나고, 자매가 결혼을 하며, 부모가 환갑을 맞는 일의 사이에 결혼기념일이 있습니다. 결혼 때의 약속을 조금 미루기로 했습니다. 그림을 좋아하는 부부는 10년 뒤에 유럽 미술관 기행을 하자고 베갯머리에서 꿈같은 약속을 했습니다. 10년이 지난 가을, 그보다 더 중한 일들이 많이많이 생겼다는 핑계로 돈과 시간의 부족을 감춥니다. 아내는 학위 논문 제출을 뒤로 미루고, 남편은 담배 끊는 일을 뒤로 미룹니다. 밤의 어둠이 깊으므로, 내일의 하늘이 푸를 것을 압니다. 나이가 들면 왜 보수적으로 변하는지 이제 이해합니다. 자라는 딸과 태어날 생명과 같이 늙어가는 반려자와 노년을 보내는 부모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좀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람을 볼 때도 누구의 자식인지, 누구의 부모인지 먼저 생각합니다. ‘개인’을 보지 못하고 ‘씨족’만 생각한다고 누가 타박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한때 사회주의자였으며 아직은 민주주의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면서도, 어느새 ‘가족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음을 고개 흔들어 부정할 수 없습니다. 조계사 촛불 수배자 농성단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 다만 가족주의에도 ‘계급성’이 있음을 믿습니다. 막대한 재산을 물려줄 아들을 지키기 위해 사회적 자원을 총동원하고, 세상 모든 이를 하나님의 자식과 악마의 자식으로 후려치며, 친미반공을 신념화하는 이들만 형제로 삼는 사람들의 배타적 가족주의와 저의 그것은 분명히 다르다고 믿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의 자식과 부모만큼 소중하며 그 신뢰 위에 가족과 다름없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는 믿음이 진정한 가족주의라고 믿습니다. 다툼과 언쟁이 없을 수 없지만, 삶의 걸음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염두에 두는 ‘코뮨주의’의 원형이 바로 ‘열린 가족주의’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지난봄과 여름, 피로 맺은 가족의 미래를 생각하며, 동시에 그런 염려를 흉중에 품은 다른 가족을 모두 아우르며 ‘촛불 가족’이 탄생했습니다.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면 어느덧 세월이 되는 슬픔처럼, 그런 일이 있었나 아련해질 것 같기도 합니다. 이번 가을, 그들은 각자의 일로 많이 바쁩니다. 직장과 학교와 가정에서 치러야 할 일이 많습니다. 촛불 가족은 서로 나눈 약속을 조금 뒤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직장을 구하면, 결혼식이 끝나면,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님 환갑을 챙기고 나면, 그 다음에 만나 안부를 묻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가족이라면 반드시 챙겨야 할 일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목소리 조금 더 높여 외친 딸, 자랄 때부터 괄괄하여 분을 못 견딘 아들, 퇴근 뒤에도 인터넷을 누비며 바른 이야기 퍼다 나른 남편, 말리는 손도 뿌리치고 아이를 안고 거리로 나섰던 아내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조계사에 있고, 방송국에 있으며, 아직도 거리에 있습니다. 제 가족만 챙겼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용기 있게 치러낸 촛불 가족입니다. 그들은 바로 당신을 위해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열린 가족주의’를 인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고초를 치르고 있습니다. 2008년 8월 22일 현재, 모두 1524명이 불법 체포됐습니다. 이 가운데 29명이 구속됐습니다. 10명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평범한 ‘시민’들입니다. 보석이나 집행유예로 풀려나온 이들도 있지만, 아직도 20여명이 갇혀 있습니다. 입건됐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두려움과 외로움에 떠는 이들이 수백 명입니다. 민변 법률지원단 소속 변호사들이 법률상담을 하고 있지만, 그들이 진짜 기대고 싶은 것은 법이 아니라 촛불 가족입니다. 아내의 부른 배를 쓰다듬고, 자라는 딸의 머리를 매만지며, 늙은 부모의 어깨를 주무르는 그 손길이 필요합니다. 능멸의 눈으로 그들을 잡아 가둔 ‘배타적 가족주의자’들에게 세상 다수의 행복을 꿈꾸는 ‘촛불 가족’이 이번 가을에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은 끌려간 이의 아픔을 덜고 돕는 일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코뮨입니다. 촛불 가족은 ‘큰 어른’이 아쉽기도 합니다. 대신 맞고 대신 끌려가며 대신 갇히겠다고 나서는 어른이 없는 듯 하여 마음이 허전합니다. 제자를 끌고 가는 경찰을 막아서는 교수, 감옥 생활에는 이골이 났으니 차라리 나를 잡아가라고 나서는 정치인이 그립습니다. 운동의 위기를 말하지만, 진짜 운동은 ‘대신 죽는 용기’에서 비롯하는 것임을 그 분들이 까맣게 잊어버린 듯 하여 안타깝습니다. 시공을 초월하는 리더십의 전형은 이끌고 보살피면서 고난의 순간에 대신 십자가를 지는 예수에게 있음을 그들 모두 망각한 듯 하여 서럽습니다. 지난 10년간 많이 늙으셨겠지만, 그래도 어른 노릇 하여 분탕질을 꾸짖지 못하고 그저 수염만 매만지는 모습에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구들방을 박차고 나와 ‘이 놈’하고 호통 치실 것을 믿어 봅니다. 그때까지는 젊은 식구끼리 의지가 되어 지내야 합니다. 가을을 견디고 겨울을 버티면서 촛불 가족의 재회를 준비해야 합니다. 광우병 대책회의에서 촛불 구속자 후원금을 모으고 있답니다.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아 도움이 많이 필요하답니다. 우리은행 1002-437-404837 (예금주: 천웅소)를 사용하면 됩니다. 입금할 때 ‘촛불 구속자 후원’이라 쓰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하겠지요. 변호사 비용이나 영치금으로 두루 쓰일 것입니다. 그 곳에 들어가는 돈은 법의 허울을 덮어 쓰고 배타적 권력을 휘두르는 이들과 맞대면하는 촛불 가족에게 또 다른 촛불이 될 것입니다. 내일의 하늘이 깊고 푸를 것을 알기에 우리는 이 밤의 고즈넉함을 저린 가슴으로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촛불 가족은 진정한 연대의 힘을 믿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351 | 추천: 0
유정배/ 춘천시민연대 상임집행위원장 2008년, 촛불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잠시 소강상태지만 분명한 사실은 촛불은 민주주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고 또 남길 것이다. 촛불시위는 우리에게 수많은 숙제를 주었지만, 사람들이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은 뜻밖의 큰 질문을 하나 던지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지역과 촛불의 관계다. 촛불은 서울 청계광장에서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청와대로 전진했다. 광장에 ‘아고라’나 ‘82쿡’, ‘레몬 테라스’나 ‘소울드레서’의 깃발은 나부꼈지만 ‘00지역’ 깃발은 자취를 감췄다. ‘집단지성’은 서울광장에만 나타났고 지역은 ‘대책위’의 빈약한 깃발아래 모인 낯익은 얼굴들이 대부분이었다. 지역은 ‘대책위’가 서울 상황을 숨죽여 지켜보며 매일매일 시위를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촛불의 의미와 진로를 토론하는 자리에서도 지역은 주제가 되지 못했고 지역에서 나타난 흐름이 조금 다르다는 것이 관심거리가 되지 않았다. 일상의 정치, 일상의 운동을 이야기 하자면 지역을 뺄 수 없는데 촛불이 생활의제의 정치화라고 선명하게 주장하는 이들은 지역이 왜 일상에 끼지도 못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지역은 온라인의 저항 없이 오프라인에서 여전히 기동전을 치러야 했다. 지역은 ‘꼰대’가 된 걸까? 