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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 교육조직국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6:42
조회
146

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 교육조직국장



새해 첫 출근하는 날, 전날부터 내린 눈이 세상을 덮고, 그리고도 사락사락 눈이 내렸지.

그 좋다던 서울의 대중교통 시스템이 지하를 제외하곤, 모두 뒤엉켜 버렸어. 5분이면 되던 기다림이 30분을 넘고, 15분이면 되던 운행시간이 30분을 훌쩍 넘기고도 움직일 생각을 안 해 결국 차에서 내려 뚜벅이가 되었다. 그리고 이튿날도 길은 눈 천지였지. 그게 어제였으니 오늘은 좀 나아지려나?

어릴 적, 눈이 오면 세상은 온통 동화 속이었지.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솟아날 때까지 눈싸움인지, 눈 치움인지를 하던 시절에 눈은 기쁨 그 자체였어. 그 때도 눈이 오면 차는 달릴 염을 못 내었었지. 신작로라 불리던 넓은 길은 온통 흰 눈으로 뒤덮여 누구의 발길도 허락지 않았었다. 단지, 눈으로 인해 괜스레 일찍 일어난 나와 동무들의 발길과 웃음과 고함과 장난질만 허용되던 시절이 있었다. 눈은 눈 그 자체로 환희이고 기쁨이었지.

언젠가 신작로가 더 넓어지고 평탄해지면서, 그리고 눈들이 적게 오기 시작하면서 눈이 오면 온 뒤의 그 처절함이 먼저 상상이 되어버리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어. 차바퀴에 치이거나 떠밀려 진흙과 한 덩이가 되어 눈인지, 흙인지 구분이 안 되던 그 형상이, 도저히 눈의 정체성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껴져서 눈이 오면, 그 자체로 기쁨이기보다는 그 뒤의 처참함이 먼저 떠올라 눈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강박이 생겨버렸다. 그리고 지금은 눈은 생활의 불편함과 대중교통시스템의 한계를 생각하게 하는 기제가 되어버렸네. 눈은 아무 변화도 가치도 없는데 눈을 바라보는 나는 변덕을 부리고 있다. 그래도, 눈은 참 이뻐. 여전히 세상을 동화처럼 만드는 재주가 있기도 하고. 그리고 새해와 눈은 참 잘 어울리지 않나 싶다. 다 덮어버리고 새롭게 세상을 느낄 수 있게 해주니 말이야. 덮는다고 덮어질까 만은...

지난한 해, 참 어이상실이란 말이 어찌 잘 어울릴까 싶을 만큼 어이없는 일들이 많았다. 기대는 했으나 기대이상으로 치달은 사건들과 시간들에 감사하다 해야 할까? 돌아보니 갑자기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너희들을 생각하니 슬퍼진다. 작년에 애가 고등학교에 가고, 그나마 저소득층을 위한 장학금이 있어 위로가 되었는데 그나마 없어졌다지? 아이는 혼자 공부하다 지쳐 드디어 학원을 가보겠다고 했다지? 알아보니 과목당 몇 십 만원이 넘는다지? 어째야하니? 한 달 겨우 끊어줬다고 했나? 그 다음은 어쩌냐? 그나마 지금까지 혼자 잘 해 왔던 애에게 감사해야할까?

그리고 아이 둘을 어찌어찌, 그것도 명문대를 보내긴 했는데, 큰 넘은 군대로 가고, 작은 넘은 일요일까지 알바를 한다니 그 애 인생도 한심하다며 웃음으로 때우던 너의 피곤한 모습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소위 ‘two job’을 가진 너를 보면서, 월요일이면 금요일보다 더 피곤하고 지친 너를 보면서 내가 해 줄 것이라곤 “몸은 좀 어때?”라는 립 서비스만 할 수 있는 나로선, “가난이 정말 대물림이 되는 거 같아서, 애들을 보면 미안하고 안쓰러워서..”라며 입을 닫던 네 곁에서 나는 그나마 조금 나은 내 현실에 안도하고만 있었다. 미래로 장학금인지 뭔지 있었는데 그것마저 수급자가 될 것인지, 장학생이 될 것인지 사이에서 초조해 해야만 한다는 기사가 곧 너였었지. 제도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제도를 만들고자 했던 나였음에도 요즘은 그 제도가 우리 삶과 얼마나 직결되어 있는지 너희들을 보면서 실감하고 있다. 그 복지라는 제도 말이야.

너희들 곁에서 같이 술 마시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는 나는, 술값을 계산할 때도 각각 나누어 내는 것에 너희들을 대신할 수도 없는 나는, 아니 나도 불투명한 현실과 미래를 살고 있기는 마찬가지인 게야. 우리 어째야 하니? 그나마 그런 절망스런 기분과 생각이 오래가지 않도록 바쁜 우리 현실과 두뇌에 감사도 하고 순간순간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며 살 수 있는 너희들의 긍정적 힘에 감탄도 한다. 예전에 “빚을 조금 지면 빚이 짐인데, 너무 많으면 아무렇지도 않아.”라던 ‘돈으로부터의 해방 혹은 해탈’을 한 듯 하던 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돈을 넘어선 것인지 돈에 눌려 자포자기 한 건지는 모르나, 여튼 그 선배의 일상은 해맑았으니, 가진 넘들 돈 좀 빌려 쓰고 갚지 않는 객기도 필요치 않나 싶다.

신 새벽에, 그것도 새해 벽두에 시답잖은 주절거림을 용서해라. 보이지 않는다고 없지 않더라는 얘기를 언젠가 떠들었듯이 눈에 덮였다고 없어진 것이 아닌 듯이, 단지 눈을 가지고 장난질 할 수 있었던 어린 시절처럼, 어이상실로 뒤덮인 이 상황을 가지고 놀자. 그런데 어떻게 놀 수 있을지는 아직도 감감하긴 하다. 그래도 그 방법을 찾을 수는 있을게야. 이제는 어떤 대상이던 싸우기보다 놀고 즐기면서 그 대상을 넘을 수 있을 때도 되었지 싶다. 왜냐면 이제 우리 벌써 반백년을 향해 달리고 있으니 말이다. 장난질할 수 있는 장난감이나 궁리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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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노컷뉴스


새해에는... 이런 표현 정말 진부하다고 느끼지만, 그래도 할 말이 이것밖에 없으니 어쩌겠니? ^^; 새해에는, 2010년에는 눈 덮인 한적한 마을처럼 마음속에 결코 버릴 수 없는 동화하나 만들고, 그 동화를 지키기 위한 놀이 감 하나 만들어 그렇게 저렇게 살아보자.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눈이 되면 어떻겠니? 허물도, 슬픔도 서로 덮어주어 정결함만 남도록 하는 그런 눈 같은 존재들이 되자.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오는 너희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