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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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찬수/ 전 강남대 교수, 현 종교문화연구원장 신정아씨 학위조작 사건의 파문이 함축하는 바는 생각보다 크다. 그것은 개인의 거짓말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내용’이 어떤지를 확인하는 데 외적 ‘형식’이면 충분하다고 간주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전형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왜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게 되었을까? 다소 과장된 해석일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진리의 기준을 우리 스스로 안에서 찾지 못하고 밖에서, 그것도 ‘대국’에서 찾아온 데 큰 문화적 원인이 있다. 실제로 유학, 불학, 도가 사상 같은 한국의 전통사상이라는 것은 다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 아니던가. 한국 최대의 사상가라고 하는 퇴계의 철학이 중국 성리학과 얼마나 다르던가. ‘작은 중국’(小中華)임을 자랑스럽게 여겨오기도 하지 않았던가. 한결같이 중국에서 배워오면서 그렇게 천년을 지내오지 않았던가. 근대에 들어 선진적인 것의 기준을 일본적인 데에서 찾기도 하다가, 이제는 미국을 위시한 구미 국가를 기준으로 진리를 판단하고 있지 않은가. 국가적인 일에 미국 눈치를 보지 않은 적이 있던가. 미국에 가까울수록 앞서가는 것이고 그만큼 객관적인 삶의 기준이 되는 분위기가 여전하지 않던가. ‘썩 그럴듯하다’, ‘멋지다’를 의미하는 ‘근사’하다는 말이 사실상 서양적인 것, 외국 것에 ‘가깝고(近) 비슷하다(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도 이런 우리네 정서를 잘 보여준다. 불행하게도 역사상 우리 안에 제대로 된 것이 있다고 자긍심을 가져본 적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동안 중국을 베껴온 것이 우리의 역사였다면, 오늘날 그 무게중심은 미국을 위시한 서양적인 데로 옮겨가고 말았다. 미국의 삼류급 선교사들이 전해준 삼류 기독교를 금과옥조처럼 붙들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실상이기도 하니 말이다. 어떤 목사가 미국에서 공부했다는 사실만으로 교회 성장의 보이지 않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로마보다 더 로마적이라는 비아냥을 가끔 듣기도 하는 한국 가톨릭이나, 중국에는 이미 없어진 공자제사(석전제)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한국 유교의 상황도 사상이나 문명을 주체적으로 소화하기보다는 큰 것을 베끼며 섬기고(事大), 그대로 모방해온 우리의 현주소를 잘 말해준다. 이것이야말로 이른바 ‘사대주의’의 전형 아니던가. 얼마나 주체적인가, 얼마나 무르익었는가, 얼마나 지행합일적인가 등이 기준이 아니라, 대국에 있는 것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내가 얼마나 대국과 가까운 사람인가가 사실상 권위를 결정하는 역할을 해왔으니, 신정아씨의 예일대 학위 조작 사건은 사실상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가짜 학위로 논란을 일으킨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이상은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는 사례들이다. 형식에 맞으면 내용이 좀 부실해도 그 형식만으로 충분히 화제가 된다. 화제의 중심에 서기위해서라도 내가 중국을, 일본을, 구미를 좀 아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한 형식을 갖추는 일이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출세하는 첩경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학문하는 이들의 독서 습관에서도 드러난다. 가령 어떤 책을 읽을 때, 과연 그 책이 읽을 가치가 있는지를 아는 제일 솔직한 방법은 당연히 그 책을 직접 읽어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읽기도 전에 가치가 있는지 확인하는 간편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책의 날개에 써있는 저자의 이력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 때 학술서의 경우라면 저자가 어디서 공부했느냐, 학위 취득 대학이나 국가가 어디냐 살펴보되, 특히 미국에서 공부했으면 일단 읽을 가치가 있겠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그 책에는 미국 학계가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그걸 읽은 것만으로도 내가 미국과 가까운 존재가 되며, 그만큼 남들에게 자신 있게 이야기할 거리도 더 생겨나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몇 마디 영어를 섞어가며 태생적인 영어 콤플렉스를 지닌 한국인의 정서를 슬쩍 건드리는 순간 그것만으로도 그이는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능력자로 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얼마나 큰 나라와 가까운 존재인지로 사회적 신분을 결정해온 우리의 오랜 문화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신정아씨가 굳이 예일대 학위증을 만들어야 했던 이유도 이와 무관할 수 없다. 더군다나 그것이 신정아씨 혼자에게만 해당하는 일이라면 사태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만 그이가 학위를 위조하고도 당당해하는 것은 자기 주변에 그런 사람이 또 있거나 적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형식이 내용과 동일시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면 충분한 사회, 분명히 그것은 극복되어야 할 저급 문화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때 이런 글을 쓰는 나는 이러한 삼류문화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음에는 나는 왜 박사공부를 하게 되었는지 써보련다.
