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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않을 수 없으나 걱정하지 말자.(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9-05 10:13
조회
195

조광제 / 철학아카데미 대표


 

1. 민주 세력에 대한 노골적인 투쟁 선포다.


요즘 한국 정치로 인해 매우 심란하다. 꼭 짚어 말하면, 대통령 윤석열을 비롯한 동조 세력의 발언과 행위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위한 모든 고난과 승리의 역사를 지우는 것도 모자라 능멸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공산 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습니다.” 이 무슨 해괴한 발언인가? 제아무리 형벌을 주관하는 검찰 권력을 휘두른다고 해도 이렇듯 오늘날의 민주 국민의 위력을 거스르는 발언을 느닷없이 그 스스로 할 수는 없다. 어디서 어떻게 해서인지 알 수는 없으나 크게 외부에서 사주받았음에 틀림이 없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다. 반공주의의 이념을 노골적으로 정면에 내세우니 그 사주의 배후는 100년 이상 공산주의와 싸운 미국의 신보수주의 내지는 뉴라이트 세력이라 짐작된다.


출처 - 경향신문


역시 100년 전쯤의 일이었던 홍범도 장군의 소련 공산당 가입을 문제 삼아 육군사관학교에 세운 그의 흉상을 철거함으로써 자신이 반공주의의 전사임을 국민에게 확인시키고자 한다. 이는 이중적인 책략이다. 그럼으로써 홍범도 장군의 목숨을 건 반일 독립 투쟁에 서려 있는 정신을 아울러 국민의 뇌리에서 아예 지워버리려 하기 때문이다. 이는 국민의 85%가 반대하는 일본의 핵 오염 폐수의 무단 해양 방출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자신의 친일 행위와 여지없이 겹친다. 강제징용 배상을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서 제3자 변제 가능성 운운하면서 일본 기업의 책임을 면제하는 그의 행위와도 겹치고, 동해를 일본해라고 명기하는 미국에 대해 제대로 항의하지 못하는 그의 무책임한 행위와도 겹친다. 말하자면, 이 일련의 사건들은 무도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반민족적이고 반역사적인 태도를 여실히 확증한다.


해양 세력인 일본이 제국주의적인 발상으로 조선의 한반도를 침략하여 대륙 진출을 획책한 것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그로 인해 우리 민족이 지난한 고통을 치른 일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대통령 윤석열과 그의 정치 집단은 반공주의를 전면에 내세워 그 배후에 깔린 미국주의와 그 배후가 표면으로 드러난 일본주의로 무장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반도 주민의 삶을 근원적으로 기형적으로 만든 남북 분단 체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그동안의 반전 · 평화를 기반으로 한 정치 외교 문화적인 노력의 싹을 아예 잘라버리고자 한다. 이는 어떤 사안이건 전 정권을 탓하며 그 긍정적인 노력조차 아예 부정하고자 하는 데서 잘 나타난다. 그 대신 반공주의에 입각한 그들만의 자유를 내세워 전쟁 불사의 불안과 공포를 심어 넣고 그리하여 국내에서의 불리한 그의 정치적 입지를 확장하고자 한다. 그뿐만 아니라, 반공주의 이념의 책략으로 그와 그의 가족을 둘러싼 각종 범죄와 비리에 대한 국민의 의혹을 잠재우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라도 동원하겠다는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결의에 찬 의도를 노골적으로 내보인다. 이는 “공산 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이 여전히 활개 치고 있습니다.”라는 그의 말에 압축되어 있다.


 

2. 진정한 이념은 고난 극복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우리 각자의 삶은 물론이고 공동체의 삶은 더욱더 수없이 많은 사실로 점철되어 있다. 개인이건 공동체건 간에 이 사실들을 의미로 바꾸어내는 역사를 형성함으로써 그 존재를 유지하고 확장한다.


자기의 삶에 의미 부여를 할 수 없다고 여겨질 때 불안과 절망이 다가든다. 오늘 아침 일찍 발 디딜 틈 없는 전철을 타고 출근하여 일하고 또 마찬가지로 북적대는 인파 사이로 곡예를 하듯 해서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에 대해 긍정적으로 의미 부여를 할 수 없다면 나의 삶을 어떻게 지탱할 수 있겠는가? 집으로 돌아와 텔레비전에서 또는 유튜브에서 방영되는 사건들을 접하면서 그 사건들에 긍정적인 의미 부여를 할 수 없을 때 과연 나의 삶이 지탱될 수 있을 것인가?


개인의 의미 부여 활동은 개인의 의도와 의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단독의 사실도 없고 단독의 의미도 없다. ‘단독’이란 말은 말 그대로 ‘오직 그것 자체만으로’라는 뜻을 지닌다. ‘오직 나만의 것’이라고 할 때 성립함 직한 단독의 나, 즉 단독의 자아도 없다. 철학자 키르케고르가 제시한 ‘단독자’는 없다. 만약 있다면, 그건 부정적인 반동에 따라서다. 무엇에 대한 반동인가?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나의 자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반동이다. 말하자면, 자아가 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 얽히는 가운데서만 성립한다는 사실에 대한 반동이다. 또 달리 철학적인 품새를 더해 표현하자면, 본질적으로 대타적(對他的)일 수밖에 없는 자아에 대한 부정적인 반동이다.


