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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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신하영옥/ 주부, 전 여성단체 활동가 6월말로 그간 약 18년간을 몸담고 있던 단체 활동을 접었다. 그리고 벌써 3개월이 지나고 있다. 그동안 서울시 급식문제로 인한 서울시장 재보선문제로 정치바람이 불고, 희망버스의 희망이 불거지고, 고대 의대생들이 출교되고, 이소선 어머님이 아드님 곁으로 가시는 등 세상은 여전히 수많은 사건들의 연속이다. 그러나 난 이 모든 것을 소식으로만 접하고 있을 뿐이다. 그저 아침에 강아지와 산책을 가고, 집안을 정돈하고 음식을 만들며 아이와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남편과도 함께 백수생활을 즐기고 있다. 사람이 익숙한 것이 무섭다. 처음 한 달은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 지 안절부절. 내일도 모레도 그날이 그날인 것에 대한 조급증과 갑갑함으로 인내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두 달 째는 이런저런 집안일들로 남편 및 나의 원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들이 많아져 그럭저럭 흘려보냈다. 세달 째는 점점 더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서 실은 이 글도 2주나 밀려서 쓰게 되는 것이다. 익숙한 생활방식에서 벗어나는 데 약 세달 정도가 소요되는 것 같다. 요즘은 아주 가끔이나마 ‘행복’, ‘평화’ 이런 것들을 느낀다. 고요함이랄까. 그동안 나의 삶이 얼마나 긴장으로 뭉쳐진 것이었나를 들여다보면서, 그리고 얼마나 이기적이었나를 살펴보면서. 어쩌면 이것은 나란 인간 개인의 특성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여성운동 나아가 시민사회운동을 하는 이들의 공통점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매일 어느 땐 하루에도 수 건의 사회문제들이 터지는 사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빠르게 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 매 순간을 긴장하면서 살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있기 마련인 긴장은 그 자체로 삶의 스트레스가 된다. 이 일이 좋은 사람들에게 일/ 운동은 삶의 1순위가 되고, 특히 여성운동을 하는 나의 경우엔 가족보다 일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가족은 항상 짐이었었다. 지금 돌아보면 아이를 독립적으로 기른다는 명분으로 외롭게 두었을 뿐이고, 남편의 나에 대한 비판을 무조건 가부장적인 구속과 몰지각으로 몰아갔던 적들이 있지 싶다. 명절에 시집으로 가야만 하는 것에 대한 부당함으로 남편의 부모와 형제자매, 친척들조차도 별로 달갑지 않았었다. 그러나 요즘은 시어머니도 어렵게 한 시대를 보낸 시골여성노인이고 시누이들도 어렵게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여성으로 다가온다. 농활도 하는데 시어머니 노동에 숟가락 얹는 일을 왜 못하랴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명절문화가 마땅하지는 않다. 여전히 변화가 필요한 것이지만,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제도나 문화, 사람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관점에 따라 달리 접근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실은 좀 심심하고 외롭기도 했다. 갑자기 너무나 길어진 하루, 매 시간을 어떻게 때워야 할 지 막연할 때,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너무 반갑고, 같이 놀아주는 남편이 반갑고 소중한 존재가 된다. 무엇보다 당분간(?) 실업자의 삶을 선택하고자 할 때 힘이 되어준 것은 남편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막연한 불안함이나 우울이나 무기력증에 빠졌을 때 가장 든든한 빽은 아이와 남편이다. 이러한 대책 없는 외로움, 스산함 들이 이유 없이 뼈 속까지 느껴지면서 거의 매일 늦게 들어오는 엄마 덕에 혼자 낯선 곳에서 시간을 보냈을 아이의 느낌, 아이와 내가 떠나온 자리를 혼자 지켰을 남편의 심정이 이해되어졌다. 그리고 여전히 내 감정과 느낌들을 중심으로 남들의 감정과 느낌들을 잔소리라 치부하는 나를 보면서 이기적 혹은 유아적임을 본다. 사진 출처 - 여성신문 흔히 가정은 여성운동에서 가부장의 온상으로 치부되면서 가족 내 남성과 여성간의 권력문제에 직면하면서 여성주의의 걸림돌로 여겨지고 있다. 실제로 내게도 결혼이후 내내 그러한 가부장제도와 문화속의 남녀위계로 인한 갈등이 발생하는 장소였음이 사실이다. 그래서 항상 한편에선 해체만이 자유와 독립을 보장하는 길이 아닐까... 가지 못한 길을 꿈꾸게 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금씩 갈등들이 진정되면서 문제는 단순히 가정 내의 가부장성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가정 내 구성원들의 성격, 삶의 가치, 소통방식, 노력정도 등 많은 것들이 가족 간 불화 혹은 문제의 원인이 되는 요소들이다. 엄마가 될 준비가 안 되었음에도 결혼하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사회문화적 강제도 문제이나 그 강제를 진지한 고민 없이 수용하고서 마치 그 강제의 피해자화 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진정한 피해자는 일과 양육의 양립을 지원하지 않는 사회제도와 대책 없이 일과 양육을 병행하고자 한 엄마의 선택으로 인한 아이였을 것이다. 임신을 한 후에 여러 가지 여건상 일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당시 한 여성운동 선배는 ‘당분간 양육에 전념하고 일을 해도 좋을 듯.’ 하다는 제안을 했었으나 일이 너무 하고 싶었던 나는 일을 선택했다. 단체를 막 만들던 시기이기도 하였지만 거기서 그만두면 영원히 그만둘 것 같은 조바심이었다. 일 속에서 나의 가치를 발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공/사 이분법적 원리, 공적영역에 있어야 사회적 존재로서의 가치를 발현한다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의 원리에 동승한 것에 다름 아니다. 폭력과 위계로 얼룩진 가정, 나아가 가족이기주의는 극복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가족은 어떤 이에게는 성찰과 위안과 평화의 장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성장의 장이 될 수도 있다. 안타까운 것은 지금 느끼고 볼 수 있는 것들을 왜 그 때는 볼 수 없었을까 하는 점이다. 아마도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세대를 넘어 공감하고 확산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 방법이 무엇일지는 모른다. 다만 여성주의를 지향하면서 사는 것이 좀 더 여유롭고 ‘여성’을 넘어 모든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뿐이다. 진정한 힘은 분노와 거부가 아니라 수용과 인정에 있다. 그것이 사람이든 사건이든 사물이든 간에. 수용과 인정 자체가 힘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결핍감이 아니라 연민으로, 기존의 누군가의 권력을 얻어내는 것이 아닌 새로운 권력질서를 만들어내는 것, 상처가 아닌 희망으로 운동하고 살아내는 방식으로서의 운동, 제도만이 아니라 사람에 중심을 두는 운동, 편협이 아니라 포괄적인 운동이 필요하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457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1. 칼 폴라니의 관점 최근 이제야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의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홍기빈 옮김, 책세상)을 읽었다. 폴라니는 1940년대에 쓴 글들을 통해, 19세기 말 시장이 정치적으로 규제를 받는 상태에서 아예 정치적인 규제에서 벗어나 자기 조정을 바탕으로 한 시장이 생겨난 것이 인류의 재앙이 시작된 것으로 본다. 자기 조정 시장이 생겨나 사회를 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으로 제도적으로 분리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렇게 해서 분리된 경제 영역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경제활동의 일부에 지나지 않던 시장이 경제활동 전반을 지배·규정하는 것으로 격상되고, 무수히 많은 시장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총체적 시장을 형성하게 되고, 그런 가운데 모든 사회적인 가치의 생산을 판매와 구매에 적합한 형태로 바꾸게 됨으로써 상품이 될 수 없는 노동·토지·화폐마저 상품으로 만들어 인간 삶 자체를 근본에서부터 위협하게 된다는 것이다. 폴라니는 노동을 제반 인간 활동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하고, 토지는 자연 전체를 일컫는 다른 이름일 뿐이며, 화폐는 구매력의 징표일 뿐이기 때문에 본질상 상품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현실의 시장에서 노동·토지·화폐가 상품으로 묘사되고 실제로 거래되는데, 실은 이 세 가지 상품은 전적으로 허구적인 상품이라는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시장이 자기 조정의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품 허구의 체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셈이다. 그 이후 사회는 상품 허구가 사회 전체와 관련하여 결정적인 조직 원리를 제공하고, 그 조직 원리가 사회의 거의 모든 제도에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쳐 시장 메커니즘이 현실 세계에서 상품 허구의 원칙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폴라니는 이러한 자기 조정의 시장에 내재된 재난에 맞서 사회가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폴라니는 19세기가 끝날 무렵 보통선거가 보편화됨으로써 노동 계급이 국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도 그 일환으로 본다. 