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1. 보편자 논의의 시발점  요즈음 (사)철학아카데미에서 <대결로 본 서양철학사>라는 강의를 하고 있다. 1월 27일 금요일 저녁에는 ‘중세의 보편 논쟁’에 관한 강의를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 논쟁은 11세기 초에 안셀무스(Anselmus of Canterbury, 1033~1109)의 실재론에 이어 아벨라르두스(Petrus Abelardus, 1079~1142)의 명목론이 제출됨으로써 격화된 것이다. 플라톤이 이데아가 현실 세계가 아닌 다른 곳에 인간의 정신과는 별도로 존재한다고 했을 때, 그 이데아는 개별적인 사물들에 대해 보편자로서의 지위를 갖는다. 이러한 플라톤의 입장을 계승한 것이 안셀무스의 실재론이다. 그런데 아벨라르두스는 보편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낱말들밖에 없고, 흔히 말하는 사물의 실체나 본질을 보편자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아벨라르두스는 보편자란 이름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 셈이어서 명목론이라 부른다.  이 보편 논쟁이 심각한 의미를 가진 것은 기독교의 전통에 있어서 신을 절대적인 보편자로 여겼다는 사실 때문이다. 신이 절대적인 보편자라는 것은 신은 결코 현실의 개별자들과는 근본적으로 구분된다는 전제 하에서,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는 이른바 신의 ‘편재성’ 내지는 ‘무소부재’를 지칭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신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시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강의를 통해 이 같은 신의 절대적 보편성을 설명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근대의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피노자는 ‘신=자연=실체’를 제시하면서 모든 개별자들 하나하나는 신의 부분이라고 말했다. 기존의 신이 보편자임을 염두에 두고서 이를 재해석하면, 보편자인 신은 개별자들로 분화되어 나타나면서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체의 것들을 무한히 망라해서 포섭하는 데서 성립한다. 개별자들이 없이는 결코 보편자가 성립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힘을 발휘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경외해마지 않은 인물이 바로 헤겔(G.W.F. Hegel, 1770~1831)이다. 헤겔은 그 유명한 자신의 변증법을 통해 결코 유한자와 대립되지 않는 무한자를 제시하면서 이를 진정한 무한자라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진정한 무한자를 존재론적으로 실현한 것이 절대정신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헤겔은 이를 ‘구체적 보편자’라고 하면서, 현실에서의 그 실질적으로 구현된 형태로서 국가를 지목한다.  헤겔이 말하는 ‘구체적 보편자’는 개별자들의 공통점만을 추상적으로 끌어내어 성립하는 보편자도 아니고, 개별자들과 독립해서 따로 실재하는 보편자도 아니다. 거칠게 간추려 말하면, 그가 말하는 ‘구체적 보편자’는 첫째, 개별자들을 통해 존재할 수밖에 없고, 둘째, 개별자들이 갖는 부정적인 한계를 부정함으로써 개별자들을 넘어서고, 셋째, 개별자들이 갖는 긍정적인 위력들을 자신의 위력으로 삼는다.         이렇게 볼 때, 헤겔은 스피노자의 존재론에서 제시하는 ‘신=자연=실체’를 구체적 보편자의 모델로 본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의 변증법은 한편으로 스피노자의 현실의 개별자들이 무한한 보편자인 신과 갖는 관계를 생성적인 관점에서 풀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교회이다. 교회는 보편적인 하나의 몸이다. 이 ‘교회=몸’에서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 외 몸의 지체들은 신도들이다. 그리고 그 활동성의 원리는 ‘코이노니아’, 즉 친교이다. 이 ‘코이노니아’는 오늘날 많이 언급되는 소통의 어원이지 싶다. ‘교회=몸’에서 드러나는 구조는 그야말로 실제의 인간의 몸에서 확보될 수 있는 유기체성이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한편으로 성부 하나님이라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적용하게 되면, 신과 인간들이 한 몸을 이루는 셈이다. 게다가 만약 ‘코이노니아’의 근원을 성령으로 보면서 아울러 ‘성부=성자=성령’이라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적용하게 되면, ‘교회=몸’은 곧 스피노자가 본 ‘신=자연=실체’와 거의 유사한 존재론적인 구조를 띠게 된다. 이는 유대교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론이다. 그러고 보면, 유대인이었던 스피노자가 자신의 신론 때문에 유대교 공동체에서 파문당한 것은 스피노자가 기독교적인 교회론에 입각한 신론을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북한의 주체사상에서 수령은 머리이고 당은 가슴이고 인민은 온 몸의 지체라고 해서 수령이 인민의 고통과 행복의 방향을 모를 수 없다고 하는 이른바 주체사상의 수령론이 기독교적인 ‘교회=몸’ 이론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한편으로 스피노자-헤겔의 노선을 따른 이른바 구체적 보편자에 관한 존재론을 활용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종교와 정치는 근본적으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근대 서구의 사상에 입각해서 보면, 북한의 주체사상의 수령론과 그에 따른 정치 체제가 워낙 종교적인 방식으로 교리화 되기 때문에 비난을 면할 수 없다. 그런데 만약 종교와 정치가 근본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특히 ‘교회=몸’을 강력하게 현실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가톨릭의 체제는 비난하지 않으면서 북한의 정치 체제를 비난한다는 것은 다소 불균형한 태도이다. 더욱이 교황이 통치하는 바티칸과 같은 종교국가의 정치 체제를 아울러 생각하면 북한의 주체사상에 입각한 정치 체제를 그 이유만으로 비난한다는 것은 더욱 불균형한 태도이다.  북한의 주체사상 특히 수령론에 입각한 정치 체제를 비판하는 핵심은 인민들이 없이는 도대체 국가라고 하는 보편자가 성립할 수 없는데, 그 보편자의 지위와 위력을 특정 개별자인 수령에게 부여함으로써 인민들의 고유한 정치사회적인 인권과 자율적인 주권을 찬탈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심지어 무오하다는 교황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비록 종교적인 차원에서 보편자를 대신하는 특정 개별자라고 하지만, 혹은 특별한 신적인 신비에 의해 머리인 그리스도를 현실에서 대변하는 자라고 하지만, 교황이 특정 개별자인 것만은 분명하지 않은가. 그리고 바티칸이라고 하는 특수한 종교국가에서는 현실 정치적으로 수령의 역할을 하고, 종교적으로는 수없이 많은 전 세계의 가톨릭 신도들에 대해 정신 정치적으로 수령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뿐만 아니라, 실제 서구의 역사에 있어서 교황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정치적인 힘겨루기를 얼마나 강력하게 수행했는가. 지금의 교황이 그런 역사적인 교황의 형태를 온존시키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신교가 생겨나면서 교황을 중심으로 한 교회 정치 체제를 버리게 되었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엄청난 개혁을 이룬 것이지만, 그 원리에 있어서는 가톨릭과 동일하다. 예수라고 하는 특정 개별자를 절대적인 보편자로서의 신적인 위치에 올려놓고서 이른 ‘교회=몸’이라고 하는 보편자를 존재론적인 전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2. 구체적 보편자와 추상적 보편자의 구분   어쩌면 이 모두를 일단 구체적 보편자의 다양한 형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 보편자에서 머리가 있는지 없는지가 대단히 중요하다. 엄격하게 말하면, 정확하게 그것도 일종의 절대적인 형태로 머리를 갖추고 있는 구체적 보편자는 구체적 보편자가 아니라 추상적 보편자이다.  스피노자나 헤겔이 그러한 머리를 제시했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들이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맞아 그러한 머리를 잘라버린, 이른바 ‘아케팔로스’(akephalos)를 단행한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완전한 ‘아케팔로스’는 아니다. 스피노자가 신적인 필연성을 주장한다거나 헤겔이 절대지를 바탕으로 한 절대정신을 주장한 것 등은 그들이 정말 머리를 절단함으로써 ‘머리 없는 몸’으로서의 구체적 보편자를 주장했다기보다는 ‘머리를 몸속에 집어넣은 몸’으로서의 구체적 보편자를 주장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이한 몸의 형태를 띤 구체적 보편자를 스피노자와는 달리 세속적으로 표현해 낸 인물은 철학자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이다. 루소는 인민들이 모여 한 몸을 이룬다고 보았고, 그 하나로 통일된 몸을 ‘정치적 몸’으로 보고, 그 몸에서 ‘일반 의지’가 발휘된다고 보았다. 이 일반 의지에 개별 인민들이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루소의 ‘정치적 몸’과 ‘일반 의지’에 관한 이론은 스피노자에서 헤겔로 이어지는 구체적 보편자의 사상적 노선에서 핵심 매개가 된다고 보아야 한다.  현대 철학으로 들어와 흥미로운 두 철학자가 있다. 한 사람은 질 들뢰즈(Gille Deleuze, 1925~1995)이고, 또 한 사람은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1949~)이다. 들뢰즈는 '기관들 없는 몸'(corps sans organes)을 주장하고, 지젝은 ‘몸들 없는 기관들’(organs without bodies)를 주장한다.  기관들이란 통일된 하나의 유기적인 조직을 전제로 한다. 각 기관마다 통일된 하나의 유기적인 조직을 유지 확대 강화하기 위한 역할이 배당되어 있다는 것이 기관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기관들 없는 몸’의 핵심적인 특징은 이른바 ‘머리’가 없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구체적 보편자에서 ‘아케팔로스’, 즉 ‘머리 잘라버리기’를 이론적으로 확실하게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구체적 보편자에서 아예 머리를 잘라버림으로써 몸의 유기체성을 아울러 파기했다. 머리가 있는 한, 몸의 기관들이 자신에게 고유하게 할당된 그 나름의 특정한 기능들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고, 머리의 현존을 통해 유기체성이 유지되는 한, 몸의 기관들이 자신의 존재 방식과 그에 따른 기능들을 횡단적인 방식으로 바꾸어 갈아 낄 수 있는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진다.    국가의 관점에서 볼 때, 몸은 국가이고 기관들은 인민 한 사람 한 사람이다. 들뢰즈는 수령이나 교황과 같은 혹은 그리스도와 같은 머리를 잘라 내버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스피노자에서 루소를 거쳐 헤겔에 이르는 구체적 보편자로서의 몸 내부적인 머리마저 잘라버림으로써 인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횡단적인 방식으로 각기 기능들을 다각화하고 또 서로 교환함으로써 그 나름의 특이성(단독성 혹은 유일성, singularité)을 갖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런데도 몸인 국가는 그 몸에서 인민들이 특이하게 발휘하는 온갖 주름들과 횡단선들로 넘쳐나는, 그 자체로 하나의 통일된 몸을 이루는 것으로 본 셈이다. 그러나 이때 들뢰즈가 말하는 국가인 몸은 그야말로 명목적이 보편자에 불과하다. 들뢰즈는 아벨라르두스의 명목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지젝은 ‘몸들 없는 기관들’을 내세운다. 이는 지젝이 들뢰즈를 정치사회적으로 비판하기 위한 이론적인 기획에 따른 것이다. 방금 제시한 들뢰즈에 대한 국가론적인 해석을 원용해서 말하면, 지젝이 말하는 '몸들 없는 기관들'은 국가가 없이도 개개 인민들의 완전한 자발성에 의해 사회체로서의 유기적인 조직이 성립한다고 본 셈이다. 비록 국가는 없지만, 기관들이 작동한다는 것은 인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유기적 조직인 사회에서 그 나름의 특정한 기능을 수행한다고(혹은 수행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국가 소멸론을 담은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발상이다. 말하자면, 국가 없는 구체적 보편자로서의 사회를 겨냥한 셈이다.    이러한 지젝의 입장을 들뢰즈의 입장에서 보면, 지젝이 몸을 없애면서 머리를 남겨놓은 기형을 안출한 것으로 된다. 몸의 비유에 있어서, 적어도 머리가 없이는 기관들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젝은 이에 대해 얼마든지 응수할 수 있을 것이다. 식물이나 하등동물처럼 뇌가 없는 유기적 조직이 얼마든지 있고 또 거기에서 기관들이 얼마든지 성립할 수 있다고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오히려 머리를 베어버린 탓에 유기적 조직이 소멸되고 아울러 기관들이 소멸된 상태에서의 국가란 그야말로 국가도 아닌 국가에 불과하기에 철저히 무정부주의적인 상태를 거쳐 결국에는 어디에선가 수령이나 교황과 같은 머리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띤 것이라고 응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젝의 들뢰즈에 대한 공격은 들뢰즈 역시 그가 비판해 마지않는 헤겔처럼 ‘머리를 몸속에 집어넣은 몸’을 주장한 것으로 된다.      