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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빚는 사회(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6:43
조회
164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노사관계 연구본부 연구위원



2009년이 끝날 무렵 한 통의 초대장을 받았다. [라 광야, ‘빛으로 쓴 시’ 박노해 초대전]. 새해에 접어들어 초대장에 적힌 장소를 찾아 나섰다. 을지로 3가 지하철역 11번 출구에서 서울 중부경찰서쪽으로 길을 걷다보면 오른쪽에 있는 갤러리 M.

“총알은 언젠가 바닥이 나겠지만/샤이를 마시는 건 영원하지요./먼데서 온 친구여, 우리 함께/갓 구운 빵과 샤이를 듭시다.” 사진전을 알리는 포스터의 쿠르드인 여성이 말한다.

박노해가 집단학살의 현장을 찾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처음 만난 23년 전부터 지금까지 벗이자 선배로서 한결같은 모습을 보이는 개인적 경험 때문만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쓸고 닦고 세우며,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신 앞에 무릎 꿇는 힘으로 다시 일어서는 광야의 사람들에게 나는 다만 경외의 마음을 가질 뿐이다”는 시인의 마음이 현장을 찾게 한다.

“나는 ‘슬픔의 힘’을 믿는다. 기쁨은 나눠 갖기 어렵지만 슬픔은 함께 나눌 수 있다. 슬픔은 우리를 돌아보게 하며 우리 자신을 정화하고 참된 나 자신과 진리에 가 닿게 한다... 슬픔은 흘러야 한다. 나의 슬픔이 너에게로 국경 너머의 슬픔이 나에게로 강물처럼 흘러야 한다”. 그 믿음이 시인을 학살로 인한 슬픔의 강으로 인도한다. 문득 용산 참사 현장이 떠오른 것은 흐르는 슬픔이 필자에게도 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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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나눔문화


그래도 한 가지 질문, 왜 시가 아니라 사진인가? “감추어진 그들의 진실을 수없이 기록했지만, 국경을 넘는 순간 언어의 국경을 넘지 못하는 나의 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만국공통의 언어인 카메라로 시를 쓰고 필자는 사진 속에서 시를 읽는다.

그러고 보니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2008년 10월 프랑스 파리에 있는 페르라쉐즈 공동묘지를 찾았다. 두 번째 방문이었고 프랑스어를 하는 동행이 있던 탓에 그 전에 알지 못하였던 새로운 사실을 배웠다. 나치의 압제에 저항하다 죽은 사람들의 묘지명에 단 한 사람의 기업가도 없다는 것 이다. 대부분 노동조합의 조직원인 죽은 자들의 합장 묘비 옆에는 조각이 즐비하였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몸, 포승과 쇠사슬에 묶인 손, 절규하는 입. 그 조각들은 인간이 행한 최대의 잔혹상을 언어 아닌 언어로 전달하였다. 라 광야의 눈동자 역시 비슷한 절규와 아픔을 간직하여 그날 밤 필자는 악몽에 시달리다 눈을 떴다.

수년간 필자는 연구자의 눈을 갖고 비정규직과 근로빈곤의 현장을 꽤 많이 돌아다녔다. 어느 때는 쟁의 중이거나 시위중이며, 어느 때는 교섭 중이거나 근로 중인 곳곳에서 다양한 이력과 얼굴의 사람들을 보았다. 돌아와서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복원하며 보고서나 논문을 쓰는 자신과 마주하였다. 그때마다 부딪혔던 질문, 우리 사회에서 연구자란 지식인이란 누구인가.

기륭전자 노동조합 위원장이 20여 일째 단식을 하는 천막에 방문했을 때 조합원 중 한 사람이 “단식으로 힘이 없는 사람을 붙잡고 길게 인터뷰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고 했지만 위원장은 필자의 조사에 응해주었다. 그러나 돌아올 때 분명 스스로에게 물었다. 저 현장을 조사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저 현장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것이 옳을까.

꽤 오래 끌었고 결국 해결하지 못한 KTX 여승무원 노동쟁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보고서의 작성을 위해 이 분들을 연구원에 모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의외로 담담하게 질문에 답하는 그 분들을 돌려보내고 나서 꼬박 하루 동안 글을 쓰지 못하였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도리스 레싱은 그녀의 강연에서 “모든 사람 스스로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바를 말하게 하라, 그리고 진리 그 자체는 신에게 맡겨라!”고 한 적이 있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충분한 대답은 아니었다.

라 광야, 박노해의 초대전은 다시 한 번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카메라로 시를 쓴 시인과 그 사진 속에서 시를 읽은 연구자, 그들은 누구인가? 불평등과 부정의로 고통 받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은 누구인가? 시는, 연구는 그들에게 무엇인가. 질문 자체, 끊임없는 질문의 과정이 곧 대답 일까.

빛으로 쓴 시는 빛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하다. 혹시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봄 햇살에 하얗게 웃는 나무를 본 적이 있는가. 뜰 한구석의 작은 나무, 여린 잎사귀에 눈이 부신 적이 있는가. 모두가 빛이 되는 꿈을 꾸어본 적이 있는가. 슬픔과 절망이 꿈을 꾸게 하는 힘이라면 빛으로 쓴 시가 빚는 사회에서는 꿈을 없애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