그래서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한쪽에서는 정부와 국가를 권력 거점으로 만들고, 다른 쪽에서는 경제와 산업을 권력의 거점으로 만듦으로써 권력을 둘러싸고서 사회 자체가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2. 21세기 악마의 맷돌의 위기 폴라니는 상품 허구의 원칙에 입각한 자기 조정 시장을 그 속에 모든 인간의 삶과 가치를 집어넣어 분쇄해 버리는 ‘악마의 맷돌’이라고 말한다. 21세기로 접어든 이후, 오늘날 전 세계는 ‘세계화’, ‘신자유주의’, ‘탈규제’, ‘자유무역’ 등을 내세운 가운데 폴라니가 말하는 ‘악마의 맷돌’을 인터넷을 통한 전 세계 동일 실시간이라는 어처구니를 통해 훨씬 더 높은 속도로 돌리고 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21세기 ‘악마의 맷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자가 엔진을 달아 현기증 나게 돌아가고 있다. 어느 누구도 책임질 수 없고, 어느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경제를 담당하는 ‘영웅적인’ 주체로서의 개인은 물론이고, 개별 기업이나 국민국가나 정부마저 이 ‘악마의 맷돌’ 속에서 갈아엎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된 악마의 맷돌’이라 할 수밖에 없는 21세기 이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목도하면서 전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1930년대에 진행된 파시즘과 전쟁이 그 귀결로서 저절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에 이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더블 딥의 가능성에 대한 공포는 ‘악마의 맷돌’이 크게 삐거덕거리면서 전체가 와해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공포이다. 폴라니에 따르면, 자기 조정 시장을 통해 경제 영역이 정치 영역과 분리되면서 동시에 경제 영역이 정치 영역을 장악하게 된다는 것이고, 이는 시장이 사회 전체를 좌지우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악마의 맷돌’이 갑자기 멈추면서 와해된다는 것은 세계 전체의 사회적 삶의 영역 전체가 위기를 맞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대적인 공포, 마치 일본의 원전 폭파와 같은 직접적인 공포를 훨씬 능가하는 대대적인 공포가 세계 전체를 휘감고 있는 것이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2008년의 위기에 이어 계속되어 온 경기부양책으로도 그다지 큰 효과가 없자 이번 9월 9일에 또 4천500억 달러에 달하는 경기부양책을 발표했다. 이는 자기 조정 시장이 얼마나 근본적으로 허구인가를 여실히 드러낼 뿐만 아니라, 한번 속도를 내기 시작한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악마의 맷돌’이 계속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어떻게 정치를 비롯한 사회의 전 영역이 동원될 수밖에 없는가를 확연하게 드러낸다. 3. 악마의 맷돌 속 한반도 문제는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이 ‘세계화 된 악마의 맷돌’이 묘하게도 우리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거센 파찰음을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내외적으로 이 파찰음은 분명 한반도의 위기를 예고하고 있다. 국내의 정치에서 ‘복지’가 사회정치적인 이슈로 정확하게 자리매김 된다는 것이 과연 더 이상 자기 조정 시장에만 삶을 맡겨놓을 수 없다고 하는 근본적인 성찰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조선일보에서 연재하는 ‘자본주의 4.0’처럼 자기 조정 시장의 ‘악마의 맷돌’이 크게 삐걱거리는 것에 대한 기계적인 수리에 의한 것인지를 지금으로서는 그 귀결을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세계 전반적인 추세를 볼 때, 후자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자기 조정 시장은 이미 마치 절대적인 존재인 양 자리를 잡고 있어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만큼이나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역시 ‘절대적인 진리’인 양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이 ‘복지 이슈화’의 기회를 자기 조정 시장의 ‘악마의 맷돌’에 저항하는 강력한 장치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야 한다. 그래야만 ‘시장으로부터의 인간 삶의 해방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우리가 ‘시장으로부터의 인간 삶의 해방구’를 확대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최근 한진중공업 사태 해결을 위한 국회 청문회에서 여실히 확인했다. 이 청문회에서 특히 조남호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비인격적인 기계성을 통해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세계화된 악마의 맷돌’이 얼마나 강고하고 무서운가를, 그 ‘악마의 맷돌’이 돌아가는 데 노동에 관련된 법률들이 얼마나 크게 기여하고 있는가를, 그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사라지고 없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제 스스로 돌아가는 ‘악마의 맷돌’에 삶을 의존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복지 이슈화’를 어떻게든 인간 삶의 해방구를 마련하는 쪽으로 끌고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진 출처 - 한국일보 그런데 ‘복지 이슈화’를 정확하게 이런 방향으로 끌고 가기에는 주변 상황이 너무 힘겹게 돌아가고 있다. ‘한미 FTA의 국회 비준’에 대한 찬반의 논의 틀이 ‘절대적 존재인 악마의 맷돌’을 근본적으로 문제로 삼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찬성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런가 하면, 미국과 중국 중 누가 이 ‘악마의 맷돌’의 어처구니를 장악할 것인가를 놓고서 대대적인 신경전을 벌이는 가운데, 한반도 내의 남북의 분단 문제가 이명박 정권 들어 크게 교착됨으로써 미중 간의 어처구니 장악 신경전을 위한 일종의 돌쩌귀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또한 일본은 묘하게도 한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 등에 대해 영토 분쟁을 계속 재생산해 내고 있다. 그런 가운데 평화헌법 9조를 어떻게든 폐지 내지는 대폭 개정하는 쪽으로 여론을 몰아가고 있다. 이 역시 동아시아 권역에서의 자기 조정 시장을 둘러싼 주도권 투쟁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군사력을 내세운 영토적인 제국주의에서 경제력을 내세운 순수 시장적인 제국주의로 바뀌었다고는 하나, 그래서 법적·형식적으로는 제국주의적 대외관계를 벗어났다고는 하나, 실질에 있어서는 자국의 경제 영역의 확대를 위해 여전히 정치군사력에 입각한 무력경쟁이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해서, 특히 한반도의 남북을 중심으로 심심찮게 격발되고 있는 것이다. 4.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모든 대내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무슨 마술적인 해법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가장 중요한 원칙은 철저히 상식에 입각한 ‘이상 아닌 이상’을 모든 정책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시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경제 성장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활동하기 위해 경제 성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격을 갖추는 것은 즉 인격을 갖추는 것은 의식주의 욕구를 더 많이 더 과시적으로 경쟁적으로 충족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적일 수밖에 없는 의식주의 욕구를 넘어서서 장구한 세월을 통해 인류가 남겨놓은 사회문화적·인문예술적인 가치들을 함께 향유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결코 유토피아 즉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 비록 억압된 형태긴 하나 이미 늘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 하버마스(Ürgen Habermas, 1929- )의 개념을 빌려 말하면, 이는 생활세계를 사회적 삶의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고, 폴라니의 개념을 빌려 말하면, 이는 전인격적인 사회를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버마스의 관점을 소개하기로 한다. 하버마스는 폴라니의 위 글보다 약 40년 뒤 80년대에 쓴 『의사소통행위이론: 기능주의적 이성 비판을 위하여』(장춘익 옮김, 나남)에서 나름의 사회역사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하버마스는 흔히 말하는 넓은 의미의 사회를 체계이자 동시에 생활세계로 파악한다. 그러면서 하버마스는 체계에 해당되는 것으로 시장과 국가를 들고, 시장은 화폐를 매체로 해서 작동하고 국가는 권력을 매체로 해서 작동한다고 말한다. 그런 반면, 생활세계를 상호이해에 입각한 의사소통적인 것으로 보면서 그 상징적인 구조들로 비축된 지식으로서의 문화, 소속과 연대를 가능케 하는 질서인 사회 그리고 언어와 행위 능력을 갖춘 인간성 등 세 가지를 든다. 중요한 것은 하버마스가 제시하는 체계와 생활세계의 관계이다. 