2017-06-19 | hrights | 조회: 417 | 추천: 0
유정배/ 춘천시민연대 상임집행위원장 지난 7월 16일, 강원도의회는 의원총회를 열고 ‘동계올림픽 3수 도전’을 호소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가 신중론을 주장했지만 강원도의회는 오직 동계올림픽을 유치해야 지역경제가 살아난다며 3수 도전을 몰아갔다. 강원도민이 지난 두 차례 도전에서 동계올림픽에 대한 찬반을 넘어 묵묵히 지지해 준 것은, 그것만 되면 강원경제가 획기적으로 좋아진다는 주장에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다. 검증된 것은 아니지만 동계올림픽이 유치되면 생산유발효과, 고용창출효과, 부가가치유발액등 경제파급효과가 십수조 단위로 일어난다는 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의 청사진은 별다른 성장 동력이 없다고 느끼는 강원도민에게 매우 매력적인 호소일 수밖에 없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기원하는 깃발 사진 출처 - 뉴시스 강원도민들은 지금, 정부가 국토균형발전을 핵심정책으로 추진한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지역경제 해체 현상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있는 역설을 고통스럽게 마주 하고 있다. 수도권 과밀집중과 고삐 풀린 채 가속화되고 있는 한미 FTA 강행은 지역경제를 양극화의 어두운 골짜기로 밀어 넣으며 우리의 삶을 하루가 다르게 조이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지역경영을 책임진 지방자치단체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그것이 설사 스포츠 쇼비니즘과 손을 잡는 것이라는 비판을 불러일으키더라도 어떤 모험을 강행하게 하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국제 스포츠 행사에 주민의 열정을 동원하고 이 기회를 틈타 국가자원을 경기장 시설 건설이나 SOC(사회간접자본) 확충에 재분배 하려는 의도는 일견 당연하거나 실리적으로 보인다. ‘재수’를 하면서까지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려다 좌절을 겪은 ‘평창의 눈물’은 어쩌면, 이런 변방의 설움이 해결되지 못한 안타까움이고 그래서 더욱 우리를 아프게 하면서 ‘삼수’를 향한 오기를 낳게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계올림픽 3수 도전이 결정되는 과정을 보면 평창의 눈물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것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교만한 악어의 눈물이 사람들을 세 번째 도전으로 몰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동계올림픽 개최만이 낙후된 지역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는 협박과 다시 한번 힘을 합치면 이길 수 있다는 맹목적인 선동이 힘을 얻고 있고 신중하게 검토한 뒤 재도전을 결정해야 한다는 수준의 주장은 지역발전의 발목을 잡는 배신행위로 몰리고 있다. 동계올림픽 개최지를 결정하기 위한 IOC총회에 국가수반들이 경쟁적으로 몰려가는 현실을 보면 강원도같은 작은 지역에서 애향을 위한 유일한 길인 동계올림픽 유치에 반대 하는 것은 공동체에서 '축출당해도 쌀 만큼 큰 불경죄'에 해당 될 수 도 있겠다. 맹목적으로 국제스포츠 행사를 추종하는 태도는 이른바 대선주자를 비롯한 중앙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강원도를 찾는 정치인 마다 하나같이 동계올림픽 유치실패에 크게 낙담하고 있는 강원도민을 위로(?)하고 자신이 대권을 잡으면 반드시 동계올림픽 유치에 사활을 걸겠다고 공언한다. 그러면 지역 언론은 ‘실의’에 빠진 도민들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그렇지만 그런 위로가 진정 강원도민의 슬픔을 치유하는 처방인지, 평범한 강원도민들도 정치인들처럼 동계올림픽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궁금할 뿐이다.   강원도내 42개 시민사회단체들이 평창 동계올림픽 3수 도전문제를 논의하려는 강원도의회 앞에서 3수 반대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참으로 어쩌지 못하는 악순환의 고리인가? 이제 강원도는 다시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세 번째 도전에 나설 것이다. ‘일부’ 시민단체의 반대는 바늘 틈도 비집고 들어설 수 없는 여론의 높은 벽에 다시 좌절하고 침묵하게 될 것이다. 2007년, 과연 우리는 과연 민주화된 세상에 살고 있기는 한 걸까 ? 눈 먼 삼수생의 무한도전이 강원도민으로부터 이번에는 또 무엇을 가져갈지 눈에 훤하다. 그들은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3수 도전을 뒤로하고 지금 우선적으로 살펴야 할 것은 무엇인지, 강원도민이 진정 바라는 것은 어떤 것인지 몸을 낮추고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2017-06-19 | hrights | 조회: 421 | 추천: 0
이유정/ 변호사, 법무법인 자하연   비정규직 보호를 위해 정부가 나서야한다 - 이랜드 사태로 본 ‘비정규직보호법’   교복자율화가 시행된 1980년대에 이랜드라는 상표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아동복과 숙녀복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입을 것이 없는 사춘기 소녀들이 사촌언니와 막내이모 때로는 엄마의 처녀시절 옷까지 걸쳐보던 시절이었던지라, 청소년을 위해 만들어진 산뜻한 디자인과 색깔의 이랜드 옷은 최고의 인기품목이었다. 게다가 품질에 비해 값도 저렴해서 패션에 신경 좀 쓴다는 친구들은 이랜드 옷을 사기 위해 1시간이나 걸리는 이대 앞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이랜드와의 인연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나는뉴코아 백화점과 킴스클럽에 장을 보러 다녔으며, 아이들 옷을 사러 계절에 한번은 2001아울렛에 갔다. 얼마 전 2001아울렛에서 물건을 구입하면서 2001아울렛은 일요일에 매장을 닫기때문에 불편하다고 투덜거리자 중년으로 보이는 여성 판매원이 웃으면서 "아이구. 우리는 월급 적고힘들어도 일요일 날 쉬는것 하나 보고 여기 다녀요. 안 그러면 일요일 날 아이들도 못 챙기니까."라고 대답했다. 화장을 했어도 얼굴에 기미가 가득한 그 여성을 보면서 처음으로 나는 이랜드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이랜드 비정규직 직원들이 매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제의 발단은 비정규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비정규보호법(진짜 명칭은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보호등에 관한 법률)이다. 7월 1일부터 시행된 위 법률은 비정규직을 2년 이상고용하는 경우에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규정을 담고 있는데, 위 규정이 오히려 비정규직 노동자를 해고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는 것이다. 사용자가 편법을 사용해도 정부는 아무런 제재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법률의 시행을 앞두고 비정규 노동자들을 해고하거나 외주용역화하는 현상이 전국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이랜드 그룹도 비정규직인 계산원에 대한 대량계약 해지와 업무의 외주용역화를 추진함으로써 현재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비정규직을 진정으로 "보호"할 생각이 있었다면 이러한 규정을 어긴 사업주를 처벌하거나 제재할 수 있는 규정이 있어야 하는데, 워낙 비정규직법안 자체가 타협의 산물이다보니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내용이 되어버려 결국 가장힘없는 비정규노동자들에게 그 피해가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서울 잠원동 이랜드 뉴코아 지하매장 점거농성 중인 이랜드 노조원들이 비정규직 철폐를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듣자 하니 200여명의 노동자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는 뉴코아 강남점에 회사측이 쇠막대와 쇠사슬을 동원해서 출입문을 용접해서 봉쇄하였다는 흉흉한 소식도 있고, 화장실 다녀올 겨를도 없이 6-8시간을 서서 일하는 비정규직 계산원들이 모두 소화불량(위염), 근골격계 질환, 방광염을 앓고 있다는 마음 아픈 소식도 들린다. 농성장의 사진을 보면서 일요일에 아이들을 챙길 수 있어 이랜드에 다닌다던 기미 가득한 얼굴의 중년 여성노동자를 떠올린다. 방광염에 걸리고 저임금에 시달리면서도, 직장에만 다닐 수 있으면, 일주일에 한번 일요일만 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을 하루 아침에 직장에서 내쫒는 행위는 누가 뭐라 해도 야만이다. 정부는 이랜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벼랑 끝에 서있는 노동자들의 점거농성을 법률로서 단죄하고 경찰력을 동원하여 진압하는 야만을 또 다시 저질러서는 안된다.
