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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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문화연구학과 교수 이곳 네덜란드에서는 연말분위기가 조금 일찍 시작된다. 어린이와 뱃사람의 보호성인인 신터클라스(Sinterklass, 영어로는 Nicholas) 축일 이브 날인 12월 5일에 선물과 축복을 나누며 한 해를 마무리한다. 일찍이 네덜란드인들이 신대륙으로 건너가 뉴 암스테르담(현재의 뉴욕)을 건설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신터클라스 명절이 미국으로 건너가 (귤이 대서양을 건너 탱자가 되듯이) 12월 24일에 활약하는 산타클로스로 재탄생 되었다는 학설도 그럴 듯하다. 그런데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전통의 재창조 혹은 원조 찾기'가 아니라, 신터클라스 축제일에 네덜란드인들은 선물과 함께 자신이 직접 쓴 시를 교환하면서 함께 읽는 오랜 전통을 즐긴다는 사실이다. 이날만큼은 학교와 직장은 물론 언론매체와 국회 등지에서도 야유와 풍자가 넘치는 '시인들의 왕국(네덜란드는 입헌군주정이다)'이 되는 셈이다. 지난 넉 달 동안의 짧은 체류 경험에 비추면, 교수정년퇴임식에서도 송사와 답사가 시 읽기로 진행될 정도로 시 쓰기와 낭송이 네덜란드에서는 어느 정도 일상생활화된 것처럼 보인다. 내가 거주하는 라이덴(Leiden)에서는 1980년부터 도시건물의 여백에 세계 40여개 국가의 시를 그 나라 언어(원어)로 장식하는 문화운동을 시민단체가 주관하여 전개해 왔다. 13년에 걸쳐 총 101편의 시로 도시를 시인의 마을로 색칠하는 행사는 전체 시를 담은 책자 《벽 위에 쓴 시(Dicht op de Muur: Gedichten in Liden, 1992)》의 간행으로 완성되었다. '대안 이미지'(Tegen-Beeld, Counter-Image)라는 주관예술단체의 명성에 어울리도록, 미운 현실에 대항하는 질서를 꿈꾸며 억압에 맞서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헌신하는 내용을 주제로 하는 세계적인 시들이 선정되었다고 한다. 사진 출처 - 필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던 청교도들이 일시 피난, 정착했던 '망명객의 도시 = 라이덴'이라는 오래된 명성과 잘 어울리는 도시 프로젝트인 셈이다. 필자가 책자를 (네덜란드어를 모르니까) 대충 살펴보니까 아쉽게도 한국시인의 작품은 보이지 않았다. 라이덴(Leiden)에서는 1980년부터 도시건물의 여백에 세계 40여개 국가의 시를 그 나라 언어(원어)로 장식하는 문화운동을 시민단체가 주관하여 전개해 왔다. 사진 출처 - 필자 '더치페이'라는 신조어를 잉태할 정도로 셈이 정확하고 실용적인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시는 물과 기름같이 어울리지 않는 이물질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어쩌면 시를 쓰고 읽는 행위는 천박한 현실과 낯 가름하고 더 좋은 내일을 다짐하는 일상적인 업무와 역사적 과제의 일종이 아닐까. 이런 명분을 담고, 네덜란드인들의 문학 사랑을 흉내 내며, 나의 문학청년 시절의 결기를 되살려, 오늘은 독자 여러분들과 한 편의 시를 읽으며 올해를 환송하고자 한다. 멀리서 기원하오니, 부디 겨울의 남은 추위를 잘 이기시고 새해에는 행운과 기쁨으로 가득 찬 또 다른 나날이 되옵소서. 교생실습 Ⅰ 아마도 일천구백팔십일년 봄이었겠지(요). 내가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얻기 위해 교생실습을 나간 곳은 서울시내에서 축구와 주먹으로 손꼽히는 어느 공고 야간 졸업반 영문도 모르고 다닌다는 영문학과 퇴폐총각 샘 터벅머리 머시마들과 함께 공부한 것은 보이스 비 엠비셔스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뛰누나 이 따위 머리 쥐나는 영어문법과 독해가 아니라 컨퓨젼 윌 비 마이 에피타프 침묵이 비명을 삼켜버리고 힘 가진 놈이 제 법대로 아름답다면 지식은 한갓 라면이나 끊이면 보람이겠지 너무나도 비장(悲壯)한 음조와 노랫말을 담은 외국산 팝송 '묘비명' 이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Ⅱ 미안하지만, 그때는 일천구백팔십일년 내가 걸음마 할 때부터 종일 대통령이었던 농민의 아들 막걸리 대신 시바스 리걸로 잔이 넘쳐 돌아가시고 남쪽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고립되어 꽃잎처럼 스러졌네. 세계가 서울로 마구 모였다는 팔팔 올림픽은 그 다음 이야기 사우스 코리아 전직 대통령이 황혼이 깃들기 전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린 것은 아직 먼 훗날 컨퓨젼 윌 비 마이 에피타프 알고 있는 자 4월의 나무처럼 분연히 일어서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운명은 바보들의 손아귀에 (아직) 잡혀있네 우리가 견뎠던 이 땅의 혼란과 시련이 7080 운동가요 후렴처럼 반복된다면 음탕하게 늙어버린 중년 주름에 각인된 나의 부끄러운 교생실습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어머니. (육문청^^*)
2017-07-20 | hrights | 조회: 361 | 추천: 0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지난 달 유엔 권리위원회는 "아시아 지역에서 유례없는 경제성장을 통해 세계 12번째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한국이 저소득취약계층에 대한 사회권 보장을 제대로 실현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 즈음에 프레시안이나 경향신문 등 많은 매체들이 우리나라를 '고성장, 저사회권국가'로 규정하였다. 당연히 맞는 지적이다. 그러나 사회권 정책의 실상을 설명할 때에 좀 더 역사적인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점을 제대로 밝히면 지난 대선에서 이른바 개혁정권이 왜 패배할 수밖에 없었는지 저절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지난 11월 25일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정부가 유엔 권리위 보고서를 수용하도록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출처 - 프레시안 부의 불평등에 대해 다양한 측정도구가 있지만, 오늘날에도 대체로 지니계수로 불평등의 실상을 해명한다. 지니계수는 인구누적분과 소득누적분을 축으로 하여 불평등을 평가하는데, 지니계수가 이론상 0이면 완전평등사회이고, 1이면 완전불평등사회가 된다. 그러나 현실의 세계에서는 0이나 1은 불가능한 수치이므로 대체로 0.2에 가까우면 매우 평등한 사회로, 0.3을 넘으면 불평등한 사회로, 0.4를 넘으면 매우 불평등한 사회로 규정한다. 지니계수는 작성기관마다 편차가 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최근 발행된 국회예산정책처 현안분석자료 48호에 따르면, 이른바 IMF 직전인 1995년의 지니계수를 0.268로, 2008년의 지니계수를 0.325로 추산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통계치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해석하는데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실제로 빈곤문제가 이명박 정부 하에서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빈곤과 소득불평등은 지난 개혁정부가 마땅히 시정했어야함에도 시정하지 못하여 현 정부가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태가 이렇기 때문에 현 정부는 오히려 인기영합적인 빈곤정책을 펼쳐 여러 가지로 혹세무민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구인회의 <한국의 소득불평등과 빈곤(서울대출판부, 2006>은 좋은 길잡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한국의 산업화시기로부터 고도성장기, 90년대 그리고 국제통화기금체제 이후의 사정을 반영하여 부의 불평등 분배를 분석하고 있다. 이 책에서 통계적으로 분명한 사실은 첫째로, 60년대 이후 한국은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기 시작하였고, 산업화 이후 지니계수는 점차 낮아졌으며 1995년을 전후하여 저점에 이르러 비교적 평등한 사회였다는 점이다. 