시장과 국가라고 하는 체계가 그것들이 생겨날 수 있는 바탕인 생활세계를 식민화한다는 것이 요체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생활세계를 화폐와 권력을 매체로 작동하도록 함으로써 진정한 상호이해와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공공의 장을 파괴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폴라니가 시장과 국가를 대립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역사적인 단계에서 글을 썼다면, 하버마스는 시장의 자본을 중심으로 국가가 결합된 역사적인 단계에서 글을 썼다고 할 수 있다. 체계가 생활세계를 식민화한다는 것은 폴라니가 자기 조정 시장이 ‘악마의 맷돌’이 되어 일체의 인간 삶을 갈아엎어 상품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을 더욱 철학적인 개념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하버마스가 국가기관들이 폴라니가 말한 ‘악마의 맷돌’을 돌리는 데 대거 동원된다는 것을 더욱 심각하게 표현함으로써 폴라니에 비해 더 비관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할 것이다. 폴라니는 인간의 사회적 삶이 결코 ‘악마의 맷돌’ 속으로 순응적으로 완전히 포섭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보고, 그것에 저항하는 계급적인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국가와 정부에 대한 계급적인 장악 여부에 따라 나름의 해방 가능성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볼 때, 그동안 국내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근대화 극복에 관한 사회이론이라든가 이와 맞물려 있으면서 동아시아의 연대와 평화를 추구하는 동아시아론이 갖는 함의는 크다 할 것이다. 다만, 동아시아론이 동아시아 중심의 자기 조정 시장이라고 하는 ‘악마의 맷돌’을 전제로 한 것일 경우에는 연대도 평화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말하자면, 지역주의에 의거한 블록화라고 하는 세계화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분명히 ‘세계화 된 악마의 맷돌’이 결정적인 위기에 처할 때,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과 그에 따른 전쟁이 예고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 대대적인 재난을 피하기 위한 국가적인 정책을 도모하는 데 국내외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를 위한 강정 마을의 투쟁은 분명히 한미일 연합의 ‘악마의 맷돌’을 강화하기 위한 군사전략에 대한 투쟁이다. 이에 대한 투쟁이 국가 공권력에 의해 철저히 억압되는 광경을 보면서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우려를 금치 못하는 까닭이 결코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에 우리는 이미 시작된 내년의 선거 국면을 예의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정말이지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왜 가치가 있고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국내외적으로 어떤 근본적인 정책들을 마련해 실천해야 하는가를 잘 느끼고 알고 있는 지혜롭고 탁월한 지도자, ‘악마의 맷돌’을 더 잘 돌리고자 하는 국회의원과 대통령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악마의 맷돌’이 낳는 재난을 벗어나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고 평화를 위한 연대, 연대를 통한 공감의 모듬살이를 구축해 내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선출해야 하는 것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394 | 추천: 1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정책위원장 나는 지금 경찰서 유치장 안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서귀포경찰서는 지난 1일 나를 포함한 9명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이 중 4명을 구속해놓은 상태다. 해군기지 공사를 방해하고 경찰공무집행을 방해했다는 혐의다. 현재 정부당국과 해군은 강정마을 구럼비 해안을 철조망 펜스와 경찰병력으로 봉쇄중이다. 이로써 400여 년 동안 이 마을 주민들의 삶의 배경이 되어왔던 구럼비의 바다는 처음으로 주민과 마을로부터 단절되었다. 대검찰청은 강정 해군기지 문제를 이른바 ‘공안사건’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체포 작전과 공권력을 통한 강제진압에 나서고 있다. 터무니없는 일이다. 강정마을이 제주 해군기지 후보지로 결정된 지난 2007년 5월 이래, 주민들과 제주의 시민사회단체들은 단 한 차례도 불법적인 집회나 시위 등을 계획해 본 적도, 실행해 본 적도 없다. 오직 해군기지 사업의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문제제기와 이를 바로잡을 합리적 해결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촉구해왔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제주도민의 해군기지 건설 반대여론은, 기지 유치결정이 이뤄진 2007년 5월을 기점으로 더욱 확대되어왔다. 이는 당시 결정의 부당성과 해군기지 사업 추진이 정당성을 결여되어 있음을 반영한 것이다. 2007년 이후 도내 언론사들에 의한 매시기별 여론조사 결과는 최소한 해군기지 건설에 대한 찬반을 넘어 해군기지 건설 사업이 ‘무리하게 추진’되고 있음을 공히 지적하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결과는 해군기지 건설계획 자체의 폐기 여론도 급격히 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올해 들어, 구럼비 해안의 아름다움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해군기지 건설문제가 국가적 사안으로까지 떠오르게 된 배경에는 올레7코스를 찾는 탐방객들의 구전효과와 생명평화결사와 같은 시민단체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주민들의 비폭력저항에 대한 신념과 노력, 시간을 견디는 인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반대를 앞세운 무리한 주장과 폭력적 방식의 저항으로 임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이런 점에서 당국이 ‘폭력시위’, ‘공권력 도전’ 운운하며 이 문제를 공안사건으로 규정하고 물리적 진압을 통해 해결에 나서겠다는 것은, 국민적 저항만 더욱 키우는 일이다. 지난 9월 3일, 평화비행기․평화버스 행사에는 바로 전날 이뤄진 공권력 작전의 삼엄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에서 2천여 명 이상의 시민이 모였다. 이 수치는 섬이라는 제주의 지리적 특성을 생각할 때 2만명 이상의 효과를 갖는다. 해군기지 반대운동의 무력화를 위해 사람들을 구속하고 손해배상청구와 같은 방법으로 발을 묶으려하고, 구럼비 해안을 물리력으로 통제한다고 한들, 평화에 대한 열망과 부정의에 대한 저항의 흐름을 잠재울 수 있을까? 강정마을 구럼비의 자연은, 보여지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400여년 계속돼 온 이곳 주민들의 삶을 반영한다. 구럼비 자체는 이 마을 공동체의 역사이자 축적된 삶의 양식인 것이다. 구럼비 해안의 자연 그대로의 정경은 이곳 주민들 또한 이곳의 자연과 얼마나 평화적으로 관계해왔는가를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곳에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들을 쏟아 붓고, 6만평 이상을 매립하는 기지사업을 벌인다고 하니, 어떤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백보 양보해 설령, 해군기지 사업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아홉 종의 멸종위기종을 포함한 연산호 군락지과 붉은발말똥게와 같은 다양한 생명의 보물창고이자 아름다운 경관지인 이곳을 잘 보전하는 것이 국가안보에 경쟁력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닐까? 구속 중인 고유기 선생의 편지를 제주참여환경연대에서 보내주셨습니다. 강정마을에 추진되는 해군기지 건설문제는 새만금-부안-평택에 이어서, 국가사업의 정당성과 추진방식의 문제를 또다시 제기한다. 설득과 대화의 노력보다는 오직 국가사업이라는 이유로 ‘묻지마’ 추진에 나서고, 이에 대한 반대는 ‘종북좌파’로 매도하며 폭력적인 방식으로 제압하는 것이, 이른바 국책사업 추진과정이 보여준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제 조중동을 위시한 보수언론의 엄호와 이를 바탕으로 한 공안논리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지금처럼 열려진 세상에서는 국가논리가 권위로서 작동할 공간은 협소하다. 이제, ‘국책사업’도 ‘국가안보’도 국민들의 광장으로 내려와야 한다. 반대와 이견(異見)을 감내하며 소통에 나서야한다. 그것이 진짜 효율성 있는 국가사업을 하는 방법이다. 무리한 추진논리와 방식으로 벌써 10년째 표류하는 제주해군기지 문제가 이미 그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어느 가을 오후, 높은 하늘을 배 위에 올려놓고 구럼비 바위에 팔베개하고 누워있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가을의 파란하늘과 맞닿은 바다 지평선 아래로 산호들은 날마다 새로운 꽃을 피우고 있다. 이것은 상상이 아니라 실은 수백 년 동안의 진실이었는데, 해군기지라는 거대한 괴물은 이 엄청난 진실을 기억과 그것으로부터 상상의 감옥으로 밀어넣으려 하고 있다. 그 수백년의 진실을, 다가올 가을 어느 날의 오후의 현실로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이 감옥의 창살쯤이야 차라리 함께 산길을 넘는 벗일 뿐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60 | 추천: 0