사진 출처 - 한겨레 민주주의가 지역에 이르면 풀뿌리 보수주의로 바뀐다는 말처럼, 지역의 골목골목은 여전히 근대를 목표로 달음질치고 있고 가끔 전근대의 그림자가 기웃거리기도 한다. 지역주민은 끼리끼리 무리지어 이권을 찾아다니다가도 ‘지역개발’ 앞에서는 일치단결한다. 온 천지가 공사판인데도 도로를 놓아 달라, 고속철도를 깔아 달라며 머리띠를 묶고 서명을 하며 중앙정부에 몰려간다. 지방정치는 당리당략의 제물이거나 개인의 영달과 정치적 진출을 위한 발판이다. 애석하게도 지역개발과 발전을 위한 중앙정부의 지원이 지역의 역량강화에 기여했다는 흔적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지역을 움직이는 원리가 ‘협동과 자치’가 아니라 ‘경쟁과 동원’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현실이다. 시민사회는 연고에 기반한 위계가 뚜렷하고 저개발 낙후지역일수록 자치단체의 영향력이 막강해서 시민사회의 다양한 결사체들이 줄을 서지 않으면 존립이 어려울 지경이다. 좋은 의미로는 사회자본이 두터운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사회자본이 연고와 결합하면 누구도 거스르지 못하는 장벽이 되기도 한다. 이런 지역에서 ‘집단지성’을 구현하는 이성적 시민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촛불에서 지역이 드러나지 않은 것은 절망일수도 있지만, 우리 사회의 속살과 사회운동의 숙제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시민운동이 풀뿌리를 외치며 풀뿌리에서 둥지를 트고자 한지 십 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 튼튼한 집을 지었다고 보기에는 빈약하다. 문제의식은 뚜렷하지만 문제해결 능력은 약하다. 주장은 있지만 주장을 실현할 물질적 토대는 취약하다. 노동운동은 아직 작업장에 머물러 있어 광활한 지역의 삶터로 눈길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 2008년, 촛불의 또 다른 의미는 그들이 아직은 생소하지만 지역의 광장에서 만났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고 함께 손을 잡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금, 지역에는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지역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세월과 함께 쌓여가고 있다. 지역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제도를 하나 만드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과 노고가 필요한 일인 듯하다. 그것은 역사의 무게만큼 버티고 있는 큰 산을 옮기는 것과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큰 산을 옮기는 것은 무모한 일이겠지만 역사의 무게는 그렇게 쌓였을 것이다. 지역을 새롭게 발견하고 지역에서 귀신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십 수 년을 버티고 있는 골골의 이름 없는 이들의 삶이 부싯돌이 되어 다시 촛불을 살리고 우리 모두를 더욱 한발 나가게 할 것이다. 그렇게 지역은 느리지만 천천히 한발 한발, ‘역사의 토성’을 쌓아가는 중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20 | 추천: 0
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정책팀장 아침에 눈을 뜨고 새로운 뉴스들을 접하면서 요즘 드는 생각은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 것과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일까?’ 하는 것이다. 규제 때문에 경제가 힘들다며 기업과 금융에 대한 모든 규제들을 완화하거나 철폐하고, 종합부동산세도 완화하겠다고 한다. 그러는 한편으로 물가는 계속 오르고 있다. 재벌 총수의 비리에는 검찰이 나서서 선처를 구하고, 소위 강남부자들의 단결과 결속력을 잘 보여준 교육감 선거의 당선자는 영어몰입교육과 특목고를 밀어붙이겠다고 일갈한다. 또한, ‘국정 철학이 같은 인물이 공영방송 사장이 되어야 한다’ 는 발언을 철썩 같이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면, 한나라당의 비영리민간단체지원법 개정안은 시민사회단체들을 행안부의 지원금에만 의존하는 존재로 평가절하하면서 ‘이명박 정부 비판 시민단체 보조금 회수’ 라는 그야말로 유치찬란한 언행을 보이고 있다. 어디를 둘러봐도, 월 100만원 여 정도 받는 ‘나’를 위한 정책은 어디에도 없다. 나날이 느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고 생존 전략에 대한 고민의 시간이다. 그냥 쉽게 말하면 나날이 ‘우리나라’에 대한 박탈감과 배신감만 키워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주권을 가진 국민인가? 아니면 권력과 자본을 가진 몇몇의 국가를 위한 소모품인가? 휴가를 맞아 유명한 해수욕장을 다녀왔다.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그곳을 가게된 것은 어떤 종류의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서였는데, 대회 출전을 준비하는 동안은 겁 없이 덤볐으나 대회가 다가오면서, 또 대회당일 이틀은 정말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긴장과 스트레스를 느껴야 했다. 그냥 ‘참가’ 하는데 의미를 두자고 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우승’에 대한 집착이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준비과정에서는 나름으로 힘든 훈련을 거쳐야 함에서 오는 다음날의 훈련에 대한 불안으로 시달려야 했다. 어른이 되고 싶은 여러 이유 중 하나가 시험의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는데, 스스로 시험에 들어 그 강박을 또 다시 느껴야 할 이유가 뭐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스스로 든 시험임에도 불구하고 도망가고 싶을 정도의 고통스러움을 느끼는데 어쩔 수 없이 강요된 선택이라면 상황은 더 심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집단이 학생들과 군인들이 아닐까 싶다. 공부하는 기계로서, 전쟁하는 기계로서 욕망과 욕구를 억압당하거나 거세당해야 하는 집단들. 그러나 아마도 그 강도는 군인들이 더 심한가 보다. 군인으로 지낸 시간에 대한 보상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18대 국회 들어 군가산점 부활법안이 2건(한나라당 김성회, 주성영의원) 발의되었다.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보상’의 하나인가? ‘군가산점제’는 이미 9년 전 차별적 요소가 있다는 이유로 위헌 판결을 받은 바 있다. 그런데 17대 국회부터 슬며시 부활법안이 논의되더니 결국 18대 국회에서 발의되고 말았다. 9년 전 위헌소송을 냈던 여성들-여성단체-과 장애인들-장애단체-이 당한 수모가 기억되면서 그 진흙탕 싸움을 또 해야 하는가? 하는 갑갑함이 먼저 들었다. 또 다시 여성과 남성의 대결구도로 문제의 핵심이 흐려질까 우려하면서-벌써 그런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여성단체들은 대안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대안을 왜 여성단체-여성들-가 찾아야 한단 말인가? 아니 왜 여성들과 여성단체들이 그 대안을 만들도록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는가?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아래의 사례들은 군인으로서 직접 당사자인 남성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한 남성이 병역법의 몇 조항이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청구인은 ‘남자만 병역의무를 지게하고 여성은 지원에 한해 복무하도록 한 점을 들어 평등권, 직업의 자유, 신체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학문의 자유 등을 침해하였다고 주장하면서, 현대의 전쟁이 무기의 현대화 등으로 전통의 개념과 다르며, 넓은 의미의 대체복무형태가 발달한 현대에서는 여성도 병역의 의무를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의 병역의무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나 남성에게 차별적인 제도라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에 국방부장관은 위헌이 아니라고 답했으나 지난 6월 14일 한국젠더법학회와 서울대 공익인권법센터에서 주최한 학술대회에서 양현아 교수는 남성에게 차별적인 조항임을 확인하였다.