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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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노사관계 연구본부 연구위원 올 봄부터 퇴근 후 모 대학의 대학원 수업을 진행한다. 강의 제목은 ‘노동이란 무엇인가?’ 이지만 “노동하는 인간에게 자유란 무엇인가?”가 좀 더 정확한 제목이겠다. 첫 강의 때 필자는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이 강의의 핵심이라고 소개하였다. 첫 번째 질문은 “왜 노동(이때는 육체노동) 그리고 노동하는 인간이 고대 및 중세사회에서는 경멸 받았을까?”이다. 노동은 인간의 삶과 분리할 수 없으며 현대까지 계속 이어지는 보편적인 현상이자 행위이며 인간사회를 형성하는 기본 축이다. 하지만 고대 폴리스에서는 자유로운 시민이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육체노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필연성에 매달려 노동을 하는 인간은 동물과 같으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따라서 고대 폴리스에서는 육체노동은 노예에게 맡겼고 육체노동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만이 시민이자 폴리스의 구성원이다. 고대 및 중세사회가 노예와 농노의 노동을 지배하였다고 비판할 수 있지만, 인간이 먹고 사는 노동에 매달리면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특수성을 드러내고 자유, 정의, 평등, 존중, 연대 등의 가치를 논의하는 정치적 행위를 할 능력을 갖출 수 없다고 본 고대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중요하다. 예를 들어 상사의 부당하거나 부정의한 명령에 따르면서 “먹고 살기 위하여”, “내 직무이니까”라는 말을 쉽게 한다. 또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쩔 수 없지”라고 한숨을 쉬어본 경험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될 경우 자유나 정의와 같은 가치는 사람들의 삶에서 의미를 갖지 못한다. 먹고 살기 위하여 정당하고 자유로운 선택을 포기해야 함을 고대인들은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프랑스 7월혁명이 일어났던 1830년에 완성된 혁명적 낭만주의 화가 들르쿠르아의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여신의 모습은 자유에 대한 열정과 흥분을 자아낸다. 미국 ‘자유의 여신상’의 모형이 됐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소장. 사진 출처 - 한겨레 두 번째 질문은 “경멸의 대상이었던 노동의 지위가 상승하고 생산자의 사회가 도래한 이후 노동하는 인간은 자유로워졌는가”이다. 예컨대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은 부의 원천이다. 더 이상 노동은 고대처럼 경멸받는 대상이 아니며 노동하는 인간은 시민권을 갖는다. 물론 이때의 노동은 ‘생산적’ 노동에 한정되지만 비생산적 노동일지라도 노예나 농노의 신분과는 다르다. 문제는 고대 사람들이 우려하였던 것, 즉 인간이 먹고 사는 노동에 매달리면 결코 자유로운 정치적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지적일 터이다. 기술발전 등에 따라 근로시간이 주 6일에서 주 5일로 줄어들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 경우 그 남는 시간에 사람들은 자유, 정의, 평등 등의 가치를 고민하고 논의하는 정치적 행위를 할 능력을 키울까? 오히려 고대 사람들의 우려가 좀 더 심각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부정의하고 불평등한 상황을 용납하고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이 공공연한 진실 아닐까? 물론 한 학기동안의 강의에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없고 하나의 정답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고전 혹은 중요한 책들을 함께 읽으면서 학생들과 강사가 각자의 대답을 찾는 것이 목적이다. 지난 강의에서 함께 읽었던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서 밀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설령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동일한 의견이고, 그 한 사람만이 반대 의견을 갖는다고 해도, 인류에게는 그 한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이는 그 한 사람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전 인류를 침묵하게 할 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효용과 공리를 강조하고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주장한 밀이 1859년에 쓴 책의 한 구절이다. “국가의 가치란, 궁극적으로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가치다(...) 국민을 위축시켜 국가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온순한 꼭두각시로 만들고자 하는(비록 그것이 국민의 이익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라고 해도) 국가는 머지않아 다음을 알게 될 것이다. 즉 국민이 위축되면 어떤 위대한 일도 실제로 성취할 수 없고, 국가가 모든 것을 희생하여 완전한 기구를 만들었다고 해도, 그 기구를 더욱 원활하게 운영하려고 한 나머지, 스스로 배제한 바로 그 구성원의 활력의 결여로 인해, 결국은 그러한 기구가 쓸모없게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51년 전 인간에게 자유란 무엇인가를 쓴 책이 지금도 가슴에 와 닿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쨌든 이번 강의는 학생들보다 강사인 필자가 더 배우는 것이 많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330 | 추천: 0
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 교육조직국장 날씨가 유난스럽다. 4월이 되도록 추위의 기승과 눈과 비가 그렇다. 어제 껍질을 뚫고 나온 개나리와 훈훈한 날씨로 두터운 옷을 벗어버린 오늘, 그러나 야속하게도 춥다. 과연 봄은 오려나? 자연의 봄도 봄이지만 사회의 봄은 언제나 오려는지,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더 마음 편하리만치 사회적 냉기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듯하다. 둘러싼 환경은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성폭력과 성추행으로 뒤범벅된 정치인들이 복귀를 시도하고 있고, 깃발만 꽂으면 된다는 당선가능성은 정당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그로인해 여성들의 저항에 부딪혀 무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여전히 복당, 공천의 수순을 밟고 있다. 백령도 앞바다의 해군함의 수몰은 뭔가 께름칙함을 남겨두고 있으나 군 당국과 정권은 연일 미심쩍음만 남기고 실종자 가족들의 복장만 터지게 하고 있다. 이 모두가 정권의 획득과 연장을 위한 짓거리들 이라는 판단이 든다. 정권획득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양심을 팔도록 강요하는 무엇이 된 데는 어떤 이유가 있나? 정치권력과 그 획득의 과정이 국민들의 생활과 삶을 파괴하면서 존재하도록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정치란 누가 뭐래도 일상의 삶과 생활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주객이 전도된 이러한 사태는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질문이 필요할 때이다. 우리가 그 과정에 동조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정치 앞에서 모든 것이 무화되고 희생되어버리는 현실 앞에서 느끼는 것은 분노를 넘어선 고통이다. 한편에서 정부는 ‘사회복지정보시스템’ 사용의 강제와 ‘지정기부금단체’에 대한 조건을 강화하고 기존의 단체들이 그 조건을 갖출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단체의 투명성과 관리의 효율성을 논리적 근거로, 국고보조금의 중단과 지정기부금단체에서의 배제를 협박으로 하는 두 제도의 핵심은 ‘단체 활동과 예산 상황에 대한 장악’ 과 ‘통제’에 있다. 여성단체는 특히나 민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주로 여성폭력의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과 자립을 주요한 활동내용으로 하면서 그 피해자들의 정보를 전산망에 올려놓아야 하고, 후원자들의 주민등록번호를 포함한 모든 신상내역을 입력하고 사회복지통합전산망이라는 온라인 유통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폭력피해자의 신상은 최소한의 조건으로 노출되도록 해온 지금까지의 관행에 전면 위배되는 정책방향이라 상당히 혼란스럽고 따라서 사용 자제를 요구중이다. 그러나 한 발 더 나아가 정부는 국고보조금을 받는 단체 외에, ‘기부금 영수증’을 발급하는 모든 민간단체들에 새로운 법령을 강요하고 있다., 일부 정관을 수정해야 하고, 통장을 통합 등록하여야 하며, 2년간의 결산 및 예산과 활동내용을 보고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국고보조금을 받는 단체가 아니라 순수 후원금으로 운영되고 있고, 공익적 성격을 갖는 단체 활동에 대한 지나친 간섭이라는 비판이 일 수 밖에 없는 지점이다. 한편에선 공익성을 띈 ‘민간단체 죽이기’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어떤 결말이 나고, 어떤 민간단체들이 기부단체로 지정되는 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문제는 기부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조치가 그나마 나눔과 기부의 관행을 퇴행시키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다. 혹자는 이 기회에 기부금영수증 없이 후원할 수 있는 후원자들과 함께하는 진정한 운동(?)으로 거듭날 기회라고 하지만, 그렇게 의미와 비장함만 갖고 대응하기엔 현실적 절박함 들이 존재한다. 이 대목에서는 시민들의 협조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단체에 대한 희망을 놓지 못하는 것은 단체가 여전히 많은 이들의 동무역할을 하고 있음이다. 3월 한 달간, 전국에서 새롭게 활동을 시작한 이들을 모아 직무연수를 진행하였다. 