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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시지탄, 영아살해죄 폐지(서보학)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7-24 10:26
조회
579

만시지탄, 영아살해죄 폐지


서보학 / 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지난주 국회에서 형법의 영아살해죄를 폐지하는 형법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최근 줄을 잇고 있는 영아살해 사건에 대한 국회 차원의 대응이라 할 수 있다. 형법에서 영아살해죄 조항을 삭제하는 것은 앞으로 영아살해죄를 일반 살인죄로 취급하겠다는 의미이다(새로운 법의 시행은 공포 6개월 후이다. 또한 이번에 영아유기죄도 함께 폐지되었기 때문에 앞으로는 영아유기도 일반유기죄로 처벌된다). 그동안 형법은 영아의 목숨을 일반인의 목숨과는 달리 취급하고 있었다. 생명은 형법의 모든 법익 중 최상위의 법익이다. 사람 각자의 생명은 고유한 존재가치가 있어서 상하귀천이 있을 수 없고 타인의 생명과 비교교량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 생명의 가치는 그 자체로 귀하고 독보적이기 때문에 인종, 국적, 나이, 성별, 빈부, 사회적 지위나 역할에 따른 차이가 있을 수 없고 건강한 사람과 병약한 사람의 생명에도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당연히 영아와 성인의 생명에도 차이가 있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런데도 형법은 일반 살인죄의 경우 5년 이상의 유기형, 무기, 사형으로 처벌함에 반하여 영아살해죄의 경우에는 10년 이하의 징역으로 훨씬 가볍게 처벌하고 있었다.


 

출처 - 모두서치뉴스


 영아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생명의 가치는 똑같은데 왜 이렇게 달리 취급하였던 것일까? 우리나라에서는 형법이 제정된 1953년부터 영아살해죄 규정이 존재하였다. 외국에서는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이 영아살해죄 감경규정을 두고 있었으나 90년대 들어 폐지하였고, 마비키라는 영아살해의 풍습이 있었던 일본 형법도 영아살해에 대해 별도의 감경규정을 두고 있지는 않다. 반면 오스트리아 및 스위스 형법은 여전히 영아살해를 일반 살인에 비해 경하게 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영아살해를 일반 살인에 비해 가볍게 처벌하는 이유는 산모를 포함한 직계 존속이 처한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환경 및 영아의 개인적 특성과 연결되어 있다. 즉 영아살해죄는 사생아, 혼외자,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 질환·장애를 가진 생명, 극심한 경제적 곤란 등의 사유 때문에 영아의 정상적인 양육이 어렵다고 판단되어 출산 직후 어린 생명을 살해하는 경우에는 성립하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는 오랜 시간 유지되었던 남아 선호 사상 때문에 여아를 살해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러한 사유 때문에 영아를 살해하는 경우에는 산모와 직계존속에게 특별히 참작할 만한 사정이 있다고 보아 가볍게 처벌할 수 있는 별도의 감경규정을 입법자가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영아를 독립된 객체가 아닌 부모의 부속물로 보았던 권위주의 사회의 시각이 입법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출처 - 노컷뉴스


 생각해 보자. 영아는 부모의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생존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이다. 스스로는 반대의사나 저항의 몸짓 한번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이런 영아를 보호자가 살해하는 것은 비난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오히려 중하게 처벌되어야 마땅하다. 직계존속에 대한 범죄를 패륜범죄로 보아 중하게 처벌하는 것이 마땅하다면 성인의 보호 없이는 일순간도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영아를 살해하는 것 역시 패륜범죄로 보아 중하게 처벌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형법은 영아의 생명가치를 낮게 보고 영아살해를 가볍게 처벌하여 왔던 것이다. 순전히 성인의 사정 때문에 영아의 목숨을 뺏는 것을 일정 부분 정당화 시키는 것이 과연 용납할 수 있는 일인가?


 이렇듯 지난 70년간 존치되어 왔던 영아살해죄 규정이 우리 사회에서 영아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성인의 곤란한 형편에 따라서는 빼앗아도 된다는 왜곡된 법의식과 생명 경시 풍조를 조장하여 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언론의 분석에 따르면 실제 최근 5년 법원의 재판에서도 영아살해ㆍ살해미수 사건에서 가해자의 절반이 집행유예로 풀렸났고 유기형도 대부분 3년 이하의 가벼운 형이 선고된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살인죄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관대한 처벌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영아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면 이는 필연적으로 영아유기 및 아동 학대의 증가로도 이어질 수밖에 없다.


 매년 로스쿨에서 형법각론의 영아살해죄를 강의할 때마다 학자로서, 성인으로서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만 했다.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의 생명에 대한 침해를 가볍게 여기면서 과연 우리 사회가 인간의 인권을 이야기하고 생명 존중을 이야기할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시지탄이지만 영아살해죄의 폐지에 백번 찬성한다.


 다만 영아살해죄의 폐지는 현시점에서 국회가 할 수 있는 가장 손쉽고 비용이 들지 않는 저렴한 조치에 불과하다. 예상컨대 국회는 이것으로 자기의 할 일을 다한 것으로 생각하고 더 이상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영아살해죄의 폐지는 영아들의 생명을 두텁게 보호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은 것에 불과하다. 후속조치가 계속 이뤄져야 한다. 만약 여기서 멈춘다면 그것은 국회의 심각한 직무해태, 직무유기에 해당할 것이다.


출처 - 의협신문


 우선 국회에서 낙태죄에 대한 후속 입법이 신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9년 기존의 낙태죄 규정이 태아 보호에만 치우쳐 임부의 자기결정권을 보호하기에는 미흡하다는 이유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2020년까지 낙태죄 규정을 개정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국회는 현재까지 이 문제에 대해 손을 놓고 있다. 미국의 낙태죄 논쟁에서 보듯이 새로운 낙태죄 규정을 만드는 과정에서 매우 격렬한 사회적 논쟁이 예상되기 때문에 일부러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낙태죄 규정은 효력을 상실하였고 낙태는 불법도 합법도 아닌 상황에 놓여 있다. 낙태는 처벌도 받지 않지만 합법적인 의료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임부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많은 사비를 들여 낙태하거나 그럴 형편이 되지 않는 임부들을 비의료적인 방법으로 위험한 낙태를 시도하고 있고, 그렇지 않으면 낙태를 포기하여 영아를 출산한 뒤에 살해 및 유기로 나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국회의 직무유기가 임부들을 위험한 낙태, 원치 않는 영아 출산과 영아살해ㆍ유기로 내몰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국회는 하루빨리 공론화 과정을 거쳐 태아의 생명 보호와 임부의 자기결정권을 균형 있게 보호할 수 있는 낙태죄 규정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나아가 정부와 국회는 임부들이 가능한 한 태아의 생명을 지키고 영아를 출산해 건강하게 키울 수 있도록 사회적ㆍ문화적ㆍ경제적 기반을 조성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임부들이 태아ㆍ영아의 생명을 지키겠다는 용감한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출산과 양육에 따른 부담을 사회가 함께 나누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출생통보제ㆍ보호출산제의 도입 논의도 장단점을 고려해 적정한 방법으로 도입을 서둘러야 하고 위탁가정제도의 활성화 방안 등도 마련되어야 한다. 강한 처벌만으로는 영아의 생명을 보호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한 아이를 낳고 키우는데 사회 전체, 사회 구성원 전체가 나서야 한다. 영아의 생명을 보호하고 키우는 것은 하늘이 우리 어른들에게 내린 신성한 의무이다. 이번 형법 개정이 그 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