둘째로, IMF 구제금융 이후에 지니계수가 급격히 상승하고 빈곤층이 폭증하여 불평등한 사회가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 책이 다루고 있지 않는 최근 몇 년 간의 상황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으로부터 얻은 시사점은 고도성장기, 완전고용, 개발의 논리는 한국사회에서 97년을 고비로 끝났다는 것이며, 물론 완전고용 시대에는 국가가 재분배정책을 실시하지 않아도 빈곤층이 취업활동을 통해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지만 IMF 체제와 같이 절대적 빈곤층이 대폭적으로 증가하고 일자리가 증발하는 고실업 구조 하에서는 빈곤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대책이 필요하였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는 빈곤층에게 빈곤탈출을 위한 정책을 마련했어야 하는데, IMF와 동시에 집권한 개혁정부는 소득격차를 완화시키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못했다. 재분배정책에 의한 소득개선정도는 시장지니계수와 세후지니계수(가처분지니계수)의 편차를 통해 알 수 있는데, 개혁정부하에서도 그 편차가 미미하였다. 실제로 소득재분배가 절실히 필요하였는데 개혁정부는 도리어 신자유주의를 들고 나오면서 사태를 어지럽힌 끝에 정권을 상실한 것이다. 물론 소득불평등은 이명박 정부의 잘못이 아니고, 현 정부에서 처음 생긴 것이 아니다. 어쨌든 성장과 완전고용의 신화(박정희의 신화)에 입각한 경쟁적 사회의 모델은 끝났으므로 사회문화적 안전망을 갖춘 좋은 사회로 이행해야 한다는 요구는 현 정부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사회권규약 제2조에 따르면, 당사국은 가용자원을 최대로 활용하여 사회권을 점진적으로 실현해야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현 정부는 용산참사에 보듯이 사회적 약자의 생활터전을 최대한 약탈하고, 콘크리트 자본가들을 위하여 가용자원을 최대한으로 한강에 투기하고 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311 | 추천: 0
홍미정/ 건국대학교 중동 연구소 연구교수 현재 유럽 연합 의장국인 스웨덴은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 계획안을 유럽 연합에 제시해 놓은 상태이고, 이번 주에 브뤼셀에서 개최되는 유럽 연합 회의에서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안이 논의될 것으로 예상된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이 계획안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계획안을 즉각 거부하였고,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예루살렘은 분리될 수 없으며, 항상 이스라엘의 수도로 존재할 것이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이스라엘의 입장은 별로 새로울 것이 없고 1994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이후 계속돼온 양 측의 기존 입장들을 재확인 한 것에 불과하다. 스웨덴의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창설 계획안에 대하여 팔레스타인 국제문제 연구소장인 마흐디 압둘 하디(PASSIA, Mahdi Abdul Hadi)는 필자에게 “스웨덴의 계획안은 UN 결의에 입각하여 움직여왔던 유럽 연합의 기존입장에서 나온 것이며,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 유대화 정책에 시의 적절하게 경종을 울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정부는 하루가 다르게 예루살렘을 독점적인 유대인의 도시로 만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유대화 정책은 국제법을 위반하는 것이며, 유럽인들이 믿고 있는 국제사회의 도리와도 충돌되는 것이다. 스웨덴의 계획안은 국제법을 위반하는 예루살렘 유대화 정책에 제동을 걸려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마흐디 압둘 하디(PASSIA, Mahdi Abdul Hadi) 팔레스타인 국제문제 연구소장 사진 출처 - 필자 이스라엘은 1967년 전쟁 이후 현재까지 동예루살렘을 불법적으로 점령하고 있으나, 알아크사 모스크는 여전히 팔레스타인인들 정체성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2000년 9월 28일에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야당지도자가 1천명의 이스라엘 경찰을 이끌고 알 아크사 모스크를 방문하면서 2차 팔레스타인 민중봉기가 촉발되었다. 이와 같이 알 아크사 모스크와 동예루살렘 문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정치에서 예민한 쟁점이며 핵심적인 상징이 되어왔다. 2009년 12월 2일 이스라엘은 셰이크 아크리마 사브리(Sheikh Ekrima Sabri)에게 6개월 동안 동예루살렘에 위치한 알 아크사 모스크의 출입을 금지했다. 셰이크 사브리는 현재 알 아크사 모스크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설교자이며, 이슬람 고등 위원회의장이다. 셰이크 사브리는 1994년 10월부터 2006년 6월까지 팔레스타인 종교 최고지도자(the Grand Mufti)를 역임하였다. 이번 셰이크 사브리에 대한 알 아크사 모스크 출입 금지 명령은 그가 일주일 동안 메카 순례를 다녀온 날인 지난주 2일에 발생했다. 사브리의 딸인 루바바(Lubaba Sabri)는 필자에게 이 사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모스크 출입 금지 조치는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조치이다. 이스라엘은 나의 아버지가 팔레스타인인들을 알 아크사 모스크에 모이도록 고무시킨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나의 아버지는 알 아크사 모스크를 파괴하려는 행위들을 막고 모스크를 보호하는 것을 자신의 필생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의 알 아크사 모스크 주변에 굴착기를 동원한 굴 파기 등을 비롯한 모스크 파괴 행위를 중단시키도록 압력을 행사해야한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 셰이크 사브리는 “우리는 인간에 관한 논의로부터 출발해야한다. 세계인들, 특히 유럽인들은 이스라엘의 인권 위반 행위들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한다. 오늘날 예루살렘 문제는 예루살렘 주권을 대상으로 한 유대교도와 무슬림 간의 종교 분쟁이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알 아크사 모스크에서 설교하고 있는 셰이크 아크리마 사브리. 셰이크 사브리는 1994년 10월부터 2006년 6월까지 팔레스타인 종교 최고지도자(the Grand Mufti)를 역임하였다. 사진 출처 - 필자 그에 따르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유대교도와 무슬림들 간의 종교 이념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 결코 아니며, 역사적으로 1917년 영국의 밸푸어 선언과 강대국들의 개입으로 촉발된 이후, 더욱 복잡하고 어려운 양상으로 전개되어 왔다. 이스라엘은 알 아크사 모스크 주변뿐만 아니라 동예루살렘에 위치한 예수의 묘가 있는 장소로 알려진 성묘 교회(the Church of Holy Sepulcher) 주변도 2009년 11월 23일부터 굴착 공사를 시작하였다. 요르단 정부는 2009년 12월 3일 이 공사에 대하여 이스라엘 측에 항의 서한을 전달하였다. 올 해 7월 이후 현재까지 동예루살렘 세이크 자흐라 지역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이 계속해서 강제 퇴거당하고,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퇴거당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주택을 점령하고 있다. 