지젝이 들뢰즈를 후기자본주의의 이데올로그라고 비난하고, 또 "파시즘은 오로지 흩어진 요소들이 '다함께 공명할 때'에만 출현한다."라고 말하면서 들뢰즈가 '비합리적인 생기론적인 파시즘'을 은닉하고 있다는 바디우(Alain Badiou, 1937~)의 주장에 선뜻 편을 든 것은 바로 이러한 논리에 입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래저래 대단히 복잡하다. 들뢰즈는 헤겔의 변증법적인 체계를 대단히 싫어한다. 그러면서 그런 헤겔에게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친 스피노자는 높게 평가한다. 그것은 들뢰즈가 스피노자 식의 ‘구체적 보편자’에게는 머리가 없는데, 헤겔이 그 ‘구체적 보편자’에 머리를 만들어 붙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스피노자가 신적인 필연성을 제시한 것은 구체적 보편자의 몸속에 일종의 머리를 숨겨 넣은 것이라 할 수 있고, 이 스피노자의 신적인 필연성이 루소가 말한 ‘정치적 몸’의 ‘일반 의지’를 거쳐 헤겔에 와서 절대지를 인륜적으로 실현하고 있는 국가로 변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들뢰즈가 헤겔을 부정한다면 스피노자도 함께 부정해야 한다. 스피노자를 부정하기는커녕 높이 떠받들듯이 상찬한 것은 그 자신이 제시하는 ‘기관들 없는 몸’ 역시 암암리에 그 속에 머리를 감추고 있는 몸임을 그의 의사와는 달리 인정하는 것이라 보아야 한다.      또 다른 기묘한 사안이 있다. 들뢰즈가 ‘기관들 없는 몸’은 완전한 감각 자체의 몸이다. 이는 헤겔이 변증법의 출발점으로 삼은 ‘감각적 확실성’을 실체적으로 바꾸어 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들뢰즈는 헤겔의 변증법을 거꾸로 세우고자 한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물질 개념을 사회역사적으로 확대시킨 레닌을 존중해 마지않는 지젝이 또한 들뢰즈를 비판해마지 않는 것은 어떻게 되는가? 3. 구체적 보편자인 국가와 추상적 보편자인 자본  플라톤이 말하는 보편자로서의 이데아는 현실의 개별적인 사물들이 그러그러한 사물이게끔 하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보편자인 책상의 이데아가 내가 쓰고 있는 개별자인 책상에 대해 위력을 발휘하고 내가 쓰고 있는 개별자인 책상은 보편자인 책상의 이데아를 최대한 닮고자 함으로써 바로 책상으로서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신의 모습(Image of God)으로 창조되었다고 한다. 개별적인 인간이 진정으로 인간일 수 있기 위해서는 최대한 절대적 보편자인 신을 닮으려 하고 또 보편자인 신의 은총에 의해 그러한 닮으려고 하는 개별적인 인간이 인도받아야만 한다.  근대 국가에 있어서 국가는 보편적인 법과 제도를 갖추고서 자신에게 속한 개개 인민들을 이른바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포섭해서 규정-지배한다. 그럴 수 있는 국가의 위력이 인민들 개개인의 천부적인 인권과 자율적인 주권으로부터 연유한다고 하는 것이 근대 국가의 본질이다. 결국 국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개개 인민들이 현실적으로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대단히 중요한 것은 사회계약론에서 알 수 있듯이 근대 국가에서는 원칙상 이전의 군주와 같은 현실적인 머리 내지는 수령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신민으로부터 평등한 인민으로 전환되었다고 하는 것이 근대 정치로의 전환에 있어서 핵심 사안이다.  근대 정치에 대한 이러한 진단이 그 자체로 옳다면, 근대 국가는 플라톤이 말하는 최고의 이데아, 즉 최고의 보편자인 선의 이데아나 기독교가 말하는 절대적 보편자로서의 신 혹은 절대적 보편자로서의 신과 동일시되는 그리스도나 그러한 그리스도를 현실에서 대리하는 교황과 같은 존재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루소-헤겔의 존재론적인 노선에 따라 말하면, ‘돌출된 머리’를 완전히 제거해버리고서 오로지 인민들로만 구성된 정치사회적인 몸인 구체적 보편자로서의 국가가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돌출된 머리’를 완전히 제거해버린 구체적 보편자로서의 국가가 성립할 수 있는가? 이른바 전 인민의 계약에 의거해서 대의적인 방식으로 임시적인 형태로나마 머리를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근대 국민국가의 현실에서 보면, 개개 인민들이 직접 스스로를 제어하는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니다. 구체적 보편자로서의 국가를 형성함에 있어서 그리고 그 국가가 법과 제도를 통해 위력을 발휘함에 있어서 그 근본적인 원천이 되는 개개 인민들의 위력이 직접 발휘될 수 있는 길은 현실적으로 보아 그 폭이 상당히 좁다.  물론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투표를 통해 대표 인물들을 정하는 데에 1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그리고 평소에 각종 시민사회를 형성해서 활동하고, 그 시민사회를 통해 공공성의 영역을 확장 심화해서 참여하고, 정당 활동에 참여하고, 언론을 통해 여론을 조성하는 데에 참여할 수도 있다. 이렇게 인민들에게 열려 있는 여러 정치적인 행위의 기회들은 비록 임시적인 형태로나마 현존하는 머리(수령)가 갖는 일방적인 지배력을 가능한 한 제한하고 그럼으로써 구체적 보편자인 국가가 그야말로 ‘머리 없는 몸’으로서 개별자인 인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위력을 조금이라도 더 원활하게 진작시키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결코 통제 불가능한 또 하나의 거대 보편자인 자본의 위력이 있기 때문에 이 모든 ‘머리 없는 몸’으로서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장치들이 왜곡되기 십상이다. 자본은 분명 인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동과 그 노동의 산물들에 의해 결과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자본은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가 『거대한 전환』에서 말한 것처럼, 시장이라고 하는 이른바 자기 조정 기구를 통해 상품화해서는 안 되는 토지, 노동, 화폐를 상품화하고, 그럼으로써 자연, 인간, 사회관계를 상품화한다. 그렇게 상품화해서 결국에는 모든 가치들을, 그래서 심지어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자인 인민의 삶의 위력마저도 하나의 상품으로서 객관적이면서 탈색된 화폐량으로 표시되도록 한다. 그런 점에서 자본은 보편자로서 그야말로 구체적으로 보편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구체성은 진정한 의미의 구체성이 결코 아니다. 중세 기독교에서 절대적 보편자인 신이 그야말로 구체적으로 인민들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위력을 발휘하지만, 그 본래의 성격은 추상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은 엄격하게 말하면 추상적인 보편자이다.  개별자들의 위력을 바탕으로 하되 그 위력을 오로지 개별자들에게 되돌려 주기 위해 총괄적으로 끌어 모아 표현하는 보편자는 구체적 보편자이다. 그 반면에, 개별자들의 위력을 바탕으로 하되 그 위력을 총괄적으로 찬탈하여 오히려 개별자들을 일방적으로 규정·억압·지배하는 보편자는 구체적 보편자가 아니라 추상적 보편자이다. 물론 이 둘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사안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본이라는 이 추상적인 보편자는 반드시 배타적인 소유자를 필요로 하고, 그러한 소유자에게 원칙상 무한한 소유권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한다. 말하자면, 자본이라는 거대한 추상적 보편자의 경우, 근대 정치에서의 국가라고 하는 구체적 보편자와는 달리 원리상 얼마든지 최고의 머리(수령)를 지닐 수 있고 또 반드시 지녀야 하는 몸이다. 그뿐만 아니라, 지체를 이루는 몸의 모든 부분들은 오로지 머리의 지배와 명령에 의거해서만 존재할 수 있고 기능할 수 있는 보편자, 즉 추상적 보편자이다. 자본이야말로 그 근본 성격에 있어서 파시즘적이다. 자본은 아예 개별자들의 주권적인 위력을 찬탈하여 역이용하기만 하려 할 뿐 그 자체의 가치 보존에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고 그럴 때라야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보편자는 근본적으로 항상 파시즘적이다.      국가라고 하는 구체적 보편자와 자본이라고 하는 추상적 보편자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 원리적인 성격으로 보면, 둘은 상충하기 마련이다. 구체적 보편자로서의 국가는 자본이 개별 인민으로부터 찬탈해 간 위력을 다시 개별 인민들에게 되돌려 주고자 하는 본성을 갖는다. 그 반면, 추상적 보편자로서의 자본은 국가를 이용하고자 한다. 개별 인민들이 자신들의 위력을 총괄적으로 끌어 모아 표현하는 보편자인 국가를 승인한다. 자본이 그렇게 개별 인민들이 승인한 구체적 보편자로서의 국가가 갖는 위력을 찬탈하면 굳이 개별 인민들로부터 저항이나 오해를 받지 않고서도, 그러니까 최대한 합법적으로 자본은 개별 인민들의 위력을 찬탈하여 규정·억압·지배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와 자본은 원리상 상충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구도에서 보면, 둘은 언제든지 통일적으로 결합할 수 있다. 어느 경우이건, 문제는 양자의 관계에서 어느 쪽이 더 주도권을 갖는가 하는 것이다. 자본은 최대한 국가를 하위 보편자로 만들어 수단으로써 활용하고자 하고, 국가 역시 최대한 자본을 하위 보편자로 만들어 수단으로써 활용하고자 한다.  이러한 원리상의 적대적인 관계를 염두에 두면서, 자본의 보편적인 위력과 국가의 보편적인 위력이 어떻게 서로 조화 혹은 충돌하면서 어떤 결과들을 낳았는가를 분석하는 것은 어쩌면 세계의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고갱이가 될 것이다. 자본이 국가를 하위 보편자로 만들어 수단으로써 활용하고자 하는 일이 대성공을 거두고 그럼으로써 경제활동이 정치활동을 완전한 수단으로 삼을 경우, 그리고 그러한 일이 세계적으로 확산될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는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뿐만 아니라 그 와중에 생겨난 파시즘 국가들의 형성과 그로 인한 파멸적인 결과들을 보아 잘 알 수 있다.  자본의 위력이 한 국가의 위력 안에 한정될 수 없다는 것은 자본이 오로지 잉여가치인 이윤을 매개로 자기 확대 재생산을 기한다고 하는 원리로 보아 쉽게 알 수 있다. 이에 자본은 국가 간의 관계를 포섭하기까지 하면서 최대한 국가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자 한다. 자본은 근본적으로 자유무역을 지향한다. 대단히 상식적이지만, 보호무역은 그만큼 국가가 자본을 규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세계화에서 근본이 되는 것은 바로 자본의 초국적화이다. 그에 따라 초국적의 금융 산업과 제조 기업들이 등장하는 것을 필연적인 과정이다. 하나의 초국적의 제조 기업이 국가의 법과 제도를 항상 규제로만 인식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국가의 임무는 자국의 인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위력을 그 자체의 가치로서 최대한 확대 심화시켜 되돌려 주는 데 있기 때문에, 이를 위해 자본을 수단이 되는 방향으로 끌고 가고자 한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국가가 초국적의 자본을 길들여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국가 간의 관계가 문제가 되고, 제국주의적인 거대 국가들이 탄생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국가가 초국적의 자본을 길들여 활용한다는 것은 결국 다른 국가들의 인민들이 노동을 통해 생산되는 자본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럴 때, 초국적의 자본 입장에서 보면, 제국주의적인 거대 국가가 존립하는 것이 ‘평등한’ 자립적 국가들만으로 국제적인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보다 훨씬 더 유리하다. ‘평등한’ 자립적 국가들은 그 나름의 경계를 만들어 그 경계 내에서만 자본이 활동하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적인 거대 국가와 초국적의 자본은 마치 샴쌍둥이처럼 한 몸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말하자면 거대한 구체적 보편자인 제국주의 국가와 거대한 추상적 보편자인 초국적의 자본이 한데 결합해서 한 몸을 이루는 셈인데, 이럴 때 과연 어떤 형태의 보편자라고 해야 하는 것인가? 네그리와 하트가 말한 ‘제국’으로서의 추상적 보편자 중의 추상적 보편자라고 해야 할까? 왜 하필이면 여기에 근대화를 통해 이미 소멸되었다고 하는 기독교적인 추상적인 절대적 보편자가 현대 국제정치에서 쉽게 거론되는가? 추상적인, 그것도 절대적이면서 추상적인 신은 당연히 초국적이고, 또한 철저히 ‘제국주의적’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파시즘적이다.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는 초국적의 거대한 추상적 보편자인 자본의 위기이다. 추상적 보편자는 규모가 거대해지면 질수록 그리고 위력이 강화되면 될수록 종말을 향해 치달을 수밖에 없다. 그 자체 개별자들의 위력들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인데, 규모와 위력이 강화되면 될수록 개별자들로부터 위력을 찬탈하는 폭과 깊이가 강화·심화되면서 제 스스로의 기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면서 제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보편자란 근본적으로 이름에 불과하다는 아벨라르두스의 명목론이 한껏 귓전을 울리는 이유이다.
