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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석방 없는 무기형’ 도입에 대한 고민(서보학)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9-11 11:23
조회
145

서보학 / 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출처 - 노컷뉴스


법무부는 최근 한국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묻지마 범죄에 대한 대책으로 가석방 없는 무기형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1998년 이후 사형 집행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함부로 인명을 살상하는 중범죄자들에 대한 형벌의 엄위성(嚴威性)이 떨어진다고 생각한 법무부는 사형 못지않은 위하력(威嚇力)을 가진 대체 형벌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지금 사회와 국회의 분위기로 봐서는 입법이 실현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많은 형법학자ㆍ범죄학자들이 연구에서 언명한 것처럼 사형ㆍ무기형과 같은 중형은 일반인들의 믿음과는 달리 강한 범죄억지력을 갖지 않는다. 사형제를 폐지한 많은 나라에서 중범죄가 급증하였다거나 반대로 사형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에서 중범죄가 의미 있는 수치로 감소하였다는 증거가 통계로 확인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 경향신문


전문가들은 최근의 묻지마 범죄의 근본 원인이 사회적 단절에 있다고 지적한다. 현대사회가 경제적으로는 풍요해졌지만 심각한 부의 불평등, 배금주의 만연과 인간성 상실, 극심한 경쟁관계에서 오는 실패와 좌절, 사회적 관계의 소외ㆍ단절로 인한 스트레스와 우울증 증가 등 다양한 사회적 병폐가 극단적 분노와 증오 표출의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폭넓은 사회안전망을 갖추기 위한 범국가적ㆍ사회적 대처가 필요한 상황에서 단순한 처벌의 강화는 단편적이고 부정확한 대응이라고 지적한다. 묻지마 범죄를 억제하기 위해 처벌 강화에 매달리는 것은 잘못된 처방과 대응일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의 유명한 형법학자 프란츠 폰 리스트가 남긴 “형사정책은 사회정책의 최후 수단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왕 논의의 물꼬가 터진 상황이니 가석방 없는 무기형의 도입이 필요한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현재 사형 집행이 중단되어 있는 상황에서 20년의 형기를 살면 가석방이 될 수 있는 무기형은 연쇄살인ㆍ잔혹한 살인과 같은 중범죄에 대응하기에는 미흡한 형벌이라는 지적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가석방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함으로써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잔혹한 생명 침해 범죄를 저지르고 개선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 중범죄자를 영원히 사회와 분리하는 것은 악행에 대한 응보(應報)의 관점과 선량한 시민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관점에서는 적정하고 필요한 형벌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전문가들은 가석방 없는 무기형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출처 - 연합티비뉴스


앞서 언급한 형법학자 리스트가 형법에 있어서 목적형 사상을 주장한 이래, 오늘날 국가 형벌의 근본 목적이 단순히 응보와 위하(威嚇)라는 일반예방의 목적을 넘어 범죄인을 개선ㆍ교화시키는데 있다는 특별예방주의가 확고한 원칙으로 자리 잡고 있다. 범죄인의 개선ㆍ교화를 위해서는 교정당국의 노력ㆍ지원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동인(動因)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겠다는 재소자 스스로의 의지일 것이다. 그런데 형법상 재소자에게 갱생의 의지와 동기를 부여하는 가장 결정적인 장치가 바로 가석방제도이다. 수감기간 모범수로 생활하고 교정의 의지를 보인다면 정해진 형기보다 일찍 석방되어 가족과 사회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을 주는 제도이다. 이렇게 희망이 주는 교정효과는 가장 중한 범죄를 짓고 무기형에 처해진 재소자에게도 예외일 수는 없다. 20년 동안 모범수로 살면서 교정의 의지를 보인다면 남은 생은 사회에서 가족ㆍ친구들과 함께 보낼 수 있다는 희망이 무기수에게도 개선ㆍ교화의 강력한 동기가 되는 것이다. 반면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고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도 영영 가족ㆍ친구의 곁으로 복귀할 수 있는 희망이 차단된 재소자는 갱생의 의지를 갖기가 어려울 것이고 평생 교정기관의 어려움을 가중하는 골칫덩어리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에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사회와 격리 시켜 응보와 위하라는 일반예방의 목적만을 수행하는 종신형이 과연 현대 형벌 제도의 이념에 부합하는 형벌일까에 대해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나치 집권 하에서 사형제도의 폐해를 수없이 경험한 독일은 2차대전 종전과 함께 사형을 폐지하고 가석방 없는 무기형(절대적 종신형)을 도입하였으나, 1978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가 “종신형을 선고받은 자도 근본적으로 다시 자유를 찾을 가능성이 있어야 하며, 특별사면 가능성 하나만으로 불충분하다”고 위헌결정을 내리면서 가석방이 인정되는 상대적 무기형으로 변경하였다. 또한 2013년 유럽인권재판소도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 유럽인권보호협약에 어긋난다며 여러 나라에 개선을 권고한 바 있다. 같은 이유에서 프랑스, 이탈리아 등도 사형제 폐지 후 가석방 없는 무기형을 도입하였다가 인권침해 논란으로 폐지한 바 있다. 이같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의 경험은 석방의 가능성이 차단 된 무기형이 인간의 존엄성에 기초한 헌법 이념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출처 - 한국일보