2017-06-19 | hrights | 조회: 354 | 추천: 0
홍미정/ 한국외대 연구교수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공격과 국제사회의 침묵 6월 25일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 요르단 국왕 입둘라 2세, 이스라엘 총리 올메르트, 팔레스타인 수반 압바스가 참가한 4자 수뇌 회담이 샤름 알 셰이크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담은 하마스에 대항하여 압바스와 연대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살해, 체포, 구금 행위를 동반한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공격을 중지시키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수뇌 회담 당일인 25일과 그 다음날인 26일에도 이스라엘 군대는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인 라말라, 나블루스, 헤브론, 베들레헴, 제닌 등을 공격하여 팔레스타인인들을 살해하고 체포하였다. 27일에는 이스라엘 군대가 가자 지구를 집중 공격하였다. 이 공격으로 가자 지구에서만 두 명의 어린이와 두 명의 형제를 포함하는 14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살해되었다. 30일에도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를 공습하여 7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살해하였다. 예루살렘 미디어와 통신 센터(JMCC)와 팔레스타인 인권 센터(PCHR)에 따르면, 지난 6월 한 달 동안 이스라엘 군대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전투기, 탱크 등을 동원해서 팔레스타인 지구인 서안과 가자를 공격했다.   4자 수뇌 회담에 참석한 요르단 국왕 입둘라 2세,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 팔레스타인 수반 압바스 사진 출처 - 뉴시스   27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의 운영 위원이며, 좌파인 팔레스타인 민주 해방 전선(DFLP)정치국원인 타이시르 칼리드는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공격을 국제사회가 나서서 막아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화력에 직면한 팔레스타인인들은 국제 사회의 도움을 계속 요청해왔다. 그러나 미국, 유럽 연합, 러시아, 유엔, 팔레스타인 주변 아랍 정부들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시종 일관 이스라엘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종교 최고 지도자 수감 팔레스타인 무프티(종교 최고 지도자)인 타이시르 타미미는 6월 8일 금요일 저녁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체포된 이후 7월 1일 현재까지 이스라엘 감옥에 3주일 이상 수감되어 있다. 이스라엘 법정이 그에게 붙인 죄명은 ‘금요 예배의 설교를 통해서 이스라엘 당국에 대항하도록 팔레스타인인들을 선동하고, 이스라엘의 허가 없이 알 아크사 모스크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타미미는 “이스라엘의 허락을 받고 알 아크사 모스크를 출입해야한다는 요구를 수용할 수는 없다. 이스라엘 법정은 나를 기소할 권리가 없고, 나를 기소한 것은 불법이다.”고 주장하였다. 타미미는 팔레스타인 이슬람 법정 최고 판사이며, 예루살렘 소재 알 아크사 모스크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이맘이기도하다. 그런데 이 사건은 4자 수뇌 회담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세계 주류 미디어뿐만 아니라 아랍 미디어들조차도 이 사건을 다루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인 무함마드는 “이 사건을 알 자지라가 한 번 다루었을 뿐이다.”고 한숨지었다. 또 이스라엘 군사 법정은 구속 수감 중인 수 십 명의 팔레스타인 의회 의원들에게 의원직을 사임하면 석방시켜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행위는 팔레스타인의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이스라엘의 지배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납치된 이들 의원들 대부분은 하마스다. 당연하게도 수감된 의원들은 이스라엘의 제안을 거부하면서 압바스 수반과 체포되지 않은 의원들에게 이러한 이스라엘의 불법적인 조처에 대해서 명백한 입장을 취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스라엘의 정책에 답하기라도 하듯, 압바스가 발족시킨 팔레스타인 비상내각 총리 살람 파야드는 6월 28일 라말라에서 800여명의 이슬람 성직자를 모아놓고 “모스크 내에서 정치적인 메시지나 선동을 금지한다. 이러한 행위는 결코 묵인되지 않을 것이다.”고 경고하였다. 이것은 서안에서 하마스의 영향력을 근절시키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하마스는 서안과 가자 소재 많은 모스크에서 영향력이 있다. 현재 서안에서 하마스 지지 설교자들은 파야드 정부를 지지하는 성직자들로 대체되고 있다.   이스라엘 장갑차들이 20일 새벽 나할 오즈 키부츠 부근에서 가자지구쪽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팔레스타인 수반, 압바스 국제군 파견 요청 이런 상황에서 6월 29일 프랑스 방문 중인 팔레스타인 수반 마흐무드 압바스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에 대해서는 언급 없이, 하마스가 장악하고 있는 가자 지구에 국제군을 배치하도록 프랑스가 나서줄 것을 호소하였다. 압바스는 하마스와는 어떤 대화도 하지 않겠다고 반복해서 강조하면서, 자유롭고, 평화로운 수반 선거와 의회 선거를 위해서 가자 지역에 국제군이 파견되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스라엘, 유엔, 유럽 연합은 이미 가자 지구에 대한 국제 평화 유지군 파견에 동의하였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여론을 결집할 능력이 없는 압바스는 이스라엘과 외국군의 힘을 빌려 하마스를 제압하고 정권을 연장해 보겠다는 속셈이다. 그러나 하마스는 압바스의 국제군 파견 제안을 반대하면서, “우리는 어떤 외국 군대도 가자 지역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점령 세력으로 간주할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전임 하마스 정부 대변인 가지 하마드는 “가자에 외국 군대가 개입할 필요는 없다. 강요된 선거는 해결책이 아니다. 만약 모든 파벌이 선거에 동의한다면, 그 때 선거는 전혀 문제없이 치루어질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하마스는 파타와 대화 재개를 요청해 놓은 상태다. 팔레스타인인 대부분은 대화를 통한 하마스-압바스 간의 분쟁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압바스는 하마스뿐만 아니라 파타 산하의 무장 단체 알 아크사 순교자 여단을 포함하는 모든 무장단체들의 무기 소지를 금지하면서, 자치 정부 보안대가 이 무기들을 압수하도록 명령해 놓은 상태다. 이스라엘의 정책은 하마스와 압바스 사이의 분쟁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내분은 군사 점령을 강화시키고 지속시키려는 이스라엘의 점령지 분할 지배 계획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야만적인 군사 점령이 종식되지 않고서는 팔레스타인의 내부 통합과 민주주의는 거의 실현 불가능하게 보인다.