2017-07-21 | hrights | 조회: 386 | 추천: 0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노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중학교 3학년이던 1978년 조세희 선생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을 읽고 난 이후였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 현실이 전혀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마치 심한 멀미를 하고 있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빛의 화가 모네는 ‘건초더미’나 ‘루앙 대성당’ 연작을 통해 날씨와 햇빛의 각도에 따라 익숙한 자연이나 사물이 달라 보인다는 것을 표현한 바 있다. 난쏘공 역시 현실을 다른 각도에서 비추어 보인 작품이겠지만 중학교 3학년생이 충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마치 다른 나라의 이야기 혹은 꿈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것이 현실일리 없어, 믿을 수 없어, 소설일 뿐이야”라면서 책을 덮은 기억이 생생하다. 그 작품을 다시 꺼내든 것은 1982년 대학교 1학년 때였고 잦은 거주지 이전 때문에 책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난쏘공이 던진 충격은 “노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혹 루앙 대성당 연작 중 햇빛 강한 오후의 그림을 본 적이 있는가. 2000년대 초 오르세 미술관에서 그 그림을 보았을 때 기울기 직전의 따가운 햇살을 정면으로 바라 본 듯 눈이 부셔 오래 바라볼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그림을 보다가 다시 돌아가고 또 돌아가서 보기를 반복했다. 뜨겁고 나른하고 환한 그 오후의 햇살을 난쏘공에서도 본 듯 한데 느낌이 전혀 달랐다. 노동이 뜨겁고 나른하고 환하게 다가든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햇빛 강한 여름 오후나 여린 풀잎이 돋아나는 다정한 봄날의 오후에도 노동은 칼날 같거나 답답하거나 무겁다. 이 때문에 노동자인 대다수 시민들이 노동자라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일까. 난장이 가족의 꿈과 희망이 좌절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오롯이 보여준다. 연극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한 장면. 사진 출처 - 한겨레21 2011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일하는 사람의 71.8%가 임금근로자 즉 노동자이다. 일하는 사람 10명 중 7명이 노동자이니 10명 중 8, 9명꼴인 다른 국가보다는 그 비중이 적지만 상당수가 노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노동자인가?”라는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적다. 오히려 “제가 노동자인가요?”라고 되묻거나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또한 “노동관련 서적을 산 적이 있어요?”라고 하면 눈이 동그래진다. 사실 교보나 영풍문고, 알라딘이나 예스24 등에서 주, 월, 분기, 연도별로 발표하는 베스트셀러에 노동관련 서적이 명함을 내미는 경우는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들다. 경영이나 자기관리 서적에는 선뜻 손이 가지만 노동이라는 제목이 달린 책은 불편하다. 그래서 작년 김진숙과 희망버스가 놀랍다. 정리해고를 한진중공업에서만 한 것도 아니고 그동안 없던 것도 아니다. 2012년 1월 부진 인력퇴출시스템과 사망자수 증가로 언론에 오르내린 KT만 해도 민영화가 시작되고 IMF를 거친 후 2009년까지 구조조정 인원이 26,555명이다. 당사자들의 개인적 혹은 집단적 저항이 없지 않았지만 빨간 머리띠 노동자의 밥그릇 지키는 행위로 치부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2011년 한 해 동안 10조 이상 이익을 올린 4대 은행을 포함하여 일부 대기업에서 경기하락을 이유로 명예퇴직을 받기 시작했다. “일상적인 일”이라는 관계자의 발언은 명예이든 희망이든 그 앞에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도 노동자 본인의 잘못이 아니지만 회사를 위해 퇴직을 해야 하는 것이 일상의 관행임을 뜻한다. 여기에 비정규직까지 고려하면 그 일상의 냉혹함은 상상을 넘어선다. 그러다보니 일상인 정리해고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저항한 김진숙이 희망버스라는 사회적 동의의 아이콘이 된 현실은 창문을 열자마자 서쪽에서 뜬 해와 맞닥뜨린 기분이다. 다른 빛과 그림자로 노동이 그려지고 있는 것일까? 갑작스럽게 노동자, 노동권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일까? 질문을 바꾸어 촛불시위가 광화문 거리를 수놓았던 2008년으로 되돌아가보자. 그 해 다양한 이유로 총 143건의 파업 혹은 농성이 있었고 짧게는 하루, 길게는 365일을 넘겼다. 혹 하나라도 기억하는 것이 있는가? 2008년이 너무 멀다면 2011년은 어떤가. 한진중공업 말고 떠오르는 것이 있는가?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아웃소싱에 반대한 뉴코아와 이랜드리테일(홈에버) 투쟁을 주도했던 당시 수석부위원장 이남신은 다음과 같이 술회한 바 있다. “촛불은 끝내 홈에버 매장으로 오지 않았다. 10년 후 광우병을 일으킬 수 있는 쇠고기 수입반대에는 그렇게 열정적인 시민들이 당장 생존권을 박탈당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선 의외로 차가웠다. 촛불은 아름다웠지만 계급적 문제에 대해선 무력했고 둔감했다.” 이 상황이 쉽게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노동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오르세에 걸린 모네의 그림 그 이상의 긴 시간동안 다양한 형태로 동일한 물음이 반복되었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다. 이미 1월부터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막론하고 계약종료나 해고가 이어진다는 소식이다. 각종 집회와 시위, 노동 쟁의 역시 함께 터진다. 굳이 해고문제만이 아니다. 임금 및 근로조건의 개선, 고용승계나 불법파견, 일자리나 청년실업, 조직민주화와 공공성 강화에 이르기까지 이슈 역시 다양하다. 노동3권은 헌법에 보장된 권리이고 국가는 적정한 임금 및 근로조건을 보장할 의무가 있으며 대다수의 시민이 노동자이니 이와 같은 갈등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때문에 노동을 비추는 빛의 각도에 따라 노동은 어떤 모습을 띠는가. 노동을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고 인식하는 것이 민주주의인가. 해가 바뀌어도 필자의 질문 역시 여전하다. 항상 노동을 연구나 삶의 중심에 두는 것이 아마도 운명인가 보다. 이제는 이렇게 생각하며 새해를 맞는다.
2017-07-21 | hrights | 조회: 247 | 추천: 0
홍미정/ 건국대학교 중동 연구소 연구교수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2013년에 이슬람 성지인 메카, 메디나 순례객 수가 1,500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2011년 11월에는 하지 순례자 약 250만 명이 메카를 다녀갔다. 이 중 180만 명은 외국인들이며, 70-80만 명은 사우디 거주민들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국가별로 무슬림 100만 명 당 1천명의 하지 순례 쿼터를 할당한다. 이에 따라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무슬림 인구밀도가 높은 남아시아 출신의 가난한 순례객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메카 순례객들을 충분히 수용하기 위한 시설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그랜드 모스크 확장사업과 최고급 쇼핑몰, 최고급 시계탑 호텔 건물을 포함하는 초고층 복합빌딩 단지 건설 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사우디 당국의 메카 관광인프라 구축 사업과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로 인해 1천년이상 존재해온 이슬람 문화유적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메카 그랜드 모스크 확장과 초고층 복합 빌딩 단지 건설 메카 태생의 유명한 이슬람 건축 전문가인 사미 안가위(Sami Angawi)는 “이러한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개발정책은 이슬람 성지라는 메카의 본질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메카와 메디나는 역사적으로 거의 끝났다. 여러분들은 메카와 메디나에서 초고층 빌딩 이외에 어떤 것도 보지 못할 것이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메카와 메디나 개발 정책에 반대하면서 현재 메카를 떠나 이집트에 머물고 있다. 런던에서 발행되는 인디펜던트지는 2011년 9월 24일자에서 “메카 소재 1천년 이상 된 건물의 95%가 지난 20년 동안에 파괴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2008년 사우디아라비아가 유네스코에 등록한 두 개의 문화유산 목록에는 이슬람 성지 메카와 메디나가 포함되지 않았다. 유네스코에 등록된 하나는 이슬람 문명 이전에 존재했던 나바티야 왕국(BC.1-AD.1)의 유적이고, 다른 하나는 사우디 제1왕국(1744-1818)의 수도였던 아라비아 반도 중앙에 위치한 디리야 유적이다. 디리야 유적은 사우디 제1왕국의 궁궐들과 유적들을 다수 포함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이슬람 문화 유적들이 우상숭배, 다신교 신봉 등과 같은 죄를 고무시키기 때문에 파괴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주장은 사우디 제1왕국 시절 이슬람 정화를 내세운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이라는 이슬람 학자의 해석에 토대를 두고 있다. 제1사우디 왕국은 알 사우드 가문과 압둘 와합 가문 사이의 결혼 동맹을 통하여 창설되었다. 이후 압둘 와합의 이슬람 해석은 우상숭배자와 다신교 신봉자들을 공격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사우디 왕가의 공세적인 영토 확장정책을 종교적으로 합리화시켰다. 압둘 와합의 이슬람 해석을 기반으로, 제1사우디 왕국은 아라비아반도 내에서 이슬람 문화 유적을 파괴하고, 이라크에 있는 이슬람 성소들을 공격하였다. 예를 들면, 1802년 제1사우디 왕국은 나자프에 있는 시아파의 시조며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 빈 아부 탈립의 무덤과 카르발라에 있는 알리의 아들인 후세인 빈 알리의 무덤을 파괴하였고, 메카와 메디나의 이슬람 초기 유적들을 공격하였다. 대다수 다른 무슬림들은 이러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문화 유적 파괴 행위들을 극단적이라고 주장하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압둘 와합의 이슬람 해석은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들과 시아파를 비롯한 다른 무슬림들을 우상숭배자 혹은 다신교도 등으로 낙인찍고, 이슬람 문화 유적들을 파괴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통치 영역을 공격하여 사우디 왕가의 지배영역 확장을 위한 공세적인 정책을 강화시켰다. 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면서 사우디 왕가는 1915년 12월 영국과 앵글로-네즈드 협정을 체결하고 보호령(1915-1927)의 지위를 수락하였다. 이 협정에서 영국과 동맹한 사우디 왕가는 영국제 무기와 매달 5천 파운드의 군사원조 등을 영국 정부로부터 지원 받아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전쟁과 메카와 메디나(히자즈) 지역에서 하심가를 몰아내는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927년 5월 20일 사우디 왕가와 영국이 체결한 제다 협정에서, 영국이 히자즈와 네즈드 지역을 통치하는 사우디 왕국의 독립을 승인함으로써,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이 창설되었다. 결국 사우디 왕가는 영국과 동맹을 체결하여 상대 무슬림들을 공격하는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압둘 와합이 제시한 와하비즘은 공격의 대상인 무슬림들을 우상 숭배자 내지는 다신교도로 규정함으로써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건설을 위한 강력한 민족주의 이념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1924년까지 메카와 메디나 지역은 지역 패권자인 오스만 제국의 영역에 속해 있었고, 오스만 제국의 지방 통치자로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인 하심가문이 700년 이상 메카와 메디나 지역을 통치해왔다. 영국의 후원을 받은 중앙아라비아 출신의 사우드 가문이 1924년 메카를 공략하여 점령하였을 때, 이들이 가장 먼저 한 행위는 이슬람 역사상 중요한 인물들의 묘지를 훼손시키고 유적들을 파괴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예언자 무함마드가 태어난 생가는 소시장으로 바뀌었다가 주민들의 항의로 도서관으로 변경되었고, 그랜드 모스크 확장 공사로 이 도서관조차도 파괴 위험에 직면하였다. 현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은 20세기 초까지 수 백 년 동안 이 지역 패권자이던 오스만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지방 통치자이며 예언자 무함마드 후손인 하심 가문을 격퇴하고 창설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흔적을 지우기 위하여,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메카와 메디나에 존재하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유적을 포함하는 이슬람 초기 문화 유적과 오스만 제국의 문화유산 일소정책을 추진하는 것으로 보인다.