이스라엘 당국은 11월 한 달 동안 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주택 14채를 파괴하고 170채에 대한 파괴 명령을 내린 반면,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은 계속됨으로써 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인들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알 아크사 모스크 주변의 굴착 현장 모습 사진 출처 - 필자 마흐디 압둘 하디(Mahdi Abdul Hadi) 소장은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충돌의 새로운 장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에서 운영 중인 팔레스타인 기구들을 더 많이 폐쇄시키고, 더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을 추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현재 상황을 상당히 비관적으로 전망하고 있다. 스페인은 곧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 계획안을 유럽 연합에 제출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 정치에서 유럽 연합 지도자들은 개별적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이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독립 국가를 건설할 권리는 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주장을 피력해 왔다. 따라서 유럽 연합이 어떤 결의를 한다할지라도, 그 결의가 예루살렘 유대화 정책에 제동을 거는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316 | 추천: 0
이광조/ CBS PD 며칠 전, 그러니까 2009년 11월 27일은 우리 정치사에 두고두고 회자될 날이 될 것 같다. 이 날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마음에 있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거짓말을 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런 반성의 말을 덧붙였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후회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그대로 밀고 나가겠단다. 대통령의 이런 고백에 국민들은 참 당혹스럽다. 우선 다른 걸 다 떠나서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다. 선거법 위반이다, 사기다, 갖가지 비난이 쏟아지고 있지만 가장 심각한 건 이번 사태가 국가 지도자인 대통령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조차 뿌리째 흔들어버렸다는데 있다. 우리 국민들은 정치인들의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으로 흩어져버리는 걸 수도 없이 목격했다. 하지만 이번처럼 ‘애초부터 생각이 달랐는데 당선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고백은 사상 초유의 사태다. 그렇다면 2년 전 대통령 선거는 도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이 땅에서 민주주의는 어떤 의미와 무게를 지니는가? 늦었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고백에 반성이 따르고 거짓말에 속은 당사자들의 의견을 존중하겠다는 의지가 따른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번 대통령의 ‘후회와 반성’ 속에는 그런 의지가 전혀 깃들어 있지 않다. 대통령의 입장은 ‘비록 내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거짓말을 했지만 내 생각이 옳기 때문에 밀고 나가겠다’는 것이다. ‘미안하다. 이해해라.’ 그런데 세종시 문제만 그런 걸까. 혹시 4대강 사업은? 모두가 아는 대로 4대강 사업의 전신은 한반도 대운하였다. 뜨거운 논란 속에 반대여론이 비등하고 사업계획의 허점이 드러나면서 대통령은 임기 중에 대운하를 추진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대신 4대강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4대강 사업은 이름만 바꾼 한반도 대운하 사업이라는 의혹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다. 4대강 사업이 마무리될 즈음 우리는 다시 한 번 대통령의 고백을 접할지도 모른다. ‘미안하다. 사실은 4대강 사업이 한반도 대운하 사업이었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공사를 마쳤는데, 이제 물길만 이으면 된다. 국민들 다수가 반대했지만 내 생각이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거짓말을 했다. 이해해라.’ 이런 상황에서 명색이 주권자인 우리는 대통령의 선의만 믿고 그의 거짓말을 이해하고 따라야 할 것인가? 서울 방향으로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다 행정중심복합도시라는 안내판을 마주쳤다. 대통령의 뜻대로 세종시 원안 추진이 백지화된다면 전국 고속도로와 국도의 표지판은 물론 새로 만들어진 지도와 각종 데이터도 모두 수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랏일 치고는 너무 경박스럽지 않은가.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해서 법안을 만들고 그 법률에 의거해 추진되던 일이 하루아침에 백지화될 처지에 놓여 있다. 국민들의 뜻도 아닌데 말이다. 이런 우리사회의 정체를 무엇이라 불러야 하나. 한국적 민주주의? 이명박식 민주주의? BJR 민주주의?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이든 ‘민주주의’라는 네 글자가 참으로 초라해 보인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369 | 추천: 0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겨울, 추위의 시작이다. 한라산에는 예년 보다 일찍 많은 눈이 내렸다. 가을이 끝나갈 무렵, 원주, 부안, 전주 등지를 다녀왔다. 공동체 운동이 활발하다는 서울의 성미산 마을도 가보게 되었다. 부안에서 만난 어느 분은 부안과 제주가 참 비슷한 곳이라는 말을 들려주었다. 과거 시대에 부안은 역사적으로 유배지이면서, 민란의 땅이기도 하단다. 제주와 유사하다. 오늘 날에도 새만금, 핵폐기장 문제로 주민들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이 또한 군사기지 문제로 고통을 당하는 제주와 닮아 있다. 부안으로 가는 길에 지나친 군산은 어느 덧 군사도시화 되는 징조를 보았다. 차이는 있지만, 한국의 ‘지역’은 오늘 날에도 국가의 필요에 부름 받는 동원구조로 머물러 있다. 그 일방주의의 결과로 돌아오는 상처는 두고두고 ‘지역’이 감내해야 할 몫이 된다. 원주에서 만난 분은 ‘원주의 꿈’에 대해 들려주었다. 주민이든, 시민활동가이든, 진보정당원이든 모두가 협동네트워크의 일원이면, 이걸 우선시 하는 분위기다. 이들의 횡적 네트워크는 오직 ‘원주’를 매개로 연결돼 있고, 그 안에서 각자의 삶을 구가한다. 이야기를 들려준 그 분은, 서울에서는 결코 희망을 만들 수 없다고 하였다. 언젠가 TV에서 오키나와 주민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인’이 아닌, ‘오키나와 사람’이라고 답한다고 했다. 부안 사람들에게는 지리상의 조건이 매개가 돼 ‘독립 의식’ 같은 게 있어왔다고 들었는데, 제주에도 그 역사적 연원을 통해 ‘독립’이야기가 세간에 농담처럼 회자된다. 이 경우들은 ‘지역’의 독자성을 매우 강렬하게 표현한 것이지만, 그 만큼 전통적 삶의 양식과 문화적 조건들의 온전한 완결체로서의 지역의 의미를 일깨운다. 중앙중심 논리가 필연코 내포하는 일방주의에 대한 일종의 방어로서 불거져 나오는 반작용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지역’은 ‘지방’이 아니다. 보편이 관철되는 특수한 ‘부분’으로서만 설명될 수 없는 고유한 맥락이 존재한다. 오늘 날, 지역은 국가를 거치지 않고 세계와 소통하는 독자단위로서 재평가되고 있다. 서울중심의 일극체제가 빚어낸 한국사회의 여러 고질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도, 이제 ‘지역’ 중심으로 가야한다는 흐름이 생긴 지 오래다. 그렇지만 아직 그 흐름은 어떤 물길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세종시 공사현장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이명박 정부는 이 ‘지역’을 과거보다 더 후퇴된 형태로 바라본다. 