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고려한 여성에게 ’수혜적 차별‘이라는 말은 결국 여성은 권리와 의무에서 권리는 있으나 의무에서는 배제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남성에게 ’과도한 부담적 차별‘이 된다는 것이다. 촛불집회 폭력 진압 때문에 부대 복귀 거부를 선언했던 이길준 의경이 지난 7월 27일 오후 서울 양천구 신월동성당에서 양심선언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한 전투경찰이 "촛불시위 진압에 나서는 것은 양심에 반하는 일"이라며 육군으로 전환복무를 요청했었고, 또 다른 전경은 촛불진압의 포상휴가를 나왔다가 시민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에서 ‘인간성이 타들어가는’ 상처를 느껴 복귀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민단체와 개인이 모여 '전·의경제 폐지를 위한 연대'를 결성하여 국민을 적으로 간주하고 국민을 대상으로 ‘국가안보 행위’를 벌이고 있는 군인으로서의 전․의경제도에 대한 문제제기와 동시에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당사자 남성들이 군대내 비민주적이고 비인간적인 요소에 대한 문제제기와 더불어 군대제도가 가진 인권 침해적 요소에 대해 적극 저항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반가운 일이다. 이는 단순히 제대군인에 대해 가산점을 주는 것으로 보상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군대제도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산점을 통해 이득을 보는 제대군인들이 몇 퍼센트나 되는가? 이는 가산점의 실익이라기보다는 그런 제도를 통한 정신적 위로의 측면이 더 많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너를 잊지 않고 있어...’ 정도?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은 군에서도 통용이 되는 듯싶다. 군대가 아무리 편해도 가기 싫은 곳이라는 네티즌들의 의견이 있긴 하지만, 군에 있는 동안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고난 후에 주는 적당한 보상보다는 군에 있을 때 보다 적절한 처우의 개선 여지는 없는 것인가? 그리고 외국의 예처럼 국민의료보험제도나 장학금제도를 통한 실질적인 보상은 실현 불가능한 것인가? 미국의 방위비 분담요구는 수용하면서 자국민인 건강한 남성들을 위해 투자할 비용은 없는가? 23가지 불온서적을 발표하여 사고와 판단의 자유마저 박탈하고 전쟁도구로 조정, 지배하기 위한 정책 외에 건전하고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넘치는, 배려와 존중이 규율과 같이 공존하는 군대문화를 만들기 위한 고민과 정책은 정녕 불가능한 것인가? 병역의무가 신성하다면 진정으로 신성한 곳으로 만들어 ‘신의 아들’들도 가게 만들 의지는 없는가? ‘군가산점제부활안’은 어느 모로 보나 유치한 논리이다. 눈속임이고, 남성들 간의 계급문제를 여성과 남성의 문제로 전환시키는 꼼수일 뿐이다. 20:80으로 점점 양극화 되고 있는 사회에서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지는 이들은 80에 속해있는 이들의 아들들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국가로부터 소외되고 박탈당하는 이들의 자식들이 국가로부터 수익과 혜택을 입는 자들의 국가를 위하여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도 소모품이 아닐까? 국가가 개인을 보호해주지 못하면서 개인들로 하여금 국가의 보위를 위해 헌신하라고 하는 것은 전체주의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지금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가? 군대문제는 가산점 하나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더욱 더 깊고 폭넓은 사회적 논의를 통해 보다 근본적인 대안을 만들어가야 하는 문제이다. 거기서 주체로 나설 이들은 남성들이다. 가산점이란 떡밥에 위로받기엔 자존심이 너무 상하지 않는가? 여성에게 분노를 향하기엔 뭔가 수치스럽지 않은가? 위로받고 분노하기에 앞서 근본적인 문제들을 고민하고 드러내는 용기와 공론화하고 대안을 만들어내려는 노력과 실천이 필요하지 않은가? 군가산점 부활을 들고 나온 한나라당은 미끼와 얄팍한 상술로서 또다시 여성과 남성의 대결구도로 본질을 흐리는 것에 낯부끄럽지 않은가? 진정으로 내 자식 걱정 하듯 진지한 정책을 마련할 의도는 없는가? 아니면 머리가 없는가? 여성단체 활동가들도 편안히 휴가를 즐기고 싶다. 제발 사고 좀 그만 치기를...
2017-07-20 | hrights | 조회: 210 | 추천: 1
이찬수/ 전 강남대 교수, 현 종교문화연구원장 일본이라는 시스템 일본사람은 전반적으로 정치에 관심이 없다. 한국에 비해 일본 TV 뉴스나 신문은 좀 밋밋하다. 뉴스에도 아래로부터의 ‘요구’보다는 위로부터의 ‘하달’이 더 많이 담겨있으며, 정치권을 향한 국민의 쓴 소리는 한국에 비해 별로 들리지 않는다. 물론 ‘하달’한다고 사회가 금방 바뀌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사회가 그만큼 안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새삼 정치에 관여하지 않아도, 정치가가 특별히 목청 높이지 않아도, 그저 그렇게 굴러갈만한 사회 시스템이 진작에 갖추어져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한편에서 보면 일본 국민은 예나 이제나 정치 순응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특히 후자가 관심의 대상이다. 군사주의 문화와 정치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시대(1192-1336)이래 에도시대(1603-1867)까지 칠백여년 가까이 군사정권을 유지해왔다. 군사정권은 필연적으로 개인적 창의성보다는 집단적 조화성을 중시한다. 개성도 집단이라는 큰 틀을 거스르지 않는 범위 안에서 유지되고 인정된다. 그런 탓인지 일본인은 오랫동안 자신만 잘 보호해주면 위에서야 무어라 하든,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하든, 밖으로는 자신의 생각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경향을 보여 왔다. 겉마음과 속마음이 다른 일본 문화는 그런 맥락에서 형성되어 왔다고 할 수 있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정권도 실세들인 ‘다이묘’나 ‘쇼군’에 의해 바뀌는 것이었지, 백성에 의해 아래로부터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 표면적으로는 군사정권이 사라졌지만, 패전(1945) 때까지 군사적 집단주의 문화는 천황을 정점으로 하면서 여전히 유지되어왔다. 그런 것이 체질화되어있는 탓일까. 일본은 경제는 선진국이지만, 상대적으로 정치는 선진국이 아니다. 정치 선진국이 개인의 권리와 국민의 참여가 보장되고 실제로 발휘되면서 움직인다면, 일본은 외적 권리는 보장되지만 그것이 정치 현장에까지 적용되기는 힘든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정치가와 국민은 항상 겉돈다. 국민은 내심 정치가를 좋아하지는 않으면서도 그저 그런 정도에만 머물 뿐, 현실 정치를 바꾸기에는 사이에 놓인 무관심의 골이 깊다. 무언가 억누르고 있는 사람들 이러한 집단주의 문화에는 특징이 하나 더 있다. 한국에도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사실 그 속담은 일본사회에 더 잘 어울린다. 개인의 자유도 집단의 틀 안에서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편 당연한 일 같지만, 일본 사회에서는 그것이 좀 두드러진다. 정치든 문화든 이런 저런 분위기든,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안 들어도 그런 감정은 특별히 표출되지 못한 채, 자기 안에 감춰져있을 때가 많다. 