2017-06-19 | hrights | 조회: 383 | 추천: 0
최응렬/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2007년 3월 힘차게 출발했던 한 학기도 시험채점과 성적평가를 끝으로 대부분의 대학이 긴 여름방학에 들어간다. 그런데 성적평가를 할 때마다 매년 달라지는 세태를 느끼게 된다. 필자가 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는 지금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당시는 10․26과 12․12 등 정치적인 큰 소용돌이로 인하여 휴교를 일삼았다. 그 결과 수강과목의 대부분은 3분의 1정도도 채 마치지 않고, Report로 성적이 평가되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은 독학을 통하여 학업을 이수해야만 했다. 그리고 절대평가니 상대평가니 하는 학교에서 정해 놓은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교수들의 성적평가도 지금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수월하고 자유스러웠다. 1997년부터 피평가자의 입장에서 평가자의 입장이 되면서 이제 11년째 학생들의 시험을 채점하고 성적을 평가하고 있다. 아마도 성적평가와 관련하여 매년 달라지는 세태는 학교에서 정해 놓은 평가기준을 준수해야 하고, 사전에 학생들에게 일정기간 성적공시를 해야 하는 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선 가장 고통스러운 것 중의 하나가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에 근거해서 학생들의 성적을 강제로 배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 학기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다 보면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도토리 키 재기처럼 거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면 신경을 곤두세우고 출결상황, 시험성적, Report 성적, 발표성적 등을 다시 한 번 면밀하게 검토하고 성적의 우열을 가려야만 한다. 그러다 보면 100점 만점에 1-2점 차이로 성적의 등급이 강제로 매겨지고, 그에 따라 학생들의 희비가 엇갈리게 된다. 이러한 성적평가는 곧바로 학생들로부터 강의평가로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수강 학생이 적은 과목이거나 성적평가가 좋은 경우에는 강의평가가 상대적으로 좋게 나오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강의평가가 좋지 않게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것은 교수들의 교육업적과 직결되고 있다. 어찌 보면 교수와 학생 사이가 사제지간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서로를 평가하는 평가자의 입장에 선 셈이다. 또 한 가지 평가자를 괴롭히는 것은 정해진 기간 내에 성적을 평가하고, 이를 일정기간 공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연말이 되면 늘 바쁘듯이 학기말이 되면 왜 그리도 바쁜지 시간에 쫓기며 시험채점과 성적평가를 해야 하는 고충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정년퇴임식장에서 그동안 교수생활을 하면서 즐거웠던 기억 중의 하나가 “채점에 쫓길 때 백지답안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는 점에 공감이 가기도 한다. 이렇게 시간에 쫓기면서 채점을 완료하고 성적을 평가하여 일정기간 공시를 하게 되면 어김없이 성적정정을 요구하는 학생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조기졸업을 위해서, 장학금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4학년 학생으로 취업을 위해서 학점을 관리해야 한다는 등 사연도 가지각색이다. 시험채점이나 성적평가에 오류가 있을 때 그것을 시정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되어야 할 성적공시제도가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어 안타까울 때가 많다. 이처럼 성적정정을 요구하는 학생들이 늘어나는 이면에는 취업 걱정과 장학금 수혜가 가장 크게 자리 잡는 것 또한 평가자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그만큼 갈수록 취업이 어려워지고 있고, 경제난으로 등록금 마련이 수월치 않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림 출처 - 오마이뉴스   성적정정을 요구하는 학생들 중에는 정직하지 못한 학생도 간혹 눈에 띄는 경우가 있다. 교수님만 성적을 올려 주시면 조기졸업이 가능하다거나 장학금 혜택을 받을 수 있고, 그래야만 학교에 계속 다닐 수 있다고 읍소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대부분의 교수는 학생들의 안타까운 사연에 감동을 하게 되고 성적을 올려 주는 경우가 간혹 있다. 문제는 이러한 구구 절절한 요구가 대부분의 교수들에게 공통적으로 써먹는 수법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요구에 교수가 넘어가면 좋고, 설사 요구대로 되지 않더라도 처음 성적보다 내려가는 일은 없으니 학생에게는 전혀 손해 볼 일이 없다는 점을 교묘하게 악용하는 예이다. 이런 경우를 당하고 나면 그러한 학생을 탓하기에 앞서 내 자신 학생들에게 전공지식 주입에만 신경을 쓰고, 올바른 사회인으로 교육하고 지도하지 못한 자괴감에 괴로울 때가 많다. 이제 긴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학생들이여! 시험성적에 연연하지 말고 더 크고 넓은 세상 속에서 본인을 드높이고, 우리나라를 세계 일류국가로 성장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 주기를 기원한다. 지금보다 어른스럽고 꿈이 가득한 여러분을 다음 학기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기를 바라며,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번 성적평가에 만족해 주었으면 한다.