이광조/ CBS PD 최근 중국의 포털 사이트에서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부인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됐다. 박근혜 의원이 2002년 개인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 위원장과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 부부 사진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소를 자아내는 이 해프닝을 보도한 국내 한 언론사의 기사는 “김 위원장 부인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중국 온라인 매체나 네티즌들은 김 위원장과 나란히 사진을 찍은 박 전 대표를 제대로 확인과정도 거치지 않고, ‘김정일의 부인’이라고 소개하며 유포한 것으로 보인다” 고 분석했다. 기사는 이어서 “현재 이 같은 황당한 사진에는 각양각색의 황당한 설명도 붙었다. ‘김정일의 4번째 부인’이라는 설명이 가장 많지만 ‘김정일의 절세미녀 4번째 부인’ ‘김정일의 2번째 부인’ ‘좀 오래된 사진이지만 김정일의 부인’ 등과 같은 설명도 있다”고 전하고 있다. 박근혜 의원이나 그를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웃고 넘어갈 밖에 별 도리가 없다. 그런데 단순히 개인의 신상에 관한 엉터리 정보가 아니라 사회 분위기와 남북관계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사안이, 위에서 인용한 기사가 지적한 것처럼, ‘제대로 확인과정도 거치지 않고’ 보도된다면 어떨까? 지난 8월 10일 중앙일보는 정부 고위 관계자를 인용해 김관진 국방장관을 암살하려는 특수임무조가 국내에 잠입해 활동을 시작했다는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북한 암살조가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과 미국의 군·정보 당국이 파악하고 암살조 색출작업을 벌이고” 있으며, “북한 당국의 지시에 따라 김 장관 암살조가 움직이고 있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북한의 호전적인 태도와 경색된 남북관계를 생각할 때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의 국방장관을 암살한다는 것이 곧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정말 현실성이 있는지, ‘정부 고위 관계자’의 전언이 신뢰할만한 건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이 보도를 필두로 중앙일보를 포함해 여러 언론에서 관련 기사가 쏟아졌다. 북한의 도발에 대한 김관진 국방장관의 강경하고 단호한 입장, 예비군 부대가 김정일, 김정은 부자 표적지를 사용한 것이 암살조 파견의 배경으로 제시됐고 급기야 북한 내부 기관 사이의 충성 경쟁까지 거론됐다. 어느새 북한 암살조의 암약이 기정사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그 뒤로는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국방부 장관의 의연한 자세가 화제가 되었다. 그의 하루 일과가 지면을 장식하는가 하면 “나와 함께 다니면 큰 일 날지 모른다”는 장관의 쿨 한 농담이 기사가 되고 김관진 국방장관의 강경하고 의연한 태도가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효과를 내고 있어 미 국방부에서 이를 ‘김관진 이펙트’라고 부른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그뿐인가 또 다른 신문은 김 장관이 장관 취임 이후 지휘 서신 1호에서 인용한 이순신 장군 결의를 인용하기도 했다.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여기에 장관이 트위터에 올렸다는 ‘저는 건재합니다’라는 발언까지. 총성 없는 전쟁이긴 하지만 국민들은 의연한 장수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편의 장엄한 드라마를 지켜본 셈이다. 그런데 장엄한 드라마는 꼭 여기까지였다. 결말은 ‘이 모든 것이 근거 없는 추측성 보도’라는 것이었다. 온갖 극적인 반전 끝에 ‘이 모든 건 주인공의 꿈이었어’라고 마무리는 드라마처럼 8월 10일부터 근 열흘간 긴박하게 진행되던 드라마는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그것도 주인공의 입을 통해. 국민들이 느꼈을 허탈감을 조금이라도 달래주고 싶었는지 한 여당의원은 김 장관에게 “북한 암살조 첩보가 허위라면 유표한 기자를 처벌해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럼 정보를 흘린 정부 고위 관계자는 어떻게 하며, 언론이 불어대는 가락에 장단을 맞춘 우리의 주인공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중국 포털 사이트의 ‘박근혜, 김정일 4번째 부인’ 보도에 혀를 차는 한 신문 기사를 보며 ‘썩소’를 날릴 수밖에 없었다. 누가 누굴 나무라겠는가.
2017-07-20 | hrights | 조회: 275 | 추천: 0
은수미/ 사회학 우리가 세계화 시대의 위력을 깨달은 중요한 계기 중의 하나가 1997년 IMF 위기 일 것이다. 난생 처음 국가 부도 사태에 직면하여 국민들은 너도 나도 금모으기에 동참하였고 막대한 공적 자금을 쏟아 대기업을 살리는데 동의했다. 온갖 희생도 감내했다. 정리해고제나 파견법이 도입된 것도 바로 그 때이다. 그것이 과연 올바른가를 따질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되로 받으면 말로 주고”,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도 있”으며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소박한 믿음이 있지 않았을까, 어려운 시기를 “함께” 견디면 좋은 시기도 “함께” 나눌 것이라는. 물론 그런 믿음은 법으로 강제하는 것이 아니며 공공연한 약속도 아니다. 따라서 긴박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근거로 일상적으로 정리해고(그것을 명예퇴직이든 희망퇴직이든 무엇이라 부르든 상관하지 않겠다)를 하거나 이윤이 남아 주주에게 막대한 배당을 하면서도 정리해고를 서두르는 대기업에게 사회적으로 그럴 법한 일인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국민세금이, 공적 자금이 투여되었는가를 되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지 모른다. 또한 그때 기업에 투자된 돈은 단지 돈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믿음과 신뢰였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멍청한 짓이겠다. 사실 사회도 바뀌었다. “자기, 나 사랑해?”라고 물으면 “일일이 말해야 아느냐” 거나 “남부끄럽게 ‘자기’가 뭐냐”면서 퉁명스럽게 입을 닫아버리는 것은 이제 과거의 사랑이나 믿음의 방식이다. 지금은 하루에 수십 번 메시지를 보내고 리플을 달며 모닝콜을 하고 시시 때때로 꽃을 안겨야 사랑하는가 보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시대에 확인해본 적도 없는 믿음이나 신뢰에 기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런 사랑이나 믿음도 끝이 난다. 새봄은 오지만 그 봄날은 간다. 때문에 우리가 십여 년 전 나라를 살리고 기업을 살리기 위해 무엇을 했는데, “너 나에게 이럴 수 있어”라고 소리칠 필요는 없겠다. 또한 기업은 이윤만 내면 그만이라지 않는가. 한진중공업이 영도 조선소를 그대로 두고 수빅 조선소로 옮기는 것이나 모 공기업 근로자의 87.5%가 비정규직인 것이, 병원에서 간호조무사를 불법 파견 받는 것이나 월 100만원 받는 청소 노동자를 비싸다고 80만 원짜리로 갈아 치우는 것이, 다 이윤 때문이라는데 그것 모르고 기업 살리기를 했다면 그런 행위를 한 사람만 손가락질 받기 십상이다. 필자는 당시 금이 없어서 금모으기에 동참하지 않았지만 나라 살리고 기업 살리기 위한 사회적 합의의 필요성에 동의했다. 때문에 앞으로 똑바로 살아가려면 스스로에게 좀 따지고 생각해볼 것이 있다. 게다가 “혹시 좌우명이 있어요?”라고 누가 물을 때 마다 고민 고민하며 내놓는 답이 “‘두 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거요” 이다. 그래서 두 번 실수 하지 않으려고 최근의 고민을 하나 던진다. 기업이 해외에 나가거나 정리해고를 하거나 비정규직을 쓰는 것은 모두 경영상의 자유이며 시장 경쟁의 원리라고 한다. 사회의 한 구성 부문인 기업과 시장이 자신의 규칙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기업과 시장만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금모으기에 동참한 대한민국 일반 국민이 사실 사회의 지배적 다수이다. 때문에 이들로 구성된 한국이라는 공동체를 유지하려면 경쟁과 자유를 넘어서는 가치와 규칙이 있기 마련이며 그것이 정의와 연대일 것이다. 금모으기를 한 것이나 태안반도의 기름유출 사고 당시 60만이 넘는 인간띠가 이어진 것은 정의와 연대의 가치 때문이다. 지난달 7월 31일 새벽 부산 영도구 청학성당 인근 도로에서 '3차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등을 요구하며 하늘로 풍등을 띄우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그래서 헌법이나 노동법에서는 사회적 정의와 연대의 정신에 초점을 맞추며, 사회의 한 구성 부문으로서 기업이나 시장도 경쟁과 자유 이상으로 정의와 연대를 고려해야 한다. 경영상의 자유는 무제한이 아니며 그것이 사회적 정의 혹은 사회권을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 그런데 한진 중공업의 정리해고는 정리해고의 정당성에서부터 사내하청의 활용이나 고용불안정에 따른 비용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정의 측면에서 상당한 문제가 있다. 또한 세계화 시대에는 경영상의 자유가 전 지구적인 것 만큼이나 사회적 정의 역시 전 지구적이다. 따라서 정당성 없는 정리해고나 값싼 노동력 착취는 사회적 정의를 전 지구적으로 망가뜨리는 것이다. 기업과 시장, 즉 자유와 경쟁이라는 좁은 눈이 아니라 국가와 세계 공동체, 즉 정의와 연대라는 넓은 눈에서 보면 한진 중공업 사례는 세계화 시대의 가치와 규칙을 되묻게 한다. 하지만 한 국가에서 정리해고의 정당성을 따지는 것도 쉽지 않은데 세계적인 시야에서 정의와 연대를 세운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업에게 경영의 자유가 있다면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당한 노동과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가 있다. 그리고 세계 인권선언이나 한국의 헌법에서 강조하는 것은 후자이며 그것이 기업이나 시장을 넘어선 사회의 구성 원리이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전에 세계화 시대에 맞게 사회적 정의를 재조직하고, 사회권을 망가뜨리는 괴물에게 백신을 투여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이제 수다를 떨어볼 때가 되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301 | 추천: 0