그래서일까, 무언가 깊은 욕망이 안으로 숨어들어 얼굴에까지 무언가 어두운 구석이 엿보이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부족할 것이 없을 것 같은데도 표정은 상대적으로 밝지 못하다. 개성을 밖으로 펴지 못하고 지나칠 정도로 속으로만 파고드는 ‘오타쿠(お宅)’가 생기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반드시 오타쿠 부류가 아니더라도, 무언가 자신의 눌린 내적 감정을 표출할 기회를 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느낌이다. 그런 와중에 자신의 생각을 정치 차원에서 과감하게 표출하는 이들 대다수는 이른바 우익세력이다. 이 우익이 일본 여론의 실질적인 주도 세력이다. 정치에 무관심한 일본인 다수보다 목소리 높은 소수 우익이 일본 정치를 이끌어간다. 그런데 일본 우익은 기본적으로 제국주의의 후예들이다. 그리고 현실 정치에 무관심한 다수 소시민은 이러한 소수 우익의 목소리를 의식, 무의식적으로 방조하거나, 결과적으로는 이들 목소리에 그대로 끌려온 역사를 지닌다. 일본의 정치가 전후 일본의 정권이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현재 후쿠다 내각의 지지율은 한국과 비슷하게 20% 초반 대를 유지하고 있다. 정권에 대한 지지율이 20% 정도라면 정치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겠지만, 그래도 정권은 바뀌지 않는다. 엄청난 잘못만 저지르지 않으면 그대로 유지된다. 일본인은 스스로 아래로부터 정권을 바꾸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심으로는 변화를 요청할지 몰라도, 실제로 경험해보지 못한 탓인지,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거북해한다. 시스템 중심의 사회는 한편에서는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변화를 용납하기 힘든 사회이기도 한 것이다. 정치가는 이것을 잘 안다. 일본 정치가는 이런 분위기를 충분히 활용할 줄 아는 사람, 정권 유지를 위해 국민을 쥐락펴락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특히 음으로 양으로 우익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우익이 오랫동안 여론 조성세력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독도 사진 출처 - 한겨레 제국주의와 다케시마 일본 정치인이 툭하면 ‘다케시마’를 들고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무리 양보해서 생각해도, 일본이 다케시마를 역사적이고 논리적으로 자신의 영토라고 우길 만한 근거는 한국의 독도 주장에 비해 적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몇 가지 이유만으로 그것을 고집하고 주장하는 이유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있거나 그것을 입증하려는 차원이 아니다. 항간에는 독도 심해에 묻혀있는 자원을 탐내기 때문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지만, 이유는 그것보다 복잡해 보인다. 중요한 이유는 다케시마를 일종의 ‘분쟁지역’으로 만들어 놓는데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우익 세력을 이용하는 일본 정치인에게 ‘분쟁 지역’은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한 적절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이전부터 주장했고 ‘나름대로는’ 그렇게 진행시켜왔던 자신들의 기존 논리를 특정 정권이나 세력이 새삼 바꾸기 힘든 사회가 일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케시마’가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해온 기존 주장을 이제 와서 바꿀 정치적 명분이 일본인에게는 없다. 이미 과거를 답습해오고 있는 정치 시스템 속에 녹아있어서, ‘다케시마’가 정말 자신의 영토냐 아니냐와 관계없이,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고, 또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본이 변화 없는 사회라는 것도 이것을 의미하며, 부정적으로 얘기하면, 우익세력을 근간으로 하는 제국주의적 저류도 큰 변화 없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국주의적 특징 중에 하나가 계속 분쟁지역을 만들어 언젠가는 자신들의 기존 목적을 위해 충분히 활용한다는 것이다. 전쟁은 가능한가 언젠가 한 학회 토론 시간에 한 일본인 학자가 서브프라임론 문제 때문에 미국 경제가 정말 어려워지면 어떤 명분을 들고서라도 전쟁을 일으킬지 모르는데, 그러면 일본도 그 전쟁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예상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섬뜩한 예상이지만, 일본에서 살아보니, 그리고 비교적 관심을 가지고 일본 문화를 공부하다보니, 그것이 그저 헛말이나 공상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그런 맥락에서 ‘다케시마’ 문제는 앞으로도 두고두고 한일 간 쟁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아니 일본 정치가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끝없이 다케시마를 이용할 것이다.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포기할 수도 없을 것이다. 늘 그래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일본 우익의 목소리를 자극해 정치권에 힘을 얻게 해주는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를 하고 고개를 숙이며 다니는 일부 일본인의 속 깊은 분노를 폭발하게 만드는 구실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어쩌면, 정말 어쩌면, ‘다케시마’는 일본을 한국 위에 군림하게 해주는 나름대로의 ‘정당한’ 구실로 작용하게 될지도 모른다. 특히 일본에 군비 강화의 명분을 제공해주었던 북한이 자의반 타의반 냉각탑을 폭파하고 핵 포기 정책을 보여주기 시작한 이후, 일본 우익은 다른 구실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케시마’가 그 구실이 될 가능성이 있을 뿐 아니라, 강화된 군비는, 다수 소시민적 평화주의자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한국을 향해 작용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비록 섬뜩한 상상이기는 하지만.... 장기 비전은 있을까 나는 군사나 경제나 정치 전문가가 전혀 아니다. 그저 문화에 관심이 좀 있을 뿐이다. 물론 문화라는 것 안에 모든 것이 농축되어 있기는 하지만, 정치나 처세에 문외한인 나에게도 한국에서는 잘 안보이던 이런 상상들이 구체적으로 든다. 그리고 이런 상상이 헛된 공상만은 결코 아니지 싶다. 이런 상상을 구체적으로 할 때 일본은 한국과 정말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이 실감난다. 그러면서 끝내는 한국의 정치인도 이런 상상 정도는 하고 살겠지, 그래도 내 수준보다는 낫겠지, 무언가 장기적인 비전과 정책은 갖고 있겠지 하는 푸념조의 자위를 하게 된다. 그것으로 동해 한 복판 독도의 외로움이 달래질지는 모르지만...