2017-07-21 | hrights | 조회: 631 | 추천: -1
신하영옥/ 주부, 전 여성단체 활동가 비혼모들에 대한 교육의 기회가 있었다. 이번이 두 번째 였는데, 워낙 처음의 경험에서 진땀을 뺏는지라, 고사하다가 그간의 활동과 고민에 대한 끈을 놓치고 싶지 않기도 했고, 두 번째이니 좀 더 노력하면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역시 마찬가지, 아니 처음 때보다 더 많은 섬세함과 인내를 필요로 하였다. 그동안 경험한 교육은 대체로 성인들이자 듣고 싶어서 참가한 ‘준비된’ 교육생들이였다. 그리고 여성문제를 알고 싶거나 현실에서 문제를 겪음으로서 고민 중에 있는, 문제의식을 갖고 참여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또 대체로 고등학교 이상의 가방끈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여성주의와 사회문제에 대해,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비전을 꿈꾸는 것에 대해 공유하고 공감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혼모들에 대한 그것은 그동안의 내 경험을 깡그리 뒤집는,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자괴감을 느끼도록 하는 과정이자 나의 훈련의 과정이었다. 먼저, 첫 번째 수업의 주제는 ‘여성주의’ 였는데 나는 사전에 잠재적 교육생들을 대상으로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수업하였으면 좋겠는지 설문을 하였고, 연령대와 관심분야, 인원 수 등을 사전 조사하여 나름 그에 맞게 교육프로그램을 들고 갔다. 그러나... 첫 뚜껑을 열자마자 ‘쎄~한’ 분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었고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며 진땀깨나 흘리다 마칠 수밖에 없었다. 여성문제를 알고 싶고, 여성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욕구, 즐겁고 재미있게 해 달라는 그들의 욕망에 대한 나의 판단은 어긋나도 한 참 어긋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왜? 그들은 일단 이 교육에 관심이 없었다. 기관에서 들으라니 듣고는 있지만 수업이 자신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왜 들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은 듯했다. 다음으로 그들이 장장 4시간이라는 교육을 듣고 있기에는 임산부라는 몸이 받쳐주기엔 명백한 한계가 존재했다. 셋째로 그들이 즐겁게 한다는 것은 그들의 용어로 그들의 놀이 방식으로 참여식의 수업을 전개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림그리기, 게임, 영화보기 등... 그러나 나의 참여방식은 워크숍에서 쓰는 작업형식- 토론하고 발표하고 코멘트하기 -이었고 내용은 활동가들이나 여성주의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 즉 적당히 지적욕구가 있는 이들이나 이해할 만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욕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혼모지만 잘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듣고 싶었던 것이다. 여튼 그 다음부터 용어와 방식을 대폭 수정하긴 했지만 5회를 하는 내내 미안하고, 나의 계급적, 문화적 한계를 절실히 통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실 두 번째 요청엔 겁이 났던 거다. 그리고 이번엔 주제가 ‘성적자기결정권’이었다. 두 번째 역시 쉽지 않았다. 아주 적은 인원이었으나 오히려 그것이 약점이 되어 한 두 명이 분위기를 흐리면 전체가 흐트러지게 되었고 이번에는 아주 강적을 만났는데 참가자들 중 누구도 그 친구의 ‘포스’를 당해내지 못했다. 그 친구의 기분에 수업분위기가 좌우되는 상황을 처음엔 최대한 큰소리와 재미있는 말들로 집중을 유도하려했으나 결국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여 폭발하고 말았다. ‘나가!’... 돌아온 말은? ‘내가 왜 나가요?’ + ‘선생님 왜 화를 내요?’ + ‘내 말도 못해요?’... 아 이런 것이 말로만 듣던 일선학교 교사들의 비애로구나... 라는 생각과 더불어 어찌어찌 썰을 풀어 잠재우긴 했지만... 그 이후 내내 어떻게 해야 할 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저 녀석을 제압할 수 있을지 뭐 이런 생각으로 흘려보내야 했다. 그리고 또 한 번 자괴감에 빠져야 했다. 대체 난 이들과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 그동안 난 뭘 했을까? 내가 떠들어 온 여성주체들의 연대는 뭐냐? 여성주의의 확장을 말해 온 나는 대체 현실을 얼마나 알았는가? 라는... 그래서 나의 자괴감과 열등감을 해소 할 겸 그 기관의 활동가분들에게 사건들을 일러바치고 내 고민을 말하곤 하였다. 그 때마다 그 분들은 그 친구들이 자라온 가족환경, 입은 상처, 탈학교 경력 등에 자신들이 겪은 그들과의 생활에 대한 느낌을 더불어 털어놓곤 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입을 통해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 그들의 삶의 궤적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가족 내에서, 학교에서, 탈학교 후 길거리에서, 어른에서 또래까지 신체적 폭력에서 성적 폭력까지. 그들이 경험하는 ‘결정할 수 있는 권리’는 ‘말보다 주먹’으로 상대를 제압했을 때만 가능했다. 자신에 대한 존중도 마찬가지다. 그런 그들의 경험과 마음 안에 나는 ‘여성주의와 성적인 자기결정권’이 씨앗처럼 이미 자리 잡고 있을 거라 기대했던 것이다. 아니 적어도 경험을 통해 이해할 수 있고 따라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들의 경험과 상처, 그에 대한 극복과 수용과정에 대한 이해와 공감도 없이 나의 언어와 나의 경험 속에서 말이다. 비혼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비혼여성축제 사진 출처 - 주간경향 그들과 마음으로 공감하는 것은 결국 마지막 수업이었다. 마지막이 주는 안도감, 편안함이 아마도 주된 이유가 될 거라 믿지만 그래도 그간의 여러 과정과 시간이 만들어낸 약간의 공감과 이해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까이 갈수록 나는 교육하는 자 라는 위선을 떨쳐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나이 때로 되돌아가서 탈선(?)하고 싶었던 또는 탈선해봤던 경험들을 가지고 그들과 그냥 수다를 떨었다. 때로는 욕설 섞은 농담도 하고, 종주먹을 들어 협박과 위협도 하는 폭력적 상황을 연출도 하고, 나의 여성폭력 경험도 나누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들과 내가 다른 시대이나 비슷한 경험과 비슷한 언어와 망가지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다는 공감인 듯하다. 그리고 하나 더 느낀 것은 내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서로 책임지고 수업의 분위기를 이어가도록 역할들을 맡겨 주는 것이다. 한 친구는 다른 친구가 책임지고 또 다른 친구는 또 다른 친구가... 이렇게 하자 내가 나서지 않아도 자신들의 방식으로 서로를 챙기면 즐겁게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하여간 역할과 책임을 주는 것이 주체적,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 되는 듯하다. 아마 다음에 다시하면 좀 더 나아질 수 있을 것 같다. 시민사회운동이 시민들에게 다가가가지 못하는 이유, 여성운동이 여성폭력피해여성들을 주체화하지 못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아본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내 것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려던 욕망, 그들의 욕망을 나의 욕망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고자 했던 오류,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는 그들의 경험을 무색하게 하는 주장과 전달, 상처받은 이들은 무조건 지지하고 공감, 수용, 위로해야 한다는 담론과 그로인한 그들의 비주체화와 피해자와, 대상화의 오류, 일차적 욕망의 함의를 읽어내지 못하는 근시안적 분석 등등... 내가 그들과 하나 될 수 없었던 문제점은 너무나 많다. 딸과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나는 현재 딸의 경험과 처한 맥락을 읽어내지 않고 나의 경험과 현재적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규명하고 위로를 주려고 한다. 안타까워 우는 자식을 보면 마음이 아프지만 그것도 내가 다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이미 나와 딸의 처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플 수도 있고, 슬플 수도 있고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는 것도 딸, 당사자이다. 다만 나는 그와 함께 슬픔과 아픔의 원인이 어디서 왔는지 그의 처지에서 말할 줄 알고 그의 언어로 위로할 줄 알면 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나의 맥락에서 재구성하여 사회문제로 환원하는 역할을 스스로에게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사회문제/여성문제는 문제의 당사자들이 주체로 나서야 정확한 의미와 내용, 힘을 가진다. 그 당사자들을 만나서 지원하는 것이 활동하는 이들의 몫이라고 할 때 과연 어떻게 만나야 할지를 이번 교육들을 통해 아주 조금 배운 듯하다. 전면적으로! 기대도 나의 맥락도 다 내려놓은 채 그들의 삶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만 내가 이미 가진 것이 있을 때 그것을 편안한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어렵다. 편견과 선입견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러자면 비혼모라는 단일한 정체성으로만 그들을 볼 것이 아니라, 딸이자 엄마, 여자친구, 또래친구, 짱 등 다양한 그들의 정체성을 통해 볼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지을 때 그 사람은 그것만으로 나와 소통하게 되고 그 소통은 당연히 한계와 일면성을 가지며 전부를 알지 못하게 하게 마련이다. 전면적인 소통, 다면적인, 삶의 총체적인 소통을 통해 다양한 시민, 여성들이 사회의 주체로 나설 수 있게 될 것이고 이는 새로운 사회, 혹은 새로운 정치형성의 주된 요소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면 이러한 개인들의 ‘발견’ 혹은 ‘드러남’은 정치를 확장하고 재구성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들이 고맙고 보고 싶다. 미래에 대한 걱정은 접어둔 채 엄마로 아이를 키울 수 있게 되었다고 해맑게 웃던 그 ‘포스’있던 친구가...