최정학/ 방송대 법학과 교수 잊어버리고 싶었다.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학생 시절 ‘운동’이라는 것을 하던 사람들 곁을 얼쩡거리며 어설프게나마 알게 되었던 고단한 노동자의 삶들. 언제나 정해진 것 같은 결론을 내리기 위해 밤새워 해야했던 토론이나 세미나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것 같고, 그 이후로도 그럴 것 같았다. 지치기도 하고, 나 자신의 앞날이 걱정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대학원에 갔다. 현실에서 찾기 어려운 답을 이론에서 구해보려 했다. 깔끔하고 명쾌한 논리로, 정곡을 꿰뚫는 서술로 대안을 제시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고 싶었을 것이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지금은 그러한 열정이 다 식어버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젠 나의 한계를 인정할 줄도 안다. 나름대로 성실히 살아오기는 했지만 이런저런 문제로 세상과 타협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 능력이 내가 꿈꾸었던 삶을 살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겸손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나는 잊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바로 ‘그들’, 한때는 내가 나의 모든 것을 바쳐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던, 언제나 내 주위에서 아픈 삶을 살아내고 있었던 노동자들을 말이다. 김진숙, 부끄럽게도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 아마도 몇 번쯤은 신문에서 보았음직 한데, 심지어 어떤 노동자가 한진 중공업의 구조조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크레인에 올라갔다는 기사를 읽으면서도 그 이름을 보지 못했다. 이번에도 또 누군가가 고달픈 싸움을 하는구나, 힘들겠구나, 어떻게 되겠지, 이런 따위의 생각만이 내 뇌리에 남겨졌을 뿐이다. 어쩌면 한국 사회의 변화, 좀 더 정확히는 한국 정치의 변화가 내 이런 망각에 한 몫을 담당했을런지도 모른다. 운 좋게도 내가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에 김대중, 노무현 두 분이 대통령이 되었다. 뭔가 예전과는 다르다고 생각해도 괜찮았고, 상대적으로 마음 편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 한때 내가 당원이기도 했던 민주노동당의 10명이나 되는 국회의원들에게 한국사회의 문제를 맡겨 놓아도 되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그가 묻는다. 기륭전자나 KTX의 여승무원들, 이랜드나 쌍용자동차, 현대자동차와 유성기업, 그 밖에 또 기억할 수 없는 많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못 본채 지나치던 내 가슴에, ‘비정규직’이라는 고통스러운 직함이 한국 사회에 700만, 800만을 넘어서는 동안에도 그저 무덤덤하게 ‘어, 이거 어떡하지’ 정도로, 나의 일로 여길줄 모르던 내게 묻는다. 전태일이 너의 가슴에 살아있느냐고, 이 땅의 노동자가 너의 가슴에 살아있느냐고, 그들이 너와 함께 살고 있느냐고.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 지도위원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누구든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마는, 나름대로 힘들었던 20대와 30대 초반을 보상받고 싶었다. 역시 운 좋게도 나는 취직을 했고 (그것도 물경 ‘교수’라는 직업을 얻었다), 결혼을 하고 예쁜 딸도 갖게 되었다. 처음으로 부모가 돼본 사람들이 다 그러하겠지만 나의 아이는 내 삶의 새로운 의미가 되었고, 저녁마다 보는 아이의 새로운 모습은 나를 ‘행복한 바보’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는 보았다. 몇 년 전 크레인에서 내려오지 못했다는 한진 중공업 김주익이라는 분의 딸이 “일자리를 구해 줄테니, 아빠, 그만 돌아오면 안돼”냐고 쓴 일기를 말이다. 그들에게는 행복해질 권리가 없는 것일까. 얼마 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 선생님이 하셨다는 이야기를 신문에서 보았다. “이 시대에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도둑, 아니면 바보”라는 것인데, 오랫동안 잊어버리기는 했지만, 지금 내 가슴이 조금은 아픈 것을 보면 나는 바보 보다는 도둑에 가까운가 보다. 내가 가장 싫어했던 도둑, 남이 애써 만들어 놓은 것을 그에 합당한 고된 노동도 하지 않고 훔쳐가는 도둑, 그들의 고통과 눈물로 만들어진 단물을 맛있게도 빨아먹으며 기생하는 도둑. 그에 가까운 삶을 적어도 지난 몇 년간 살았음을 나는 비로소 참회한다. 이런 나약한 반성문을 김진숙씨가 보아주기를 나는 바라지 않는다. 다행히 그에게는 그럴 시간도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다섯 달이 넘도록 그가 매일 연습했다던가. “부디 무사히 내려와 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이 부정의한 세상에는 아직도 그가 할 일이 너무 많고,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어서 떠나보낼 수 없는 사람들이 아직은 많이 있다. ‘희망의 버스’가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소금꽃나무’에서 그가 그렇게 강조하던 희망을 그는 몸소 보여주었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슴 속에 잠들어 있던 희망을 모아 이에 화답하고 있다. 심지어 이렇게 게으르고 무기력한 나도 희망을 얘기하고 있지 않은가. 그가 부디 희망을 버리지 말고 돌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817 | 추천: 2
마흐디 압둘 하디/ 팔레스타인 국제문제 연구소 소장 (Dr. Mahdi Abdul Hadi, PASSIA) http://www.passia.org 다음은 Mahdi Abdul Hadi (PSSIA 소장, 팔레스타인 국제문제 연구소장)이 보내온 "2011년 9월 유엔 총회"에서 논의될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 승인과 관련한 내용으로 홍미정 교수가 전해왔습니다. 번역을 위해 홍미정 교수와 자원활동가이신 김현수씨께서 도와주셨습니다. 요시 알퍼(Yossi Alpher)가 제안한 "팔레스타인 건국 수용하기"(뉴욕 타임즈, 2011년 6월 24일)는 다음과 같은 부질없는 전제들을 기반으로 한다. 1) 팔레스타인 수반 마흐무드 압바스는 임무를 성취한 것으로 간주하고 사임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권을 행사하면서 협상을 계속 진행할 것이다. 2) "압바스 수반의 심복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거나 어떤 선거에서도 살아남고, 협상은 “과거와 다름없이” 지속될 것이다! 3) 팔레스타인 사회는 파타와 하마스로 분할되어 유지되며, 하마스는 그 입장을 변경하지 않을 것이다. 4) 팔레스타인 국가는 예루살렘에 관하여 타협하지 않고, 난민 귀환권에 대한 공정하고 정당한 유엔 결의안 194호(1948년)를 적용하지 않고 건국될 수 있다. 5)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유대인 국가"라는 용어를 수락하고 영토 교환에 대해 동의할 것이지만, 유엔 분할 결의 181호(1947년)를 완전하게 실행하도록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 181호는 전 팔레스타인 영역의 56.47%에 이스라엘 국가, 42.88%에 아랍 국가, 약 0.65%를 국제 통치 영역으로 규정한다.) 5)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44년 동안 이스라엘 점령 통치하에서 창출된 "감옥의 문화" 아래에서 계속 지낼 것이며, 파타와 하마스의 화해에도 불구하고, 하마스의 붕괴를 포함하여 가자지구로 “이스라엘 행정권”을 조건부로 확장시키려는 이스라엘의 지침을 수행할 것이다. 6) 팔레스타인 국가 내에서 이스라엘의 “안보 상황”은 오늘날과 비슷할 것이다. 팔레스타인 안보 필요성이 무시되고, 새로운 국가가 요구하는 국제사회의 보호도 무시될 것이다. 7) 2002년 아랍 평화안(The Arab Peace Initiative)은 이스라엘이 거부하고 보류한지 10여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협상 테이블에 있다. 그러나 너무 늦기 전에, “9월 유엔 회의”에서 이스라엘이 “각성”하라는 조언을 충분히 수용해서 네타냐후 총리와 그러한 부류 정치인들의 허세로부터 벗어나길 바란다.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고 1967년 경계를 국경으로 획정한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 계획 승인을 위한 제안서를 7월 20일경에 유엔 총회에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결정은 1993년에 PLO-이스라엘이 상호 인정한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이러한 결정을 이끈 다음의 A. 내부적, B. 지역적, C. 국제적 요인들은 위의 요시 알퍼의 전제들이 잘못되었음을 명백하게 밝혀준다. Mahdi Abdul Hadi (PSSIA 소장, 팔레스타인 국제문제 연구소장, http://www.passia.org/) A. 팔레스타인 내부적 요인: 유엔 투표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1) 세계무대에서 팔레스타인의 입장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팔레스타인인들을 통합하고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의 화해가 활력을 얻을 것이다. 2) 무익한 협상 때문에 발생한 정치적 공백을 채울 것이다. 3) PLO와 PA를 외부 행위자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시켜서 분쟁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활동의 장을 열 것이다. 4) 팔레스타인 청소년들을 동원하여 비폭력 운동을 발달시키고, 아랍의 봄 문화의 일부가 될 것이다. 5) 모든 삶의 측면(교육, 건강, 경제, 관광 등)에 영향을 끼치는 “감옥의 문화”를 종결시킬 것이다. 6)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위한 문을 열어 디아스포라(난민)에서 무조건적인 귀향으로 이끌 것이다. 7) 가자지구의 포위, 폐쇄 그리고 분리를 끝낼 것이다. B. 