2017-07-20 | hrights | 조회: 188 | 추천: 0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장마가 끝나기 무섭게 폭염이 쏟아집니다. “올 여름은 얼마나 더우려나” 해보지만, 생각해보면 매해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마음을 먹습니다. 올 여름은 그 자체가 휴가인 듯 마음이라도 여유롭게 지내자고. 조급하거나 성내지 말고, 찬찬히 음악도 즐겨가면서. 따지고 보면 바쁘다고 하지만, 자투리 시간 하릴 없이 인터넷 돌아다니느니 그 시간 소중히 책 한 줄 담는 것이 그 자체로 휴식이 될 테니. 지리산 풍경을 담아내거나 악다구니 세상, 그래도 평심 흐트러짐 없이 물 흐르듯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 들려주는 산문이나 시집이면 더욱 적격일 것입니다. 서귀포시 강정마을을 아시나요? 물 강(江), 물 정(汀), 강정마을입니다. 마을 이름에서 눈치 채셨겠지만 이 마을은 옛날부터 물이 풍부했습니다. 강정천과 악근천이라는 한라산에서 발원한 하천이 바다와 만나는 마을이 이 곳이지요. 제주에서 논농사가 행해지던 몇 안 되는 지역 중 대표적인 곳이기도 합니다. 서귀포 시내를 중심으로 인근 지역 대부분의 먹는 물을 이곳이 책임지고 있지요. 다른 지역보다 일조량도 많아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꽃을 재배하며, 특히 이 곳 감귤은 그 맛이 달기로 유명합니다. 와 보시면 알겠지만, 아름다운 경관에 놀라실 겁니다. 강정마을은 다섯 개의 보호구역으로 둘러싸인 곳입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생물권보전지역이기도 하고, 해양생태계보전지역이기도 하지요. 마을 바로 앞에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서귀포 앞 바다 세 개의 섬 중 ‘범섬’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 바다 속에는, 저도 영상으로만 봤지만 화려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산호 군락이 장관을 이룹니다. 세계에서도 드문 경우라 합니다.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지요. 그 뿐 입니까? 바다로 흐르는 하천에는 은빛 은어들이 춤을 추며 놀지요. 서건도라는 아주 작은 섬도 마을과 마주하고 있는데, 하루 몇 번씩 물길이 열려 자근자근 까맣고 동그란 바닷 돌을 밟으며 이 섬에 갈 수 있어요. 마치 마을의 정원 같은 소담스런 곳이지요. 마을 사람들은 또 어떻구요? 15년 동안 유원지 지구로 묶여 재산권행사 제대로 못해도 큰 소리 별로 안내고 조용했지요. 요즘 같은 세상에 말이죠. 그래서 낙후됐다는 말도 듣지만, 그렇다고 몇 년 전 이 곳에 골프장 짓는다고 했을 때 반겨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골프장 건설 반대운동에 나서기도 했지요.   이지스함을 본뜬 최병수 화백의 설치 작품. 이지스함을 통해 범섬이 보인다. 기지건설 예정지가 포함된 서귀포 앞바다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생물권 보전지역이다 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에게 이 짙은 그림자는 가혹하기만 합니다. 요즘 마을 사람들은 차로도 한 시간이 족히 걸리는 이 곳 제주시에 와서 제주도청과 도의회 앞에서 뙤약볕 아래서 하루 종일 1인 시위를 합니다. 1인 시위... 대체로 사람들 왕래 많은 시간 골라 한 두 시간 하는 게 보통인데, 이 곳 사람들은 순박한 건지, 절박한 건지 그냥 하루 종일 하고 만답니다. 그것도 두 달 동안 한다고 합니다. 절박함이 맞을 겁니다. 바로 1년이 지난, 작년 5월 이 마을은 느닷없이 첨단무기로 무장한 해군의 전략기지 건설예정지가 된 것입니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계획은 벌써 6년째 표류하고 있습니다. 후보지로 지목된 제주의 마을, 가는 곳 마다 격렬한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당국은 작년에 마치 무슨 작전이라도 펼치듯 여론조사라는 수단을 동원해 기지건설을 확정했고, 이 곳 강정마을이 그 날로 예정지가 되어 버린 것이죠. 기지건설 예정지로 확정된 후 마을 사람들은 놀란 가슴만 쓸어내릴 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몇 몇 분들이 나서기 시작하고, 주민들이 밤마다 마을회관에 모이면서부터 서로가 서로를 확인하게 되고, 강정마을이 기지건설 예정지로 결정된 것이 부당하다는 데 의견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작년 8월에는 몇 번의 곡절과 좌절 끝에 주민투표를 통해 마을 사람들 모두의 의사를 비로소 분명하게 모아내게 되었던 거죠. 그럼에도 정부나 군은 아랑곳 하지 않더군요. 일단 결정했으니 따라오라는 것뿐입니다. 국가안보를 위한 시설을 한다면서, 정작 해당 마을의 주민의사는 이렇게 무시되다니요. 과연 주민의 지지와 협력 없는 안보가 성립 가능한 것이기나 한 것인지 내내 궁금했습니다. 아무리 국가의 결정이지만, 그 자체로 주민의 자기결정권보다 우월하기만 한 것인지 의문입니다. 이 마을 사람들 심사가 요즘 말이 아닙니다. 지난 1년 동안 강정마을이 기지건설 예정지가 된 것이 왜 정당하지 못한 것인지, 반면, 마을의 의견은 얼마나 정당한 절차에 의한 것이었는지 충분히 알리는 일에 노력해왔습니다. 그 결과 정부 당국도 일부 인정하는 듯 했고, 국회도 이를 알아주어 잘될 거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지금 벌어지는 일을 보면 그럴 만도 하지요. 새 정부가 들어서더니 강정마을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는 커녕, 날로 깊어가는 마을 사람들 간의 일부 찬성주민과의 갈등에도 나 몰라라 하는 겁니다. 하긴 이 정부 뭐 다른데 신경 쓸 새 없지요. 제 발등 불끄기 바쁘니. 제주도 당국도 결정된 사항이라 어쩔 수 없다는 태도만 고수하고 있지요, 해군은 해군대로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며 밀어붙이죠, 그러니 마을 사람들 어떻겠습니까? 이 마을에 기지건설반대 대책위원장 일을 하는 양홍찬이란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동네 반장 한 번 해본 일 없는 조용한 분이신데, 요즘 이 분 입에서조차 격한 말도 자주 나옵니다. 이 분이 묵상하듯 눈을 아래로 내리고 생각에 들 때, 저는 옛날 시애틀 추장과 대추리 김지태 이장과 더불어 이 분이 시공을 넘어 만나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강정마을의 여여함 그 자체를 꼭 빼닮은 분이죠. 마을 사람들과 얘기 나누면서 더 기막힌 건 뭔지 아십니까? 그래도 비폭력, 평화적으로 버텨오니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마을 사람들이 말한다는 거죠. 자기 생존이 걸린 문제가 터졌는데, 갈수록 태산인데 이런 말이 나옵니까? 그 동안 너무 이기적으로 살아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지건설을 막아내든, 설령 못 막아낸다 해도, 아이들 앞에서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그래서 앞으로도 민주적이고 오로지 비폭력적으로 상대해 나가자 이런 말들 합니다.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마을해군기지반대대책위원회 강동균 마을회장과 양홍찬 공동위원장 등이 지난 7월 7일 오전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우리 운동단체들이 생명평화 마을이라 이름 붙이기 이전부터 강정마을은 이미 생명과 평화의 마을이었던 겁니다. 생명과 평화 마을, 서귀포 강정마을에서 올 여름 축제가 벌어집니다. 무슨 노래공연, 시낭송도 하고 알토란같은 강정마을 속속 속살을 더듬으며 생명의 기운을 느끼는 걷기행사도 하구요, 어느 날인가는 돼지도 잡고, 한 판 난장도 벌인답니다. 때로는 진중하게 이 마을의 아름다움을 어찌 알리고 지킬지 토론회도 연답니다. 이 기운들을 모아 강정마을 사람들은 한여름 땡볕도 마다않고 제주도 전역 순례길에 나설 작정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생명의 기운, 난장의 기운을 안고 집과 길의 호흡을 열어 세상과 통하기 위한 불끈 저항의 대열을 만들기도 할 계획입니다. 이 여름이 지나면, 가을 지나 겨울로 가는 여정만큼이나 마을의 이 문제가 더 큰 시련에 들지 모른다는 판단 때문이죠. 마을 사람들은 지금 축제준비에 한창입니다. 무엇보다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에 분주합니다. 마을회관에 인터넷 선도 더 깔고, 이부자리 준비하고, 샤워시설도 만들고 있습니다. 오시는 분들 맞이하기 위한 환영의 인사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예술하는 분들은 이 마을에서 벽화도 그리고, 미술품도 설치하고 퍼포먼스도 한답니다. 글 쓰는 분들은 시낭송회도 준비하고, 종교인들은 평화미사와 기도회 준비는 물론, 순례길 인도에도 함께한다고 합니다. 우리 같은 시민단체 사람들은 모든 여름 계획을 이 곳 강정마을에서 준비합니다. 수련회도 하고 모꼬지도 하고, 때론 마을 사람들과 축구도 한 판 하려고 합니다. 생태관광하시는 분들은 마을과 인근마을 길 돌며 안내하고 이 마을의 빛을 보여주는 일을 합니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모두가 강정마을에서 올 여름나기에 나선 거죠. 당신은 어떻습니까? 올 여름 강정마을에 한 번 안 오시렵니까?