2017-06-19 | hrights | 조회: 379 | 추천: 0
이광조/ CBS PD 여름이다. 일상생활에서 여름을 느끼는 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극장에 개봉하는 공포 영화들을 보면서도 계절을 느낀다. 아주 어릴 때 봤던 “장화홍련”부터 중고생 시절 유행했던 “13일의 금요일”, 비교적 최근에 본 “한니발”과 개봉을 앞둔 “검은 집”까지. 공포 영화의 소재는 무척 다양해졌지만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건 한을 품고 죽은 귀신이나 인간과 사회를 증오하는 이른바 ‘싸이코 패스’들이다. 겁이 많은 탓에 공포 영화를 별로 즐기지는 않지만 나이가 들면서 공포영화에 흥미를 잃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영화가 주는 작위적인 공포보다는 현실이 훨씬 더 끔찍하고 무섭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던 어른들의 말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내가 공포영화보다 무서운 현실을 처음 느꼈던 건 대학 1학년 때 처음 경찰서에 잡혀갔던 때가 아닌가 싶다. 가두시위에 나갔다 시위에는 참여도 못해보고 사복경찰에 붙잡힌 나는 이른바 ‘닭장차’에 실려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 머리를 무릎에 처박고 앉아 어디서 무엇이 날아올지도 볼 수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곤봉으로 혹은 군화발로 폭행을 당하면 정작 맞는 순간보다 타격이 가해지기 전의 잠깐이 훨씬 두려운 법이다. 하지만 좀 맞다보면 상황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다. 비슷한 패턴이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영화 '검은집' 홈페이지   얻어맞는 것보다 더 큰 공포를 느낀 건 경찰서에 들어간 뒤였다. ‘전경들이야 시위학생들에게 공격을 당했으니 흥분해서 우리를 때렸겠지만 사람들의 눈이 있고 높으신 경찰간부와 형사들이 있는 곳에선 좀 덜 때리겠지.’ 하지만 나의 이런 순진한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꼬박 24시간동안 2시간 단위로 새로운 전경들이 들어와 우리에게 분풀이를 했지만 경찰서의 높으신 양반들은 그 모습을 보고도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누구 하나 말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때 느낀 배신감과 절망감이란. 그 뒤 내가 당한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끔찍한 고문에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일이 다반사였던 시절, 더구나 80년 5월 광주에서는 무고한 사람들이 총칼에 목숨을 잃고도 침묵을 강요당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 막 세상물정에 눈을 떠가던 내게 사람들이 권력의 횡포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현실은 ‘공포영화’ 그 자체였다. 그 공포를 일으킨 사람들은 ‘싸이코 패스’도 아니었고 ‘소복 입은 귀신’도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평범한 소시민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정에서 자상한 아비였을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인정 많은 좋은 친구, 이웃에겐 모범적인 생활인으로 인정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보면 한 없이 선량한 이 소시민들이 ‘먹고 살아야지, 위에서 시키니 어쩔 수 있나’, 또는 ‘세상이 그런데 어쩔 수 있나’라는 핑계로 거대한 악을 지탱하는데 일조했다. 얘기가 장황해졌다. 거대권력이 폭압을 휘두를 때 거기 맞서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저항했기에 나는 깊은 정신적 상처를 받지도 않았고 그 시절 ‘먹고 살기 위해’ 권력에 휘둘렸던 사람들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하지만 그런 ‘거악’이 사라진 시대에 누군가가 부당한 공격을 받고 그 상처를 보듬어주고 가해자를 처벌해야 할 사람들이 가해자를 두둔하고 오히려 피해자를 손가락질한다면, 그가 느낄 공포와 절망은 어느 정도였을까? 더구나 그 피해자가 아직은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청소년에다 연약한 여성이라면, 또 그가 겪은 고통이 ‘성폭행’이라는 극복하기 힘든 폭력이라면, 그가 느낄 두려움은 얼마나 컸을까? 나로서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한 방송사의 시사 프로그램이 전한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 피해 학생이 겪은 2년 6개월은 세상 그 어느 공포영화보다 무서운 현실이었다.   밀양 성폭행 사건에 대해 방송한 MBC '뉴스 후' 사진 출처 - MBC   그는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힘도 센 남학생들 수 십 명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했고 가해자를 두둔하고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경찰과 주변 사람들, 제대로 된 현장 조사도 없이 가해자들에게 관대한 판결을 내린 법원과 자신의 신상을 세상에 드러나게 만든 경찰과 언론, 가해자들과 쉽게 합의를 해줘버린 아버지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깊은 상처를 입었다. 거기에 가해자인 자기 자식의 선처를 위해 그가 어렵게 다시 시작한 학교생활을 망쳐버린 가해자의 어미까지. 세상에 이런 공포영화가 어디에 있는가.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상대방의 입장과 고통을 헤아리지 않는 인간,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어떤 고통을 줄지 성찰하지 않는 인간. 나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타인의 고통에는 무관심한 인간. 그들이 한 소녀에게 가한 행위는 ‘악’이다. 악은 멀리 있지 않다. 반성하지 않는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평온한가. 때때로 악은 바로 그 평범함 속에 깃든다.
2017-06-19 | hrights | 조회: 450 | 추천: 0
송기춘/ 전북대 법학과 헌법학 교수 ‘내가 믿사오며’... 공포와 전율 한 때 열렬한 종교적 신앙 속에서 ‘내가 믿사오며’라는 고백을 할 때의 공포와 전율을 기억한다. 믿는다는 것을 입으로 고백하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안다면, 힘들게 입을 열어 고백하고 그 말을 따라 살 때 닥쳐올지 모르는 고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말 따로 행동 따로 살아가는 데 어떠한 문제도 느끼지 못한다면 별문제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하는 말과 고백에 걸맞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한 마디 말을 뱉어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고백을 따르고 지키는 건 별도로 하고 입술만 딸싹거려 하는 일이 뭐 그리 어렵느냐고 한다면 종교적 고백의 진지함을 모르는 소치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가 아직도 계속되어야 하나 최근 국기법을 제정한 데 이어 그 시행령을 만들면서 그 동안 이어져 온 ‘국기에 대한 맹세’문안에 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는 맹세문이 가진 엄청난 의미에 대해서는 박정희 시대의 충성맹세문이라느니, 국가주의를 강요하는 것이라느니, 일제의 황국신민의 서사를 연상시키느니 등등이 비판이 있어 왔다. 필자도 몇 차례 이 국기에 대한 맹세가 가지는 문제에 대해서는 지적한 바 있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이 국민 모두가 추구하는 바인가 우선 이 맹세문의 문제는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궁극의 목표가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이라는 데 있다. 조국과 민족의 명확한 개념에 대해서는 합의가 없지만, 이 막연한 목표를 위하여 과연 어느 누구가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맹세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직업 자체가 몸과 마음을 바쳐 조국과 민족의 영광을 추구하는 데 상당히 관련이 있는 군인이나 공무원의 경우에 해당되는 경우가 있을 법도 하다. 그러나 모든 국민에게 요구되는 이 맹세는 국민 모두의 삶의 궁극적 가치이길 요구하고 있다. 수많은 가치 가운데 특정한, 아니 그 내용조차 불명확한 이 가치를 위하여 모든 국민에게 몸과 마음을 바치겠다는 맹세를 요구할 수 있는가? 