이명박 정부에 있어서 ‘지역’은 국가의 번영에 복무하는 일개 경쟁력 단위일 뿐이다. 서울을 ‘세계도시’로의 발전을 촉진토록 하는 주변부 동력에 불과하다. 서울의 인구를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역의 몇몇 도시들을 주변과 통합해 만드는 덩어리 체제를 국가발전구조로 놓고, 독자적 단위로서의 ‘지역’들을 이른바 광역경제권으로 묶어세움으로써, 국가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봉건적 지배구조로 재구조화하려는 의도를 출범초기부터 보여 왔다. 지금 벌어지는 세종시 논란도, ‘행정수도이전’이라는 명제는 실종된 채 ‘세종시 수정’이라는 프레임 속에 끌려 다니고 있을 뿐이다. 의도했던 바일 것이다. 내년에 벌어지는 지방선거는 현 정부에 대한 중간평가라는 모호함에서 벗어나 이러한 보다 가치적이고 맥락적인 차원에서 ‘지역’에 대한 논쟁이 선명하게 부각되는 공간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지역들이 힘을 합쳐 지역연합의 문제제기를 형성하고, 그것이 다시 지역별 역내 구도로서 자리 잡게 해야 한다. 그래야 분권이든, 녹색성장이든, 심지어 4대강이든 오로지 ‘정부사업, 정부예산 따오기’의 삽질경쟁의 시각으로 지역을 몰가치의 늪으로 치환해 버리는 현존 지자체 권력과 대별되는 구도를 전제할 수 있다. 2010년 지방선거를 향한 여러 논의가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MB체제를 돌파하기 위한 이른바 ‘반MB-한나라당’연대에서부터 진보대연합 논의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도 폭넓다. 진보정당간의 후보단일화 논의도, 이미 정치참여를 선언한 시민사회 진영과 더불어 ‘제3지대 창당’논의로 까지 구체화된다는 소식도 있다. 비판적 지지론이나 독자후보론과 같은 전통적 틀에 얽매임 없이, 현실을 기반으로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는 분위기다. 어쨌거나, 최소한 MB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절박함이 공통분모로 작용하는 모양새다. “진보개혁세력의 연대를 위해 모든 세력들의 뼈를 깎는 희생과 양보가 있어야 한다”는 최병모 변호사의 주문은 이를 웅변하고 있다. 그런데, 시간이 부족한 것일까? 그것은 다시 ‘서울의 움직임’이다. 그것이 ‘2010 연대’이든, ‘희망과 대안’이든, 진보정당 통합론이든, 모두 서울이 시발점이 되고, 서울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투어강연식의 지역기획이 있긴 하지만, 하나의 프로그램일뿐더러, 지방선거를 서울발로 얘기하는 것이 맞나 하는 회의가 앞선다. 이런 식의 논의구조라면, 그것이 실재화된다 하더라도, 정작 지역에서는 중앙 회의가 작동구조를 벗어나지 못한 진보정당 정도만 영향을 받을 뿐, 내년 지방선거에서 진보를 새롭게 대변하는 흐름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할 것 같다. 비단 내년 선거만이 아니라, 이번을 계기로 진보개혁의 새로운 실체를 형성한다는 관점에서도 그 접근과 경로의 일방성으로 인해 입체적인 전국전략으로 가기는 힘들다고 보여진다. 그 만큼 ‘지역’의 문제의식은 이미 성장해 있기 때문이다. 지역의 사회운동은 ‘정치’에 대한 욕망이 한껏 성숙해 있다. 욕망이라기보다는 절박함이다. 지역사회의 변화를 위해 정치는, 그 영역에 대한 인식을 채 가다듬을 새 없이 중요하고 강력한 수단임을 구체적이고 오랜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체득했기 때문이다. 지역에 있어서 사회변화는 매우 실질적인 문제이다. 그래서 그것은 훨씬 분명한 목표, 구체적인 접근과 동시에 깊숙이 보고, 길게 가는 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제주에서 벌어진 주민소환은 ‘토대 없는 정치투쟁’으로부터 뼈저린 변화의 노력으로 거듭나라는 주문을 일반화 시켰다. 그것의 경험이 아니더라도, 지역의 공감은 바로 여기에 있음을 부안, 전주, 원주를 다니며, 그 곳의 사람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지역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한국사회의 그늘이 관통하는 지역의 변화는 한국사회 변화의 내용을 담보한다. 그래서 강준만은 “한국을 지방이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 지역에서 변화를 준비함으로써 한국사회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 진보의 재구성을 위한 중요한 기획이 되어야 한다. 이념과 입장에 따라 나눠지고 합쳐지는 방식이 아니라, 구분된 이념과 입장에 공통적으로 내재된 자치, 평화, 생태와 같은 가치의 총체로서 ‘지역’안에 진보가 구현되게 하고, 또한 그런 지역들의 네트워트가 서울의 일방주의를 포위하는 형태의 새로운 진보기획이 구상되어야 한다. 이미 우리사회에서 ‘지역’은 그 자체로 진보이기 때문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83 | 추천: 0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노사관계 연구본부 연구위원 한 달쯤 전부터 여의도 직장까지 40분을 걸어서 출근한다. 한강고수부지 억새밭을 지나면 곧바로 KBS까지 이어지는 낙엽길이고 그 중간에 작은 찻집이 있어 잠시 다리쉼을 한다. 진한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버릇처럼 책을 꺼내든다. 시집, 소설책, 인문사회과학 서적. 그날 그날 읽으려고 들고 오는 책이 바뀐다. 몇 주 전 갑작스런 추위에 집을 나서기 전, 서랍을 뒤졌다. 혹시나 하며 장갑을 찾았는데 역시나 없다. 세 켤레든 네 켤레든 장갑을 모두 잃어버려야 겨울이 끝나고, 장갑을 사야지 하면 또 다시 겨울이다. 그래서 이맘때면 장갑을 잃어버리는 털털함을 책망하기 마련이다. 마침 KBS 앞을 지나는데 피켓을 든 사람들이 예닐곱 명 서 있다. 피켓 밑에는 ‘KBS 계약직 지부’라 적혀있고 부당한 해고와 원직복직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문득 피켓을 든 손을 보니 장갑을 끼지 않았다. 해고가 되어 싸우다 보니 겨울일 터 언제 장갑을 준비할 정신이 있으랴마는 찻집에 들어설 때까지 그 손이 뒤꽁무니를 쫓아온다. 공원 양쪽 은행나무 가로수에 그들의 시린 손이 단풍으로 걸린다. 지난 목요일인가. 집을 나서는데 가랑비가 온다. 커다란 우산을 쓴 채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g in the Rain)를 흥얼거리며 오는데 KBS 앞이 소란스럽다. 무슨 일인가 멈춰 서서 보니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해고된 사람들이 정문 출입을 시도하고 있다. “비정규직도 사람이다, 일터로 가고 싶다.” 막히면 서서 구호를 외치고 그래도 막히면 또 구호를 외친다. “공영방송 KBS가 부당해고 웬 말이냐!” 비에 젖은 그들의 등만 바라보다 찻집에 들어갔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는데, 또 얼마나 비에 젖으려나. 찻집 통유리 너머로 뿌리는 비를 1시간 넘게 바라만 보다 일어섰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계약직지부가 지난13일 오전 서울 여의도 KBS본관 앞에서 그동안 사측과 벌여온 비정규직 문제해결과 고용안전을 위한 교섭 진행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아마 그 때문일 게다. 지난 금요일 토론회에서 도대체 비정규직에게 “연대하다”가 무슨 의미이냐고 묻게 된 것이. 사회에 ‘자리’가 있는 자, 예를 들어 정규직은 자리를 지키거나 나누거나 더 많이 만들기 위해 연대하고 지금까지 그렇게 연대해왔다. 때문에 연대하다는 사실상 무엇 무엇 ‘인 자’의 규범이며 모든 도덕과 문화와 관습, 법 역시 그러하다. 하지만 한 사회가 무엇 무엇 ‘인 자’와 ‘아닌 자’ 즉 정규직 인자와 아닌 자, 정상인 인 자와 아닌 자, 인문계 고고를 나온 자와 아닌 자, 이성애 인 자와 아닌 자로 나뉘면, 그래서 사회에 자리 자체가 없는 긴 차별의 목록이 만들어지면 무엇 무엇 인자의 규범은 그렇지 않은 자를 배제하는 규범으로 바뀐다. 정규직이 아닌 자에게 연대하다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지 않고 그 말을 쓰게 될 경우 연대가 배제로 바뀌는 것은 불가피하다. 노동조합 전략에 목소리내기(voice)와 회피(exit) 전략이 있다. 