교육과정에는 서로를 드러내어 나누는 시간이 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새롭지 않으나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었다. 본 단체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니 어느 면에서든 ‘지진아’ 이거나 ‘부적응자’들이라는 것이다. 다양한 삶의 경로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공통적인 점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개인적 저항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제도권 교육을 일찍이 박차고 나왔던 이, 가부장적인 집안분위기에 저항하여 집을 나온 이, 모태신앙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의 절망.... 이들이 겪었을 배제된 자로서의 삶의 경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대다수 비슷한 경로의 삶을 겪어온 이들인 만큼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사진 출처 - 한국여성의전화 우리 중 누군가는 그래서 여기를 ‘대안학교’라고 한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 대한 대안학교. 참 그럴듯한 말이다. 아이들만 대안학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인이지만 여전히 부적응하는 자들, 기득권-적응된-을 가진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지진아’들인 이들을 위한 ‘대안학교’는 더욱 필요하다. 성인은 아이에 비해 동정의 여지가 적기 때문에 기회도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성이 수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부적응자는 필연이다. 더욱이 사회구성원 중 일부가 일부에 의해 현저히 억압되거나 왜곡됨을 강요당할 때 아웃사이더의 양산은 당연한 현상이 된다. 이러한 아웃사이더들이 모여서 위로받고 지지받고 지지해주어 집단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이 필요하고 다행히 내가 속한 곳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에 위로와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누구는 타인의 삶을 파괴하고서라도 사회적응에 목을 매고 그만큼 적응하고 누구는 자신의 삶을 파괴하지만 적응 못하거나 적응을 거부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마음이 아프다. 삶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나, 누구는 타인의 삶을 파괴하고 누구는 자신의 삶을 포기함으로써 파괴한다. 그리고 사회제도는 그러한 간극을 더 확대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사회복지정보시스템이나 지정기부금단체에 대한 조건의 강화는 그 중간지대에 새로운 적응상황을 만드는 것들을 애초에 차단하는 형태로 작동할 수 있다. 이러한 제도는 결국 제도에 순응하는 제도화된 시민단체를 양산하거나 탈 제도화된 시민단체를 양산할 뿐이다. 순응하거나 벗어나거나 양자택일을 강요할 뿐이다. 시민단체의 영역은 제도화와 제도 밖, 탈 제도를 넘나들면서 새로운 사회의 대안을 모색하는 것에 있다. 시민단체 활동의 영역자체가 다양성을 전제로 하고 있음이다. 그러나 현재의 제도는 오로지 한 길, 순응하거나, 배제됨으로서-시민단체 생존권을 버림- 생존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택하게 되게 한다. 양극화는 이제 시민단체의 양극화로 확대되고 있는 경향이다. 이러저러한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이러저러한 대안이 머릿속을 왔다 갔다 한다. 제도자체에 대한 저항을, 제도밖에서의 저항을, 그리고 제도자체에 대한 저항을. 아무래도 뾰족한 대안은 없다. 다만 추방되거나 스스로 벗어난 자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 공간을 바탕으로 사회질서에서 거부되거나 거부한 자들이 정체성을 선명히 하고, 그들의 경험을 보편화하고 일탈/부적응의 맥락을 드러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이 곧 획일성에 다양성을 포함시켜가는 과정이자 기존사회질서에 대한 대안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것이 곧 대안의 학교로서의 여성/시민단체여야 한다. 기존의 상식을 상식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과정-정치가 삶의 위에 있지 않고 삶을 위해 존재하도록 하는 것과 같은-이 다양한 현존하는 대안학교-여성/시민단체-들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적이고 가부장적 사회질서에 부적응한 이들, 지진아들의 대항의 공간으로서의 대안학교에 다니는 나는 행운아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322 | 추천: 0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기원전 1세기 전반에 로마사회는 혼란스러웠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집단과 기득권에 도전하는 세력 간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실라와 마리우스 같은 군벌들의 대결이 공화정의 앞날에 암울한 전조를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기원전 58년에 호민관 푸불리우스 클로디우스가 도시빈민을 염두에 두고 식량을 무상으로 배급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키케로는 무상배급을 받으려는 시민들을 향해 '국고를 빨아먹는 반아사의 거머리들'이라며 참으로 품위 없는 독설을 쏟아 내었다. 물론 클로디우스에게 평민의 표를 얻기 위한 동기가 크게 작용했다는 점은 짐작이 간다. 당시에 정치를 민중과 손잡고 수행하겠다는 사람을 민중파(populares)로, 원로원과 상의하며 상층부의 이익을 옹호하는 그룹을 선량파(optimates)라고 불렀다. 키케로는 선량파답게 재산이나 토지의 집중을 정치적 의제로 거론하는 자들을 공화국의 파괴자라 성토하고, 국가를 '귀족과 기사계급(최상층 시민계급을 말함)라는 두 신분의 조화'라거나 '재산을 가진 자들의 연합체'로 규정하였다. 요즘 말로 유산자 계급의 국가론에 입각하여 로마의 귀족적 공화정을 온몸으로 수호하고자 하였다. 그러면서도 호민관제도가 민중의 격동을 순치하는 데에 적합한 기구라고 판단하는 정치적 노회함도 보여주었다. 본성상 그가 귀족적인 공화정이 민주정으로 진화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였다. 로마공화정의 진화과정에서 그라쿠스 형제들의 정치를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야심찬 계획을 추진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지만 항상 정치의 본령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요즘 개념으로 하면 그라쿠스 형제는 사회민주주의자에 가깝다. 그러나 키케로는 그라쿠스 형제가 등장하기 이전의 로마의 정치질서를 이상적인 체제로 규정하면서, 그라쿠스 형제를 민중파의 원흉으로 지목하였던 것이다. 로마는 포에니 전쟁을 종국적으로 승리함으로써 도시국가에서 제국으로 팽창하였다. 승전은 외부적으로 로마의 위세를 높이는 것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분열과 붕괴의 씨앗을 배태하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전쟁은 평등에 기여하기 보다는 부의 집중을 낳으면서 양극화를 가속화시킨다. 로마는 제국으로 발전하면서 공화정의 기풍이 와해되고, 무엇보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내던질 평민(군인)들이 빈곤의 나락에 떨어짐으로써 공화국의 입대자원도 부족하게 되었다. 이에 그라쿠스 형제들이 10년의 시차를 두고 각기 기원전 133년과 기원전 122년에 호민관으로 선출되어 가난한 평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토지귀족들이 과도하게 잠식한 공유지의 보유상한선(500유게라=약39만평)을 정하고 그 이상의 토지는 환수하여 토지 없는 평민들에게 30유게라씩 배분하였다. 10년 후에는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곡가폭등으로 인한 로마의 가난한 시민들의 민생고를 타개하기 위하여 곡물법(lex frumentaria)을 도입하였다. 해외 시장에서 싼 가격으로 매입하여 시민(그의 처자나 자식 전부가 아니라 오로지 선거권을 갖고 있는 시민)들에게 평등하게 한 달에 33kg의 밀을 시가의 2분의 1로 공급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상당한 비용이 소요되는 것이었지만 상당히 유용한 정책이었다. 그라쿠스 형제들은 이러한 정책을 시행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키케로는 이들을 성토하며 이른바 사회정의와 분배를 말하는 자를 거의 반역자 수준으로 몰고 갔다. 그런데 정치라는 것이 사회 안에 절망자를 희망으로 갖도록 이끌고, 중간계급을 나락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지혜와 책략이라고 본다면, 누가 정치의 이상에 충실하였는지를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다. 키케로는 원로원의 명성 아래서 자신의 지위와 재산이나 지키려하였던 정치적 수사학자로 자로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6·2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 등 교육 관련 이슈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민주당 등 야 5당과 ‘친환경무상급식풀뿌리국민연대’가 3월18일 오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친환경 무상급식 전면 실시 및 입법화 촉구 결의대회를 열었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최근 무상급식(의무급식)이 교육감선거에서 이슈로 자리 잡았다. 정파를 떠나서 의무적인 공교육의 이상을 구현해야 할 것이다. 급식의무의 이행은 공교육의 내실화로서 청소년들의 건강에도 기여하고, 사회적 책임감이나 세대 간의 연대의식을 강화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따라서 시민단체들이 급식문제를 중요한 선거쟁점으로 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선거관리위원회가 시민단체의 이러한 노력을 선거법에 위반된다며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고 말았다. '민주주의 기네스북' 같은 것에 등록하기에 적합한 사례들이다. 정치는 공공의 대지를 확장하는 작업이다. 선거는 경마장으로 떠나는 소풍이 아니다. 시민은 후보자들의 경합을 그저 구경하는 집단이 아니다. 당국이 말의 정치를 막는다면 남는 수단이 무엇인지 당국자는 생각해 보시라.