2017-07-21 | hrights | 조회: 252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현재 우리는 한미FTA 비준을 통해 국가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 모든 시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나름으로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불안해하면서 알게 모르게 고민하고 있다. 사회 전체적인 위기는 늘 새로운 세상을 향한 잠재성을 지니고서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결단을 요구한다. 수동적인 미온적 태도 탓에 구렁텅이에 빠져 퇴락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벼랑에 선 결연한 태도로써 그동안의 엉거주춤한 입장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향한 정신적 무장과 실천을 수행해 나갈 것인가. 현존하는 모든 것들은 양 방향의 벡터적인 힘을 발휘한다. 한쪽은 수렴·응축의 방향이고, 다른 한쪽은 확산· 분절의 방향이다. 이 두 방향은 동시에 작동하면서 현존하는 모든 것들의 성격을 규정한다. 수렴·응축의 방향은 자성(自性)을 향한 방향이고, 확산·분절의 방향은 대타성(對他性)을 향한 방향이다. 그런데 이 두 방향의 힘들은 물리학에서 말하는 작용과 반작용처럼 서로 맞물려 작동한다. 자성은 스스로의 존재가 지닌 강도와 밀도를 바탕으로 한 것이고, 대타성은 자기 아닌 것들과의 뭇 관계들을 관통·포섭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진다. 이 두 방향의 힘은 서로를 규정한다. 대타성을 향한 확산·분절의 열림의 폭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수렴·응축에 의한 자성의 위력은 더욱 커진다. 그 반대로 수렴·응축에 의한 자성의 위력이 크면 클수록 대타성을 향한 확산·분절의 열림의 폭이 커진다. 현존하는 모든 것들은 스스로의 자성의 위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대타성을 향한 열림의 폭을 넓혀야 한다. 즉 대타성을 향한 장을 다변화해야 한다. 그 반대로 대타성을 향한 열림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자성의 위력을 강화시켜야 한다. 자성은 대타성을 통해 열림의 성격을 갖고, 대타성은 자성을 통해 능동의 성격을 갖는다. 한 국가도 현존한다. 말하자면, 국가도 벡터적인 방식으로 현존한다. 그러니까 국가도 수렴·응축을 통한 자성의 위력을 갖추면서 확산·분절을 통한 대타성의 위력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말하자면 확산·분절을 통한 대타성의 위력을 갖추면서 수렴·응축을 통한 자성의 위력을 동시에 갖추지 않으면 한 국가의 운명은 그만큼 위태로운 지경으로 치닫는 셈이다. 지금 한미FTA 비준과 대통령 서명이 임박한 한국의 상황은 이 같은 위태로운 지경으로 치닫는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 말기 이른바 서세동점에 의해 서양 세력들이 침범해 들어올 때, 조선의 위정자들은 기존의 확산·분절의 장인 청나라만을 믿고서 그 장을 바탕으로 하면 얼마든지 그동안 형성해 온 수렴·응축의 국가적인 자성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이른바 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기존의 자성과 대타성의 영역을 고집함으로써 새롭게 열리는 대타성과 자성의 가능성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자성을 유지하기 위한 수렴·응축의 방향으로 나아가되 새롭게 열리는 대타성의 영역으로 향한 확산·분절의 위력을 갖추지 못한 까닭에 제대로 된 자성을 확보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나라를 송두리째 일본 제국주의에 넘김으로써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자성마저 완전히 상실하고 만 것이다. 역사에 관한 이야기는 사후적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결과론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다만, 그러한 역사가 언제든지 현재 속의 미래를 통해 그 구조와 형식을 반복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서 말하면, 조선(혹은 대한제국)이 나라를 빼앗기고 만 것은 대타성을 향한 확산·분절의 다양한 열림을 조율해 나가고자 하는 정신과 그럴만한 역량을 구비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닫혀버린 지 오랜 탓에 이미 그 스스로의 자성마저 갖출 수 없었던 청나라라고 하는 허울뿐인 대타성의 장만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의 상황이 엇비슷하다. 그동안 한국은 대타성을 향한 확산·분절의 한정된 장을 주로 미국을 통해 확보해 왔다. 경제도 그러했지만 특히 군사·외교·정치 방면에 있어서 미국이라는 지극히 한정된(한정되었다고 해서 작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지 않다고 해서 미국이 지닌 일방적인 규정력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대타성의 장을 바탕으로 해서 국가적 자성의 삶을 꾸려왔다. 그런 까닭에 한국이 일구어온 ‘국가적인 자성(自性)’ 역시 미국이라는 장에 의거해 규정되는 방식으로 형성되어 왔다. 이를 일컬어 우리는 ‘기생적인 자성(自性)’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군사·외교·정치를 제외한 경제 분야에 있어서 그동안 한국은 확산·분절에 의한 대타성의 장을 폭넓게 다변화하면서 구축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이제 미국과의 교역량보다 중국과의 교역량이 더 많아진 것을 그 분명한 증거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교역 관계를 보자면, 세계 어디를 막론하고 한국이라는 국가적인 현존 벡터가 가능한 많은 관계들을 관통·포섭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경제적인 차원에서의 이루어지는바 수렴·응축에 의한 한국의 자성은 상당 정도 독자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즉 경제에서 ‘독자적인 자성(自性)’의 폭을 넓혀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군사·외교·정치에 있어서의 ‘기생적인 자성’과 경제에 있어서의 ‘독자적인 자성’이 모순·충돌을 일으키면서 우리 한국인의 삶을 기묘한 방식으로 비틀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경제적인 독자적 자성만 주어진다면 군사·외교·정치적인 기생적인 자성쯤은 충분히 감내해야 마땅한 것 아닌가 하는 주권적인 굴복을 체화해 온 측면이 결코 적지 않다. 그럴 때 경제적인 독자적 자성마저도 근본적으로 기생적인 방식을 취할 수도 있음을, 혹은 기껏해야 상대적인 독자적 자성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못하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튼, 이제 미국은 경제에서의 한국의 독자적인 자성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인 독자적인 자성이 군사·외교·정치적인 기생적인 자성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러, 자칫 반세기 이상 너무나도 유용하게 지배·활용해 온 한국이 미국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는 징후를 보인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징후는 노무현 대통령의 대미관계의 종속성을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 대 국가로서의 관계를 추진해 나가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 바탕은 그동안 크게 신장한 한국의 경제적인 독자적 자성임을 눈치 챈 미국은 무디스라고 하는 미국의 국가신용평가 기관을 내세워 한국의 국가 신용도를 낮추겠다고 위협하자 주식 시장이 크게 흔들리고 환율이 치솟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거기에는 정치와 경제의 얽힘에 대한 통념을 악용하고자 한 전략이 숨어 있다. 한국이 그나마 경제에서 독자적인 자성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대미종속적인 군사·외교·정치에서의 기생적인 자성이 바탕으로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이 후자가 흔들리면 전자도 당연히 흔들린다는 터무니없는 통념을 악용함으로써 무디스가 제시한 위협이 나름대로 정당성이 있는 것인 양 통용되고 만 것이다. 국가 내부에서조차 다국적 기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국내 굴지의 재벌 대기업들이 위기론을 조장한다. 노무현은 이에 굴복하고 만다. 그 결과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 한미FTA다. 다른 모든 현존 벡터들도 그러하지만, 특히 한 국가라고 하는 현존 벡터는 대타성을 향한 확산·분절의 방향이 다양해야 한다. 그 다양한 열림을 통하지 않으면, 그 반대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자성을 향한 수렴·응축의 위력은 대단히 폭이 좁고 그만큼 투명해져 타자에 의해 파악되기가 쉽고 그 결과 언제든지 대타적인 관계에 있어서 더 이상 확산·분절의 운동을 해 나갈 수 없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한미FTA(자유무역협정) 저지 범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한 '한미 FTA 국회 비준 무효화' 촉구 촛불집회가 지난 11월 26일 서울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한미FTA는 그동안 한국이 형성해 온 경제 영역에서의 대타성의 장의 다변적인 열림과 그에 따른 (비록 군사 ·외교·정치적인 기생적인 자성에 의해 상대적이긴 하나) 그 나름대로 확보한 경제적인 독자적 자성, 그 두 가지를 크게 약화시키고자 하는 미국의 전략이다. 미국이 이러한 전략을 꾸리고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미국 자체의 일극체제에 의거한 전방위적인 자성, 즉 통상적인 국가의 독자성을 넘어서서 일방적 대타성인 제국주의적인 성격을 띤 초독자성을 바탕으로 한 미국의 자성이 약화된 것에 대한 위기의식에 의거한 것이다. 요컨대 미국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대타성을 향한 확산·분절의 운동에서 초독자적인 자성의 상태로부터 독자적인 자성의 상태로 전락하는 것에 대한 위기의식에 의거한 것이다. EU의 형성과 중국의 강력한 부상이 그 핵심 원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중국의 강력한 부상이 핵심이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아시아에 ‘올인’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다 알다시피 중국의 대타성을 향한 강력한 확산·분절의 위력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미군 기지를 평택으로 옮기고, 제주도의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만들어 항공모함의 기착지로 활용하겠다고 하는 미국의 군사전략은 그동안 유지해 온 미국의 초독자적인 자성을 끝내 유지하겠다는 각오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로서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유독 미국만은 초독자적인 자성을 지녀야 하는가? 70억 지구촌 인구 중에서 2억5천에 불과한 국민을 지닌 나라가 유독 초독자적인 자성을 지니고서 다른 모든 나라들의 대타성을 향한 확산·분절의 다양한 길목을 규정하고 막아야 하는가? 그 정당성과 권리는 도대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전혀 그런 역사적인 사실들이 없지만, 미국이 이른바 민주와 자유를 전 세계에 확산시킨다는 명목으로 내세워 그러한 정당성과 권리의 기반으로 삼으려 할지 모른다. 하지만 한 국가의 초독자적인 자성에 의해, 즉 제국주의적인 자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다른 나라들의 대타성과 그에 따른 자성의 형성에서 민주와 자유는 결코 진정성을 지닐 수 없다. 그저 기생적인 자성만으로는 근본적으로 민주와 자유를 제대로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한반도가 해방되었지만, 미국과 소련이라는 제3자에 의한 것이었기에, 결국에는 분단과 혹독한 내전을 겪고 지금까지도 민주와 자유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역진 방지 장치가 조약처럼 명기되어 있는 한미FTA가 구체적으로 진행되어 많은 세월이 흐르면 어떤 일들이 전개될 것인가? 정확한 예측을 한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다만, 그동안 형성해 온 한국 경제의 독자적인 자성이 크게 훼손될 경우, 경제적인 영역에서나마 나름의 독자적인 자성을 통해 그나마 민족공동체로서의 위신과 자존심을 유지해 온 한국 민중들의 의식/무의식이 ‘반미’ 쪽으로 자연스럽게 흐를 것이다. 아울러 미국이라는 초독자적 자성을 지닌 나라를 만들어 이를 최대한 이용하고자 하는 거대 자본에 대한 혐오, 즉 ‘반자본’ 쪽으로 한국 민중의 의식/무의식이 자연스럽게 흐를 것이다. 물론 이를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전에 비해 그 강도가 훨씬 더 높아질 것임에는 틀림없다. 우리로서는 ‘반미’를 통한 민족공동체의 독자적 자성(自性)에 대한 요구가 분출되고, 아울러 ‘반자본’을 통한 민중공동체의 독자적 자성(自性)에 대한 요구가 암암리에 사회 전반적으로 확산되는 것으로 진단코자 한다. 이 두 요구는 따로 분리될 수 없을 터인즉, ‘반미·반자본’ 일찍부터 국내의 선진적인 운동세력들이 외쳐온 ‘반제반자’가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아 그 구체적인 현실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가 도래할 가능성이 무척 높다. 한반도에서 민족민중공동체의 독자적 자성을 향한 각성이 일고, 그 수렴·응축의 위력을 통해 동시에 바람직한 대타성을 향한 확산·분절의 다양성이 열릴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하게 된다면, 이는 오히려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의 기회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돌이켜 보면, 이전의 ‘반제반자’의 운동은 경제적인 차원에서 독자적인 자성을 형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제시되었기 때문에, 의식주에 시달리는 민중들의 전반적인 현실을 반영해 내지 못한 상태에서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온 엘리트적인 일종의 외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오히려 기생적인 파쇼 군사독재정권이 나서서 이른바 경제개발을 통해 의식주에 시달리는 민중들의 요구를 현실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그 근본적인 모순을 적발해 내고자 하는 다른 한 편에서의 민중 대변인들의 요구는 수도 없이 심각한 희생 제물을 바친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이제 나름의 경제적인 독자적 자성을 형성한 경험과 더불어 강력한 독재투쟁을 통해 민주화를 이룬 경험이 있는 민중들로서는 ‘반미·반자본’이 현실적인 생활 속에 의식/무의식적으로 스며들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태가 되었다. 