직장에 자리가 있는 정규직은 소리를 지르거나 아니면 다른 직장으로 자리를 옮기면 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지 않던가. 그러나 비정규직은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정규직 조직률은 17.5%이지만 비정규직 조직률은 2.5%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매년 떨어지는 추세인데 어떻게 목소리를 내겠는가. 그렇다고 회피(exit)가 가능한 것도 아니다. 비정규직에게 회피란 사회적 강제이며 일종의 추방이지 결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노동조합 전략 하면 두 가지를 떠올린다. 그것이 무엇 무엇 인자에게는 전략과 규범일지 모르지만 아닌 자에게는 그 말을 사용하는 것조차 배제이다. 다시 한 번 묻는다. 비정규직, 주변인들, 사회적 약자에게 연대하다는 어떤 의미인가. 그들이 연대와 저항의 주체일 수 있는가. 이 사회에 자리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가당키나 한 소리일까. 이와 비슷한 문제가 최근 논란이 되는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에 있다. 대기업에서는 기존의 정규직 노동조합 외에 소규모의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있을 수 있다. 이들 노동조합은 조합원의 범위가 겹치는 복수노조가 아니기 때문에 현행법으로도 노동조합의 설립을 인정받은 다수노조이다. 그런데 정부가 주장하는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는 다수노조와 복수노조를 구분하지 않고 한 사업 혹은 사업장에 하나의 교섭단위를 강제하기 때문에 현장에 다수의 조합이 있으면 조합원 수가 최소 1명이상 많은 노동조합만이 단체교섭권을 가지고 사무실을 유지할 수 있다. 즉 정규직 노동조합에 비해 조합원 수가 적은 비정규직 노동조합은 교섭권을 갖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한국의 노동조합은 해당 조합의 조합원 이익만을 대표할 뿐이며 다른 노동조합이나 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모든 종업원의 이익을 대표하는 조직이 아니다. 결국 숫자가 많다는 이유로 특정 이해집단에게만 단체교섭권을 부여하여 다른 노동조합은 헌법에 보장된 노동삼권을 갖지 못하게 된다. 또한 정부는 이 조치를 시행령에 의해 만들겠다고 주장한다. 노동삼권의 제약을 시행령으로 강제하겠다니. 해당 기사를 읽으며 눈을 의심하지만 다시 읽어도 그렇게 씌어있다. 오늘은 영하의 추위란다. KBS 앞을 지나다보니 계약직 지부 사람들이 장갑을 낀 손으로 피켓을 들고 있다. 모금함이라도 있으면 싶은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다. 멈칫 거리다 다시 걷는 길에 노란 은행나무 잎이 휘날린다. 비정규직에게 또 다시 겨울이 왔다. 그들이 정규직처럼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대답할 자신이 없는 탓인지 아니면 추위 탓인지 장갑 낀 손이 시리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91 | 추천: 0
이유정/ 변호사, 인하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국가권력을 입법, 행정, 사법으로 나누고 각 기관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권력분립의 원리이다.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이 하나로 통합된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그 권력은 남용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에 심각한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기관을 국민이 선출하여 구성하는 것이 대의민주주의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입법부의 구성원인 국회의원과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여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국가권력의 한 축을 담당하는 사법부의 구성원은 국민이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관료 법관으로 구성된다. 법관을 선거로 선출하지 않는 이유는 입법부는 다수결에 의해 선임되고 다수에 대해 책임지는 의원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다수의 의사를 입법으로 관철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사법부는 법의 원리를 규명하고 법이 무엇인지 선언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다수의 요구와 관심에 반드시 부응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대중의 영향으로부터 독립된 법관이 재판을 담당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다수의 의사에 의존하고 다수의 의사를 대변하는 입법과 행정은 소수의 이해를 대변하거나 권리를 보장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수의 의사(정치권력)로부터 독립된 사법이야말로 소수의 이해와 권리를 보장하기에 가장 적합한 기관이다. 다수가 될 수 없거나, 다수와 이해관계를 달리 하는 사람들, 공동체의 집단적 목표에 의해 희생당하거나 권리를 침해당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다수의 눈치를 보지 않고 법과 정의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사법부야 말로 유일하게 기댈 언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사법이 과연 이러한 기능을 하고 있는가? 지난 주 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선고한 두건의 판결이 그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용산참사의 1심 판결에서 법원은 진압현장에 있었던 철거민 피고인들에게 징역 5-6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을 행사하여 법질서를 유린한 행위는 엄중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는 사람들도 있다. 용산 참사의 피고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재개발이라는 다수의 이해관계 속에서 권리를 침해받고도, 정당한 보상을 받을 길이 없는 소수자들이다. 다수가 만든 법률에 그들의 권리는 누락되어 있다. 그런 사람들이 경찰 특공대의 진압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사망하였다면, 피고인들이 그 사망자의 아들이고 이웃이라면, 그들이 던진 화염병 때문에 화재가 발생하였는지 여부도 확실하지 않다면, 더구나 범죄사실의 입증책임이 있는 검사들이 수천페이지의 수사기록을 고의로 제출하지도 않고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면, 이런 사건에서 사법부가 5-6년의 중형을 선고하여 피해자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은 하지 않았어야 옳다. 많은 사람들이 판결에 대해 분노하는 이유는 피고인들의 행위가 정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경찰의 무리한 진압과 그로 인해 발생한 참혹한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오로지 힘없는 피고인들에게만 묻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9일 오후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개정 방송법 등 미디어법 권한쟁의 심판 사건에 대한 심의 모습 사진 출처 -노컷뉴스 미디어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도 마찬가지이다. 헌법재판소는 표결과정에서의 위법을 모두 지적하면서도 국회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법률이 무효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다수의 눈치를 보지 않고 법과 정의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헌법재판소의 권한을 포기한 채,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잘못은 했지만 결과물은 건드리지 않을 테니 알아서 고쳐라’고 점잖게 훈계하고 끝내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역할인가? 