진심으로 그렇게 맹세하고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도 나름의 보람과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 각기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또 살아갈 수 있는 게 권리인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특정한 가치가 나의 궁극의 가치이길 요구하는 것은 어느 모로 보아도 헌법에 어긋난다. 국민 대다수가 동의하는 무궁한 영광도 이와 조화될 수 없는 소수자에게는 결코 영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종교적 고백을 요구하는데... 둘째, 몸과 마음을 바친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기독교의 경우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 것이다. 말 그대로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고, 그럴 각오 없이는 할 수 없는 고백이어야 마땅하다.   인권·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11일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를 없애라고 촉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그러나 이러한 맹세는 우리에게 진심으로 그럴 의사도 없으면서 입술만 움직여 어마어마한 고백을 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거의 종교적 차원의 고백이라고 봐도 무방할 내용인데... 더구나 하느님을 믿으면서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맹세한다면 조국과 민족의 영광이 하느님의 뜻 자체란 말인가?   거짓말을 ‘짜연스럽게’... 셋째, 이렇게 입술로 하는 말 따로, 마음 속의 본 뜻 따로일 경우, 이러한 맹세나 고백을 요구하고 또 자연스럽게 이러한 고백이 이뤄질 수 있다면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일상화시킨다는 점이다. 어느 누구인들 자기 자식에게, 또 학생에게, 친구에게 거짓말을 잘했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강력한 요구에 저항할 수 없어 입술로만 하는 고백일수록 더욱 자연스러운 거짓말을 요구하는 결과가 되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몸과 마음을 바쳐 추구하는 대상이 분명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이 아니고 또 이것과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맹세문에 아무런 저항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더욱 문제라고 생각된다. 거짓말에 둔감해졌음을 뜻하는 것이기에... 맹세문 수정안의 등장 국기에 대한 맹세문이 논란을 빚자 지난 5월 31일 행정자치부가 맹세문의 수정안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세 가지 안이 제시되었다. 제1안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서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과 영광을 위하여 국민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제2안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사랑과 자유와 평등의 이름으로 국민의 의무를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제3안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위하여 정의와 진실로써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세 가지 안 모두 현재의 맹세문보다 순화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정안 역시 지금의 맹세문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책임과 의무를 다한다... 권리행사는 나쁜가? 첫째, 책임과 의무의 이행이 강하게 부각된다는 것이다. 수정안은 권리의 행사가 부정적으로 인식된 전제에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거나, 국민의 의무를 다하고, 충성을 다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공동체의 삶에서 권리의 행사는 결코 부정적으로 인식되어서는 안된다. 적극적인 권리의 행사를 통하여 공동체가 발전하고 인간의 삶의 질이 향상되어 온 점을 애써 부인하려 하는 것은 아닐지... 과도한 권리의 행사나 남용이 경계되어야 하는 점은 옳지만, 권리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전제되어 만들어진 수정안은 아닌지 의문이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대한민국의 발전, 무궁한 영광, 번영은 무엇인가? 둘째, 여전히 대한민국의 발전, 모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 조국의 통일과 번영이 최고는 아니지만 국가생활에서의 매우 높은 가치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사실 매우 공허하고 그 내용에 대해 쉽게 합의가 이뤄질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충성을 다하고, 책임과 의무를 다할 대상이 대한민국의 발전과 영광이거나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이라지만, 그 내용은 동일한 사안을 두고도 의견이 극과 극으로 갈릴 수 있는 것이다. 이라크파병을 두고 이게 대한민국 국력신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는 입장도 있지만 오히려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서는 결코 파병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있지 않는가? 애매모호하고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기도 어려운 목표를 두고 언제까지 국민에게 입술만 움직이는 맹세를 요구할 것인가? 사랑, 자유, 평등, 정의, 진실의 다짐... 너무 심하지 않은가? 셋째, 수정안에 등장하는 사랑, 자유, 평등, 정의, 진실이라는 단어의 뜻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의 삶에서 매우 숭고한 가치를 가지는 이들 개념을 사용하여 조국과 민족에 대한 맹세를 요구하는 것은 이 맹세문을 통하여 국가가 인간의 내면에 깊이 관여하고자 하는 것인가? 순박한 사람은 그런 마음으로 조국과 민족을 대할 것이고, 약은 사람은 맹세를 하면서 숭고한 의미를 가지는 ‘사랑, 자유, 평등, 정의, 진실’이라는 단어의 뜻을 마음 속에서 왜곡하게 될 것이다. 이도저도 아니면 매번 맹세문을 읊을 때마다 거짓말임을 의식하면서 하는 수밖에... 올바른 국가관의 형성 국가생활을 하는 인간에게 올바른 국가관은 필요하다. 함께 국가를 형성하여 살아가는 삶에서 국가란 무엇인가, 민족은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은 어떠한 권리를 가지고 국가는 인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는 구성원이 져야 할 책임과 의무는 무엇인가 등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구성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기보다 인간으로서의 자 와 권리가 강조되고 국가는 이러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아는 것은 우리의 역사적 경험으로 보아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는 것보다 더욱 절실한 과제이다. 남용되지 않는 권리의 행사야말로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고 발전시키는 힘이며 진정으로 봉사하고 싶은 공동체를 만드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실한 마음의 소리는 강제될 수 없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이제 폐지되어야 한다 진실한 마음의 고백은 강제될 것이 아니다. 진지한 양심의 소리는 스스로 울려나오는 것이다. 그런 마음의 소리가 강제되는 순간, 그 마음은 이제 왜곡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국기와 국가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라고 요구해서는 안된다. 국기에 대한 맹세문의 어떤 수정안도 맹세를 요구해서는 안된다. 이제 국기에 대한 맹세문은 폐지하여야 한다. 국민의 70%가 폐지에 반대한다는 조사도 있다지만, 이런 문제는 합의하여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양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2017-06-19 | hrights | 조회: 467 | 추천: 0
