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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반복 (안)된다고?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6:41
조회
195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문화연구학과 교수



이곳 네덜란드에서는 연말분위기가 조금 일찍 시작된다. 어린이와 뱃사람의 보호성인인 신터클라스(Sinterklass, 영어로는 Nicholas) 축일 이브 날인 12월 5일에 선물과 축복을 나누며 한 해를 마무리한다. 일찍이 네덜란드인들이 신대륙으로 건너가 뉴 암스테르담(현재의 뉴욕)을 건설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신터클라스 명절이 미국으로 건너가 (귤이 대서양을 건너 탱자가 되듯이) 12월 24일에 활약하는 산타클로스로 재탄생 되었다는 학설도 그럴 듯하다. 그런데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전통의 재창조 혹은 원조 찾기'가 아니라, 신터클라스 축제일에 네덜란드인들은 선물과 함께 자신이 직접 쓴 시를 교환하면서 함께 읽는 오랜 전통을 즐긴다는 사실이다. 이날만큼은 학교와 직장은 물론 언론매체와 국회 등지에서도 야유와 풍자가 넘치는 '시인들의 왕국(네덜란드는 입헌군주정이다)'이 되는 셈이다.

지난 넉 달 동안의 짧은 체류 경험에 비추면, 교수정년퇴임식에서도 송사와 답사가 시 읽기로 진행될 정도로 시 쓰기와 낭송이 네덜란드에서는 어느 정도 일상생활화된 것처럼 보인다. 내가 거주하는 라이덴(Leiden)에서는 1980년부터 도시건물의 여백에 세계 40여개 국가의 시를 그 나라 언어(원어)로 장식하는 문화운동을 시민단체가 주관하여 전개해 왔다. 13년에 걸쳐 총 101편의 시로 도시를 시인의 마을로 색칠하는 행사는 전체 시를 담은 책자 《벽 위에 쓴 시(Dicht op de Muur: Gedichten in Liden, 1992)》의 간행으로 완성되었다. '대안 이미지'(Tegen-Beeld, Counter-Image)라는 주관예술단체의 명성에 어울리도록, 미운 현실에 대항하는 질서를 꿈꾸며 억압에 맞서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헌신하는 내용을 주제로 하는 세계적인 시들이 선정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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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필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던 청교도들이 일시 피난, 정착했던 '망명객의 도시 = 라이덴'이라는 오래된 명성과 잘 어울리는 도시 프로젝트인 셈이다. 필자가 책자를 (네덜란드어를 모르니까) 대충 살펴보니까 아쉽게도 한국시인의 작품은 보이지 않았다.
라이덴(Leiden)에서는 1980년부터 도시건물의 여백에 세계 40여개 국가의 시를
그 나라 언어(원어)로 장식하는 문화운동을 시민단체가 주관하여 전개해 왔다.
사진 출처 - 필자

'더치페이'라는 신조어를 잉태할 정도로 셈이 정확하고 실용적인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시는 물과 기름같이 어울리지 않는 이물질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어쩌면 시를 쓰고 읽는 행위는 천박한 현실과 낯 가름하고 더 좋은 내일을 다짐하는 일상적인 업무와 역사적 과제의 일종이 아닐까. 이런 명분을 담고, 네덜란드인들의 문학 사랑을 흉내 내며, 나의 문학청년 시절의 결기를 되살려, 오늘은 독자 여러분들과 한 편의 시를 읽으며 올해를 환송하고자 한다. 멀리서 기원하오니, 부디 겨울의 남은 추위를 잘 이기시고 새해에는 행운과 기쁨으로 가득 찬 또 다른 나날이 되옵소서.
교생실습



아마도 일천구백팔십일년 봄이었겠지(요).

내가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얻기 위해 교생실습을 나간 곳은
서울시내에서 축구와 주먹으로 손꼽히는
어느 공고 야간 졸업반

영문도 모르고 다닌다는 영문학과 퇴폐총각 샘
터벅머리 머시마들과 함께 공부한 것은

보이스 비 엠비셔스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뛰누나
이 따위 머리 쥐나는 영어문법과 독해가 아니라

컨퓨젼 윌 비 마이 에피타프
침묵이 비명을 삼켜버리고
힘 가진 놈이 제 법대로 아름답다면
지식은 한갓 라면이나 끊이면 보람이겠지

너무나도 비장(悲壯)한 음조와 노랫말을 담은
외국산 팝송 '묘비명' 이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그때는 일천구백팔십일년

내가 걸음마 할 때부터 종일 대통령이었던 농민의 아들
막걸리 대신 시바스 리걸로 잔이 넘쳐 돌아가시고
남쪽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고립되어 꽃잎처럼 스러졌네.

세계가 서울로 마구 모였다는 팔팔 올림픽은 그 다음 이야기
사우스 코리아 전직 대통령이 황혼이 깃들기 전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린 것은 아직 먼 훗날

컨퓨젼 윌 비 마이 에피타프
알고 있는 자 4월의 나무처럼 분연히 일어서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운명은 바보들의 손아귀에 (아직) 잡혀있네

우리가 견뎠던 이 땅의 혼란과 시련이 7080 운동가요
후렴처럼 반복된다면

음탕하게 늙어버린 중년 주름에 각인된
나의 부끄러운 교생실습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어머니.

(육문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