2017-07-20 | hrights | 조회: 262 | 추천: 0
이광조/ CBS PD “서유럽과 미국에서 만들어져 전 세계로 퍼져 나간 근대사회는 미래에 대한 낙관을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삼아 왔다. 그러나 경험과 이성을 두 축으로 문명의 발전을 의심하지 않았던 인류는 지난 수십 년간 환경 문제 등 예기치 않은 도전에 부딪히고 있다. ‘위험사회’와 ‘성찰적 근대화’란 개념을 통해 근대문명의 방향 전환을 요구하고 있는 독일 뮌헨대 울리히 벡 교수를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장훈 교수가 만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실체와 돌파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편집자)... 장훈 : 당신이 발표한 ‘위험 사회’의 개념은 환경 위기, 복지국가의 실패와 같은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에 커다란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위험사회’란 어떤 것이며 그런 개념을 새롭게 생각하게 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울리히 벡 :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합리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해서 정치, 경제, 사회 체제를 유지해 왔습니다. 하지만 근래 들어 그런 합리성의 부수적 결과들이 예측 불가능해 짐에 따라 일상생활 속에서 커다란 불확실성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체르노빌에서의 원자력 유출 사건이라든가 광우병, 여러 가지 환경 재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계급이나 지위와 관계없이 사람들은 점차 더 많은 불확실성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사회적 변동들이 폭발적으로 분출되고 있었지만, 사회과학은 이러한 새로운 현상들을 포착할만한 개념의 빈곤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계급이라는 오래된 개념이 있기는 했지만, 저나 학생들 모두 이러한 개념적 범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대안적 개념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위험사회’는 그 결과입니다. 장훈 : 당신은 현대의 복지국가가 이런 ‘위험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위험사회’의 극복은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울리히 벡 : 여전히 기술 관료제에 의존하고 있는 현대 국가로서는 위험사회를 불러온 근본적 요인인 기술적, 경제적 합리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현대 국가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고 오히려 대규모의 생태 재난과 같은 문제의 존재 자체를 부인함으로써 시민들에게 공적 안전을 제공해야 할 국가로서의 정당성을 상실했습니다. 저는 위험사회의 극복은 대의 정치제도의 한계를 인식하고 자율적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책임지고자 하는 시민운동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민주주의는 국가를 비롯한 제도권 영역으로부터 일상적인 생활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위험사회의 극복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2000년 12월 14일) '위험사회' 저자인 사회학자 울리히 벡 독일 뮌헨대 교수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수 백 만년에 걸쳐 형성되고 굳어진 자연의 생리(소는 풀을 먹는다)를 이윤을 위해(기술합리성의 추구) 파괴한 결과(동물성 사료를 먹임으로써 소를 육식동물로 만들어 버린) 빚어진 광우병. 위험에 무기력한 국가와 자신들의 문제를 직접 책임지려고 하는 시민과 시민운동. 인용이 좀 길었지만 지난 5월부터 두 달 넘게 지속되고 있는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위험 논란과 촛불시위를 이 보다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위에서 인용한 인터뷰 기사는 경향신문도 아니고 한겨레신문도 아닌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다. ‘그 때는 이런 인터뷰 기사를 실어 놓고 지금은 왜 그러냐’고 비아냥거리거나 따지려는 게 아니다. 길지 않은 칼럼에 저렇게 긴 인터뷰 기사를 인용한 건 순전히 안타까움 때문이다. 위험사회. 독일의 세계적인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개념화한 이 ‘위험사회’는 사회학에 대한 지식과 관심이 없더라도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너무도 쉽게 다가오는 개념이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대구 지하철화재, 아현동 가스폭발사고... 물론 이런 사고들이 한국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울리히 벡이 말하는 위험사회란 기술 관료제에 기반하고 있는 현대 국가 모두에 적용되는 것이고 그 위험이 적지 않기 때문에 그가 세계적인 사회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진국들이 몇 백 년 동안 이룩한 근대화를 불과 수 십 년 만에 압축적으로 이룬 대한민국에서 위험사회라는 말이 지닌 울림은 남다를 수밖에 없을 터. 지난 4월 1일 조선일보는 “한국은 아주 특별하게 위험한 사회다, 첫 내한한 ‘위험사회’ 저자 울리히 벡 교수 인터뷰”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조선일보가 울리히 벡 교수의 ‘위험사회론’에 이렇게 관심을 기울이고 적지 않은 지면을 통해 그의 이론과 생각을 소개한 건 그가 세계적인 학자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위험사회’에 대한 경고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반성 또는 성찰이 바로 언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는 인식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깔려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정치면이든 경제면이든 사회면이든 기사 형태가 스트레이트든 분석이든 인터뷰든 언론은 끊임없이 문제를 지적하고 경고한다. 여기에는 당연히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고 더 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예방하겠다는 의지가 깔려있다. 우리가 조선일보뿐만이 아니라 숱한 신문지면과 방송 뉴스에서 접하는 각종 고발 기사들, 이것이 위험사회에 대한 성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 논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명박 출범 이후 불거진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에 관한 논란에 대해서는 ‘성찰’이라고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마치 ‘불량 철근 좀 들어갔다고 한강 다리가 무너지랴’라는 식이다. 물론 불량철근 좀 쓴다고 꼭 다리가 무너지고 빌딩이 무너진다는 법은 없다. 쓰레기 시멘트로 아파트 짓는다고 사람이 죽는 것도 아니고 지하철에서 석면에 노출된다고 해서 모두가 암에 걸리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매일 매순간 이런 저런 위험에 노출된 채 살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 먹고 광우병 걸릴 확률이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다는 얘기도 이런 슬픈 현실을 지적한 것 아니겠는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교통사고 사망률이나 산재 사망률에 비하면 그깟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쯤은 아무것도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쇠고기 수입업자나 협상 책임자가 할 말이지 언론이 할 말은 아니지 않는가. 더구나 촛불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미국산 소를 다 도살하라는 것도 아니고 미국산 소는 아예 안 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예방할 수 있는 위험은 예방하자는 것인데, 그것이 그렇게 불합리한 요구인가. 우리정부가 우리가 구매하는 쇠고기에 대해서 만이라도 광우병 전수검사를 하자고 제안하고 동물성 사료강화조치를 요구했더라면, 설사 정부의 그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더라도 국민이 이렇게 화가 났겠는가. 