온갖 불법을 저지르면서까지 미디어법을 통과시킨 다수가 과연 자율성을 발휘하여 스스로의 잘못을 고칠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인가? 사법부의 존재 근거는 소수의 이해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고, 다수를 등에 업은 정치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법과 정의를 수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법은 단순히 다수가 만들었다고 해서 정당화되는 그런 차원의 법이 아니라, 민주적이고 도덕적이며 형평성을 갖춘 법을 말한다. 민주적인 정당성을 부여받지 않은 사법부가 독립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만약 정치권력의 의사에 휘둘리고 눈치를 보며 앞장서 정치권력의 의사를 대변하는 사법부라면 더 이상 독립을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 지금까지는 사법부의 정치적인 독립을 위해 대법관과 헌법재판관을 선거로 선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지만, 계속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는 생각을 바꾸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325 | 추천: 0
안수찬/ 한겨레21 기자 기자가 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권력자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 예외가 없지 않지만 드물다. 좋은 기자도 그만큼 희귀하다. 언론사에 들어가면, 첫 6개월을 ‘수습 기자’로 지낸다. 경찰서 3~4곳을 맡아 기자 훈련을 시작한다. 갓 대학을 졸업한 20대 중후반의 신참 기자는 경찰서장과 ‘대당’한다. 수습 기자의 첫 임무는 서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는 일이라는 우스개가 이 바닥에 있다. 서장을 당당히 대할 수 있어야 ‘출입처’인 경찰서를 장악할 수 있다는 믿음이 기자들에겐 있다. ‘원론적으로’ 경찰 취재 경험은 좋은 기자의 자양분이 된다. 힘 있는 자는 경찰서에 가지 않는다. 힘없는 자들이 피해자 또는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 앞에 줄지어 선다. 10여 년 전 겨울, 수습 기자가 되어 처음 경찰서 형사과를 찾은 날을 잊을 수 없다. 중년 남자가 팬티 차림으로 유치장 창살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만취 상태였다. 형사인가 싶어 말을 건 양복 신사는 알고 보니 사기 피의자였고, 이런 자가 조폭이구나 싶은 험상궂은 남자가 실은 경찰이었다. 퇴학당한 중학생들이 공사장에서 돌려 마신 본드 냄새, 그러잖아도 팍팍한 직장생활의 우울한 퇴근길에 느닷없이 봉변을 당한 샐러리맨의 피냄새, 이 사건에 관해 할 말이 무지하게 많지만 배운 게 없어 두서없이 머리만 조아리는 퇴학생 보호자들의 술 냄새. 그 모든 것이 뒤섞인 비릿하고 습습한 공기가 경찰서 전체에 스멀거리고 있었다.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경찰서는 악다구니의 집합소다. 서민과 권력이 서로 갈등하는 최전선이다. 그런 경찰 취재를 통해 수습 기자는 대학의 온실에서 서민의 뻘밭으로 삶의 근거지를 옮기게 된다. 경찰이 ‘법과 질서’의 눈으로 ‘사건’을 다룰 때, 기자는 ‘인간과 정의’의 눈으로 ‘사람’을 만난다. 거기서 기사를 길어 올린다. 원론적으로는 그렇다. 실제 진행되는 일은 사뭇 다르다. 사람을 만나려면 사건을 취급하는 경찰과 친해져야 한다. 어울리는 일이 잦아진다. 피의자의 처지보다 경찰의 고충에 공명하는 일이 많아진다. 서장·과장 등 간부들이 기자에게 먼저 다가오기도 한다. 그들은 승진에 목을 매고 있고, 기자들이 함부로 휘두르는 펜 끝에 식구들의 생계가 끝장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은 ‘경찰 간부의 눈으로’ 세상 보는 법을 기자들에게 전염시킨다. 이 과정은 이후 기자 생활 내내 반복된다. 검찰, 법원, 행정부, 국회, 청와대 등에서 거듭 된다. 언론의 ‘출입처 시스템’은 감시견 역할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원론적으로는 그렇다.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권력자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시민사회의 대표를 ‘자임’한 기자는 권력 기관에 스스로를 ‘파견’시킨다. 시민의 눈으로 권력의 부패와 전횡을 감시한다. 기사로 폭로하여 경종을 울린다. 결과적으로 ‘출입처 시스템’은 특종 보도에도 도움이 된다. 권력기관은 고급 정보가 오가는 길목이다. 비밀스런 문서와 음험한 이야기들이 횡행한다. 문서를 건네줄 내부 제보자와 친밀해지기만 한다면, 특종을 건져 올릴 수 있다. 이 방식은 기자들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어느 기자가 첫 기사를 썼는지, 시민들은 아무 상관이 없다. 오직 기자 사회의 평판과 관련이 있다. 묻혀진 진실을 캐낸다는 특종의 ‘원론적’ 의미는 출입처 경쟁에서 이겨 직업적 성공을 거두려는 기자의 ‘실용적’ 가치로 종종 격하된다. 언론의 존재이유를 망각하지 않고, 날 서린 비판의 눈으로 권력자들을 감시하는 기자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열의 아홉은 ‘감시견’ 대신 ‘반려견’이 되어 간다. 드물게 비판기사를 쓴다 해도 권력자들의 언어로 보도한다. 그들이 쓰는 기사에서 세상은 권력자, 명망가, 권위자, 유력자의 각축장이다. 여기에 이데올로기는 없다. 진보건 보수건 ‘파워 게임’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면, 결정적 부패 보도조차 “그 놈이 그 놈”이라 생각하는 필부들의 상식에 지푸라기 하나 더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기자의 뿌리에 해당하는 서민들이 감동하거나 분노하지 않아도 큰 상관은 없다. 기자는 다른 방식으로 생존하는 법을 터득한다. 스스로 파워 게임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신문이 대통령을 만들었던가?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대통령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기자들이 별처럼 많았다는 이야기다. KBS <다큐 3일>의 민생르포, MBC <PD수첩>의 탐사고발은 한국 언론이 빚어낸 최고의 성취였다 사진 출처 - KBS, MBC 출입처 시스템이 파워 게임의 링으로 변질되어 가는 동안, 그 링에 오르지도 못한 언론인 집단이 있었다. PD들이다. 공중파 방송의 ‘시사교양국’에 둥지를 튼 이들은 ‘교양’에서 ‘시사’로 진화를 거듭했으나, 끝내 출입처 시스템에 편입하지는 못했다. 같은 방송국의 청와대 출입 기자들이 매일처럼 고위 관료와 얼굴을 맞댈 때, 이들은 인터뷰 요청서를 수없이 보내다 마침내 거절당하는 일을 밥 먹듯이 겪었다. 대신 PD들은 골목과 거리로 떠밀렸다. 고위 당국자가 은밀히 전하는 문서 한 장이면 해결될 일을 그들은 골목의 서민과 거리의 군중을 수없이 만나 확인했다. 해고자 대표의 한 마디와 노동부 장관의 한 마디를 평등하게 다루는 ‘객관주의 저널리즘’ 대신 해고자들의 사연을 일일이 파고들어 소개하는 ‘뉴 저널리즘’을 택했다. 기자보다 성실하거나 탁월해서가 아니라, 기자와는 ‘다른 입장에서’ 세상을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그들이 권력을 만들었던가? 전혀 아니다. 대신 그들은 권력자, 명망가, 권위자, 유력자를 끊임없이 불편하게 했다. 황우석 박사가 자신의 농장에 각 언론사 기자들을 초청해 견학시킬 때, 초대받지 못한 PD들은 황 박사가 거느린 연구자와 그에게서 시술받은 환자들을 만났다. 재경부 출입 기자들이 FTA의 외국 사례를 분석한 여러 문서를 들고 우왕좌왕할 때, PD들은 FTA에 신음하는 멕시코의 서민들을 직접 만났다. MBC <PD수첩>의 탐사고발, KBS <다큐 3일>의 민생르포는 한국 언론이 빚어낸 최고의 성취였다. 그걸 PD들이 개척했으니 흔히 일러 ‘PD 저널리즘’이라 하지만, 실은 탐사 저널리즘의 본령이다. 몰카를 쓴다고? ‘고위 소식통’을 익명인용하면서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기자들보다 낫다. 