이미 ‘월가점령시위’의 세계적인 확산에 의해 99%에 의한 1%의 자본에 대한 투쟁이 상식이 되고 있다는 것도 우리 민중들의 의식에 각인되고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국가와 정부가 자본의 첨병 역할을 한다는 것도 이제 점점 더 민중적인 상식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직접 투쟁에 나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힘겨운 삶이 세계 전체의 왜곡된 구조에 원인을 두고 있다는 것을 각자 나름으로 몸소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전반적인 정세를 누구보다도 미국의 정치인들과 자본가들이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물론적인 관점을 노동자 계급보다 자본가 계급이 더 확실하게 견지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여전히 상당히 강력한 초독자적인 자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세계 최대의 국가총생산량을 자랑하면서 전반적으로 당당한 ‘거대 독자적 자성’을 확보하고 있는 중국마저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최대한 적절한 대응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훨씬 더 극복하기 힘든 현실적인 모순에 처해 있다. 앞으로 그 모순의 강도는 높아질 것이다. 최대한 독자적인 자성을 갖춘 민족민중공동체에 대한 요구가 강해지는 가운데, 이를 제대로 형성할 수 있는 현실적인 조건들은 더욱 열악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대한 강력하고 지속적이어야 하지만, 한편으로 최대한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우리 모두가 공유하면서 몸 전체로 느끼고 실천할 수 있는 사상이다. 민족민중공동체의 전반적인 독자적 자성을 구축하기 위한 구심점으로서의 사상이 필요한 것이다. (철학과 사상은 다르다. 철학이 엘리트적인 상층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수렴·응축되는 것이라면, 사상은 민중적인 하층의 기반에서부터 위로 올라오면서 확산·분절되는 것이다. 철학과 사상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철학은 사상의 원리를 형성하는 논리적인 바탕이고, 사상은 민중적 삶의 전반적인 현실에서부터 존재 근거를 확보하는 것으로서 철학의 실질을 이루는 것이다.) 우선 급한 대로 간략하게 그 윤곽만을 제시한다면, 민족민중공동체를 위한 사상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첫째, 최대한 열린 대타적인 민족민중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 결코 폐쇄적이어서는 안 된다. 다양한 대타적인 열림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민족민중공동체는 형성되어서도 안 되고, 설사 형성된다고 할지라도 민족민중공동체의 성원들에게 매력적인 삶을 보장할 수 없기에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그 열림의 일차적인 대상이 분단된 민족구성원들의 거주지인 북한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둘째, 동시에 대자적인 민족민중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 대자적인 성찰과 그에 따른 각 부문에서의 공동체의 잠정적인 위력의 개발은 전반적인 독자적 자성을 지닌 민족민중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이다. 대자적인 성찰의 기반은 민족 개념과 민중 개념의 상호규정적인 관계에서 확보할 수 있다. 민중적이지 않은 민족은 참다운 민족이 아니다. 민중적이라는 말은 여러모로 결코 터무니없는 삶의 격차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족적이지 않은 민중은 역사성을 띨 수가 없기에 참다운 위력을 지닌 민중일 수가 없다. 민족적이라고 하는 말에는 수많은 세월을 함께 살아왔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다함께 고루 잘 살아야 한다는 당위가 들어 있다. 이 당위야말로 민중적이라는 말과 직결된다. 역사적으로 축적된 모든 역량들에 의거한 삶의 내용들을 가능한 한 다함께 고루 누리자는 것이야말로 민족민중적인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반적으로 대자적인 성찰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셋째, 다양한 삶의 내용으로 열려있는 민족민중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 어느 특정 종파의 종교적 이념이나 어느 특정 윤리적 이념, 혹은 어느 특정한 문화 예술의 이념만을 내세우는 민족민중공동체는 있을 수 없다. 특히 의식주 중심의 경제에 집중된 민족민중공동체는 지양해야 마땅하다. 경제는 민족민중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사다리이자 발판일 뿐, 그 자체로 결코 삶의 내용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가 사다리이자 발판일 뿐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형성해 온 독자적 자성의 긴요한 영역이기에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타고난 창조적인 기지를 총동원해서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열심히 노력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 경제활동의 목적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목적의식을 유지하는 데 한시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사회역사적으로 축적된 민족적인 다양한 삶의 가치와 더불어 인류 전체가 형성해 온 다양한 삶의 가치를 가능한 넓고 깊게 최대한 다 같이 고루 향유할 수 있는 민족민중공동체를 목적으로 삼아 지향해야 한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61 | 추천: 0
안수찬/ 한겨레 탐사보도팀장 나의 기억 속에서 80년대 한국 주요 도시의 대기는 차량 배기가스가 아니라 최루탄 가스로 오염됐다. 1960년대 4·19 혁명 시기에 이미 등장했던 한국의 최루탄은 1980년대 들어 ‘더 가공할 성능’을 갖췄다. 80년 광주항쟁에 놀란 전두환 정권이 시위진압용으로 더 치명적인 최루탄을 수입했다. 최루탄의 주 성분은 클로로벤즈알말로노나이트릴(C10H5ClN2)이다. 이것의 화학식을 풀어 그 성분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내 능력 너머의 일이다. 그것은 상온에서 고체(가루)로 존재하는데, 가루 상태의 그것을 뿌려봐야 바람에 날려 목표물 조준에 효과가 없다. 그래서 용매제인 디클로로메탄에 녹인 뒤 기체(근접거리에선 액체) 형태로 방사하는 경우가 많다. 덕분에 CS 가스라는 간단한 이름도 생겼다. CS는 1928년 이를 개발한 미국인 벤 코손(Corson)·로저 스토턴(Stoughton)의 성씨 첫 글자다. 액체건 기체건 멀리 날아갈 수 없으니 일련의 탄두에 남아 날려 보내는 기술도 발전했다. 우리는 ‘최루 가스’보다 ‘최루탄’에 더 익숙하다. CS 가스는 살상용이 확실히 아니다. 최루액·최루가스·최루가루에 노출됐다 하여 현장에서 죽지는 않는다. (곧바로 죽음에 이르진 않지만, 그 성분이 치명적 발암물질이라는 분석은 오래 전에 나와 있다. 그 즉각적 고통이 너무 강력하므로 ‘언젠가 이것 때문에 암에 걸릴지도 몰라’ 따위의 걱정을 하는 이가 드물었을 뿐이다.) 다만 그것은 인간의 오감을 마비시킨다. 우선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눈을 뜰 수가 없다. 눈을 떠도 아프고 눈을 감아도 아프다. ‘아프다’는 말로 그 고통을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코와 목에 대바늘 수백 개를 집어넣어 함부로 쑤셔대는 고통과 함께 폐 전체를 먹물로 채운 듯 숨을 쉴 수가 없다. 노출된 피부 전체, 즉 얼굴·목·팔·다리가 불에 데인 듯 따갑고 뜨겁다. 최루탄에 노출된 손으로 사타구니라도 만지면 종족 번식의 꿈이 산산조각 나는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최루탄은 사람을 완전히 무릎 꿇린다. 개가 되라면 기꺼이 개가 된다. 최루탄을 겪어본 사람들은 이상의 설명이 불만족스러울 것이다. 최루탄은 ‘하나의 최루탄’이 아니라 ‘일련의 폭력체계’로 구성된다. 우선 그것은 실제로 ‘탄환’의 구실을 했다. 경찰은 45도 각도로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리지 않고, 정면을 조준해 최루탄을 발사했다. 그것을 맞으면 최루 가스와 상관없이 그 충격 때문에 죽는다. 1987년 연세대생 이한열이 그렇게 죽었다. 최루탄이 등장하면, ‘직격탄’을 피해야 한다는 공포부터 시작된다. 설령 그것이 ‘곡사포’의 형태로 발사된다 해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 탄환은 중력가속도의 레일을 따라 언제든지 시위대의 정수리를 타격할 수 있다. 최루가스·최루액·최루가루에 노출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 상태에 빠진다. 무기력이 곧 죽음은 아니다. 그러나 ‘백골단’으로 불리던 무장경찰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일은 피할 수 없다. 은빛 투구에 날렵한 청재킷을 입은 그들은 군화와 곤봉과 주먹으로 시위대를 무차별 가격했다. 태권도·유도·합기도 등으로 단련된 그들의 육체는 치명적 흉기다. 그들에게 얻어맞다가 죽을 수 있다.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와 성균관대생 김귀정이 그렇게 죽었다. 그들의 모진 매질에서 살아남았다 해도 체포·구금·구속의 공포가 남아 있다. 최루탄을 마시고 널브러져 시위 현장에서 잡히면 그들의 마음대로(그들은 ‘법대로’라고 주장하지만) 인신을 요리한다. 군대로 끌려가거나 몇 년씩 감옥에 갇히는 일이 벌어진다. 그것은 정신, 양심, 육신에 대한 한시적 사망선고다. 최루탄을 겪어본 사람들은 이러한 일련의 공포 체계를 종합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탄환’이 아니라 ‘거대하고 무자비하고 체계적인 폭력’이다. 과거 시위현장에 단골로 등장했던 것은 ‘지랄탄’이다. ‘페퍼포그’(Pepper Fog)로 불리는 장갑차의 정수리에서 다연발로 발사돼 우리의 머리 위로 쏟아지던 ‘지랄탄’은 먼 거리에서 시위대를 무력화시키는 경찰의 무기였다. 일단 땅에 떨어지면 반경 수십 미터를 미친x 지랄하듯 요동치며 노란 최루가스를 끝없이 게워냈다. 아스팔트 위를 쏜살같이, 그러나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튀어다니는 그것에 맞아 발목이 부러지는 일도 있었다. 그걸 손으로 잡아 전경에 되던지려다가 뜨거운 열기에 화상을 입는 경우도 있었다. 지랄탄이 쏟아지면 그것으로 그날의 시위는 끝장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더 공포스러워 했던 것은 ‘사과탄’이었다. 한 주먹에 잡히는 사과탄은 오직 가까운 거리에서만 사용됐다. 그들은 시위대를 ‘토끼몰이’ 방식으로 거리 구석에 몰아놓고 사람들의 머리 위에 사과탄을 툭툭 까 넣었다. 땅에 엎드려 개처럼 기면서 두 손으로 머리와 목덜미를 감싸 쥐는 것이 시위대가 취할 수 있는 방어의 전부였다. 백골단은 우리의 어깨와 허리와 머리를 지근지근 군화발로 밟으며 담배꽁초를 길바닥에 버리듯 툭, 툭, 툭 끝도 없이 사과탄을 까서 아비규환의 틈바구니에 굴려 넣었다. 눈에 파편이 박히고, 고막이 터지고, 얼굴에 화상을 입는 이들이 있었으나, 심지어 죽어 나가기도 하는 시절에 그들의 희생은 사람들의 기억에도 남지 않았다. 대학 시절, 나는 어떤 논쟁에 격렬히 가담한 적이 있다. 집회·시위 현장에서 쇠파이프·화염병 등을 사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논리 싸움이 붙었다. 나는 ‘비폭력투쟁’은 말도 안 된다는 쪽이었다. 확실히 그 시절의 나는 피가 뜨겁다 못해 물불을 가리지 않아 무모했다. 집회·시위의 목적은 우리의 뜻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인데, 경찰의 폭력으로 집회·시위 자체가 원천 봉쇄되는 상황에서 ‘비폭력’을 고집하다 고스란히 잡혀 들여가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나는 떠들었다. 시민을 만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공간을 확보하고, 시위대의 핵심역량을 공권력의 폭력에서 지켜내려면, ‘최소한의 자위 수단’이 필요하다고, 나는 떠벌렸다. 실은 무서웠던 것이다. 그런 대의명분은 나중의 일이고, 나는 시위를 하다가 직격탄, 지랄탄, 사과탄, 그리고 곤봉과 군화에 맞아 죽을까봐 무서웠다. 그것이 개죽음인 것 같아 더욱 두려웠다. 나중에 ‘물대포’가 등장했을 때, 나는 ‘최소한의 자위 수단’에 대한 주장을 거둬들였다. 노즐을 조정해 자유자재로 직사·곡사를 넘나들고, 형광액을 묻혀 시위참가자를 색출하며, 한번 맞는 것만으로도 하루 종일 무기력해지는 그 가공할 장갑차의 최루액 살포를 맞닥뜨린 뒤, 나는 우리의 무기가 사소한 자위에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내려놓고, 그저 책만 읽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세상을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가짓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날치기 처리를 규탄하는 시민, 학생, 노동자들이 지난 22일 밤 서울 중구 명동 남대문세무서 앞 도로를 점거한 채 시위를 벌이다 경찰이 물대포를 쏘며 진압에 나서자 팔짱을 낀 채 버티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2011년 11월은 최루탄 역사의 대단원 또는 또 하나의 절정으로 기록될 것이다. 경찰은 국내 등장 20년이 지난 CS 최루액을 “내년 중에 폐기하겠다”고 밝혔다. 그들은 “만약에 있을지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해 보관하던 것을 없애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이 염두에 뒀던 ‘비상사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은 ‘비상사태’ 개념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했다. 경찰 발표 이튿날인 11월22일, 김 의원은 FTA 날치기 처리 현장에 최루가루를 뿌렸다. 기자 출입까지 봉쇄한 상태에서 벌어진 사태이므로 그가 사과탄을 터뜨렸는지, 그냥 최루가루를 뿌렸는지는 아직 정확치 않다. 어쨌건 그것은 클로로벤즈알말로노나이트릴이 공개 장소에서 사용된 마지막 사건이 될 것이다. 같은 날 저녁, FTA 날치기 통과 반대 시위대를 향해 경찰은 물대포를 쏘았다. 그 물대포에 최루액이 포함됐는지, 그것이 구래의 CS 가스인지, 덜 유해하다는 ‘켑사이신’ 성분인지는 잘 모르겠다. 겪지 않으면 공감하기 힘든 일이 세상에는 있는 법이다. 최루탄은 맞아봐야 안다. 국회 날치기 현장에서 터진 사과탄 또는 최루가루에 대해 조중동은 일제히 ‘테러’라고 1면 머릿기사를 썼다. <위키백과> 한국어판은 테러에 대해 “정치·종교·사상적 목적을 위해 민간인한테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는 폭력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국회의원은 민간인인가? 민간인은 대대손손 국민 모두의 운명을 좌우할 한미FTA를 날치기 통과시킬 권능이 없다. 미국·유럽의 정치인들은 종종 토마토·계란·오물·신발·밀가루·쓰레기 등을 끼얹는 시민들에게 곤욕을 치른다. 그것은 모욕이고 아마도 폭력이겠지만, 그렇다고 테러는 아니다. 김 의원은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날치기를 시도하는 한나라당 의원이라는 ‘특수 집단’을 겨냥했다. (겨냥이 정확치 않아 제 몸에 더 많은 최루가루를 뒤집어쓴 것 같기는 하다. 그럼 ‘자폭 테러’인 것인가?) 그것은 분명 폭력이겠지만, 자신이 위해를 당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전혀 없는 이들에게 불의의 습격을 가한 것이 아니다. 