이유정/ 변호사, 법무법인 자하연   상상력이 막혀버린 사회에 살다 -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이시우 작가의 석방을 기원하며...   국가보안법은 1948. 12. 1. 제정된 법률이다. 헌법이 제정된 때가 1948. 7. 17. 이고, 구형법이 제정된 때가 1953. 9. 18, 민법이 제정된 때가 1958. 2. 22. 이니 국가보안법은 형법이나 민법과 같은 기본 법률보다 훨씬 오랫동안 대한민국과 함께 했고 조만간 환갑을 맞게 되는 장수법률이다. 참여정부의 출범 초기에 나는 이 법률이 곧 폐지될 것이라고 기대했고, 우여곡절 끝에 열린우리당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한 이후에는 국가보안법 폐지는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대통령까지 나서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보내야 한다는 말을 한 이후에는 드디어 국가보안법이 폐지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해 연말 국가보안법 폐지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에도 그저 허울만 남아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남과 북을 잇는 철도가 개통되는 세상에서 50년 전에 만들어진 낡은 법으로 인해 더 이상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근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어 47일째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 이시우 작가의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 드는 생각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어이상실” 그 자체였다. 문제된 사진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비무장지대와 미군기지, 한미연합훈련을 담은 사진들인데 아무리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더라도 그것이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미군기지와 비무장지대를 찍은 사진이 왜 선전. 선동에 해당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설령 그러한 사진이 북측의 선전. 선동에 사용되었다면, 이용당한 우리의 현실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나라의 영토에 다른 나라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비정상적이고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 아닌가 말이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영토에 일본이나 중국의 군대가 주둔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듯이. 지난 달 평양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었지만 지금까지도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김책 공업종합대학 도서실이다. 서가의 앞쪽에는 두툼한 표지로 된 김일성, 김정일 저작선집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서가의 뒤쪽으로 들어가보니 2-30쪽의 팜플렛만도 못한 조잡한 책들만 꽂혀 있었다.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된 사진작가 이시우씨. 사진 출처 - 사진작가 이시우 석방대책위   모두 주체사상이나 맑스레닌주의와 관련된 책들. 혹시 다른 종류의 책이 있는가 살펴보니 과학 기술과 관련된 책 이외에 인문학이나 예술과 관련한 책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호머, 일리아드, 오딧세이 등 몇 권의 서양고전이 전부였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날 나는 일기장에 “이곳은 상상력이 막혀있는 곳이다”라고 적었다. 아무리 많은 장점을 가진 사회라 하더라도, 하나의 생각 이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조차 없도록 정보와 지식을 통제한다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곳은 결코 올바른 사회라고 할 수 없다. 북한에서 주체사상 이외의 다른 책을 읽지 못하도록 정보와 지식을 통제하는 것만큼이나. 남한에서 미군기지의 문제를 다룬 사진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것도 한심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그 사진작가를 구속한다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사회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자유민주주의란 타인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다름을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대화와 토론을 지향하는 이념인데, 타인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대뜸 구속부터 해버리다니 북한과 무엇이 다른가.   국가보안법 남용 실태 보고회 옆에 전시된 이시우 씨의 사진들. 사진 출처 - 프레시안   이시우 작가의 구속은 국가권력이 자의적인 잣대로 개인의 사상과 창작의 자유를 어디까지 침해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남북을 잇는 철도길이 열리고 대통령 후보들의 방북이 이어지는 세상에, 국가보안법이라는 낡은 법률의 잣대를 들이대 사진작가를 구속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참여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 훌륭한 성과가 있었다”는 코미디 같은 자화자찬은 집어치우고, 남은 임기동안만이라도 국가보안법이 악용되는 사례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며, 사법부는 더 늦기 전에 이시우 작가를 석방하여야 할 것이다.
2017-06-19 | hrights | 조회: 405 | 추천: 0
유정배/ 춘천시민연대 상임집행위원장 춘천이 삶터가 아닌 사람들은 대개 춘천을 첫사랑 추억을 만든 곳으로 기억하곤 한다. 춘천은 영화 ‘박하사탕’에서 주인공 영호와 순임이 품었던 풋풋한 사랑빛깔 같은 색조를 지니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사실 춘천은 여러 모습을 지니고 있다. 춘천 근교에서 군 생활을 한 이에게는 다시 돌아보기 싫은 동네일테고, 의암호 주변을 거닐었던 아련한 기억이 있는 이에게 춘천은 문득 그리운 고장일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춘천이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다가가는 것은 호수와 산, 그리고 왠지 편안한 시가지등이 주는 아늑함이다. 춘천에 대단위 단지형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들어선 시기는 1983년 이라고 한다. 대한주택공사가 처음 전파한 아파트는 이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춘천으로 들어오는 입구부터 긴말뚝을 거꾸로 박아놓은 것처럼 촘촘히 들어섰고 그 주변은 밤마다 불야성을 이룬다. 그래서 여느 중소도시들처럼 춘천의 구도심도 텅 비어버렸다. 봉의산 자락을 타고 오르며 다닥다닥 붙어있는 허름한 주거지들도 몇 군데를 빼고 낡고 열악해 이미 오래전부터 개발요구가 있었다. 춘천시가 얼마 전 춘천 구도심지 70여만평에 ‘뉴타운’을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영국에서 출발하고 유력한 대선후보인 이명박씨가 서울시장 재직시 밀어붙여 성공작으로 회자되는 ‘뉴타운’사업이 드디어 춘천에 까지 상륙한 것이다. 청계천, 대중교통체계 변경, 뉴타운 조성 - 이 세가지는 이명박 성공신화를 일군 동력으로 그를 ‘능력있는’ CEO형 대권주자로 격상시킨 밑천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지방자치단체를 경영하는 단체장이 이명박 신화를 따라잡으려는 것을 흉보기에는 단체장들이 여유롭지 못하다. 정치인이자 행정가인 단체장이 주민에게 편익을 제공하면서 정치적 성공도 보장된다면 그 길을 마다할 이가 누가 있겠는가.   이명박씨가 서울시장 재직시 밀어붙여 성공작으로 회자되는 ‘뉴타운’사업이 드디어 춘천에 까지 상륙하였다. 사진은 지난 2005년 3차 뉴타운 예정지인 종로구 창신동 일대에 붙은 플래카드.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그러나 이명박씨의 한계로 지적되는 것이 불도저형 사업 스타일이라면 단체장의 실력이 진가를 발휘 하는 것은 밀어붙이기 보다는 갈등을 예방하고 조정하는 능력이 어떤가 이다. 그리고 묻지마 개발이 아니라 누구를 위한, 어떤 개발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방향성을 잃지 않는 것이다. 이명박씨의 뉴타운 사업을 놓고 가장 많이 지적되고 있는 점은 사회통합형 개발과 정비가 실패했다는 것이다. 강남북 균형발전을 내걸고 진행된 뉴타운 사업이 오히려 원주민 복귀율이 낮으며 ‘한양주택’ 같이 경관가치가 높은 지역도 밀어내고 아파트를 올렸다는 지적이 많다. 