반론을 충분히 싣지 않는다고? 기계적 객관주의로 사안의 본질을 비틀어버리는 기자들보다 낫다. 이슈를 선정적으로 다룬다고? 노조원에게 전기총을 쏘는 경찰의 선정적 진압 작전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단신 처리하는 기자들보다 훨씬 낫다. 시민의 눈으로, 시민들의 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권력을 향해 따져 묻는 탐사·기획·심층 보도는 원래 기자들의 몫이었다. ‘반려견’이 되어버린 기자들이 그 임무를 망각했을 뿐이다. 방송에 대한 탄압이 이들 시사교양 PD들에게 집중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초창기 KBS <다큐3일>은 찜질방에서 먹고 자는 사람들, 대리운전으로 생계를 잇는 사람들에 주목했다. 민주 정부 집권 이후에도 왜 하층민들의 삶이 여전히 고단한지 물었다. 요즘 <다큐 3일>은 한일 민간 교류 행사 따위에 주목한다. 세상은 그저 평온하다. MBC는 시사교양프로를 통폐합하라는 압력에 처했다. “거기서 거기인 프로를 왜 여러 개 만드느냐”는 핀잔을 듣고 있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거기서 거기인 3개 보수신문이 멀쩡히 발행되는 이유는 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언론은 1분짜리 리포트의 총합이다. 캐묻지 말고 파고들지 말고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아야 선진 언론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심층탐사 PD들의 입에 재갈이 씌워지고 있다. 이미 이빨이 뽑혀 반려견이 된 기자들에겐 그 일이 강 건너 불구경 같을 것이다. 저널리즘 전체가 궁형에 처해지고 있다는 것을 여전히 모른다. 그러고도 기자 맞나.
2017-07-20 | hrights | 조회: 303 | 추천: 0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문화연구학과 교수 필자는 현재 '연구년'(창조를 위한 재충전이 아니라 집중연구와 생산력을 강조하는 요즘 한국의 대학가에서는 '안식년'이라는 낭만적인 용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을 맞아 네덜란드에 머물고 있다. 교내외 기관의 지원을 받는 연구과제 2개를 수행하며 국가기관이 후원하는 해외한국학 파견교수 자격으로 이곳에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때로는 다소 쓸쓸하지만, 모두가 어려운 시절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해외체류근무(?)를 고맙고 소중하게 체험하고 있다. 조그만 대학촌에 정착한지 한 달 보름 정도가 지났는데, 오늘은 그동안 내가 단편적으로나마 관찰했던 우리 업계(대학/인문학) 이야기를 몇 가지 해 보려고 한다. 첫째, 소위 '인문학의 위기'는 한국적 상황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 (혹은 최소한 네덜란드도 예외가 아닌) 현상인 것 같다. 내가 방문한 대학에서도 수강생이 적거나 인기 없는 인문학 분야가 구조조정 대상이 되어 작년에 40여 명의 교수들이 직장을 잃었고 수업과목도 많이 축소되었다. 관련 연구소들도 시장경제의 칼날을 피해가지 못했는데, 이슬람국제연구원은 폐쇄되었고 나의 공식초청기관인〈동양학국제연구원(The International Institute for Asian Studies)〉도 얼마 전 좀 더 협소한 공간으로 이사를 했다. 옛 빌딩에서 혼자 연구실을 사용하던 호사를 누렸던 나는 다른 방문교수와 함께 연구실을 공유하게 되었으니 그 불똥이 나에게도 튀긴 것일까. 둘째, 네덜란드 동업자 교수들은 좀 더 열악한 환경에서 교육·연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연구/교육조교의 도움에 많이 의존하는 한국의 대부분 대학교수들과 달리 이곳 교수들은 온갖 잡무와 행정업무를 스스로 감당해야만 했다. 개강 전에 학과사무실에 들러 출석부를 얻고, 필요한 참고서적을 도서관에 예약하고, 수업자료를 복사하여, 행정실에서 해당 강의실 열쇠를 수령하고서야 수업을 시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정해진 연봉 외에는 부수입원이 원천적으로 거의 없다. 다른 대학에서의 특강은 품앗이 형태로 진행되었고 일반인 대상 교외 강연은 지식인 사회봉사의 일종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한국의 '이름 날리는' 일부 교수들이 대기업 '자문/고문역'과 '사외이사' 등과 같은 빛나는 명함을 새겨 정규수입보다 더 많은 돈을 챙길 수 있는 횡재는 이곳에서 불가능하다. 같은 역사업계에 종사하는 네덜란드 동료학자는 "우리는 한국처럼 (영어)논문 아무리 많이 발표해도 보너스 한 푼 없다"고 푸념했다. 그렇다면 네덜란드 교수들은 과연 무엇으로 사는가? 막스 웨버가 말한 '직업으로서의 학문'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조건 없는 헌신이야말로 그들이 일용하는 양식인가.   네덜란드 라이덴 시의 모습 사진 출처 - Discover Leiden 셋째, 한국과 비교하면 네덜란드에 전반적인 교육시스템은 좀 더 보편적인 평등권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였다. 교육에 따른 금전적, 신분적 불평등을 방지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의대입학생들을 일정한 시험을 통과한 후보자들 중에서 추첨으로(!) 결정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필자는 깜짝 놀랐다. 전문교육이 개인적인 부와 특권의 밑천이 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묘책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학입학도 어렵지 않고 대학별로 전체 순위가 있다기보다는 각 단과대학별로 다른 전통과 특징을 가질 뿐이다. 예를 들면, 한국(어)학과 일본(어)학 을 배울 수 있는 곳은 네덜란드에서 라이덴 대학이 유일하다. 예술체육대 등 모든 학과를 총망라해서 특정대학만이 최우수대학으로 선망되는 한국 실정과는 아주 다르다. 내 수업에 등록한 수강생들도 상호 경쟁적이라기보다는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과목을 느긋하게 배우겠다는 것이 기본태도이다. 학생참여와 토론을 장려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발표하면 보너스 점수를 부여 하겠다"고 공지했는데 신청자가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 한국에서의 경우에는 거의 80% 이상의 학생들이 다투어 발표신청을 한다. 상대평가에 따른 성적시스템 때문에 다른 학생이 받는 보너스 점수는 내 점수를 빼앗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사상 유래 없는 취업난에 시달리는 한국의 대부분 대학생들이 이런 '제로섬 게임'의 악몽에 시달리는 반면, (대학원 진학 계획이 없는) 많은 네덜란드 대학생들은 낙제를 면하는 65점 이상 성적에 만족한다고 한다. 나쁜 학점이 좋은 직장을 구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느냐고 되짚어 물어보니까, 너무 높은 학점 소유자는 학창시절에 사교활동이 부족했던 부적합한 직장후보생으로 찍힐 우려가 있다고 한다. ㅎㅎㅎ 오호라, 교수들은 '생기는 것 없이' 온갖 잡무와 업무에 시달리고 대학생들은 우등생 되기에 목숨 걸지 않고 평균적으로 빈둥거린다면 이 나라의 장래는 누가 이끌고 책임질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네 처지 네 대학 네 나라 걱정이나 제대로 해라'이다. 다소 속물적인 기준으로 따지자면, 네덜란드는 노벨상 수상자를 15명이나 배출한 세계 TOP 10 안에 손꼽히는 인재국가이다. 도대체 무슨 특별한 교육철학과 교육정책의 비밀이 있단 말인가. 혹시 이곳 대학에서 교수와 학생이 교실에서 은밀히 주고받는 것은 '지식(knowledge)'이 아니라 '질문(question)'이 아닐까. 결국 이상적인 선진대학은 네가 떨어져야 내가 붙는 겁나는 취업사관학교가 아니라 아름답지 않은 현실과 세상만사에 대한 '의심(doubt)의 숙성공장'이어야 하지 않을까. 근데, 당신 정말 유럽역사 전공자 맞아? 네덜란드에 대해서 쥐뿔도 확실하게 아는 게 없잖아! 그렇다. 우리나라가 직면한 모든 잘못과 어려움의 근원은 분수도 모르고 불평 많고 비판만 일삼는 나 같은 삼류 사이비 역사가(인문학 교수)들이다. 그러므로 되풀이 경고하건대, 허튼 생각 말고 "철자법 맞는 논문이나 열심히 써라 이 철밥통들아."