2017-07-20 | hrights | 조회: 551 | 추천: 0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문화연구학과 교수 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분방한 나라 중의 하나로 흔히 네덜란드가 꼽힌다. 마리화나를 포함한 마약과 공창(公娼)제도가 대변하는 육체적 향락이 허용된 세계에서 매우 드문 나라이기 때문이다. 골목마다 눈에 띄는 '커피 하우스'에 가면 마리화나를 쉽게 구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량을 소지할 수도 있다. 또한 관광객들의 단골 답사지로 알려진 암스테르담 중심가 홍등가(Red Light Street)에서는 금전을 매개로 한 성매매가 공공연히 거래된다. 라이덴과 같은 대학촌에도 '에로틱 하우스'라는 간판을 내건 업소가 주택가에 버젓이 위치한다. 내가 작년 여름에 '금지된 것이 없는 나라'에 체류하기 위해 짐을 꾸릴 때 친구들이 염려와 부러움이 섞인 눈빛으로 환송해 준 까닭도 여기에 있으리라. 지난 6개월 정도 현지에서 생활하면서 알아보니까 사정이 다소 다르다. 마리화나를 포함한 약한 마약류(soft drugs)를 소비하는 것은 엄격히 따지면 여전히 불법이다. 다만, '관용'될 뿐이다. 보통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추구하는 탐닉을 감시, 통제, 금지하는데 따르는 공적인 재정 부담과 인적자원의 낭비 및 현실적인 실효성 등의 여러 요인들을 고려하여 관행적으로 허용된 것이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15-24세의 네덜란드 청년층의 9.7%가 한 달에 1번 정도 약한 마약류를 즐기며, 전체국민의 60%가 약한 마약류의 합법화를 지지한다. 이런 배경 하에 온갖 사회제도를 도덕적 잣대가 아니라 철저히 실용적인 차원에서 실험하고 검증하는 네덜란드 식의 '똘레랑스' (네덜란드 용어로는 gedoogbeleid) 정책이 법규와 실제가 다른 특이한 마약정책을 잉태한 셈이다. 마리화나 피는 것이 '관용'되는 것에 비해 성매매는 네덜란드에서 완전히 합법적이다. 1988년에 창녀/창남은 정상적 직업인으로 인정받았고, 2000년에는 성매매업소가 라이센서를 획득한 합법업체로 승격되었다. 현재 대략 150개의 사업자등록증을 획득한 성매매업소가 암스테르담에서 개업 중이며 8천-1만 2천명의 성노동자들이 업계에 종사하며 연간 1억 달러 규모의 거래를 창출한다. 홍등가에서 도보로 20-30분 거리에 떨어진 반 고호(Van Gogh)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이 연 150만 명이며 연간 입장료 수입이 대략 1천만 달러인 것인 것과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서양격언을 곱씹어 보면 뒷맛이 남는다. 붉은 조명이 빛나고 있는 암스테르담의 홍등가 ‘데 왈렌’ 구역.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네덜란드에서의 공창제도의 도입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직업'의 존재이유와 유용성을 인정하고 개인의 자연적인 쾌락권리를 국가가 도와주고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실용적 똘레랑스 정신을 역시 반영한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혹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육체적 핸디캡을 가진 사람들도 성적 기본권에서 절대로 제외되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이 낳은 사회적인 실험이 현재진형형인 장애인에 대한 성적 서비스 제공제도이다. 육체가 불편한 성인고객들에게 성관계를 포함한 '서비스 배달'을 제공하는 대표적인 비영리 사회단체가 1982년에 창립된 '선택적 인간관계 재단'(Stichting Alternatieve Relatiebemiddeling, SAR)이다. 간호사 출신들이 중심이 된 자원봉사자 체제로 운영되는 SAR은 장애자들에게 단순히 성관계만이 아니라 쇼핑과 산책, 영화감상 등의 동료서비스를 유료로 제공한다. 재단의 홈페이지(www.stichtingsar.nl)에서 필자가 확인해 보니까, 80유로(약 12만원)의 금액으로 고객은 출장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이 금액의 7-8% 정도는 재단 운영비로 재투자 되고 나머지는 서비스제공 당사자의 교통비와 사례비로 충당된다. 필자와 같은 연구원(IIAS)에 소속된 가토(Kato Masae) 박사의 보충설명에 의하면, 극히 드물지만 가난한 장애자에게는 지방정부가 SAR 지불비용에 대해 공적 자금으로 일부 보조해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서비스는 원칙적으로 수익자 부담이며 네덜란드의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기 때문에 대부분 장애인들은 금전적인 걱정 없이 정기적으로 이용한다고 한다. 2005년 현재 1,800명이 SAR에 등록된 고객이며 18명의 여성과 3명의 남성이 서비스 자원공급자로 활약하고 있다. 현재 네덜란드와 벨기에 및 독일 일부 지역 등으로 확산되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성 서비스 공급제도는 어쩌면 19세기 전반 초기사회주의자들이 꿈꾸었던 허무맹랑한 '날 생각'이 150년 뒤에 열매 맺은 결과일 수도 있다. 당시 대표적인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의 한 명이었던 프랑스의 푸리에(Charles Fourier, 1772∼1837)는 자신이 스케치한 이상적인 공동체(팔랑스테르)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은 양도할 수 없는 최소한의 육체적 쾌락추구권을 갖는다고 천명했다. 가난하거나 늙었거나 혹은 외모가 매력적이지 않거나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성적 파트너를 스스로 구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공동체에서 무료로 '사랑의 배달부'를 파견하여 누구나 공평하게 최소한의 육체적 행복을 향유할 권리를 보장했다. 일찍이 누군가 "인간은 빵만으로 살지 못한다"고 선언한 이후, 인류는 형이상학적인 '말씀'의 복음에 포획되어 형이(배꼽)하학적인 육체는 오랫동안 찬밥신세였었다고 서양지성사는 기록한다. 최근에 유행하는 육체담론의 선구자격인 니체의 철학적 금언을 빌려 역설적으로 반박하자면, "거룩한 말씀은 천박한 육체에 빌붙어 사는 하숙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신성한 노동권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굶주리지 않고 사소하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기본권을 갖는다는 주장이다. 장애자 아들이 억제해야만 하는 욕망의 응어리를 풀어주기 위해 그를 업고 사창가를 헤매는 늙은 어머니와 남동생의 이야기(이승우, 『식물들의 사생활』)를 읽은 적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가물가물 하지만 군대에서의 사고로 불구가 된 아들의 폭력적인 (자위행위를 포함한) 발작 증세를 진정시켜주기 위해 가족들이 창녀를 구하러 다니는 소설은 슬픈 육체의 '생얼'을 상징적으로 증언한다. 육체적 터치와 보살핌은 본능적 욕망의 동물적인 교환만이 아니라 완전한 인간이 지향하는 지극히 온전한 행위의 일부분인 것이다. 극히 예외적인 서양사례에 기대어 육체적 쾌락의 기본권을 옹호하려는 필자의 글을 (다소) 낯부끄럽고 (매우) 한심한 봄 잠꼬대라고 항의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청년실업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남아있고 장애인들에게 대중교통을 이용한 자유로운 이동의 권리마저도 보장되지 않는 한국의 현실을 기억한다면 이해할만한 불만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3류 역사가가 얕게 배운 역사적인 차원에서 관찰하면, 사회적 변혁은 늘 비천한 변두리에서 제기된 발칙한 생각에서 비롯된다. 어제의 황당하고 유치찬란한 유토피아가 오늘은 위험하고 급진적인 사고방식으로 배척되다가 내일에는 경청할만한 건강한 대안으로 모색되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가 진정 견디기 어려운 것은 비루한 시간의 사슬이 아니라 전망 없는 상식과 고정관념이 아니던가.