비유하자면 이렇다. 지금 국민들이 요구하고 있는 건 불량 건축자재와 쓰레기 시멘트가 들어간 아파트와 학교, 다리를 다 부수고 새로 짓자는 게 아니다. 그것이 성수대교 붕괴, 상품백화점 붕괴와 같은 대형 사고를 일으킬지 아토피를 포함한 피부병을 일으킬지, 언제 누구에게 암을 일으킬지는 모르지만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상 앞으로는 불량자재를 쓰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지어진 구조물에 대해서는 정기적으로 검사를 해서 사고가 나지 않게 예방하자는 것이다. 이게 무리한 요구인가? 이게 친북좌파 운운할 사안인가? 정치인과 기업가들이 미처 돌아보지 못하는 이런 위험, 그 결과를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위험, 당장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해도 사회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경고와 참견, 이게 바로 언론 본연의 임무 아닌가. 우리들 대부분은 내가 사는 집이 불량 자재로 지어졌다는 걸 알면서도 적응하며 살고 세상의 자잘한 부조리도 그러려니 하면서 참고 지낸다. 하지만 가려움에 자기도 모르게 몸을 긁어서 피가 나는 자식들을 본 부모라면 ‘안 죽으면 되지’라고 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돈 좀 아끼자고 불량자재를 계속 쓰자고 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철근이든 시멘트든 쇠고기든, 공짜도 아닌데 말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58 | 추천: 1
안수찬/ 한겨레 기자 그러니까, 넌 열일 제쳐두고 반성부터 심각하게 해야 돼. 며칠 전 당국이 널 감옥에 잡아 가둔 건 차라리 다행한 일이야. 천둥벌거숭이처럼 뛰어다니지만 말고, 이번 기회에 생각 좀 해봐. 시민운동가들이 모여 석방대책위원회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는 거기에 끼어들어 네 석방 따위를 요구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 굳이 석방을 촉구하려면 그건 촛불시민들을 위한 것이어야겠지. 넌 그저 그 곳에서 책도 읽고 좌선도 하면서, 시민운동가의 역할과 자질에 대해 성찰이라는 걸 한번 해봐. 도대체가 말이 되느냔 말이야. 지난 10년 동안 너는 시민운동에 매진했잖아. 그것 말고 달리 한 게 없잖아. 그런데 가히 ‘운동 전문가’라 할 만한 네 지성과 감성이 이번 촛불집회에 기여한 바가 뭐 있느냐고. 집회 사회도 보고, 거리행진도 이끌었다고 말하고 싶겠지. 다시 물어볼게. 그거 정말 네가 한 거야? 거리와 광장을 채운 촛불 시민들의 상상력을 봤지? 하나의 거대한 문화공연과도 같았던 그 기발함과 발랄함을 봤지? 어느 운동가보다 단호하게 발언하고, 어느 교수보다 분명하게 논리를 밝히는 고등학생, 주부, 대학생, 직장인들을 봤지? 넌 지금까지 한번이라도 그런 식으로 데모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있어? 넌 도대체 뭘 했냐고. 시민운동가로서 이번 촛불집회에 대해 책임질 일이 하나도 없다는 거, 이거 부끄러운 일 아닐까? (이쯤에서 너는 기자로서의 내 구실에 대해 따지고 싶겠지만, 흠흠, 오늘은 네 이야기만 하도록 하자고) 하긴, 우리가 기억하는 데모란 그저 숭고하고 치열하고 엄숙하고, 그리하여 절망적인 그런 것들이긴 했지. 너와 내가 만나 이 기묘하고도 질긴 인연을 맺게 된 것도 그 치열하여 절망적이었던 ‘데모들’의 기억 때문이잖아.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안진걸 조직팀장이 지난 6월 25일 오후 서울 광화문 경복궁역 앞에서 장관고시 철회와 전면 재협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게 강제 연행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89년, 전교조가 만들어졌지. 너는 광주에서 나는 대구에서 전교조 선생님들을 지킨답시고 데모 흉내를 냈지. 그때 우린 촛불집회 같은 건 생각도 못했지. 고작해야 종이비행기를 접어 교실 밖으로 던지거나, 대학가에서 벌어지는 시국 집회의 한켠에 모여 앉는 따위가 전부였지. 선생님들이 학교에서 쫓겨나는 날, 교문을 붙잡고 엉엉 울어버린 게 우리의 마지막이었지. 우리는 누구에 맞서는 것인지도 잘 모른 채 그저 항의하고 분노했지. 어떤 친구는 퇴학당했지. 어떤 친구는 스스로 학교를 그만둬 버렸지. 어떤 친구는 항의 유서를 남기고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지. 그리고 우리는 또 울었지. 그때 기억나지? ‘교사는 노동자’라고 말하는 전교조 교사들은 모두 빨갱이다. ‘참교육’이란 중고생들을 의식화시키려는 책동이다. 조선일보가 그렇게 대문짝만하게 썼잖아. 교사와 학생들의 집단행동에 처음엔 주춤했던 정부도 보수 언론들의 보도를 계기로 전교조 교사들을 모조리 해직하고 그것도 모자라 감옥에 집어넣었잖아.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지. 데모 한다고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니라는 걸, 사춘기 시절에 알아 버렸지. 올바른 것이 항상 이기는 것은 아니라는 놀라운 사실도 알게 돼 버렸지. 대학 신입생이던 1991년, 그 해 봄을 잊을 수가 없지. 3월부터 6월까지 10여명이 죽었어. 고등학생, 대학생, 노동자가 죽었지. 시위하다 전경에 맞아 죽고, 거기에 항의해 투신 또는 분신하여 죽었지. 일주일에 한명씩 죽어나가는 거리에 나가려면 말 그대로 죽을 결심을 해야 했지. 그 시절엔 밤이 되면 라이터를 켰어. 종로를 메운 군중이 구호를 외칠 때마다 무수한 별빛처럼 명멸했던 라이터 불을 보며 우리는 환호했지. 해직된 옛 선생님들도 만났지. 이젠 대학생이 된 제자들과 함께 어깨동무하고 선생님들도 함께 데모를 했지. 87년 6월 이후 최대의 인파라고, 드디어 뒤집어진다고, 우리는 흥분했지. 그 다음의 일도 기억나지? 다시 한 번 조선일보가 ‘죽음의 굿판’ 운운하며 우리를 악의 화신으로 만들었지. 동료의 투신자살을 부추겨 유서까지 대신 쓰는 피도 눈물도 없는 빨갱이들이라고 몰아갔지. 각계각층에 주사파가 침투해 있다고 선전했지. 장관에게 계란과 밀가루를 던지는 대학생들을 희대의 패륜아라고 손가락질했지. 공권력이 대학생을 때려죽일 때, 우리는 왜 밀가루조차 던지면 안 되는 것인지, 우리는 정말 알지 못했지. 그리고 거짓말처럼 세상은 조용해졌지. 신문과 방송은 소련의 붕괴를 축하하고, 빨갱이들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다고 선언했지. 대학 졸업을 눈앞에 둔 1996년, 아마도 90년대의 진정한 마지막이라 할 만한 그 때, 우리는 연세대에 있었지. 조선일보는 한총련 출범식에 모여든 대학생들을 북한의 지령을 받아 움직이는 주사파 집단으로 매도했지. 일본 전공투와 비교하면서 극렬 테러집단으로 몰아갔지. 경찰은 들어오는 길, 나가는 길을 통째로 막았지. 배가 고파도 먹을 것조차 없었지. 그렇게 열흘 동안 학생들을 굶겨 힘을 빼고, 일시에 진입해 모두 잡아갔지. 몰아놓고 때려잡는 토끼몰이식 진압의 초대형 버전이 그때 만들어졌지. 10여대의 헬기를 띄워 사실상의 군사작전을 펼쳤지. 그렇게 5800명의 학생들이 일시에 끌려갔지. 우리 같은 놈들을 선배라고 믿고 따라온 1학년, 2학년 후배들이 많이 잡혀 갔지. 선배들은 분해서 울었고, 후배들은 무서워서 울었지. 다시는 데모 같은 거 하지 않겠다고, 자아도취에 불과한 시위 따윈 아예 때려 치고, 진짜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만한 일을 하겠다고. 우리는 결심했지. 너는 시민운동을 택했고, 나는 언론을 택했지. 그리하여 진걸아, 너와 내가 기억하는 모든 데모는 장렬했지만 절망적인 것이었지. 우리는 청바지에 청재킷을 입고 번개처럼 달려와 시위대의 머리를 잡아채 강력한 헤드락을 걸고 니킥으로 명치를 가격하는 백골단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지. 닭장차에 갇히는 순간 시작되는 전경들의 무수한 발길질이 왜 죽음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지 잘 알지. 누구건 마음만 먹으면 빨갱이로 낙인찍어 감옥에 보내버리는 조선일보가 얼마나 거대하고 강력한지를 잘 알지. 공안정국이 일단 시작되면, 세상 모든 항의의 목소리가 통째로 사라져버린다는 것도 잘 알지. 그게 보수정치의 본질이라는 것도 너무너무 잘 알지. 1998년 초, 너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그 기억을 모두 나누고 있었지. 80년 광주항쟁처럼 시대를 넘어 추앙받지 못하고, 87년 민주항쟁처럼 승리의 기억으로 뭉친 하나의 세대를 낳지도 못했던 너와 나의 그 ‘데모들’은 오직 우리끼리만 서로 위로할 수 있는 것이었지. - 거대한 절망. 그것에 대해 우리는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지. 아무도 우리의 비극을 모를 거라고 제 슬픔에 취해 술잔을 기울였지. 나는 말이야, 진걸아. 촛불시민들이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을지 어떨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 아마 잘 안될 거야. 세상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을 거야. 그런데 말이야. 나는 지금도 가끔 울컥해. 