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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적 진실과 꿰맞추기 수사(이윤)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01-10 08:49
조회
259
이윤 / 경찰관



정치권에 법조인이 많아서 그런지 정치 관련 뉴스에 ‘실체적 진실’이 자주 언급된다. 실체적이라는 말이 꾸며주니 그냥 진실이라고 하는 것보다 꽤 멋져 보인다. 멋지면 유행을 타게 된다. 그래서 요즘 여기저기에 실체적 진실이 많이 등장한다. 그냥 진실이라고 해도 될 것을 꼭 실체적 진실이라고 앞머리를 붙인다. 그 의미에 맞게 적절히 쓰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1. 실체적 진실의 의미

‘실체적 진실’의 의미를 간단하고 쉽게 알려주는 곳을 못 찾았다. 나름대로 해석이 필요하다. 나는 수업 시간에 형사소송 이념 중 하나가 ‘실체적 진실주의’라고 하는 데서 처음 들었다. 문제는 ‘실체적(實體的)’이 무슨 뜻인지, 그냥 ‘진실’과의 차이가 무엇인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요한 순간에 내가 깜빡 졸았을 수도 있다. 일상에 잘 쓰이지 않는 실체적이란 말이 들어간 걸로 보아 아마도 일본 법률 교과서를 그대로 베낀 일본식 단어가 아닌가 싶다.


법률용어사전에 의하면 실체적 진실주의란 「(형사소송에서) 법원이 당사자의 주장, 사실의 부인 또는 제출한 증거에 구속되지 않고 사안의 진상을 규명하여 객관적 진실을 규명하려는 소송법상 원리」라고 한다. 이에 의하면 실체적 진실이란 형사소송에서 범죄 사건의 정확한 진상 또는 객관적 진실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절대적 진실, 명확한 진실 또는 그냥 진실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 의문이며, 형사소송 외의 영역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발생한 사실을 똑같이 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목격자나 피해자, 심지어 범인의 기억도 변형되고 편집된다. 요즘 가장 정확한 것은 CCTV 영상이다. 그러나 CCTV 영상이 목적이나 동기 같은 마음속까지 알려주지는 못한다. 모든 수사기관이나 법관은 최대한 실체적 진실에 수렴하기 위해 노력하나 결국 도달하지 못한다. 증거에 기초하여 사실에 최대한 가깝게 구성된 진실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2. 꿰맞추기 수사


실체적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아무리 수사를 잘 하더라도 그 결과 드러난 진실은 완벽할 수 없다. 하지만 완벽에 가까운 진실을 밝히기 위해 오래전부터 수사와 추리 방법이 개발되었다. 가추법(가설적 추리법: Abduction)은 연역법, 귀납법보다 수사에 더 적합한 추리방법이다.


가추법이란 과거에 발생한 사실에 의한 흔적(증거, 자료)을 근거로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①가설을 여러 개 만들고 → ②각 가설을 검증하거나 기각하기 위한 증거를 수집하고 → ③가설들을 채택하거나 기각하고 → ④새로운 증거에 의한 새로운 가설을 수립하고 → ⑤검증이나 기각을 위한 증거를 수집(이하 반복)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많은 가설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지고 또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와중에 가장 마지막에 살아남는 가설이 실체적 진실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는 것이다. 머리도 많이 써야 하고, 시간과 노력도 많이 들어가는 방법이다. 수사를 제대로 하면 상당히 피곤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꿰맞추기 수사도 많이 이루어진다. 흔히 와꾸(わく: 틀)수사라고도 하는데, 수사관이 초기 수집된 증거에 의해 어림짐작으로 만들어 놓은 하나의 틀(시나리오) 안에 여러 증거와 진술을 맞추어 끼워 넣는 방식이다. 틀에 맞지 않는 증거는 애써 외면하거나 버린다. 때로는 조작하기도 한다.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이 와꾸수사의 희생자가 되었다. 확증편향 때문에 한 번 만들어진 와꾸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 과거 행적이 모두 그 와꾸 안에서 나의 범죄행위를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내가 무고함을 입증할 방법은 마지막으로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많은 비극이 여기에서 나온다.


가추법이나 꿰맞추기 수사나 둘 다 가설을 설정하는 것은 같다. 하지만 가추법은 다수의 많은 가설을 설정한 후 그 전부에 대해 검증하고 기각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는 반면에 꿰맞추기 수사는 오로지 하나의 가설을 설정한 후 그 가설이 옳음을 입증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는 차이가 있다.


꿰맞추기 수사를 하는 한 실체적 진실발견이라는 형사소송 이념은 안드로메다 성운만큼 멀어지게 된다. 바쁘고 힘들어도 용의자가 범인이 아닐 가능성을 포함한 최대한 많은 가설을 수립하고, 많은 증거를 수집하여 검증해야 한다. 그렇게 수사하면 좀 늦어질 수도 있다. 그러니 수사가 좀 지연된다고 너무 재촉하고 비난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리고 제발 실체적 진실이라는 말을 아무 데나 쓰지 않으면 좋겠다. 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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