2017-07-20 | hrights | 조회: 390 | 추천: 0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지난 9월에 검찰이 인도인 보노짓 후세인 성공회대 연구교수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이유로 박아무개를 기소하였다. 이 사건은 여러 가지 면에서 눈에 띤다. 우선 이런 종류로는 처음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다인종‧다문화적 성격이 강화되고 있는 우리나라 상황에서도 생각할 바가 많다. 발언자가 특별히 폭력행위를 준비했던지 그렇지 않던 간에 발언 자체가 갖는 부정적인 상승 작용 때문에 인종차별적 발언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매우 높다. 특히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강력하게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들도 인종차별적 발언을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보호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정도이다. 인종차별적 발언에 담긴 세상은 이질적인 집단들의 정체성이 공존하는 다원적 질서가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국제사회는 인종차별적 발언을 단순히 개인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인종 범죄 수준에서 접근하고 있다. 통상 사회적 약자 집단을 향한 차별적이고 공격적인 발언을 증오적 발언(hate speech)이라고 한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증오적 발언은 인종, 성, 연령, 민족, 국적, 종교, 성적 지향, 성정체성, 장애, 언어능력, 사회경제적 계급, 장애, 도덕적 또는 정치적 견해, 직업, 외모(신장, 체중, 머리색), 정신적 능력, 여타 구별요소에 기초하여 사람이나 사람들의 집단을 비하하거나 위협하거나 폭력과 편견에 찬 행동을 선동할 의도에서 이루어진 발언을 의미한다. 어쩌면 인간을 구별하는 특정징표에 의존하여 이루어진 비신사적인 발언이 모두 증오적 발언에 해당할 수도 있다. 국제사회는 그 중에서 특히 인종에 입각한 차별적 발언을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다루고 있다. 규제옹호론자들은 이러한 유형의 증오적 발언이 저질 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범죄적 행동이라고 한다. 이들은 알포트(G. Allport)의 편견의 단계이론을 좋은 근거로 원용한다. 알포트는 유대인 집단살해 과정을 심리적으로 다섯 단계로 설명하였다(The Nature of Prejudice, 1954). 처음에는 특정집단(유대인)에 대한 편견을 단순히 표출하는 부정적 발언(antilocution)의 단계에서, 이러한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을 기피(avoidance)하는 단계, 이들을 배제하고 차별(discrimination)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다음에는 그들에 대한 물리적 공격(physical attack)을 가하는 단계로 상승하고, 마지막에는 집단 전체에 대한 절멸(extermination)의 단계에 이른다는 것이다. 증오적 표현은 제1단계인 부정적 발언에 해당하고, 첫 단계에서 방치하면 증오의 감정이 팽배하게 되어 위기의 상황에서 타인종, 소수민족, 외국인에 대한 폭력 범죄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서울 강남역 대로에 홀로 서 있는 후세인. 한국인의 차별 속에 외롭게 서 있는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물론 일상에서는 인종차별적 의도 하에서 공격적 발언을 일삼는 혈통파나 네오나치와 같은 부류들도 있지만, 특별한 공격의도 없이 차별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인종차별적인 발언은 발언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언의 상대방은 사회적 인종적 약자로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위협을 느끼게 된다는 점만큼은 보편적 진실이다. 일각에서는 우리 역사가 앞서 말한 유대인 학살, 아파르트헤이트, 흑인노예제 등을 수반했던 나라들의 역사와 다르다거나 우리 민족은 외국인에 대해 정이 넘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전반적으로 동의하기도 어렵거니와, 있다하더라도 정도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근대자본주의와 인종주의는 깊은 상관성을 가지고 있다. 근대자본주의는 인종을 착취 활용하였으며, 인종적 우열의 논리를 통해서 자본주의는 심화되어 왔다. '순혈' 한국인들과 유럽인종이나 일본인들, '순혈' 한국인들과 주변부의 어두운 피부의 사람들의 관계를 공시적으로, 통시적으로 생각해 보면 친절과 적의가 본질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지배질서에 연관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인종주의는 자본주의적 세계질서의 내면이고, 경제적 억압과 착취의 심리적 표현에 가깝다. 전후 세계질서는 이와 같은 가학적 세계관과 이를 조장하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였다.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은 "차별, 적의 또는 폭력의 선동이 될 민족적, 인종적 또는 종교적 증오의 고취는 법률로 금지"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제20조 제2항). 인종차별철폐협약은 직접적인 폭력행동뿐만 아니라 인종주의를 전파하거나, 인종적 증오를 고취하거나, 특정인종에 대한 폭력행동을 선동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제4조). 르완다 국제법정은 증오적 표현을 국제관습법에 위반된다고 선언하면서 전쟁범죄의 일종으로 다루었다. 증오적 발언이 단순한 언어적 표출이 아니라 공격, 지배, 살육의 과정이라는 점을 확인한 것이다. 우리는 증오적 발언, 즉 인종차별적 발언, 장애차별적 발언, 성차별적 발언, 반인도범죄의 희생자에 대한 모욕적 발언 등이 가지는 가학적 성격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 이 문제는 바로 세계관에 대한 세계관의 힘겨운 싸움이다. 그러나 이를 형벌로 간단하게 해결할 생각은 버려야 한다. 형벌이 세계관을 바꾼 적이 없기 때문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380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