한나라당 날치기 의원들은 위협을 분명히 인지하여 경호권을 발동하고 언론을 봉쇄하고 야당 의원의 단상 진입을 봉쇄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욕설과 드잡이를 포함한 ‘어떤 폭력’이 자행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게 최루탄일 줄은 몰랐겠지만, 그게 토마토이건 쓰레기이건 똥물이건 예상치 못한 수단이 동원됐다 하여 폭력이 곧 테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명의 진화는 폭력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 입각해 발전해왔다. 이젠 누구도 사사로이 폭력을 행사해선 안 된다. 합법적인 폭력은 오직 ‘정당 방위’와 ‘국가의 폭력’에 국한된다. 현대 문명은 이제 ‘국가의 폭력’에 대한 성찰을 통해 발전해 나갈 것이다. 예컨대 지난해 예산안 날치기 통과 때, 한나라당 김성회 의원이 민주당 의원과 당직자를 ‘정권’으로 가격한 것은 (먼저 맞았다고 주장하는 김 의원의 말처럼) 정당방위인가 그저 사사로운 폭력인가 국회 질서를 해치는 테러인가. 수많은 폭력이 난무한 예산안 날치기 통과 이후, 김 의원을 비롯한 한나라당 의원들은 청와대로부터 격려를 받았다. 물리력을 동원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했으니 김 의원의 행동이 폭력인 것은 맞지만, 그건 ‘테러’가 아니다. 테러가 현대 인류 문명 최대의 적인 이유가 있다. 테러는 분노와 적개의 대상이 아닌 자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미 제국주의에 대한 적개심에서 9·11 사건이 일어났지만, 실제로 희생당한 것은 미국에서도 가장 리버럴한 뉴욕 시민들이었다. 테러는 나찌 인종청소의 연장선에 있는 폭력이다. 명분을 위해 불특정 다수를 죽인다. 김선동 의원의 최루탄의 품격은 부시 미 대통령을 향해 날아갔던 어느 이라크 기자의 신발과 같다. 당시 미국 어느 언론도 그 신발이 ‘대통령 암살 시도’라고 선동하지 않았다. 그것은 폭력이었으나 정치권력을 향한 공공의 모욕을 대변하는 개인의 행위였고, 그는 그 폭력에 어울리는 수준의 처벌을 받았다. 김 의원의 의도가 무엇이건, 덕분에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최루탄의 맛을 보았다. 그런데 그들이 맛본 것은 겨우 애피타이저에 불과하다. 직격탄, 지랄탄, 토끼몰이, 사과탄, 구타, 체포, 구속, 전과자의 낙인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폭력체계를 모두 겪어봐야, “아, 이래서 최루탄 최루탄 하는구나“”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지경까지 겪지 못하였으니,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그날 저녁 명동 성당 앞에서 물대포 맞으며 오들오들 떨면서도 FTA 반대를 외치던 3천여 명의 시위대를 끝내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과탄에도 불구하고 날치기 하는 국회의원과 물대포에도 불구하고 날치기를 규탄하는 시민 사이에 아직 공감을 위한 경험의 공유가 부족하다.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빌려 말하자면, “내가 최루탄 맞아봐서 아는데” 국회 의사당에 지랄탄 몇 개쯤 터져야 힘없는 이들이 공권력의 폭력에 대한 공포를 무릅쓰고 광장으로 광장으로 밀려나오는 이유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분노 없는 폭력이야말로 비인간화의 전형”이라고 설파했다. 국가 권력이 폭력을 휘두를 때, 그것은 비록 합법을 가장할지언정 비인간의 편에 서있다. 권력을 향해 분노하는 이들이 불복종·항의·위력시위 등을 벌일 때, 그것은 인간의 편에 선 폭력을 향한다. 물론 아렌트는 “폭력으로 권력을 창출할 수는 없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국회 의사당에 사과탄을 터뜨리는 폭력으로 의회 독재를 무너뜨리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폭력은 날치기를 위한 경호권이나 명동성당 앞 물대포보다 ‘정의롭다’. 적어도 경호권과 물대포를 앞세운 이들이 까짓 사과탄에 호들갑 떨 일은 결코 아니다. 굳이 그래야만 한다면 지랄탄 몇 개 한달음에 흡입해 보시던가.
2017-07-20 | hrights | 조회: 332 | 추천: 0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스마트폰 2,000만 시대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스마트폰을 갖고 있지 않다. 그 이유를 대라면 곧바로 열 가지쯤은 줄줄이 나오겠지만 굳이 밝힐 이유는 없겠다. 스마트폰의 효용이나 효율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투표율을 올린 공신 중의 하나가 스마트폰이라는 것에 토를 달 생각도 없고, 스마트폰이 성장을 주도하고 삶을 바꾼다는 이야기에 감히 문제를 제기하지도 않는다. 어쨌든 개인적으로 스마트폰을 원하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어제 오전에 전화가 왔다. 공짜 이벤트가 있으니 이번에 구닥다리 핸드폰을 바꾸라는 것이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콜센터나 서비스 센터의 전화를 잘 끊지 못한다. 2분에 1콜을 받거나, 콜 수와 성사 건수에 따라 급여가 매겨지는 고된 노동을 하는, 그것도 젊은 목소리를 매몰차게 자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요즘 청년 노동이 얼마나 심각한가 말이다. 하지만 이번 전화는 정말 이상했다.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몇 번이나 응답을 했는데도 전화를 끊지 않고 다시 걸어 바꾸라고 권유한다. 연말로 2G 서비스가 끝나 기존의 핸드폰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 이야기에는 조금 놀랐고 그래서 안내를 받아보라는 것에 응했다. 바뀐 담당자가 설명을 하는 와중에 다시 물어보았다. “제 핸드폰에 대한 서비스가 끝나나요?” 그것은 아니란다. 그럼 원하지 않는다고 답했더니 그래도 설명을 이어간다. 조금 강하게 말하고 나서야 전화를 끊을 수 있었는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정신없이 일을 하는 와중에 같은 사람으로부터 세 번이나 더 전화가 왔다. “고객님, 도대체 왜 그러시나요?”에서부터 “사용료 부담이 저렴해요”에 이르기까지. 구구절절 전화를 계속 걸어댄다. 결국 담당자의 마지막 말은 이랬다. “고객님, 그 전화 계~속 쓰세요”. 이번에는 정말 놀랐다. 소비자 보호원에 고발하라는 동료의 이야기에 응할 수는 없었지만 정말 궁금해졌다. 정말 왜 이러는가?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일을 해야 하는 연말에, 자판기 수준으로 폭풍글쓰기를 해야 하는 연말에, 결국 억지로 시간을 내서 인터넷에 올라온 온갖 기사를 검색하고 나서야 영문을 알 수 있었다. KT가 이달 말 2G 서비스 종료를 재천명하였고, 최시중 방통위원장이 최근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에서 개인적인 의견임을 전제로 "KT 전체 가입자 1600만 명 중에서 2G 가입자가 1% 수준이 됐을 때 서비스 종료를 허가해 주는 것이 좋을 듯하다"며 "현재 KT는 이 같은 기준에 상당히 근접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필자 같은 가입자를 없애야 하는 것이고 그 때문에 유사한 시달림을 겪는 사람이 꽤 있다고 한다. KT의 노동자들이 잇따라 숨진 가운데 '죽음의 기업 KT-계열사 책임 촉구 및 노동인권 실현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준비위원회'가 지난 10월 12일 서울 광화문 KT사옥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 출처 - 참세상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지난 10월 10일 매일노동뉴스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6일 KT대전 NSC논산운용팀에서 일하는 전씨(50세)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 "8명이 하던 일을 2명이 하려니 힘에 부친다", "팀끼리 경쟁을 붙여 성과급을 지급하는 바람에 너무 힘들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또한 5일 경기남부NSC 윤씨(50세)가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7월에는 NSC에서 고객컨설팅 업무로 전환 배치된 강씨(50세)가 옥상에서 투신자살했다. 민주당 홍영표 의원에 의하면 ”KT 재직자 중 숨진 노동자가 올해만 14명이고, 2009년 12월 KT의 특별 명예퇴직 이후 사망자가 폭증했다”고 한다. 2G 가입자를 없애기 위해 이 정도로 집중하는데 그 내부에 있는 노동자에게는 어떤 대우를 할까? 게다가 경영상의 문제를 왜 노동자와 소비자가 감당해야 하는가 말이다. 노동자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경우에도 해고할 수 있는 정리해고는 경영상의 문제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서 이윤하락은 왜 경영상의 문제가 아니라 2G 가입자나 소비자의 책임인가? KT 민영화가 시작된 것은 1990년대부터이다. 93년부터 96년까지 정부 지분 28.9%를 시장에 팔았고 2002년 드디어 정부 지분 0%의 민영KT로의 전환을 마무리했다. 2008년 외국인 지분이 47.5%, 자사주 25.6%, 국내주주 18.3%이며 국민연금 투자분도 2.3%이다.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를 제외하면 의결권이 있는 주식 중 외국인 소유 지분이 50%가 넘어 주주들은 더 높은 배당을 받을 수 있으며 외국인 주주가 매년 가져가는 이익 만 해도 천문학적 숫자이다. 노동은 정반대이다. 1998년부터 1999년까지 구조조정으로 8,968명이 회사를 떠나야 했고 2003년에는 노사합의에 의해 약 5,500명이 다시 회사를 나가 고용 규모는 끊임없이 줄었다. 남아 있는 사람의 노동 강도 강화는 불을 보듯 뻔 하여 이것이 연이은 자살의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2006년 평균임금도 타 통신업체 대비 약 10% 수준 적고 1999년 임시직과 사내하도급 노동자 수가 7,419명 늘어난 이래로 현재까지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다. 2001년에 500여일 동안 비정규직 투쟁이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마 필자를 괴롭힌 사람은 회사의 의뢰를 받은 협력사 혹은 하청회사의 직원일 것이다. 비정규직일 가능성이 높고 기필코 성사 건수를 높여야 하기 때문에 매일 매일의 전쟁을 치르는 사람일 것이다. 일선에 선 노동자와 소비자 간에 전쟁 치르듯 전화로 목소리를 높이지만 이익은 전혀 딴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가 가져간다는 속담이 가슴 아프게 떠오른다. 2G 서비스 중단 압력만큼이나, 삶을 바꾼다는 스마트폰 광고비만큼이나 노동자를, 그리고 노동자이기도 한 소비자를 생각해주었으면 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는 상품이 아니고 사람이며 휴대폰 가입자는 없애야 할 휴대폰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제발 사람을 상품으로 처리하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1944년 “노동자가 상품이 아니다”고 선언한 필라델피아 정신이 너무 그립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58 | 추천: 0
이광조/ CBS PD 며칠 전이다. 온라인상에서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의 2007년 라디오 인터뷰 내용이 화제가 됐다. 제목이 낯익어 들여다봤더니 당시 내가 제작하고 있던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2007년 5월 28일)에서 인터뷰했던 내용이었다.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사표를 던지면서 이뤄진 인터뷰였다. 방송 후 활자화된 인터뷰 전문에는 “한미 FTA, 한국의 사법주권 전체를 미국에 바친 것”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인터뷰 전문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으며 정치인 홍준표에게 가졌던 막연한 호감의 뿌리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지난 몇 년간 주한미군과 관련된 협상을 지켜봤는데, 방위비 협정을 보면 주한미군은 줄어드는데 방위비는 올라가고 있다”며 “우리도 미국에 요구할 건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당시에도 이미 많은 논란이 되고 있던 ‘투자자-국가 소송제’와 관련해 “한국의 사법주권 전체를 미국에 바친 것”이라고 비판하며, “FTA가 세계적 추세이므로 따라가야 하지만 따라가는 방법이 자기 임기 중에 실적을 남겨야겠다는 조급한 생각 때문에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협상이 없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과거의 발언을 가지고 말꼬리를 잡자는 게 아니다. 홍준표 대표의 과거 발언을 다시 들여다보는 건, 외교관계, 특히 한미관계와 관련해 대한민국 보수가 보여주는 맹목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있던 한 정치인에게 느꼈던 호감과 기대가 허물어져 내린데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다른 것 다 떠나서 보수에게 국가주권보다 우위에 있는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 그런 점에서 한미FTA는 비단 투자자-국가소송제도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누구보다 이 땅의 보수 세력이 그 내용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개선을 요구해야 했을 사안이다. 하지만 그의 표현대로 시간에 쫓겨서 졸속으로 추진된 한미 FTA, 그것도 미국 산업계와 정치권의 반대로 재협상을 통해 미국에 많은 것을 양보해 준 한미 FTA가 국회비준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이런 문제의식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건가. 더구나 그는 지금 대통령과 대등한 국정운영의 파트너인 여당 대표가 아닌가. 사진 출처 - 노컷뉴스 당시에는 투자자-국가 소송제도가 이렇게 무서운 건지 몰랐다는 야당 지도자들의 말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래서 예전과 같은 걱정은 이제 안 해도 되는 건지, 국민에게 설명이라도 해야 할 게 아닌가. 한미 FTA와 투자자-국가소송제도에 관해서는 참여정부 시절이나 지금이나 여러 가지 해석과 전망이 엇갈린다. 미래를 누가 정확하게 예측하겠는가. 하지만 지구상의 초강대국 미국과 체결하는 한미 FTA, 더구나 우리사회의 법과 제도, 관행을 미국식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한미 FTA는 ‘우리도 미국과 1대 1로 경쟁할 수 있다’거나 해보고 나서 ‘아니면 말고’ 식으로 정리할 수 있는 그런 사안이 아니다. 홍준표 대표가 지적했던 신중한 접근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사족. 한미 FTA, 특히 투자자-국가 소송제도와 관련된 여러 가지 논란과 진실게임을 보면 노무현 정부 초기 장안의 화제가 됐던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강금실 변호사를 법무부 장관에 임명한 것이 발단이 되어 마련됐던 대통령과 검사들과의 만남은 말이 ‘대화’였지 검사들의 집단시위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대통령 앞에서도 당당했던 검사들의 그 기개란. 그런데 말이다, 2006년에 대한민국 법무부가 사법주권 침해 우려가 있다며 외교통상부에 삭제를 요구했었다는 투자자-국가 소송제와 관련해서는 이 땅의 검사 중 누구 하나 우려를 표명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일이 없다. 너무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일이어서 그런가, 아니면 내 밥그릇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가.