나이를 먹어 그런지, 예전처럼 눈물이 막 쏟아지고 그러진 않는데,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앞이 흐려지는 일이 많아. 절망하는 게 아니고 말이야, 위로받는다는 생각, 드디어 우리의 그 불행한 ‘데모들’이 위안 받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야. 촛불시민들은 사제단의 미사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고 하지만, 실은 바로 그들이 우리에게 마음의 평온을 주고 있는 것 같아. 그렇구나. 데모는 엄숙하고 장렬하여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 기쁘고 발랄하고 상쾌한 어떤 것이었구나. 바로 그래서, 성취하여 얻는 바가 적어도 데모 자체로 즐겁고 행복한 것이었구나. 그런 ‘행복의 힘’이야말로 조선일보와 정치검찰과 백골단과 청와대를 모두 넘어서는 원천이구나. 그걸 모르고 우리는 그저 죽을 결심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구나. 진정한 운동이란, 그 성취가 대단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행복해야 하는 것이구나. 대통령이 항복할까 하지 않을까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우리 같은 옛날 데모쟁이들과는 달리, 이들 촛불시민들은 오늘은 어떻게 보다 새롭고 즐거운 방법으로 거리와 광장에서 시간을 보낼까를 고민하는구나. ‘해방구’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여 권력자들을 몰아낸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자리한 해방의 욕망을 끄집어내어 표현하는 바로 그 시간과 공간을 일컫는 것이구나. 뭐, 그런 상념 끝에 또 한 번 감상에 젖어 울컥하는 것이지. 시민운동가와 언론인으로서 너와 나는 이제 촛불시민들의 앞길을 진지하게 고민해야겠지. 그게 우리의 몫일 테고. 그렇지만 말이야. 그런 짐을 잠시 벗어놓고, 그저 이 촛불의 물결에 지친 몸과 마음을 맡기고 그 해방감을 만끽하는 것이 더 중요할 지도 몰라. 어쩌면 지도가 필요한 것은 촛불시민이 아니라 바로 우리일수도 있으니. 우리의 내면에 자리한 공권력에 대한 공포, 보수언론에 대한 열등감, 정치권력에 대한 집착 따위의 ‘80년대식 트라우마’를 모두 벗어던지는 촛불의 의식화를 먼저 거쳐야 할 것 같아. 그럴려면 우리 데모 좀 더해야겠지? 무슨 해결책 따위를 성급하게 기대하기 전에 너와 나는 케케묵은 20세기의 허물부터 벗어 던져야겠어. 그러니 진걸아, 나와라. 공부 좀 하고 난 다음에 감옥에서 나와서 거리에서 만나자. 그리고 지칠 때까지, 우리의 몸과 마음이 더 이상 따라잡을 수 없을 때까지, 실컷 데모하자. 저들이 말하는 질서와 평화 따위는 그런 걱정에 날밤을 새는 저들에게 줘버리고, 우리는 해방구의 질서와 평화를 단 며칠이라도 좋으니 조금 더 누려보자. 권력을 얻어 그 권력으로 인해 자유로워질 것을 기대하기 전에, 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유쾌하게 만드는 진짜 데모의 기억을 만들자. 가난하고 초라한 지성과 감성을 가진 탓에 이 촛불의 물결에 조금도 보탬이 된 바 없는 듯 하여 더욱 쑥스럽고 미안한 나는 그저 그런 정도의 소박한 기대만 갖고 이 여름을 버티려 해. 그러고 나면 아마도 가을 무렵엔 조금 더 깊은 혜안이 생기지 않을까, 장담하기 힘든 그런 희망도 곁들여서 말이야. 천둥벌거숭이 같은 시민운동가 안진걸도 아마 나와 비슷할 거라고 믿어. 술 마시면 말이 많아지는 것 말곤 닮은 데라고 하나도 없는데도 사람들이 우리 둘을 자꾸 비교하려고 하여 서로 기분이 많이 나쁜, 참여연대의 안수찬, 너 안진걸에게 한겨레의 안진걸, 나 안수찬이 보낸다. 씩씩하게 잘 지내라.
2017-07-20 | hrights | 조회: 313 | 추천: 0
이유정/ 변호사, 인하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광화문에 수십만 개의 촛불이 모여 쇠고기 재협상을 외치던 날, 청와대 뒷산에 올라 많은 반성을 했다는 대통령은 그로부터 닷새 만에 “국가 정체성에 도전하는 시위나 불법 폭력시위는 엄격히 구분해 대처해야 한다"고 대국민 선전포고를 했다. 도대체 대통령이 생각하는 국가 정체성이란 것이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다. 국어사전에서는 정체성의 뜻을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라고 풀이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변하지 않는 본질은 “민주공화국”이라는 것이고, 민주공화국이란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주권의 운용이 국민의 의사에 따라 이루어지는 나라를 말한다. 6월 한 달 내내 촛불시위에 나선 국민들이 가장 많이 외친 구호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것이었다. 국민들의 요구는 간단하다. 정부가 민주공화국의 정부로서 정체성을 가지라는 것이다. 국민들의 뜻을 존중하고, 국민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값싸고 질 좋은 미국 쇠고기’를 홍보하면서 미국 축산업자들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미국 정부가 보증만 해주면 안심해도 좋다는 식으로 미국정부의 선처에 기대지 말고 한 나라의 정부답게 검역주권을 행사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를 국가의 정체성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다니, 그동안 대통령이 무엇을 반성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24일 국무회의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 그는 이날 "일부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시위는 정부 정책을 돌아보고 보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지만 국가 정체성에 도전하는 시위나 불법 폭력시위는 엄격히 구분해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출처 - 청와대   대통령은 아마도 대한민국과 미국이 같은 나라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나라 국민들도 미국 사람처럼 미국말 하고(심지어 우리나라 역사도 영어로 배우고), 미국 사람들이 먹는 소고기 먹고(심지어 안 먹고 버리는 뼈나 내장도 아까우니 먹어주고), 미국 사람들이 원하는 일만 해 주면 진짜 미국처럼 강대국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런 친미 사대주의적인 태도가 국민들의 자존심을 건드려 반미성향이 없던 사람들까지도 반미로 돌아서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대통령이 국가정체성 운운하는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수구언론들이 부시대통령의 방한이 성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쏟아내는 모습을 보면 민망하다 못해 얼굴이 화끈거린다. 퇴직을 앞두고 이삿짐 쌀 준비를 하는 미국 대통령을 이렇게 애타게 기다리는 꼴이라니.... 가르쳐주지 않아도 국민들은 이미 알고 있다.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사실을.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정부의 역할은 국민들의 뜻에 따라 통치하고, 국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어떤 목적을 위해서든 국민들의 생명과 건강을 내팽개치는 일을 정부가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한 국민들은 잘 알고 있다. 촛불에 놀라 미국으로 달려간 협상단이 가져온 보따리에 실은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허울 좋게 내세운 민간자율합의라는 것이 사실상 아무런 구속력이 없다는 사실을. 전국 수만 곳의 음식점에서 원산지 표시가 제대로 지켜지는지 여부를 감시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국민들의 의사와 안전은 안중에도 없이 덜커덕 퍼주기 협상을 하고 돌아와 국민들의 자존심을 짓밟고 대한민국 정부의 정체성을 근본부터 흔들어놓은 장본인은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대통령이라는 사실도 또한 알고 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계속되고 있는 혼란은 전적으로 대통령의 실정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국가 정체성을 운운하며 국민들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다면,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국민의 뜻을 저버린 권력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기에, 국민들은 앞으로도 촛불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85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