근래에는 뉴타운 사업이 수도권 집값을 흔드는 요인 중의 하나였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시민이 참가하는 마을 만들기 춘천의 ‘뉴타운’이 이명박의 길로 갈지 다른 길로 갈지는 아직 분명하지는 않지만 서울의 뉴타운 사업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 점은 많다. 먼저, 재정비 촉진지역의 주민들이 개발 뒤 재산상의 피해를 입거나 주거권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 주민들의 주거환경개선을 위해 추진하는 사업이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결과를 낳는다면 추진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리고 주민의 의사를 묻고 개발형태나 공간구조를 결정하는 과정에 주민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 춘천은 서울과는 다른 도시다. 인구학적인 구성이 다르고 도시발전 형태도 다르며 도시경쟁력을 형성하는 기본 방향이 다르다. 춘천의 공간적 특성을 보면 도심지에 용적율 높은 아파트를 올리는 것은 춘천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을 파괴하는 미련한 짓이다. 주거환경개선에 대한 주민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춘천 구도심지가 가지고 있는 장소의 강점을 살리고 경관의 우수성을 높일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지역을 가장 잘 알고 사랑하는 주민들의 아이디어와 요구가 충실히 반영되어야 해결 될 수 있을 것이다. 시민이 참가하는 마을 만들기를 춘천시가 적극 지원 하는 것도 방법 중의 하나 일 것이다. 얼마 전 정부는 수도권에 ‘분당급 신도시’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밖에도 이미 수도권은 약 20여개의 신도시를 계획하고 있으며 이른바 ‘명품도시’로 불리는 고급주거단지도 몇 군데 들어올 예정이라고 한다. 춘천은 2009년이면 수도권과 1시간거리로 좁혀진다. 이처럼 접근성이 개선되면 춘천은 어떤 방식으로든 수도권 부동산 시장에 더 큰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수도권 부동산시장의 수요와 공급, 소비자의 욕구, 정부정책의 변화 등을 면밀히 분석해서 대응해야 성공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존 계획과 상충되지 않게 진행되어야 한다. 춘천시는 이미 2005년 의암호 수변지역과 중도를 세계적인 친수공간으로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춘천의 구도심지는 이 지역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뉴타운 계획이 기존 계획과 조화롭게 진행되어야 공간경쟁력이 높아질 것이다. 춘천의 도시빛깔은 오랜 기간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자연환경과의 소통에서 만들어진 역사적인 산물이다. 그 빛깔을 살리고 키워가는 춘천만의 ‘뉴타운’을 기대해 본다.
2017-06-19 | hrights | 조회: 530 | 추천: 0
최응렬/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 어린이날(5월 5일), 어버이날(5월 8일), 스승의 날(5월 15일), 성년의 날(5월 21일)과 둘이 하나가 된다는 부부의 날(5월 21일) 등이 5월에 몰려 있어서 나온 말인 듯 싶다. 이상의 여러 가지 기념일 중에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해 마다 달라지는 ‘스승의 날’에 대한 기억들이 “아이 둘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자식들의 스승을 어떻게 모셔야 하는가 하는 생각”, “나를 가르치고 지도해 주신 스승들을 어떻게 모셔야 하는가 하는 생각”, 그리고 “내가 가르치는 제자들로부터 받게 되는 스승의 날에 대한 생각” 등이 서로 교차되어 떠오른다. 우선 아이들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선생님들을 어떻게 모셔야 하는가와 관련해서는 특별하게 얘기할 만한 내용이 없다. 왜냐하면 언제부터인가 아이들의 교육은 거의 전적으로 어머니의 몫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다만,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선생님께 감사의 뜻을 표하려는 것이 혹시라도 내 아이만 잘 봐달라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서 주저하게 만들곤 하였다. 그러나 조그마한 기쁨으로 간직하고 싶은 것은 1992년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시간강사 생활을 하던 나로서는 물질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아내의 주선으로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스승의 날을 전후해서 5년 가까이 스승의 날 일일교사를 했던 적이 있다. 초등학생들을 1시간 정도 가르치면서 5분도 집중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사회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배움을 주시는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노고가 이런 것이구나 하며, 선생님들의 어려움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점이다. 나를 가르치고 지도해 주신 선생님들을 모시는 제자로서의 도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등에서 나를 가르치시고 지도해 주셨던 선생님들 증에서 기억에 떠오르는 선생님들이 여러분 계시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 중학교 때 수학을 가르쳐 주시던 교장 선생님이 가장 기억에 남고 작고하실 때까지 늘 연락을 드렸던 기억이 아련하다. 교장 생님과 대학교의 은사 선생님들께만 연락을 드리는 반푼이의 생활을 하고 있으니 제자로서의 도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해 온 스승의 입장에서 제자들이 나에게 베풀어 주는 기쁨은 부끄럽게도 말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감사할 따름이다. 특히, 계명대학교에서 학생들이 여러 가지 이벤트를 마련하여 스승들에게 기쁨을 선사해 주었던 기억이 자주 떠오르곤 한다. 그러면서 내가 내 스승들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면서 제자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으며 몸둘 바를 모를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또한 제자들이 카네이션을 달아주며 불러주는 “스승의 은혜”란 노래를 듣노라면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빨리 행사가 끝났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서 내 스승들을 잘 모시고, 제자들을 잘 가르쳐야 되겠구나 다짐하게 된다.   참교육학부모회는 지난 2005년부터 '스승의 날'을 5월 15일이 아닌 2월말로 옮기자는 운동을 벌였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가끔 언론보도를 통해 학생 또는 학부모에 의한 교사 폭행이라든가 입시위주의 교육정책으로 사제지간(師弟之間)이 각박해지는 현실을 접할 수 있다. 또한 스승의 날이 되면 학생과 학부모는 촌지 또는 선물에 대한 부담감이 밀려오고, 묵묵히 사랑으로 교단을 지켜온 대다수의 선생님들도 학생들을 가르친 ‘대가(代價)를 바란다’는 오해를 받는 날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스승의 날이 갈수록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려는 날에서 촌지를 주고받는 날로 변질되거나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행사를 위한 날로 변화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심지어는 촌지 수수가 두려워 휴교까지 감행하는 학교가 생길 정도니 더 말할 나위 없다. 1964년 5월 16일 청소년적십자중앙학생협의회가 스승의 날 제정 취지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스승의 높고 거룩한 은혜에 감사하며, 애정과 깊은 신뢰로 선생님과 학생 사이에 올바른 인간관계가 하루 빨리 회복되기를 기원하며, 스승의 날이 길이길이 계승발전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다시 한번 교직을 천직으로 여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해 주시는 선생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앞으로 제자로서 스승님을 잘 모실 것을 다짐해 본다. 아울러 학생들이 가진 특성을 적극 계발할 수 있도록 지도하여 그들 모두가 개성 있는 인격체로서 살아 갈 수 있도록 조그마한 밀알이 되기를 약속한다.
2017-06-19 | hrights | 조회: 423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