2017-07-20 | hrights | 조회: 256 | 추천: 0
홍미정/ 건국대학교 중동 연구소 연구교수 2011년 9월 뉴욕에서 개최된 제 66차 유엔총회의 주요한 주제는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 문제였다. 유엔 총회 연설에서 팔레스타인 수반 마흐무드 압바스는 동예루살렘과 서안 지역에서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의 완전한 중지를 요구했다. 그 대답으로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에 대규모의 새로운 정착촌 건설 계획을 밝혔으며, 동예루살렘과 서안 지역에 건설된 불법적인 정착촌 전초기지를 합법화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번 유엔 총회에서 특히 중요한 안건이 이스라엘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의 분쟁이며, 이것은 미국 외교정책의 시험대라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신들의 국가를 가질 가치가 있지만, 진정한 평화는 이스라엘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서만 실현될 수 있으며... 수십 년 동안 계속돼 온 분쟁을 끝내는 지름길은 없다. 평화는 유엔 결의들이나 연설을 통해서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아니라 이스라엘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이 경계, 안보, 난민 예루살렘 등의 문제들에 관하여 협정을 체결해야만 한다.” 오바마의 연설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유엔과 국제 사회의 책임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발언으로, 압바스 팔레스타인 수반의 연설내용과 전면적으로 충돌하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직접 협상을 통한 분쟁 해결을 강조한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주장과 일치한다. 사실, 미국이 중재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직접 협상은 1993년 이후 계속되어왔다. 그러나 이 협상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점령지에 대한 실효적인 지배권을 확장 강화시키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은 되풀이되는 재앙에 직면해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쟁 해결을 위한 유엔의 역할을 부정하는 미국이 과연 유엔 안보리 상임 이사국으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유엔 총회 연설 서두에 팔레스타인 문제는 유엔 결의들과 복잡하게 얽혀있다고 밝히면서 유엔 결의들에 토대를 둔 팔레스타인인들의 양도할 수 없는 합법적인 민족의 권리를 역설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1967년 6월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과 가자 전역에서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건설, 1948년 11월에 결의된 유엔 총회 결의 194호와 2002년 아랍 국가들이 결의한 아랍 평화안에 따른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해결, 이스라엘 감옥에 있는 팔레스타인 정치범 석방”을 확언하였다. 특히 여기서 압바스는 이스라엘의 국가 테러리즘을 비난하고 이스라엘에게 정착촌 활동을 완전히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내용은 전임자인 야세르 아라파트가 PLO 대표로서 1988년에 선언한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하지만, 오슬로 협상 과정에서 압바스 수반 본인이 이스라엘과 직접 협상해온 내용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 연설에 대해서 한 팔레스타인 친구는 “오늘 처음으로 압바스는 내 이름으로 유엔에서 연설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곧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유엔 정식 회원국 가입 신청을 보도하는 AP통신 반면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는 이스라엘 관련 27개의 유엔 총회 결의 중 21개가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결의였고, 유엔을 불합리한 기구라고 비난하면서 연설을 시작하였다. 그는 유엔 연설에서 “유엔 안보리 결의 242호는 6일(1967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장악한 영토 전역이 아니라, 그 영토의 일부에서 철수하기를 요구하였다. 이스라엘은 서안을 제외하면, 그 폭이 매우 좁아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서는 서안 지역에 오랜 기간 동안 주둔해야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을 체결한 이후에 국가 건설을 해야 한다. 정착촌 건설은 분쟁의 핵심이 아니다. 1917년 밸푸어와 로이드 조지·1948년 트루만 대통령·2009년에 오바마 대통령이 밝혔듯이, 팔레스타인 지도부도 이스라엘을 유대 국가로 인정해야한다. 이스라엘에게 예루살렘은 미국에게 워싱턴, 영국에게 런던과 마찬가지다.”고 주장했다. 네타냐후는 안보상의 이유로 서안 지역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양도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밝히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과 평화 협상을 체결한 이후에 비로소 국가 건설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1967년 서안을 장악한 이후 이스라엘이 일관되게 실행시켜온 정책이며 새로운 내용이 없다. 그가 밝힌 대로 20세기 초부터 현재까지 영국과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유대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을 인정해 온 반면, 팔레스타인인들의 영토에 대한 권리와 정치적 주권은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다. 끝내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국의 반대로 팔레스타인은 유엔 정식 회원국가로 승인받지 못할 것이다. 확실한 경계를 갖는 영토 획정과 관계없이, 팔레스타인이 유엔에서 투표권이 없는 비회원 국가의 지위를 확보한다할지라도, 그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당면한 분쟁 해결에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정책이 변화되지 않는 한 ‘명목상 존재하는 팔레스타인 국가’는 영토에 대한 실효적인 지배권과 정치적 주권을 갖지 못한 채 문서상으로만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73 | 추천: 0
최정학/ 방송대 법학과 교수 한 쪽은 주었다고 하고, 다른 한 쪽은 받지 않았다고 한다. 수년간 가까운 사이였다고 하면, 그런 사람을 모른다고 하고 만난 적도 없다고 한다. 이 쯤 되면 수사 과정에서 잘 쓰인다는 거짓말탐지기라도 동원해서 어느 편이 사실을 얘기하고 있는지 알아보아야 할 것인데, 뇌물사건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탐지기를 이용해 수사했다는 얘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하긴 수사와는 달리 형사재판에서 거짓말탐지기의 검사결과는 거의 증거능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결국 경찰은 피의자의 자백을 얻어내기 위한 일종의 압박수단으로 거짓말탐지기를 활용하는 셈인데, 그렇다면 고위 공직자가 대상인 뇌물사건에서도 이것을 이용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SLS 조선이라는 기업의 이국철 회장이라는 분이 요즘 연일 머리기사를 장식하고 있다. 그 내용이란 우리가 지금까지 여러번 들어본 줄거리인데, 잘 나가는 기업의 회장이 유력 정치인들에게 금품을 제공해 왔으며, 정권이 바뀐 이후 이 기업인에 대한 보복성 수사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 그의 기업은 파산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마지막 저항으로 이 기업인은 현 정권의 고위 공직자 가운데에서 자신이 관리(?)해 온 사람들을 폭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 공직자들은 이 기업인의 주장을 부인하였는데, 관련자에 포함된 현직 검찰총장까지 나서서 믿을 수 없다던 이 사건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흥미로운 변수들이 생겨나고 있다. 신재민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과 현직 검사장 등 인사들에게 금품과 향응을 제공했다고 폭로한 이국철 SLS그룹 회장이 지난 10월 11일 오후 서울 신사동 자신의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그 하나는,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는 일부 언론과 야당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애초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던 검찰이 적어도 겉으로는 적극적인 자세로 돌아섰다는 점이다. 이것은 물론 이른바 ‘측근비리’를 엄정하고 신속하게 수사하라는 청와대의 입장이 전적으로 반영된 것이다. 일부의 추측대로, 정권의 입장에서 임기 말 연이은 비리의 폭로로 인한 권력의 누수를 방지하고, 특히 다른 문제들, 예컨대 소위 ‘자원외교’에 묻혀있는 주가조작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이번 폭로의 대상자들을 희생양으로 삼기로 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이대로 간다면 신재민 전 차관이나 박영준 전 국무총리실 차장, 임재현 현 청와대 정책홍보비서관 등에 대한 조사는 불가피할 것이고, 그 결과에 따라 일부 혹은 전부에 대한 사법처리도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국철 회장이 지금까지의 폭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비망록’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인데, ‘군사정부 시절보다 더하’게 ‘(권력자가 국민을) 숨기고 속이고 등쳐먹’었다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 자못 궁금해진다. 광주의 어느 학교에서는 십 수 년에 걸쳐 선생님들이 가녀린 학생들을 성추행해왔고, 서민들을 위한다던 저축은행들은 부실공사의 시공기업에 수십억, 수백억의 돈을 대출해줘 결국 소액 예금자들에게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넘기는 일보다도 더 충격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의 주장대로라면 이 비망록에는 현 정권 이후 검찰과 정치인, 경제인들의 권력비리가 담겨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 권력의 반응은 무엇일까? 그의 주장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 문제가 심각한 인사들에 대해서는 법적 처리를 진행하는 것, 아니면 다른 관심사를 찾아내거나 혹은 그에게 어떤 다른 대가를 지불하는 등 그의 폭로를 무력화시킬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 이도저도 아니라면 시간을 끌면서 그의 약점을 찾아내어 철저하게 응징하는 것? 이 회장은 자신의 폭로에 검찰의 비리가 담겨있는 만큼 검찰을 믿을 수는 없고, 결국 특검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미진한 검찰의 수사를 대신하기 위해 시도되었던 특검 또한 그 한계를 보여준 경우가 여러 번이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언론에 대한 폭로에 의존한다. 이것은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특별히 정당해서가 아니라 언론의 뒤에는 국민, 시비를 가리고 선악을 구별하여 부정의한 자들을 심판할 수 있는 주권자로서의 국민이 있기 때문이다. 다윗은 골리앗의 급소를 찾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윗은 신의 도움이 있을 때에만 골리앗을 이길 수 있다. 더욱 진실하고 겸손한 태도로 국민의 공분을 얻는 것, 이것만이 이 회장이 국가권력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303 | 추천: 0