2017-07-20 | hrights | 조회: 329 | 추천: 0
안수찬/ 한겨레21 기자 ‘바이-라인(By Line)’은 기사 끝에 붙는 기자 이름이다. 영문 기사 끝에 ‘Reported by ○○○’라고 쓰는 데서 비롯했다. 고관대작은 새 사무실이 생기면 책상 위 명패부터 챙길 것이다. 기자들에겐 바이라인이 명패다. 제가 쓴 기사에 제 명패가 달렸는지 꼭 확인한다. 남들 몰래 쓰다듬기도 한다. 내가 쓴 기사는 내가 낳은 자식이다. 수습 기자는 바이라인이 달린 기사를 쓰지 못한다. 제가 취재해 작성한 기사에 제 이름을 달지 못한다. 내 기사를 내 기사라 부르지 못한다. 대신 수습 기자를 교육하는 ‘일진 기자’ 또는 ‘사수 기자’(기자들의 세계는 조폭과 닮았거나 군대를 빼다 박았다)의 이름이 적힌다. 적어도 최초 두세 달 동안, 그 원칙이 지켜진다. 6개월 수습 기자 시절의 막판에야 바이라인이 허용된다. 다만 여기에도 문턱이 있다. 단독 발굴 기사, 단독 기획 기사를 쓸 경우에만 수습 기자의 이름을 달아준다. 그런 걸 못하면 하염없이 바이라인 등장이 늦춰진다. 그 정도는 해야 기자 대접해줄 수 있다는 ‘조폭적이고 군사적인’ 선배 기자들의 텃세다. 수습 기자 시절, 나는 지진아에 가까웠다. 동료 수습 기자들이 하나둘씩 ‘신고식’을 치르는 동안에도 나는 내 이름이 달린 기사를 지면에 내놓지 못했다. 1997년 11월3일 신문사에 입사하여 1998년 2월13일에 첫 ‘바이 라인’ 기사를 썼다. 그나마도 단독 발굴 따위가 못됐다. 민주노총이 파업에 돌입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밤샘 회의를 하던 현장을 취재해 보고했는데, 선배 기자가 자신이 쓴 기사에 내 이름을 붙였다. 다음날 새벽에야 신문에 적힌 내 이름 석 자를 보았다. 밤새 취재하느라 고생했다는 ‘정상 참작’의 결과였다. 반가움과 자괴감 사이에서 잠시 헤맸다. 좀 더 멋있게 강렬하게, 기왕이면 역사에 한 획을 긋는 기분으로 첫 바이라인 기사를 쓰고 싶었다. 그 꿈이 무너졌다. ‘첫 경험’을 그렇게 치르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세상이 1등만 기억하는 것처럼, 나도 첫 번째 바이라인 기사만 기억한다. 두 번째, 세 번째 바이라인 기사가 무엇이었는지 기억에 없다. 그보다는 다른 문제가 등장했다. ‘첫 바이라인’ 전까지는 내가 취재했는데 내 이름이 없는 경우가 문제였다. ‘첫 바이라인’ 뒤부터는 내 이름이 달렸는데 내가 취재한 흔적이 없는 경우가 생겼다. 내가 보낸 기사를 팀장이 ‘통째로’ 뜯어 고친 것이다. 그것은 귀밑 머리털을 뽑히는 일이다. 치욕적이다. 약이 바싹 오르는데 버럭 주먹을 휘두르기엔 뭔가 모자라는 기분이다. ‘선배면 다야? 왜 이따위로 분리 해체해 버린 거야?’ 그런 분통의 대부분은 수습 기자의 자기기만이다. 기자 생활 몇 달 치러본 것으로는 괜찮은 기사 하나 제대로 쓰기 어렵다. 데스크는 그런 허점을 보충한다. 물론 이 메카니즘을 악용해 ‘자본과 권력의 얼굴을 한 데스크’가 후배 기자의 기사를 제 맘대로 왜곡하기도 한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런 일을 겪진 않았다. 그래도 아프고 쓰리긴 매 한가지다. 내 바이라인이 오염되는 것 같아 치가 떨렸다. 2000년대 초반인가 신문사에서 작은 논쟁이 일었다. 바이라인에 두세 명의 기자 이름이 한꺼번에 붙는 일이 있다. 여러 명이 협업 취재한 경우다. 원래는 ‘선배-후배’의 순으로 이름을 적었다. “일은 후배 기자가 더 많이 했는데, 왜 선배라고 앞에 이름을 다느냐”는 항변이 제기됐다. 그 뒤로 <한겨레> 바이라인에선 ‘연공서열’이 사라졌다. 더 많이 취재하고 더 많이 쓴 기자의 이름이 앞에 나온다. 바이라인에는 이름만 적지 않는다. 기자의 전자우편 주소도 함께 적는다. 요즘 감성으론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기껏해야 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일이다. 몇몇 언론사를 필두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입했다. 그때마다 기자들의 ‘저어함’이 없지 않았다. 불만을 품은 독자가 기자의 이름 석 자를 벽에 휘갈겨 쓰고 그 먹물 자리에 칼을 꽂는다 한들, 기자에겐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 언론사로 항의전화를 해도 이리저리 돌려받으며 순간을 모면할 수 있다. 그런데 전자우편은 다르다. 분노한 독자들이 바로 내 귀에 대고 항의한다. ‘이메일 바이라인’을 도입한 것은 잘한 일이다. 기자들이 직설적인 분노와 격려에 노출되는 것은 언론의 발전을 위해 좋은 일이다. 그 전까지 기사에 대한 품평은 데스크의 몫이었다. ‘이메일 바이라인’ 이후 그것은 독자의 몫이 됐다. 물론 악의적인 것도 있는데, 감수할만하다. ‘이주 노동자가 저지른 한국인 테러·폭력·살인 사건’을 스크랩하여 매주 나한테 보내는 독자가 계신다. 이주 노동자 인권 기사를 쓴 뒤에 생긴 일이다. 그 독자 분은 나를 계몽하기로 작정한 것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쌍욕을 적어 보내는 독자도 계신다.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인내심을 단련한다. 아직은 버틸만하다. 이제 바이라인은 기자 개인의 인격을 표상하지만, 원래 이랬던 것은 아니다. 90년대 초반까지도 한국 신문의 대다수 기사에는 바이라인이 없었다. 특히 정치·사회·경제면 기사에는 기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이는 영미권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기사는 기자 개인이 아니라 언론사 전체가 책임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여기에 깃들어 있다. 지금도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엔 바이라인이 없다. <이코노미스트> 기자는 기사를 써도 제 이름을 달지 않는다. 방송 뉴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뉴스는 방송사를 대표하는 앵커가 읽었다. 현장을 취재한 기자가 직접 얼굴·이름을 노출시키며 리포트 하는 일은 드물었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묻는다면, 단연 명패를 내거는 편에 내 기자직을 걸겠다. 나는 무색무취의 기계가 아니다. 나는 보고 듣고 느끼고 판단하고 쓴다. 나는 <한겨레>의 한 구성원으로서 이 매체의 품위를 표상하지만, 어디까지나 나는 내 기사를 책임진다. 가끔 <한겨레>도 지면을 통해 헛발질을 하고 뻘짓도 하는데, 그걸 전부 내가 책임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 기사를 쓴 기자에게 우선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런 헛발질 기사가 나오도록 <한겨레> 뉴스룸의 민주성과 유능함을 높이지 못한 책임의 일부는 물론 나의 몫이다. ‘연대 책임’, ‘대표 책임’ 등은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이야기다. 바이라인은 ‘편집권 민주화’에 대한 잣대이기도 하다. 지면(또는 방송 보도)은 대표이사가 책임지는가? 아니다. 대표이사에게만 편집권이 있다면, 기자들은 대표이사의 명에 따르면 된다. 그 때의 언론은 대표이사의 ‘사유물’이다. 독재정권 시절의 언론이 그랬다. 그런 일을 막으려고 편집권을 지키는 대표자를 따로 정한다. 편집인, 편집국장, 보도국장 등이 그런 자리다. 그렇다면 지면(또는 방송보도)은 편집국장·보도국장이 책임지는가? 아니다. 편집국장에게만 편집권이 있다면, 기자들은 편집국장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그런 언론사에선 편집국장이 대표이사의 명을 받들어 취재 지시를 해도 편집권이 독립됐다고 강변할 것이다. 요즘 보수 언론이 그렇다. 그런 건 진정한 편집권 독립이 아니라는 게 현대 언론의 정석이다. 취재·보도 기자의 편집권까지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편집국장의 지시가 부당하면 그에 저항하는 기자가 탄생한다. 그때 편집권 독립을 지키는 것은 편집국장이 아니라 기자 개인이다. 그렇다면 지면(또는 방송보도)은 기자가 책임지는가? 아니다. 기자에게만 편집권이 있다면, 언론자유는 기자 마음대로 휘갈기는 일과 다름없다. 제 하고 싶은 대로 날뛰는 게 언론자유라면 한국은 진작에 아비규환이 됐을 것이다. 편집권은 독자에게도 있다. 언론은 사회의 사실·진실·관점을 담는다. 그걸 발생시키고 유통하며 소비하는 독자야말로 ‘뉴스’의 주체다. 오피니언 면을 늘리고 독자참여 기회를 넓히는 것은 편집권의 주체를 기자로부터 독자로 넓히려는 시도다. 그렇다면 지면(또는 방송보도)은 그 매체를 소비하는 독자가 책임지는가? 