출처 - 글로벌이코노믹


외부의 사회현실이라는 객관적 장(場)에서건 내부의 심리 현실이라는 주관적 장에서건, 모든 사실은 긍정적 또는 부정적 방향의 의미를 띤다. 일본의 핵 오염 폐수의 무단 해양 방류가 갖는 부정적인 의미도 있고, 또 그로 인해 내 마음속에서 이는 분노가 갖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외부의 객관적인 장에서 생기는 의미와 내부의 주관적인 장에서 생기는 의미가 연결되어 양쪽 모두에 일정하게 변형이 일어남은 물론이다.


우리는 나의 외부 현실에서 생겨나건 내부 현실에서건 생겨나건 모든 사실이 갖는 부정적인 의미를 부정하고 극복함으로써 최대한 긍정적인 의미를 형성하고자 알게 모르게 죽으라고 노력한다. 긍정적인 의미들이 축적됨으로써 나의 존재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설립되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의미들이 축적되는 일이 지속하면 그 겹침과 어긋남이 겹겹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겹침의 한가운데서 일정하게 가치가 성립한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사회현실의 객관적인 의미와 개인의 주관적인 의미는 연동해서 성립해서 작동한다. 그래서 각자가 형성하는 주관적인 존재의 가치는 공동체의 객관적인 존재의 가치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주관적인 내 존재의 가치가 지속할 때, 그 가치는 삶의 현실을 바라보는 일정한 관점을 주도한다. 그리하여 가치관, 인생관, 나아가 세계관이 성립한다. 각자가 갖는 가치관 또는 세계관은 다른 사람의 것들과 때로는 조화를 이루기도 하지만 때로는 충돌한다. 이를 조정하고 조율하는 기나긴 과정을 통해 집단 공동체가 형성된다. 한 집단 공동체를 지탱하는 가치관은 공동체에 속한 개인들이 가치관을 형성하고 작동시킬 때 공통의 힘을 발휘한다. 그리하여 민족에 따른 공동체 의식도 생겨나고 종교에 따른 공동체 의식도 생겨나고, 나아가 국가에 따른 공동체 의식도 생겨난다. 이 공동체 의식들은 기본적으로는 정치 경제적인 삶을 기반으로 하면서 사회 문화 공동체의 형태를 띤다. 사회 문화는 공동체가 수행하는 의미 부여의 제반 정신적 활동이 목표로 삼아 객관화하고 표현하는 역동적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가치관이 공고해지면 신념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공동체의 가치관이 공고해지면 이념으로 작동한다. 그러니까 신념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이고, 이념은 공동체적이고 객관적이다. 서로 다른 신념이 충동하면 자칫 목숨을 건 투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공동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념의 충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신념 또는 이념의 충돌은 곧 존재의 궁극적인 가치와 의미를 둘러싼 충돌이고, 만약 그 충돌에서 나 또는 우리의 존재 가치와 의미가 무너지면 삶을 위한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되고 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념 또는 이념의 충돌과 투쟁이 일어날 때 과연 어느 쪽이 이기고 어느 쪽이 패배할 것인가? 핵심 기준은 그러한 신념과 이념을 형성하는 데에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어떻게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성찰하고 반성하며 노력했는가다. 외부에서 주입된 신념 또는 이념은 행위자를 수동적으로 맹종하게 만든다. 그들 행위자가 일순간 감정적인 충동에 따라 미쳐 날뛸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목숨을 건 결정적인 순간에는 두려움으로 인해 패퇴할 수밖에 없다.


 

3.능동의 민주 진보는 이길 수밖에 없다.


민주 공화국에서 국민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은 통치자도 아니고 대표자도 아니고 대리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통령은 자신이 대리하는 국민의 국가적인 삶과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최대한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할 책무가 있다. 원리적으로 보아, 그 책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무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들의 삶과 존재에 대해 주체적이고 능동적이고 자율적으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대통령은 모름지기 국민이 역사를 통해 자발적으로 온갖 난관을 뚫고 형성한 공동체의 가치와 의미를 존중하고 더욱 앙양하는 방향으로 밤낮없이 심혈을 기울여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 윤석열은 ‘반국가세력’ 운운하면서 우리 민족과 자립성과 자율성을 파괴하고자 하고 민주화를 위해 지난하게 싸워 이룩한 국민의 진보적인 이념과 평화 평등에 입각한 자유의 이념을 파괴하고자 한다.


출처 - 가톨릭일꾼


대통령 윤석열은 저 스스로 민주화를 위해 싸운 적도 없고, 민족의 평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싸운 적도 없고, 하다못해 심지어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를 분쇄하기 위해 싸운 적도 없다. 그런 그가 내세우는 반공주의와 그 배후의 힘으로 그가 암암리에 또는 노골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미국주의와 일본주의는 철저히 외부에서 주입된 수동적인 맹종의 이념에 불과하다. 민주화와 남북 분단의 극복을 위해 오랜 세월 지난하게 싸워 몸소 밴 진보의 이념으로 무장한 민주 국민과의 목숨을 건 투쟁의 결정적인 순간에 그와 그의 세력은 두려움으로 인해 패퇴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이기지 못하는 그가 공동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민주 진보의 세력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으나, 걱정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