지역적 요인: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중요하다. 1) 아랍의 봄은 시민 국가, 민주주의, 법치주의, 아랍의 존엄성의 탄생에 대한 열망과 함께 전염성 자스민 열풍을 확산시켜 왔다. 팔레스타인도 예외가 아니다. 2) 새로운 아랍 연맹 사무총장 나빌 알 아라비(Nabil al-Arabi)는 협상 과정이 끝난 것으로 믿는다. 왜냐하면, 포스트 빈라덴 시대에서 중동 평화를 위한 4자 위원회(UN, 미국, 유럽 연합, 러시아:2003년 로드맵 협상 때 구성됨) 상황은 과거가 되었고, 오바마 대통령은 그의 재선 운동 기간 동안 행동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유럽 연합 27개 국가들이 전원 합의에 이르지 않을 것이고, 현재 아랍의 통치자들은 정치, 외교, 재정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지원하기는 하지만, 2002 아랍 평화안을 고수하지도 않고, 미국과 직접 연루되거나 충돌을 일으키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 아라비는 유엔이 후원하는 국제회의를 선호하고, 그러한 방향에서 “9월의 유엔 회의”를 “시험대”로 간주한다. 3) 아랍 연맹과 새로운 이집트는 “9월 유엔 회의”를 완전히 지원하고 있으며, 터키는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 안을 여러 번에 걸쳐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C. 국제적 요인: 유엔 총회에서 분쟁의 국제화는 다음으로 이끌 것이다. 1) 유엔 총회에서 토론을 위하여, 지난 60여 년 간 실행되지 않은 유엔 결의안을 포함한 모든 팔레스타인 관련 문서들을 공개할 것이다. 2) 예루살렘에 관한 토론을 새롭게 시작할 것이다. 즉 독점적인 이스라엘의 도시가 아니라 개방되고, 공유되는 도시라는 인식으로 국제 관리하의 예루살렘(베들레헴 포함)에 관하여 토론할 것이다. 3) 이스라엘의 점령을 종식시키는 것과 팔레스타인의 자결권을 반대하여 미국과 다른 몇몇 국가들이 거부권을 행사하였던 것이 드러날 것이다. 4) 유엔 192회원국들 중 대략 2/3 또는 그 이상의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의 권리를 명확하게 지지하고 승인할 것이다. 5) 팔레스타인이 국제 사법 재판소를 포함한 모든 국제기구의 정회원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6) 팔레스타인에 국제군에 의한 보호를 요청할 기회가 열리고,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의 식민화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국제적인 노력이나 논쟁이 역할을 할 것이다. 7) 초안 협상, 모호한 협상,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체제(PA)라는 오슬로 문화를 끝내고,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가 하나의 국가로 바뀌는 것을 도울 것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70 | 추천: 0
홍미정/ 건국대학교 중동 연구소 연구교수 요즈음 팔레스타인인들은 오는 9월에 유엔 총회로부터 1967년 6월 경계 내에서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을 승인받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우선 팔레스타인인들은 2011년 7월 15일에 유엔 사무총장에게 호소문을 보낼 예정이다. 그런데 중동 평화를 위한 4자 위원회(UN, 미국, 유럽 연합, 러시아:2003년 로드맵 협상 때 구성됨)는 2011년 7월 11일 워싱턴에서 새로운 중동 평화안을 제시하기 위하여 수뇌 회담을 개최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는 이 새로운 평화안이 2011년 5월 19일 버락 오바마의 워싱턴 연설에 토대를 둔 것이며, 팔레스타인인들이 유엔차원에서 국가 건설 문제를 논의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워싱턴 연설에서 오바마는 “팔레스타인인들이 9월에 유엔에서 팔레스타인 국가를 승인받으려는 행위는 이스라엘 국가의 합법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창출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동시에 “우리는 이스라엘의 안보에 헌신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을 소외시키려는 국제 사회의 토론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오바바의 연설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유엔이라는 국제기구를 통해서 팔레스타인 국가를 창출하려는 노력을 중단시키고, 팔레스타인인들과 그 영토를 미국과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에 묶어두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 연설에서 오바마는 두 국가 해결안(Two-State Solution), 즉 유대 국가로서의 특별한 정체성을 갖는 이스라엘과 비무장 팔레스타인 국가 계획안을 제시하였다. 이 해결안은 튀니지와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 지역에서 진행되는 민주화 요구가 이스라엘의 군사 점령 상태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며, 이로 인하여 잠재적인 혁명 세력인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이스라엘 군사 점령상태가 영구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분석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인종 차별주의적인 점령 정책을 실행시키는 이스라엘도 권위주의적인 아랍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중동 전역에서 진행되는 민주화 열풍을 피해가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 5월 19일 워싱턴 연설에서의 오바마 대통령의 모습 사진 출처 - AP연합 유대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을 강조하는 오바마는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역을 구체화시키면서, “생존 가능하고, 비무장한 팔레스타인 국가는 1967년 경계에 토대를 두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 측이 협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오바마의 워싱턴 연설은 조지 W. 부시가 중재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직접 협상의 결과물인 2003년 로드맵(Road Map)에 토대를 둔 것이다. 로드맵은 2003년 조지 W. 부시가 중재하여 당시 이스라엘 총리 아리엘 샤론과 팔레스타인 총리 마흐무드 압바스가 서명했으며, 현재까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에서 성취된 최종 협정이다. 로드맵 전문은 “양 측이 협의한 해결안은 독립적이고, 민주적이며, 생존 가능한 팔레스타인 국가의 출현으로 이끌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로드맵 협상에는 중동 평화를 위한 4자 위원회(UN, 미국, 유럽 연합, 러시아)가 참관하였다. 4자 위원회는 미국의 계획을 추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생존 가능한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제안했던 2003년 로드맵은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게 하마스 등 팔레스타인 무장 정치 단체 해체를 요구함으로써 내전을 유도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은 이것이 로드맵의 최우선 목표였다. 오바마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련 연설들에서, 하마스 테러리스트라는 주제는 거의 매번 강조된 반면, 거의 매일 반복되는 이스라엘 군대와 점령민들의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잔혹한 테러 행위는 언급된 적이 거의 없다. 하마스의 테러 행위와 이스라엘의 테러 행위는 그 규모나 빈도수에서 비교상대가 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오바마의 시각은 절대적으로 이스라엘 편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번 워싱턴 연설에서도 오바마는 파타와 하마스의 통합이 이스라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며 현재 직면한 난제라고 지적하면서, 이스라엘과 협상을 하기 위해서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해야하며, 중동 평화를 위한 4자 위원회와 아랍 국가들은 이 난국을 벗어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5월 3일 카이로에서 파타와 하마스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의 13개 파벌 사이에서 통합 협정이 이루어졌고, 파타와 하마스는 1년 이내에 대통령 선거와 의회 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임시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오바마와 이스라엘은 하마스 테러리스트를 주장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의 통합 정부 구성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결국, 2003년 로드맵과 2011년 오바마의 연설에서 구상한 팔레스타인 국가는 유대 국가로서 정체성을 갖는 이스라엘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잠재적인 혁명 세력인 팔레스타인인들을 손쉽게 관리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런 구상으로 출현한 팔레스타인 국가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인가? 