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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잼버리와 KBS 수신료(박록삼)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8-10 12:00
조회
383

박록삼 /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폭염의 무서움만큼이나 바늘로 찌르는 듯 콕콕 쏘아대는 햇볕이 매섭다. 집 밖을 걷다가 손바닥만한 그늘이라도 보이면 어떻게든 신세 지며 걸어보려 애쓰기 일쑤다. 이 날씨에 산책은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한 주일이 복판인 수요일의 산책이라니. 여전히 텁텁하나마 조금은 누그러진 여름밤 저물녘 터벅거리는 산책이라면 그나마 낫겠다. 분주한 거리이건, 한강길이건, 북한살 둘레길이건 남다른 시원함이 있다. 왠지 한 걸음 떨어져 사람과 세상 생각할 수 있어 좋고, 부질없는 고민으로 가득한 머리를 조금씩 비워낼 수 있어 나쁘지 않다. 처음으로 수요산책을 서성거리는 이의 쓸데없는 서설이다.



새만금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잼버리 대회를 둘러싼 논란이 무성하다. 숨이 턱턱 막히는 폭염 속 4만 5000명의 청소년들이 허허벌판에서 야영을 하며 지내기에 턱없이 열악한 설비, 급식 시설, 위생시설 등 준비 부족에 대한 지적들이다. 온열환자가 수백 명 속출했고, 코로나19 감염자들마저 발생한데다 성범죄 이슈까지 나왔다. 핵심 참가국인 영국, 미국의 참가자들이 연신 대회장을 떠나니 다른 국가의 참가자들 역시 동요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언론을 통제하려 한다는 불만까지 터져 나왔다.


출처 - 민중의 소리


 

스카우트 자녀를 둔 전세계 학부모들의 걱정거리로 떠오르면서 ‘대한민국 국격 추락 행사’ 등 비난과 불만이 폭주했음은 물론이다. 대통령실에서는 “지금은 책임 문제를 거론하기보다 행사를 잘 끝내야 한다”면서도 “전임 정부에서 5년 동안 준비한 것”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어쨌든 윤석열 대통령이 “현장의 문제점을 모든 정부가 총력을 다해 즉각 해결하라”고 지시하며 한덕수 국무총리,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박보균 문체부 장관 등 국무위원들이 현장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새만금 젬버리 대회 주관방송사인 KBS는 대회 시작 하루 전 6000억원 경제 효과 등을 소개하는 보도를 했고, 이튿날에는 스카우트 출신의 세계적인 생존전문가 베어 그릴스 참가 소식을 전하며 화제성 보도를 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채 이틀도 지나지 않아 운영상 문제점 등에 대해 시설 준비 등 문제점이 속속 드러나자 비판 보도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출처 - youtube


 

국민의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 KBS가 국가적 거대 행사에 그 의미, 정당성, 향후 과제를 꼼꼼히 분석해서 알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게다. 이는 당대 정권의 눈치를 보거나 국정홍보를 하는 것과 궤를 달리하는 일이다. ‘김비서(KBS의 별칭)가 알아서 정부에 긴다’는 식의 비난은 억울할 일이다. 물론 이와 더불어 국가와 관련된 이슈에 문제가 드러났을 때, 혹은 구조적 문제를 발견했을 때 그에 대한 지적 및 개선 보완을 위한 취재 보도를 하는 것 또한 너무도 당연하다.



공영언론이라 함은 언론사 소유 구조 또는 경영 방식에 대한 개념만은 아니다. 언론이 공공성, 시민 책임성, 정치 독립성 등등의 가치와 원칙 속에 국가적 아젠다, 시민적 아젠다를 다룰 때 상업적 이해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보장하는 대원칙의 구현 형식인 것이다.



출처 - SBS뉴스


 

월 2500원 수신료의 법적 의미 또한 그 위에서 존재한다. 영화 티켓 값 혹은 넷플릭스 컨텐츠 이용요금 등과 달리 KBS를 봤기 때문에 내는 시청료가 아님은 자명하다. 하지만 늘 여야간 공수 교대되는 정치적 공격에 의해 이 근본적 개념과 원칙은 헷갈려지기 일쑤며 정서적 반감에 부닥치곤 한다. 41년 동안 제자리 걸음인 수신료 인상은 KBS의 숙원 과제였지만 번번이 좌절됐던 언감생심의 일이었다.



오히려 거꾸로 이번 정부에서는 전기요금과 합산 고지되던 수신료를 아예 분리 징수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담은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정부여당 고위관계자는 마치 수신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발언을 하기까지 했다.



출처 - MBC뉴스 youtube


 

정부 입장에서 일방적이고 졸속적으로 추진하는 배경은 분명하다. 입 안의 혀처럼 굴어야 할 KBS의 보도가 영 시원치 않거나 못마땅한 탓이다. KBS 내부의 원인도 명확할 것이다. 국민의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으로서 수행해온 역할과 과제에 대한 성찰 부족 및 평가와 혁신이 부족한 탓일 테다. 언론의 공공성을 제대로 충실히 수행하고 있느냐는 존재 필요성에 대한 근원적 질문 앞에 국민들을 이해시킬 만한 답을 내놓지 못해온 탓이다.



다시 폭염 속 젬버리. 어떻게든 12일까지 명맥은 이어가겠지만, 파행 자체는 막을 수 없게 됐다. 더 이상의 실질적 피해가 없길,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후진국가의 모습으로 남지 않길 바랄 따름이다. KBS 수신료 분리 징수 역시 국무위원회를 통과한 만큼 현실이 됐고, 향후 수신료 수입은 절반 가까이 줄어들며 현실적 파장이 KBS를 덮치게 됐다. 공영방송의 존립 근거 및 수단이 사실상 없어지는 일임에도, 그래서 공영방송의 공적 책임이 형해화할 위기임에도 졸솔적인 준비로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젬버리 대회가 그랬던 것처럼 공영방송의 망가짐 역시 책임과 탓을 논하기 전에 공영방송의 필요성과 역할, 그리고 운영 근거와 방법에 대한 차분한 사회적 논의를 진행해야 할 때다. 엎질러진 물이라도 주워 담을 수 있다면 주워 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