다만, 현시점에서 우리나라에 가석방 없는 무기형을 도입할 필요성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사형을 대신하는 대체형벌로서 도입될 경우이다. 현재 법무부는 사형을 그대로 존치하면서 가석방 없는 무기형을 도입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고, 여기에 대해서는 최근 대법원이 사형을 대체하는 경우에만 가석방 없는 무기형의 도입을 찬성한다는 의견을 표명한 바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1998년 이후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있어 실질적인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되고 있다. 참고로 한국 정부는 지난 2020년 유엔 제75차 총회의 사형집행 모라토리엄(사형집행정지선언) 결의안에 찬성한 바 있고, 2010년 유럽연합과의 FTA 협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는 유럽평의회에 사형불집행 약속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사형불집행의 약속이 지켜지고 있으나 형법에 사형제도가 존치되고 있는 한 언제까지 사형불집행이 계속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정치적 환경ㆍ사회적 분위기의 변화에 따라 불시에 사형집행이 재개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통합을 이뤄내야 내야 할 일국의 대통령인지 아니면 강력부 검사인지 아직 정체성을 알 수 없는 윤석열 대통령의 막무가내식 통치 철학과 국정 운영 스타일을 고려하면 어느 날 갑작스럽게 사형집행이 재개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불안한 상황이다. 최근에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전국 교도소 내 사형 집행 시설의 점검을 지시해 불안감을 자극하고 있다. 지난 1997년 12월 김영삼 정부도 23명에 대해 한꺼번에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던가. 공포정치를 노리면서 치안 확립을 핑계로 사형대기자 58명에 대한 사형 집행 명령이 전격적으로 내려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출처 - 가톨릭평화신문


아무 대책 없이 사형을 폐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반 시민들의 반대의견이 높은 것이 현실인 만큼 이번 기회에 사형을 폐지하는 대신 가석방 없는 무기형을 도입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18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사형을 대체할 수 있는 적절한 형벌을 도입하면 사형폐지에 찬성한다는 시민들의 의견이 3분의 2에 가까웠다. 지난 17대 국회 때인 2004년에는 여ㆍ야 의원 157명의 서명으로 가석방 없는 무기형을 대체 입법으로 하는 사형제 폐지 법안이 발의된 바도 있었다. 이 법안은 당시 재적 국회의원 과반이 서명해 통과 가능성이 컸었으나 유영철 연쇄살인 사건 등 잔혹 범죄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결국 입법이 무산되었다. 현실에서 발생하는 여러 중범죄와 시민들의 불안감을 생각할 때 사형의 전격적 폐지가 쉽지 않은 만큼 사형을 대체하는 형벌로서 가석방 없는 무기형의 도입은 고려할 수 있다. 다만 가석방 없는 무기형은 다수의 인명을 살해하고 살해 방법이 매우 잔혹한 사건에 한해 한정적으로 선고될 수 있도록 제한할 필요가 있다. 그 다음은 가석방 없는 무기형이 우리 헌법 이념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헌법재판소의 판단에 맡기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