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횡단보도와 신뢰(황문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9-20 09:45
조회
160

황문규 / 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


출처 - 광주드림


한때 갑질은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사안이었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여전히 비난의 손가락질을 받기 십상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대개 ‘을’로 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갑질이 아니라 갑질을 당할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도로에서 운전자는 결코 ‘을’이 아니라 (보행자와의 관계에서) ‘갑’이다. 실제로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 어쩌다 사람이 지나가도록 일시정지한 차량을 마주친 보행자는 고맙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횡단보도를 (조금이라도 차량의 일시정지 시간을 줄여주기 위해) 뛰어 지나가는 상황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을 정도이다. 보행자를 배려하는 차량의 일시정지 풍경이 그만큼 일상적으로 익숙치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지난해말 기준 대한민국의 차량등록 대수가 2550만 3000대이니까 대부분의 성인 남여는 운전자에 해당하고, 도로에서 ‘갑’일 확률도 높다. 운전자도 때로는 보행자가 될 수 있을진대 일단 운전자가 되면 차량이 우선이고, ‘사고나면 사람만 손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보행자에게 ‘갑질’을 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가장 신뢰할 공간이 되어야 할 횡단보도가 보통사람을 갑질의 주체로 만드는 공간이 되고 있다. 필자가 지난해 경남 창원 소재 경남자치경찰위원회 재직시 경남신문 촉석루 필진으로 참여하여 ‘횡단보도’를 기고(2022. 9. 22.자)한 이유다.


출처 - 뉴스데일리


도로교통법에서는 보행자가 도로를 횡단할 수 있도록 안전표지로 표시한 도로의 부분을 ‘횡단보도’라고 정의한다. 보행자가 길 건너편으로 안전하고 최단 거리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횡단보도를 이용하는 것이 최선이다. 횡단보도는 보행자의 안전한 차도 횡단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로교통법에서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통행하고 있거나 통행하려고 하는 때에는 그 횡단보도 앞에서 일시정지할 것을 운전자에게 강제하는 이유다. 그런데 필자가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으면 그에 아랑곳없이 무섭게 달려오는 차량으로 인해 죽을까 겁이 날 정도이다.


실제로 보행자 교통사고는 2021년 기준 전체 교통사고의 17.6%인 35,665건이고, 사망자는 전체의 34.9%인 1,018명에 달한다. 또한 (무단횡단을 포함한) 횡단 중 사고는 전체의 36.9%에 이른다. 가해운전자는 안전운전의무불이행(66.6%), 보행자보호의무위반(17.4%) 순으로 법규를 위반한다는 통계다. 이러한 통계는 횡단보도가 운전자와 보행자에게 상호 신뢰하는 공간이 아니라 동상이몽의 공간임을 말해준다.


사실 자동차로 인한 교통사고의 영역에서는 신뢰원칙을 전제로 처벌을 제한하고 있다. 내가 교통규칙을 준수하면 다른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로 교통규칙을 준수하리라는 것을 신뢰한다는 것이 신뢰원칙이다. 이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고속도로에서 무단횡단하는 보행자가 있을 것이라고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듯이,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차량이 일시정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 (특히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 보행자 앞에서 차량이 당연히 일시정지할 것으로 생각하는 이는 많지 않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우리에게 주는 편익 못지않게 수반하는 위험도 크다. 그러나 그 편익을 외면한 채 살아가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신뢰원칙을 전제로 일정한 위험을 허용하게 하자는 일종의 타협책이 이른바 ‘허용된 위험’ 이론이다. 사람의 안전보다 교통을 더 중시하는 우리나라 운전자들이 상기해야 할 이론이다. 횡단보도를 신뢰의 공간으로 생각하지 않는 운전자는 엄히 처벌받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출처 - KBS뉴스


최근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어린이를 상해·사망에 이르게 한 경우 가중처벌한다는 이른바 ‘민식이법’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합헌 결정을 했다. 이 결정에서 헌법재판소는 “아직도 보행자보다 차량을 우선시하는 후진적인 차량 중심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서슴치 않았다. 대한민국이 적어도 교통문화 분야에서는 아직도 저신뢰 사회임을 말해주고 있다.


미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1995년 ‘트러스트’(신뢰)라는 명저를 내놓으면서, 대한민국을 대표적인 ‘저신뢰 국가’로 분류했다. 대한민국은 사람과 사람 간의 믿음인 신뢰가 부족한 사회라는 지적이다. 25년이 지난 2020년경 코로나19(COVID-19)에 대한 방역상황을 본 후쿠야마 교수는 대한민국을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갖춘 국가로 평가하기도 했다. 시민들이 국가의 방역을 신뢰했기 때문에 나온 평가일 것이다.


출처 - 뉴스핌


대한민국 도로 위에서는 아직도 사람의 안전보다 차량의 흐름이 더 우선시되고 있다. 끔찍한 (어린이) 교통사고를 경험한 시민들이 사람의 안전을 울부짖을 정도로 강조하고, 도로교통법도 이를 반영하려고 노력하지만, 도로 위의 ‘갑질’에 익숙한 운전자들에게 이는 오히려 갑질을 누릴 수 없게 하는 불편함으로 인식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속과 처벌도 필요하지만, 사람들의 인식 전환이 그 무엇보다도 필요한 이유다. 이미 도로 위의 갑질에 익숙한 운전자들의 인식을 전환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로 위의 ‘을’의 지위에 있는 어린이 때부터 체험교육을 통해 사람의 안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우선시하는 경험을 쌓게 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독일에서처럼 교통안전교육 차원의 어린이 자전거 운전면허시험, 경남자치경찰위원회의 어린이 자전거면허시험, 또는 전동 킥보드(바이크) 운전시험 등등. 건강한 선진국이 되기 위한 대한민국의 신뢰자본을 쌓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