아니다. <조선일보>를 사서 보는 독자만 <조선일보>의 편집권에 대해 감놔라 배 놔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신문·방송·인터넷을 가리지 않고 모든 언론은 ‘1차 소비자’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조선일보>를 정기 구독하는 독자는 그 신문에서 취득한 사실·진실·관점을 다양한 사회활동을 통해 ‘사회화’시킨다. 생각을 품고 토론도 하고 행동도 한다. 그가 권력을 갖췄다면 타인을 ‘강제’하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편집권은 궁극적으로 ‘공중(public)’에 있다. 나는 <조선일보>를 정기구독하지 않지만, <조선일보>가 자신의 독자를 발판삼아 공공의 여론장을 함부로 훼손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만일 나의 세금이, 내가 뽑은 정부가, 내가 숨쉬고 있는 시민사회가 그런 <조선일보>를 수수방관하는 쪽으로 움직인다면 나는 반대할 것이다. 나 역시 ‘공중’의 하나이므로.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 언론의 편집권은 ‘편재’한다. 두루 곳곳에 나뉘어져 있다. 이 점을 수긍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전제 하에서 기자는 ‘편재하는 편집권’의 핵심고리다. 기자가 ‘바이라인’을 쓰는 이유는 대표이사-편집국장으로 이어지는 언론사의 편집권과 공중-독자로 이어지는 시민사회의 편집권의 한 가운데서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는 ‘편집권 수호의 병사’라는 표식이다. 공중은 기자를 매개로 뉴스룸과 만나고, 뉴스룸은 기자를 통해 공중과 만난다. 이런 맥락에서 기자는 진정한 단독자다. 90년대 이후 신문·방송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국내 언론이 바이라인을 도입했다. 기자 이름을 걸고, 기자 개인의 인격과 품위를 걸고, 진실을 보도하겠다는 약속을 한 셈이다. 대신 뉴스룸은 좋은 기자, 유능한 기자, 착한 기자, 성실한 기자, 공정한 기자, 진실을 보도하는 기자를 길러내고 보호하겠다는 약속이다. 내가 쓰는 기사 끝에 붙는 ‘안수찬 기자 ahn@hani.co.kr’의 바이라인은 따라서 이런 뜻이다. ‘이 기사는 안수찬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한겨레> 뉴스룸을 거쳐 지면에 나가는 기사이지만, 취재·보도의 일차적 책임은 안수찬에게 있습니다. 중대한 착오는 매체 전체가 책임지겠지만, <한겨레>는 안수찬 기자의 능력과 시각을 신뢰하므로, 오늘 그의 이름을 빌어 <한겨레>의 기사를 전합니다.’ KBS 기자들이 공개한 영상 ‘기자 김인규를 말한다’의 한 장면 사진 출처 - 한겨레 김인규 <KBS> 사장이 얼마 전, KBS 기자를 징계했다. 김 사장이 기자 시절, 전두환 정권을 찬양하는 리포트를 했는데, 그 화면을 공개했다는 이유다. 마이크 잡고 직접 리포트 했으니 김인규 기자의 바이라인이 달린 기사였음은 당연하다. 기자가 보도한 기사를, 그것도 이미 공중에 공개된 공영방송의 리포트를, 비록 수십 년이 지났다 한들 공중의 소유임에 분명한 보도를, 잠시 들춰 사람들에게 내보인 게 무슨 죄인가. 김 사장은 그 바이라인이 부끄러운가, 아니면 바이라인을 달았지만 데스크가 시키는 대로 했다고 강변하고 싶은데 그럴 기회를 얻지 못해 억울한가. 비록 이번의 시도는 모욕적인 징계로 귀결됐지만, KBS 기자협회는 바이라인의 의미를 새로 ‘발견’했다. 기자는 자신의 기사에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고 난 다음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기왕 들춰진 ‘바이라인의 휘발성’을 좀 더 확대할 필요가 있다. 지금 <KBS> 9시 뉴스가 ‘땡이뉴스’로 전락하고 있는가. 그 기자의 이름을 모두 적어라. <KBS>의 주요 교양 프로그램들이 모두 정권 홍보물로 변질되고 있는가. 그 피디의 이름을 모두 적어라. 지금 권력의 방송장악을 강 건너 불구경하며 오히려 찬양하고 있는 신문 기자들이 있는가. 그들의 이름을 모두 적어라. 기왕이면 그 기자들이 지난 10년 동안 무슨 기사를 쓰고 보도했는지도 적어라. 그들이 제 이름을 걸고 내보낸 기사 가운데 무엇을 책임질 것인지, 반드시 따져 물어라. 지금 당장 따질 수 없다면, 5년 뒤에 10년 뒤에, 그들의 생전에 안 되면 훗날 역사책에라도 밝혀 적어라. 그것이 현대 언론이 기자 개인에게 ‘바이라인’의 명패를 씌워준 이유다. <KBS>를 비판하지 말고, <KBS> 기자 개인의 이름을 적어 비판하라. 조중동이라 싸잡지 말고, 문제의 기사를 쓴 기자의 바이라인을 들어 비판하라. 기왕이면 그 바이라인으로 떠받든 수많은 텍스트를 한두름에 엮어 비판하라. 지금 언론자유가 흔들리고 편집권 독립이 위협받는가. 기자한테 일일이 책임을 물어라. 그 기자가 역사의 죄인이 되기 싫다면, 공중과 만나고 대표이사·편집국장과 긴장할 것이다. 제 이름 석자 내걸고 기사 쓰는 일에 자부심을 느꼈다면, 제 이름 석자에 오욕의 낙인이 찍히는 일에 공포감을 느낄 것이다. 기자의 인격을 걸고 보도하겠다고 언론 스스로 공언한 일이 벌써 20년 전이다. 그들의 잘못을 왜 매체에게 뭉뚱그려 묻는가. 한 놈씩 잡아 패라. 그러라고 바이라인이 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62 | 추천: 2
이광조/ CBS PD 단조로운 일상에서 스포츠만큼 좋은 재밋거리가 또 있을까?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원초적인 패거리 정서를 끄집어내는 국가 대항전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거기다 예상하지 못한 메달까지 쏟아지고 연아의 환상적인 연기까지 봤으니... 김연아 선수가 프리 스케이팅을 실수 없이 마치고 눈물을 쏟을 때, 하마터면 나도 따라 울 뻔했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감동의 순간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순간 스스로가 참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살면서 저런 감동의 순간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없었다고 하면 인생이 너무 불쌍한 것 같지만 기억이 별로 나지 않는다. 세계적인 슈퍼스타와 자신을 비교하다니 욕심이 너무 많다고? 그런 건 아니다. 그런 환상에 빠져서 살 나이도 아니거니와 어릴 때부터 특별하게 큰 꿈을 꾼 적이 없으니. 부러웠던 건 무언가를 위해 땀을 흘리고 그것을 성취했을 때의 보람과 기쁨을 느낀다는 것 그 자체다. 바보 같은 놈, 네가 꿈도 꾸지 않고 노력을 안했으니 그렇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나 세계 최고가 될 수는 없고 개인의 재능과 노력에 따라 주어지는 보람과 기쁨, 보상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고만고만한 재능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도 살면서 보람과 기쁨을 느끼며 살 권리는 있지 않은가. 그런데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이 뭔가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땀을 흘리고 목표를 이룬 뒤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란 김연아가 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것보다 더 힘든 일처럼 보인다. 사방이 가시덤불이고 진흙탕이다. 적당한 크기의 쾌적한 집과 마음 놓고 산책하고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주변 환경, 깨끗한 공기, 훼손되지 않은 산과 강, 폭력 없는 학교, 적당한 월급... 40대에 접어든 나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실은 어릴 때부터 이런 평화로운 세상에 사는 것이 꿈이었다. 꿈이 크긴 크네. 혼자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대게 이렇게 ‘큰’ 꿈, 혼자서는 이루기 힘든 꿈을 수밖에 없다. 왜냐고? 개인적으로 무언가 특별한 성취를 이루기가 어려우니까. 거기다 평범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에는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가 너무 험하고 답답하고 화가 나니까.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인터넷을 뒤적이다 몇 가지 기사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가 소개한 한국 직장 여성들의 고충. 직장 다니는 사람이면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보다 훨씬 더 잘 알지. 