필자가 생각하는 최상의 대안은 이스라엘 군사 점령지와 이스라엘 국가 영역을 한 국가로 완전히 통합하면서, 보편적인 인권과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팔레스타인인들과 이스라엘인들에게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하는 한 국가 안(One State Solution)이다. 이 해결안은 혈통이나 종교 같은 배타적인 정체성을 넘어서서 보편적인 인권과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가장 바람직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인종차별주의에 토대를 둔 유대 국가의 특성을 버리고 현대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맞이할 것이다. 이 대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노력을 경주해야한다. 20세기 초 국제 연맹(the League of Nations)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민족 고향(Jewish National Home) 건설을 내세우면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윤곽을 세웠고, 유엔(UN)은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 국가 영역과 아랍 국가 영역으로 분할(UN Resolution 181)하면서 이 문제를 격화시켰으며, 현재 공정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내세우는 미국은 극단적으로 이스라엘 편향이다. 계속되는 유혈 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혈통과 종교를 넘어서 보편적 인권과 민주주의에 토대를 두고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책임감을 가지고 해결하도록 노력해야한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88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세상을 살다보면 가끔씩 헷갈리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상급식’을 둘러싼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가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이에 속한다. 최근 ‘반값 대학 등록금’에 관한 논의에서도 이 문제가 중요한 사안인 것처럼 대두되고 있다. 예컨대 7월 3일 일요일 아침 KBS의 토론에 나온 어떤 인사가 “대학 등록금을 아예 전체적으로 반으로 낮추는 것은 등록금을 충분히 낼 수 있는 부자의 자녀들에게도 혜택을 주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했다. 이 주장을 한 그 인물은 분명 보수 진영에 속한 인물이었다. 나는 이 주장을 듣는 순간 묘한 상념에 빠졌다. 갑자기 이 주장이 “동일한 혜택을 받더라도 수혜자들의 재정적인 능력에 따라 그 수혜에 다른 비용을 달리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 그 순간 바로 이어서, “부모의 재산과 소득을 철저히 조사해서 그 정도에 따라 대학 등록금을 각자 아예 다르게 내도록 해야 한다.”라는 주장으로 바뀌어 들렸기 때문이다. 이는 빈부의 격차가 개인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의거해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인식을 암암리에 깔고 있고, 따라서 빈부의 격차를 사회구조적인 차원 즉 정치적인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른바 선별 복지를 제시한 그 보수 논객의 주장이야말로 진보 진영의 정치가나 논객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주장으로 탈바꿈된다. 다만, 그 함의를 잘 따져 그 속에 담겨 있는 ‘갸륵한’ 뜻을 더욱 심도 깊게 변환해야 할 것이다. 사회구조적인 연관을 염두에 둘 때, 부와 가난이 결코 각자의 능력이나 성실성에 의거해 결정되어 나타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은 상식이다. 제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하루에 잠을 네 시간 이상 자지 않을 정도로 성실한 자라 할지라도, 그가 사회역사적으로 구축된 제도와 장치를 비롯해 그동안 축적된 사회 전체적인 역량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부를 쌓을 수 있을 것인가. 그 사회적인 제도와 장치에는 가난하게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충분히 허용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부와 가난이 결정되는 변수들 중 대부분은 사회구조적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300만 명의 대학생들 중에는 거금의 대학 등록금을 아예 ‘껌 값’ 정도로 생각하는 부모를 가진 학생으로부터 말 그대로 등록금을 내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한 부모를 가진 학생에 이르기까지 그 빈부 격차의 스펙트럼은 다양할 것이다. 그런데도 마치 슈퍼에 가서 다 같은 값을 주고 탄산음료를 사먹듯이, 똑같은 등록금을 내고 대학을 다니는 것이다.(물론 가난한 학생들에게 일정하게 장학금을 준다는 것을 완전히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사립대학이 80-90% 이상을 상회하는 가운데 대학교육이 완전히 상품으로 인식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대학에서의 교육은 일종의 상품이다. 상품의 가격이 소비자의 뜻과 맞지 않으면 사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동일한 상품은 동일한 가격에 구매해야 옳다.”라는 현실을 반영한 주장이 예사로 제기되기도 한다. 대학교육을 상품이라고 할 때, 정확하게 말하면 그 상품은 교육내용이 아니라 대학졸업장이 되고 만다. 대학교육을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처럼 보게 되면, 언젠가 부가가치세를 매겨 마땅하다는 험악한 주장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난 6월 10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조건없는 반값등록금 실현을 위한 국민촛불대회'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그런데 고맙게도 보수 진영의 논객이 사회구조적인 측면을 충분히 감안해서 부의 정도에 따라 등록금을 차등 납부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그의 주장을 좀 더 밀고 나가면, 사회 전체적으로 통용되는 온갖 재화와 서비스에 대해 빈부의 격차에 따라 대금 지불을 차등으로 해야 한다는 엄청난 주장으로 연결된다. 십 분 양보해서 전체 교육에 한정해서 보더라도 그 보수 논객의 주장은 모든 학교 교육(폭을 확대하면 심지어 사교육과 사회적인 평생교육을 다 포함할 수도 있을 것이다.)에 있어서 빈부의 격차에 따라 등록금을 차등 납부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를 한 단계만 더 밀고 나가면, 만약 그렇다면 도대체 학부모가 아닌 국민들이 거의 없을 것이니까, 아예 등록금을 없애고 ‘상당한 차등 비율의 누진세 제도에 입각한 교육 특별세’를 신설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야말로 진보 진영에서 염원해 마지않는 보편 복지로의 길이 아닌가. 아니, 그렇다면 선별 복지와 보편 복지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인가? 없다. 사실 조금만 달리 생각해서 사회 전체적인 비용을 중심으로 해서 보면, 어차피 전체 국민들이 교육비 전체를 담당해 온 것 아닌가. 물론 이를 모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누가 왜 무슨 이유로 어느 정도로 그 교육비를 담당해야 하는가이다. 교육받는 사람들이 교육비를 내고 얼마나 많은 이득을 얻는가를 개인별로 일일이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러나 사회구조적인 구도를 바탕으로 포괄적으로 계산할 수는 있다. 결국 교육에 의해 부유한 자들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이득을 얻은 것이고, 가난한 자들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손해를 본 것이다. 그 불균형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점에서 있어서는 선별 복지건 보편 복지건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이다. 한 가지만 더 생각하고 말을 맺고자 한다. 국방과 교육을 비교해 보자는 것이다. 국방비를 아예 국가에서 총책임지고 지불하듯이, 교육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가 하는 것이다. 교육이야말로 모든 국민들의 삶의 질을 방어해 내는 ‘실질적인 국방’이라 할 수 있다. 튼튼한 국방이 필요한 것은 바로 교육에 의한 실질적인 국방의 내용을 안정되게 유지하자는 데 있는 것이다. 교육이 목적이라면, 국방은 수단이다. 국방을 어느 특정한 개인이나 기업 등의 이익을 위해 활용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렇게 활용하기 위해 국방의 내실을 상품화해서 완전히 시장 논리에 편입시켜야 한다고 하면, 아예 매국노로 찍혀 입을 여는 순간 매장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국방의 목적인 교육은 왜 상품이라고 함부로 떠들고 실제로 교육을 상품화하여 매점매석을 일삼으려 하고 어떻게 하면 시장 논리에 편입시킬 수 있을까를 노심초사 안달하는 것이 용납되는가. 물론 그렇다고 국가가 나서서 대학을 비롯한 많은 교육기관들에 재정 지원을 한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서울대학교마저 법인화하여 상품 중심의 교육으로 치달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다든지, 부도덕하기 이를 데 없는 자들로 판명이 난 인물들이 대학의 운영권을 갖도록 한다든지, 편의를 명목으로 대학 내에 온갖 상점들을 끌어들여 대학 환경을 시장화 하는 쪽으로 치닫는다든지 하는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한 것은 관련 책임자들이 교육을 얼마나 시장 논리에 입각해서 활용하고자 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른바 ‘반값 대학 등록금’이라고 하는 현안이 그 속에 얼마나 강력한 폭발력을 지니고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교육의 본질과 정체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서 완전히 잘못 가고 있는 교육 체제 자체를 뒤집어엎을 수 있는 폭발력을 지닌 것이다. 보수 진영조차 알게 모르게 이미 그 강력한 자장에 깊게 발을 들여놓고 있다. 특히 진보 진영에서는 물러서지 말고 이참에 이 현안을 활용하여 대다수의 시민들에게 교육을 통한 진정한 삶이 어떤 것인가를 확연하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책 입안자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모두 사유의 물꼬를 전연 창조적인 방향으로 틀어나가야 할 것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46 | 추천: 0