업무도 잘해야지 회식에도 빠지지 않아야지 출산휴가와 육아휴가는 눈치껏 알아서 줄여야지, 애들이 자라면 입시경쟁에 죽어라 한몫 해야지, 사교육비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집값은 비싸고... 결혼과 출산이 보통일이 아닌 거다. 그나마 선진국의 유수 언론에서 다뤄주니 포털에 기사나 실리는 거지. 정부에서는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다며 난리를 피우면서도 애 낳으면 지자체에서 돈 몇 푼 준다는 거 말고 뭐가 있나. 저출산 문제 해결한답시고 위원회니 뭐니 자리나 생겼겠지. 서울시교육청 홈페이지 화면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또 다른 기사에는 이런 제목이 붙어 있다. “하이힐 폭행과 14억 통장의 진실은?” 서울시 교육청을 비롯한 교육청 비리에 관련된 기사다. 방과 후 학교 강사들에게 돈을 받은 교사, 학교 급식 업체와 교재 납품업체에서 뇌물은 받은 교장들, 장학사 시험 잘 보게 해주겠다며 뇌물을 받은 장학사들... 학부모들과 교육단체, 시민사회단체들이 그렇게 학교 직영급식을 요구해도 이런 저런 이유로 반대해 온 사람들이 벌인 일들이다. 그 중심에는 지난 2008년 서울시민들이 직선으로 뽑은 ‘공정택’이라는 분이 있다고 한다. 기가 막히지 않은가. 더 큰 문제는 정부와 지자체, 국회와 지방의회에 계신 분들의 다수가 여전히 학교 직영급식에 반대하고 교사들의 문제 제기를 빨갱이라고 비난하며, 그들만의 왕국을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교육비 걱정에 학교급식의 안전성과 학교폭력에 노심초사하며 교육감 선거에 무관심한 유권자들이 이들의 왕국을 지켜주고 있는 꼴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건가. 연아를 부러워하다 아직도 옷도 자기 맘대로 못 입고 머리도 자기 마음대로 못 기르고 일부 교사들은 물론 친구들로부터 얻어맞고 사는 학생들이 떠올랐다. 불쌍해도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쉽게 변할 현실은 아니지만 아이들에게 변화가 가능하다는 희망의 단초라도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지방자치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303 | 추천: 0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새해는 새로운 것들의 총체입니다. 그래서인지 새해인사는 기대의 말들로 충만합니다. 새해에 건네지는 “복 받으세요”라거나 “부자 되십시오”라거나 “소원성취 하십시오”와 같은 동서고금을 관통해 온 이 덕담들은 해가 바뀔 때마다 늘 새로움의 기대로 전해집니다. 한 해, 두 해, 시간을 나누어 놓은 것도 인간이고 보면, 이 시간의 흐름 한 묶음으로서 한 해는 과거로부터 미래를 단절시키고자 하는 어쩌면 욕망의 계산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욕망의 시원(始原)은 단절이 곧 새로움이라는 본능 같은 것 때문이겠습니다만, 요즘은 이에 더해 마치 ‘과거는 필요 없어’식의 경향성을 타지 못하면, 문명인이 아닌 듯 천대받습니다. 사람들의 손에서 휴대폰이 바뀌는 압축된 유행은 시간의 구분조차 허락하지 않을 듯 매우 빠르게 진행됩니다. 지나간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으로의 시간의 흐름이 사람들의 미시적 생활관념안에서 시시각각 단절을 일상화해 놓았습니다. 여기에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역사 관념은 촌스럽기 짝이 없을 따름입니다. 이 단절이 사실은 ‘망각하기 위해 기억’하고, 진보하기 위한 제대로 된 단절을 모색하는 역사작업을 방해합니다. ‘새로운 것’의 ‘조건’을 상실한 탓입니다. 독재로부터의 민주주의, 구태로부터의 개혁이라는 새로운 것들은 그것에 합당한 조건을 진행시키지 못한 채, 또 다른 독재, 부활한 구태의 뜰채에 의해 물에 뜬 기름처럼 오늘 날 요부룩 소부룩 걸러내어 지는 것입니다. 평화의 섬이라는 제주의 새로움도 ‘평화’에 대한 깊은 담론과 고민을 조건으로 달지 않은 탓에 군기지의 계획 하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세계자연유산이라는 제주의 새로운 브랜드도 사실은 단절되지 않은 과거와 생태의 결과인데, 그 조건의 성찰 없이 대형건물과 주차장 같은 이기(利器)의 새로움으로 드러내려 바쁩니다. 봄은 늘 ‘새봄’이고, 새해는 추운 겨울로 시작됩니다. 겨울은 시간이 나뉘는 시점에 걸쳐 있으니 ‘새 겨울’이 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아무래도 추운 겨울을 두고 ‘새 겨울’이라고 하기엔 이상합니다. 새로운 것은 따뜻한 데서 출발합니다. 따뜻한 기운이 새로운 것을 창조합니다. 봄이 새로움이라면, 가을과 겨울은 그 새로움의 조건입니다. 새해, 새봄, 이 새로운 것들은 돋아나고, 성장하고, 얻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새해에 서로에게 가해지는 덕담의 ‘덕’은 각자 스스로 얻어내는 것에 대한 관심을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덕(德)은 <설문해자 說文解字〉에서 직(直)과 심(心)을 합친 덕(悳)조에 "밖에서 사람이 바람직하고 안에서 나에게 얻어진 것"이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행위와 실천양식이 바람직하면, 그 안에서 얻어지는 것이 덕(德)입니다. 밖에서 바람직하다는 것은 조건입니다. 이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핵심은 바람직한 행위와 실천양식입니다. 조락(凋落)의 가을, 엄동과 혹한의 겨울의 조건이 있어, 봄의 양식은 새로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가을의 애상보다는 조락한 나무의 곧은 가지와 성장을 봐야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옛 현자들은 겨울 한(寒)데의 곧추 서는 신경이 명민한 각성과 예지를 가다듬기에 제격이라며 스스로 차가운 방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쓰러진 것들이 쓰러진 것을 일으켜 세우고,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헤아려 서로 도울 줄 아는 세상사의 이치와도 맥이 닿습니다. 그러니 좀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새해 인사는 ‘올해는 더욱 바르게 살자’, ‘바람직한 일들을 더 많이 하세요’와 같은 충언이 좋을 듯 합니다. 그것이 바로 덕담을 건네는 상대에 대한 좋은 인사로 여겨지기를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바쁜 인사말 보다는 상대에 대한 깊은 관심과 눈동자를 지긋이 마주하는 일에 시간을 내어주는 일을 앞세웠으면 합니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5당이 지난 10일 오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연합해 공동대응키로 합의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초등학교 시절, 국군장병에게 보내는 위문편지에 “나라를 지키는 일에 더 힘써주세요”라고 썼다가, 가뜩이나 고생하는 군인들에게 더 힘쓰라고 하면 어떡하냐고 선생님께 핀잔 듣던 생각이 납니다. 그 후로부터는 “수고하세요”와 같은 인사말에 늘 신경이 갑니다. 그러나 수고가 있어야 얻어지는 것이 있으니, 이런 저런 일에 더 마음을 두어 수고하면 행복이 커질 것으로 기대합니다와 같이 얻어짐의 조건을 일깨우는 말이 충언으로 받아들여지는 인사가 오가기를 소망해 봅니다. 해가 바뀌면, 정부나 기업의 큰 규모의 인사이동이 있곤 합니다. 제주의 경우 음력 정월을 앞두고 ‘신 구간’이라 하여 집을 옮기는 이들이 일제히 이사를 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지난 해 말미까지 읽던 책을 새해에 계속 부여잡는 게 뭔가 뒤쳐진 느낌에 새로운 책을 찾아보기도 합니다. 1월 1일자 신문은 ‘올해부터 달라지는 것’에 대해 일제히 보도를 합니다. 모두 새로운 것들을 향한 행보입니다. 새로운 것들의 조건은 비단 그 이전과 달라지는 것들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것들의 조건은 ‘바람직한 변화’이냐 하는 것일 것입니다.