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 교육조직국장 몇 년 전부터 동문회니 동기회니 하는 모임들이 하나 둘 씩 늘어가고 있다. 아마도 나이 40줄에 들어서면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정작 학교 다닐 때는 얌전하고 적극적이지 않던 친구들이 동창회를 주도하기도 하고, 괄괄한 성격에 많은 일들을 주도해서 모임도 주도할 것이라 여겼던 친구들은 오히려 모임에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나는 명확한 주제가 없이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에 별반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남성들이 많은 집단이 주는 위계적인 문화에 그런 모임들이 벅차기도 하다. 이것도 병이지 싶어 가급적 모임이 있으면 참여를 하는 편이다. 모임참여의 우선 목적은 ‘운동권’이란 테두리 안에 갇혀 지내는 나를 성찰할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사람은 어울려 살아야만 하는 동물이기에 조금 어색해도 자꾸 어울려야 한다는 자기최면을 걸기도 한다.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만남, 소위 언어가 통하는 사람들의 만남이 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운동이란 것이 끼리 끼리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주만나야 교류와 소통이 형성되고 그럴 때 다른 생각들이 만나고, 사람들이 상호변화를 통해 성장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을 굳이 육체적인 것과 사회정치적인 것으로 나누는 것은 아마도 사람이 공동체 속에서 서로를 성장시키며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역설하는 것이리라. 나는 육체적인 생명 외에 사회정치적으로 ‘여성주의자로서의 생명’을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무엇이 여성주의인가? 라는 질문은 나를 곤혹스럽게도 하지만 무엇이 여성주의가 아닌가 하는 것에는 제법 답을 내어놓을 수 있다. 물질만능, 위계, 폭력, 차별, 억압, 전쟁, 경쟁, 이기주의, 자연파괴 등. 여성운동이란 남녀관계의 위계적인 권력질서를 해체하고 남성의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한 모든 활동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남성과 여성의 대결로 몰아가는 식으로 여성주의와 여성운동을 해석하는 것은 반대한다. 여성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여성운동은 가깝게는 남성의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보일 수 있으나, 결국은 사회정치적인 질서와 문화를 새롭게 재편하는 것에 있다. 그동안 남성 중심으로 구성되고 유지된 사회, 정치, 문화 전반에 대한 재구성과 재조직을 목표로 하는 어쩌면 지난한 대안을 만드는 작업과정이다. 이는 현재의 사회정치문화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 생활패턴을 전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때문에 어쩌면 여성주의, 여성운동은 기존질서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와 도전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일상에서 여성주의는 아주 편협한 이해와 해석의 대상이 되고 여성운동을 하는, 그리고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이들에 대해 모난 척, 잘난 척, 남성 적대적이라는 혹평이 붙고 그리하여 때로는 공공의 적이 되기도 한다. 항상 날을 세워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여성주의를 지향하면서 살고자 할 때는 스스로에 의해서보다는 남에 의해 날이 세워지는 경우들이 생긴다. 나는 전교생이 280여명이던 좀 작은 시골초등학교를 다녔다. 전교생이 얼마 되지 않아 일학년부터 육학년까지 이름과 얼굴을 다 욀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초등학교도 매년 총동문회를 개최하고 체육대회를 진행한다. 올해도 이번 달에 총동문회가 열렸고 매년 참석권유를 받기만 하고 참석치 못했던지라 연휴에 고향 어머니도 뵐 겸 동문체육대회도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체육대회라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인삼각경기도 하고 단체 줄넘기도 하면서 즐거운 한나절을 보내며 흥겹게 그 시간을 즐겼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흡연문제로 남자동창이 시비를 걸고 물건을 던지고, 언쟁이 오가고 급기야 몸싸움까지 날 뻔하다 수습되기까지 눈 깜짝 할 사이에 일어났다. 그로인해 즐겁던 모임은 순식간에 찬물 끼얹은 듯 냉랭해지고 나는 분노와 억울함에 치를 떨면서 그 뒤 며칠을 엉망인 기분으로 보내야 했다. 80년대 겪었던 흡연문제를 이 나이에 다시 겪어야 하나 하는 자괴감과 그 동창 놈과 주변에서 사태가 위기로 진전될 때까지 구경만 하던 친구들에 대한 분노가 좀체 가시지 않아 마침 고향집에 온 동생들과 언니들에게 고자질을 해대면서 분노를 표출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쫓아가 똑같이 복수를 하고 싶은 정도였다. 그러나 내 편이 되어 함께 그 원수 놈을 욕해주길 바랐던 내 기대와 달리 언니는 겪었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언니가 경남의 시골마을 버스를 탔는데 할아버지 두 분이 타시면서 한 분이 다른 한 분에게 젊은 여자가 옆자리에 탈 수도 있으니 떨어져 안자고 하셨단다. 그러나 그 할아버지 옆 자리에는 불행히도 지팡이를 짚으신 허리 구부러진 할머니께서 앉게 되셨다. 그러자 할아버지 왈 “늙은 호박꽃도 꽃인가?”라고 비꼬시더란다. 버스안의 승객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할아버지를 흘기는 사이 할머니께서 응수하시기를 “늙은 호박이 더 단거 모리나?” 하시더란다. 버스안의 승객들이 같이 할아버지에 대한 고소함과 할머니의 재치에 감탄하여 웃었다고 한다. 앞에서 여성주의란 기존질서와 가치에 대한 전복이자 대안을 형성해내는 과정이라고 장황히 언급하였다. 언니의 일화를 듣는 순간은 ‘할머니 참 재치 있으시다.’라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일상으로 돌아와, 그 친구가 전화와 문자로 사과를 하였으나 받아들일 맘이 나질 않았다. 오로지 복수 외에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대응 방식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버스안의 할머니는 충분히 화를 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농담으로 할아버지를 무안함으로 한방에 제압하고 승객들까지 기분 좋게 만드는 그 힘은 어디서 왔을까를 고민하면서 사람이 성숙하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폭력을 이기는 것이 비폭력저항이고 전쟁을 이기는 것은 평화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내 안에는 여전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보복중심의 갈등해결방식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폭력성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음을 본다. 무슨무슨 주의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삶의 과정이 그러한 주의를 지향하고 실천하고자 노력할 때 설득력이 생긴다. 더불어 안과 밖이 일체가 되는 삶을 살 수 있다. 입 따로, 몸 따로 갈 때 그의 말은 설득력을 잃고 허공에 흩어지게 된다. 나는 얼마나 여성주의자라는 사회정치적인 생명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를 돌아보는 이 순간에도 나는 내 삶의 과정에서 겪어왔던 날선 갈등과 상처의 자국에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그 분노는 가끔 비열하게도 약한 고리를 찾게 되면 폭발한다. 이런 한계와 모순덩어리가 나다. 다만 다행인 것은 그것이 나의 한계라는 점을 안다. 알게 되면 시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아니 매순간 시작해왔는지 모른다. 사람은 고정불변한 존재가 아니지만 변화가 그리 쉬운 것만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의 한계를 고백하는 순간에도 머리를 떠나지 않는 궁금증이 있다. 왜 남자들은 자기가 모든 여자들의 남편이나, 오빠,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까? 그것도 꽤나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때로는 폭력적인 방식까지 동원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진정한 남편이자 오빠, 아버지는 여성들이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에 있지 않을까? 그것이 사랑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만약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표현 한다고 하면 그래야 한다는 말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61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