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새로운 후보, 새로운 정책, 새로운 세력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특히, ‘5+4’로 표현되는 이른바 ‘반MB’논의가 언론보도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새로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바람직한 변화로서 그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새로움의 조건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반(反)’이 작용이 아니라, ‘정(正)’의 행보라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서로 아쉬워 기대는 처지가 아니라, 서로 나눌 것을 풍부히 하는 관계로 기대를 받을 것입니다. 그래야 스스로 얻고 국민과 나누는 대안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86 | 추천: 0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노사관계 연구본부 연구위원 2009년이 끝날 무렵 한 통의 초대장을 받았다. [라 광야, ‘빛으로 쓴 시’ 박노해 초대전]. 새해에 접어들어 초대장에 적힌 장소를 찾아 나섰다. 을지로 3가 지하철역 11번 출구에서 서울 중부경찰서쪽으로 길을 걷다보면 오른쪽에 있는 갤러리 M. “총알은 언젠가 바닥이 나겠지만/샤이를 마시는 건 영원하지요./먼데서 온 친구여, 우리 함께/갓 구운 빵과 샤이를 듭시다.” 사진전을 알리는 포스터의 쿠르드인 여성이 말한다. 박노해가 집단학살의 현장을 찾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처음 만난 23년 전부터 지금까지 벗이자 선배로서 한결같은 모습을 보이는 개인적 경험 때문만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쓸고 닦고 세우며,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신 앞에 무릎 꿇는 힘으로 다시 일어서는 광야의 사람들에게 나는 다만 경외의 마음을 가질 뿐이다”는 시인의 마음이 현장을 찾게 한다. “나는 ‘슬픔의 힘’을 믿는다. 기쁨은 나눠 갖기 어렵지만 슬픔은 함께 나눌 수 있다. 슬픔은 우리를 돌아보게 하며 우리 자신을 정화하고 참된 나 자신과 진리에 가 닿게 한다... 슬픔은 흘러야 한다. 나의 슬픔이 너에게로 국경 너머의 슬픔이 나에게로 강물처럼 흘러야 한다”. 그 믿음이 시인을 학살로 인한 슬픔의 강으로 인도한다. 문득 용산 참사 현장이 떠오른 것은 흐르는 슬픔이 필자에게도 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 출처 - 나눔문화 그래도 한 가지 질문, 왜 시가 아니라 사진인가? “감추어진 그들의 진실을 수없이 기록했지만, 국경을 넘는 순간 언어의 국경을 넘지 못하는 나의 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만국공통의 언어인 카메라로 시를 쓰고 필자는 사진 속에서 시를 읽는다. 그러고 보니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2008년 10월 프랑스 파리에 있는 페르라쉐즈 공동묘지를 찾았다. 두 번째 방문이었고 프랑스어를 하는 동행이 있던 탓에 그 전에 알지 못하였던 새로운 사실을 배웠다. 나치의 압제에 저항하다 죽은 사람들의 묘지명에 단 한 사람의 기업가도 없다는 것 이다. 대부분 노동조합의 조직원인 죽은 자들의 합장 묘비 옆에는 조각이 즐비하였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몸, 포승과 쇠사슬에 묶인 손, 절규하는 입. 그 조각들은 인간이 행한 최대의 잔혹상을 언어 아닌 언어로 전달하였다. 라 광야의 눈동자 역시 비슷한 절규와 아픔을 간직하여 그날 밤 필자는 악몽에 시달리다 눈을 떴다. 수년간 필자는 연구자의 눈을 갖고 비정규직과 근로빈곤의 현장을 꽤 많이 돌아다녔다. 어느 때는 쟁의 중이거나 시위중이며, 어느 때는 교섭 중이거나 근로 중인 곳곳에서 다양한 이력과 얼굴의 사람들을 보았다. 돌아와서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복원하며 보고서나 논문을 쓰는 자신과 마주하였다. 그때마다 부딪혔던 질문, 우리 사회에서 연구자란 지식인이란 누구인가. 기륭전자 노동조합 위원장이 20여 일째 단식을 하는 천막에 방문했을 때 조합원 중 한 사람이 “단식으로 힘이 없는 사람을 붙잡고 길게 인터뷰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고 했지만 위원장은 필자의 조사에 응해주었다. 그러나 돌아올 때 분명 스스로에게 물었다. 저 현장을 조사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저 현장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것이 옳을까. 꽤 오래 끌었고 결국 해결하지 못한 KTX 여승무원 노동쟁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보고서의 작성을 위해 이 분들을 연구원에 모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의외로 담담하게 질문에 답하는 그 분들을 돌려보내고 나서 꼬박 하루 동안 글을 쓰지 못하였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도리스 레싱은 그녀의 강연에서 “모든 사람 스스로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바를 말하게 하라, 그리고 진리 그 자체는 신에게 맡겨라!”고 한 적이 있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충분한 대답은 아니었다. 라 광야, 박노해의 초대전은 다시 한 번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카메라로 시를 쓴 시인과 그 사진 속에서 시를 읽은 연구자, 그들은 누구인가? 불평등과 부정의로 고통 받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은 누구인가? 시는, 연구는 그들에게 무엇인가. 질문 자체, 끊임없는 질문의 과정이 곧 대답 일까. 빛으로 쓴 시는 빛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하다. 혹시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봄 햇살에 하얗게 웃는 나무를 본 적이 있는가. 뜰 한구석의 작은 나무, 여린 잎사귀에 눈이 부신 적이 있는가. 모두가 빛이 되는 꿈을 꾸어본 적이 있는가. 슬픔과 절망이 꿈을 꾸게 하는 힘이라면 빛으로 쓴 시가 빚는 사회에서는 꿈을 없애지 못한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95 | 추천: 0
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 교육조직국장 새해 첫 출근하는 날, 전날부터 내린 눈이 세상을 덮고, 그리고도 사락사락 눈이 내렸지. 그 좋다던 서울의 대중교통 시스템이 지하를 제외하곤, 모두 뒤엉켜 버렸어. 5분이면 되던 기다림이 30분을 넘고, 15분이면 되던 운행시간이 30분을 훌쩍 넘기고도 움직일 생각을 안 해 결국 차에서 내려 뚜벅이가 되었다. 그리고 이튿날도 길은 눈 천지였지. 그게 어제였으니 오늘은 좀 나아지려나? 어릴 적, 눈이 오면 세상은 온통 동화 속이었지.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솟아날 때까지 눈싸움인지, 눈 치움인지를 하던 시절에 눈은 기쁨 그 자체였어. 그 때도 눈이 오면 차는 달릴 염을 못 내었었지. 신작로라 불리던 넓은 길은 온통 흰 눈으로 뒤덮여 누구의 발길도 허락지 않았었다. 단지, 눈으로 인해 괜스레 일찍 일어난 나와 동무들의 발길과 웃음과 고함과 장난질만 허용되던 시절이 있었다. 눈은 눈 그 자체로 환희이고 기쁨이었지. 언젠가 신작로가 더 넓어지고 평탄해지면서, 그리고 눈들이 적게 오기 시작하면서 눈이 오면 온 뒤의 그 처절함이 먼저 상상이 되어버리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어. 차바퀴에 치이거나 떠밀려 진흙과 한 덩이가 되어 눈인지, 흙인지 구분이 안 되던 그 형상이, 도저히 눈의 정체성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껴져서 눈이 오면, 그 자체로 기쁨이기보다는 그 뒤의 처참함이 먼저 떠올라 눈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강박이 생겨버렸다. 그리고 지금은 눈은 생활의 불편함과 대중교통시스템의 한계를 생각하게 하는 기제가 되어버렸네. 눈은 아무 변화도 가치도 없는데 눈을 바라보는 나는 변덕을 부리고 있다. 그래도, 눈은 참 이뻐. 여전히 세상을 동화처럼 만드는 재주가 있기도 하고. 그리고 새해와 눈은 참 잘 어울리지 않나 싶다. 다 덮어버리고 새롭게 세상을 느낄 수 있게 해주니 말이야. 덮는다고 덮어질까 만은... 지난한 해, 참 어이상실이란 말이 어찌 잘 어울릴까 싶을 만큼 어이없는 일들이 많았다. 기대는 했으나 기대이상으로 치달은 사건들과 시간들에 감사하다 해야 할까? 돌아보니 갑자기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너희들을 생각하니 슬퍼진다. 작년에 애가 고등학교에 가고, 그나마 저소득층을 위한 장학금이 있어 위로가 되었는데 그나마 없어졌다지? 아이는 혼자 공부하다 지쳐 드디어 학원을 가보겠다고 했다지? 알아보니 과목당 몇 십 만원이 넘는다지? 어째야하니? 한 달 겨우 끊어줬다고 했나? 그 다음은 어쩌냐? 그나마 지금까지 혼자 잘 해 왔던 애에게 감사해야할까? 그리고 아이 둘을 어찌어찌, 그것도 명문대를 보내긴 했는데, 큰 넘은 군대로 가고, 작은 넘은 일요일까지 알바를 한다니 그 애 인생도 한심하다며 웃음으로 때우던 너의 피곤한 모습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소위 ‘two job’을 가진 너를 보면서, 월요일이면 금요일보다 더 피곤하고 지친 너를 보면서 내가 해 줄 것이라곤 “몸은 좀 어때?”라는 립 서비스만 할 수 있는 나로선, “가난이 정말 대물림이 되는 거 같아서, 애들을 보면 미안하고 안쓰러워서..”라며 입을 닫던 네 곁에서 나는 그나마 조금 나은 내 현실에 안도하고만 있었다. 미래로 장학금인지 뭔지 있었는데 그것마저 수급자가 될 것인지, 장학생이 될 것인지 사이에서 초조해 해야만 한다는 기사가 곧 너였었지. 제도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제도를 만들고자 했던 나였음에도 요즘은 그 제도가 우리 삶과 얼마나 직결되어 있는지 너희들을 보면서 실감하고 있다. 그 복지라는 제도 말이야. 너희들 곁에서 같이 술 마시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는 나는, 술값을 계산할 때도 각각 나누어 내는 것에 너희들을 대신할 수도 없는 나는, 아니 나도 불투명한 현실과 미래를 살고 있기는 마찬가지인 게야. 우리 어째야 하니? 그나마 그런 절망스런 기분과 생각이 오래가지 않도록 바쁜 우리 현실과 두뇌에 감사도 하고 순간순간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며 살 수 있는 너희들의 긍정적 힘에 감탄도 한다. 예전에 “빚을 조금 지면 빚이 짐인데, 너무 많으면 아무렇지도 않아.”라던 ‘돈으로부터의 해방 혹은 해탈’을 한 듯 하던 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돈을 넘어선 것인지 돈에 눌려 자포자기 한 건지는 모르나, 여튼 그 선배의 일상은 해맑았으니, 가진 넘들 돈 좀 빌려 쓰고 갚지 않는 객기도 필요치 않나 싶다. 신 새벽에, 그것도 새해 벽두에 시답잖은 주절거림을 용서해라. 보이지 않는다고 없지 않더라는 얘기를 언젠가 떠들었듯이 눈에 덮였다고 없어진 것이 아닌 듯이, 단지 눈을 가지고 장난질 할 수 있었던 어린 시절처럼, 어이상실로 뒤덮인 이 상황을 가지고 놀자. 그런데 어떻게 놀 수 있을지는 아직도 감감하긴 하다. 그래도 그 방법을 찾을 수는 있을게야. 이제는 어떤 대상이던 싸우기보다 놀고 즐기면서 그 대상을 넘을 수 있을 때도 되었지 싶다. 왜냐면 이제 우리 벌써 반백년을 향해 달리고 있으니 말이다. 장난질할 수 있는 장난감이나 궁리해보자.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새해에는... 이런 표현 정말 진부하다고 느끼지만, 그래도 할 말이 이것밖에 없으니 어쩌겠니? ^^; 새해에는, 2010년에는 눈 덮인 한적한 마을처럼 마음속에 결코 버릴 수 없는 동화하나 만들고, 그 동화를 지키기 위한 놀이 감 하나 만들어 그렇게 저렇게 살아보자.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눈이 되면 어떻겠니? 허물도, 슬픔도 서로 덮어주어 정결함만 남도록 하는 그런 눈 같은 존재들이 되자.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오는 너희들아.
2017-07-20 | hrights | 조회: 279 | 추천: 0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문화연구학과 교수 이곳 네덜란드에서는 연말분위기가 조금 일찍 시작된다. 어린이와 뱃사람의 보호성인인 신터클라스(Sinterklass, 영어로는 Nicholas) 축일 이브 날인 12월 5일에 선물과 축복을 나누며 한 해를 마무리한다. 일찍이 네덜란드인들이 신대륙으로 건너가 뉴 암스테르담(현재의 뉴욕)을 건설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신터클라스 명절이 미국으로 건너가 (귤이 대서양을 건너 탱자가 되듯이) 12월 24일에 활약하는 산타클로스로 재탄생 되었다는 학설도 그럴 듯하다. 그런데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전통의 재창조 혹은 원조 찾기'가 아니라, 신터클라스 축제일에 네덜란드인들은 선물과 함께 자신이 직접 쓴 시를 교환하면서 함께 읽는 오랜 전통을 즐긴다는 사실이다. 이날만큼은 학교와 직장은 물론 언론매체와 국회 등지에서도 야유와 풍자가 넘치는 '시인들의 왕국(네덜란드는 입헌군주정이다)'이 되는 셈이다. 지난 넉 달 동안의 짧은 체류 경험에 비추면, 교수정년퇴임식에서도 송사와 답사가 시 읽기로 진행될 정도로 시 쓰기와 낭송이 네덜란드에서는 어느 정도 일상생활화된 것처럼 보인다. 내가 거주하는 라이덴(Leiden)에서는 1980년부터 도시건물의 여백에 세계 40여개 국가의 시를 그 나라 언어(원어)로 장식하는 문화운동을 시민단체가 주관하여 전개해 왔다. 13년에 걸쳐 총 101편의 시로 도시를 시인의 마을로 색칠하는 행사는 전체 시를 담은 책자 《벽 위에 쓴 시(Dicht op de Muur: Gedichten in Liden, 1992)》의 간행으로 완성되었다. '대안 이미지'(Tegen-Beeld, Counter-Image)라는 주관예술단체의 명성에 어울리도록, 미운 현실에 대항하는 질서를 꿈꾸며 억압에 맞서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헌신하는 내용을 주제로 하는 세계적인 시들이 선정되었다고 한다. 사진 출처 - 필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던 청교도들이 일시 피난, 정착했던 '망명객의 도시 = 라이덴'이라는 오래된 명성과 잘 어울리는 도시 프로젝트인 셈이다. 필자가 책자를 (네덜란드어를 모르니까) 대충 살펴보니까 아쉽게도 한국시인의 작품은 보이지 않았다. 라이덴(Leiden)에서는 1980년부터 도시건물의 여백에 세계 40여개 국가의 시를 그 나라 언어(원어)로 장식하는 문화운동을 시민단체가 주관하여 전개해 왔다. 사진 출처 - 필자 '더치페이'라는 신조어를 잉태할 정도로 셈이 정확하고 실용적인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시는 물과 기름같이 어울리지 않는 이물질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어쩌면 시를 쓰고 읽는 행위는 천박한 현실과 낯 가름하고 더 좋은 내일을 다짐하는 일상적인 업무와 역사적 과제의 일종이 아닐까. 이런 명분을 담고, 네덜란드인들의 문학 사랑을 흉내 내며, 나의 문학청년 시절의 결기를 되살려, 오늘은 독자 여러분들과 한 편의 시를 읽으며 올해를 환송하고자 한다. 멀리서 기원하오니, 부디 겨울의 남은 추위를 잘 이기시고 새해에는 행운과 기쁨으로 가득 찬 또 다른 나날이 되옵소서. 교생실습 Ⅰ 아마도 일천구백팔십일년 봄이었겠지(요). 내가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얻기 위해 교생실습을 나간 곳은 서울시내에서 축구와 주먹으로 손꼽히는 어느 공고 야간 졸업반 영문도 모르고 다닌다는 영문학과 퇴폐총각 샘 터벅머리 머시마들과 함께 공부한 것은 보이스 비 엠비셔스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뛰누나 이 따위 머리 쥐나는 영어문법과 독해가 아니라 컨퓨젼 윌 비 마이 에피타프 침묵이 비명을 삼켜버리고 힘 가진 놈이 제 법대로 아름답다면 지식은 한갓 라면이나 끊이면 보람이겠지 너무나도 비장(悲壯)한 음조와 노랫말을 담은 외국산 팝송 '묘비명' 이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Ⅱ 미안하지만, 그때는 일천구백팔십일년 내가 걸음마 할 때부터 종일 대통령이었던 농민의 아들 막걸리 대신 시바스 리걸로 잔이 넘쳐 돌아가시고 남쪽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고립되어 꽃잎처럼 스러졌네. 세계가 서울로 마구 모였다는 팔팔 올림픽은 그 다음 이야기 사우스 코리아 전직 대통령이 황혼이 깃들기 전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린 것은 아직 먼 훗날 컨퓨젼 윌 비 마이 에피타프 알고 있는 자 4월의 나무처럼 분연히 일어서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운명은 바보들의 손아귀에 (아직) 잡혀있네 우리가 견뎠던 이 땅의 혼란과 시련이 7080 운동가요 후렴처럼 반복된다면 음탕하게 늙어버린 중년 주름에 각인된 나의 부끄러운 교생실습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어머니. (육문청^^*)
2017-07-20 | hrights | 조회: 320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